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86)
“예, 그렇겠지요.”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1월 둘째 주는 뜬금없네요. 아마 플레로마의 제국 오염 사건이 터진 후에, 교원들의 안전을 점검하기 위해 처음으로 비정기 검진을 실시하신 것이겠지요. 맞습니까?”
“맞습니다. 허허, 아까부터 잘 아시는데 왜 질문을…? 교수들이 학교를 지켜야 하니 마력 상태는 괜찮은지, 건강에 문제는 없는지 알아보자고 하셨습니다.”
“알아보자고 하셨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제국2교육원 협력 병원에서 제안했습니다. 저기 수도 북부에 있는 황립 중앙병원이죠.”
제안했다.
그렇겠지.
“검진 결과는 보통 며칠 안에 나옵니까?”
“오래 걸려도 2주쯤 기다리면 나오지요. 마력 검사만 하면 3일쯤 걸리고요.”
“그렇군요. 마력 검사에 들어가는 피는 몇 병 뽑습니까?”
“주사기로 한 통만 뽑죠, 보통. 이번에도 그랬고요. 저도 냈으니 압니다.”
‘괜히 피를 많이 요구했다가 의심받을 것을 우려하긴 했나 보네.’
피는 마력뿐 아니라 플레로마와도 관련이 깊은 것이니 지금처럼 의심 사기 쉬운 시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겠지. 고마운 상황이다.
그는 내가 계속 당연한 질문을 하는 것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상황이다. 확실해야만 한다.
“그럼, 이번 검진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이곳 교수 인원이 많은 것도 아닌데, 3주씩이나 걸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늦어지는 이유를 못 들었네요. 오늘 바로 편지를 보내 봐야겠습니다.”
처장이 살짝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레오와 시선을 교환했다.
왜 이 모양으로 일하는지는 차치하고….
결과를 못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검사에 써야 할 피를 처마셨으니까 못 주지.’
특히 교수들은 일반 마법사보다 강한 만큼, 회장도 그들의 뇌에 안전히 진입하려면 뽑아 놓은 한 병을 다 마셔야 했을 것이다.
작년 결과로 위조라도 해서 보낼 것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연락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안 그래도 제가 곧 그쪽에 방문할 일이 있어서요. 답변을 들으면 학교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아, 예.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고맙습니다. 오늘 여쭤보러 온 것은 이 정도가 끝이고, 일정이 촉박해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날 배웅하려 일어난 순간 완드를 뽑아 겨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나는 쓰러지려는 처장의 몸을 마력으로 붙잡고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병원에 연락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가 풀린 눈으로 바닥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으며 마법을 풀었다.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 * *
처장실에서 나온 나는 은신 마법을 걸고 후문을 통해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미 교정에 학생들이 나와 기웃대고 있었기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 배웅하러 나온 레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도….”
“잘도?”
“잘도 잔머리를 굴리는군요. 전부터.”
“잔머리가 아니라 그쪽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찍기 운에 기댄 것도 아니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레오가 물었다.
“그렇다면 경은 어떻게 처음부터 그것이라 확신하셨습니까? 1월에 검진이 있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까.”
“저하의 말씀처럼, 그들이 피를 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숙소에 침입할 정도라면 교수들에게 계시를 주지 않아도 되고, 지나가다 소매치기하듯 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음.”
“의심받지 않고 납득 가게 피를 구한다…. 마침 스스로 피를 뽑아 제출하게 할 방법이 하나 존재하지요. 게다가 이번 달 들어 건강에 관련된 재난이 닥쳤으니, 공교롭게도 최적의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놓칠 이유가 있겠습니까?”
레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학교로 오실 겁니까?”
“아뇨. 의회로 갈 겁니다.”
레오가 나를 바라봤다.
내가 또 뭔 짓을 할까 싶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하와는 저녁때 만나도록 하지요.”
* * *
“에른스트 각하.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요하네스 론 교수님과 스테판 트라우트 교수님의 마력 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황제에게 바로 연락을 넣고, 수사국을 총동원해 병원을 쥐잡듯이 털었다.
나는 형사가 내게 넘겨준 자료를 펄럭이다 빈칸으로 된 마력 검사 항목을 보고 코웃음 쳤다.
‘작년 검사 결과로 채울 생각도 하지 않다니 놀랍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단순 실수?
뭐,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이것을 맡은 놈이 꼼꼼치 못하고 게으른 놈이라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겠지.
하지만 부족하다. 모든 싸움에 있어서 상대방을 저평가하는 순간 그 판은 내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가능한 경우의 수를 나 스스로 모조리 무시한 셈이니까.
‘회장은 아직 병원에 제 사람을 만들어 두지 못했다.’
이 결론이 훨씬 합리적이다.
혈액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하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면 그는 지금쯤 수도에 살고 있는 정재계 고위직 마법사들에게 전부 계시를 줄 수 있어야 했다.
동의받으러 도장 깨기 다니는 것쯤이야, 피 구하는 것에 비하면 쉬우니 오래도록 미룰 이유도 없지.
즉 이것으로부터 회장이 병원에 계시받은 자를 만들어 둔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고, 그 계시받은 자를 정신적으로 감화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짜’ 부하라면 둘에게만 공란을 남겨 둘 게 아니라 더 치밀하게 장부를 조작했을 것이다.
그 뒤의 일 처리가 허술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계산이 깔려 있을 가능성이 작다.
“고맙습니다. 이제 위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예.”
나는 내 뒤를 따라온 나르케와 아델베르트에게 손짓했다.
아델베르트에게 ‘의회에 심문하러 갈 것이고, 좀 비밀스러운 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을 흘려 놨더니, 놈은 곧장 제 아버지에게 가서 날 따라가겠다고 졸랐다.
그래서 지금은 황실의 신력 마법사 대신, 아델베르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후 훈련도 마쳤으니….’
느긋하게 가 보자고.
우선, 천천히 짚어 보자.
계획이 변경되었다.
지난 시간에서 회장을 만났을 때는 ‘담임 교수를 구하기 위해 내밀 증거가 없고, 또 회장이 프림로즈 패스에서 종교 집단을 만들어 교세를 확장할 것을 막기 위해서’ 그를 다시 만나야 한다고 했지.
첫째 이유는 버린다.
둘째 이유만을 위해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 시간 속에 있을 때는 폭력에 무뎌져서 실감하지 못했다.
물증을 구하기 위해 그를 만나야 한다면, 상황은 지나치게 복잡해지고 내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단순히 ‘죽이고 끝’이 아니고 ‘죽이지 말고 일단 그를 카메라 앞에 세운 다음 자백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레오와 한 약속도 있고.’
놈을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게 하려면 일단 나부터 그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증거로 쓰일 수 있는 자료를 찾으러 왔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증거를 만들러 왔다.
“황자 전하.”
“예!”
나는 기합이 바짝 들어간 그 목소리에 웃을 뻔하다 헛기침했다.
“지금부터 보실 광경은 썩 바른 광경이 아닐 겁니다.”
“괜찮습니다. 에른스트 각하를 따라 저와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나는 웃음을 터트리려는 나르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고 의회 건물로 들어갔다.
이미 돌려서 사라진 시간대에서도 왔던 곳이지.
나는 오늘 의원과 잡은 약속을 떠올리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나르케가 말없이 나를 따라 계단을 오르다 물었다.
“그나저나 어제는 안 와도 된다 하셨는데, 의회에는 왜~?”
나르케에게 그랬지.
사라진 시간대에서 그와 함께 의원들을 심문했지만, 시간을 돌린 뒤에는 그에게 ‘의회는 됐고 프림로즈 패스부터 가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이미 이 의원들에게서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 더 얻어야 할 정보가 있는 건 아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자, 지난 시간대에서 내게 그레고리오에 대한 정보를 주었던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니콜라우스 경. 반갑습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울먹이던 이전 시간대와 달리 그는 쾌활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악수를 시도했다. 나는 가볍게 그의 손을 잡고, 완드를 빼 들었다.
“반갑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의원의 눈이 잠깐 풀렸다가 돌아왔다. 그가 당황한 눈으로 입을 벌렸다.
“잠깐, 경…?! 갑자기 무슨 짓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거기까지 읊자, 그의 눈이 풀렸다.
나는 그의 머리를 붙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내 마법이 바로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델베르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반면 나르케는 이전처럼 감을 잡은 듯했다.
“한번 한 약속은 어길 생각 없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곧장 손가락을 튕겼다.
“좀 응해 주셔야겠습니다.”
“…허억…! 자, 자, 잠깐! 무슨 짓을…!”
의원이 곧바로 초점을 되찾고 커진 눈으로 심장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많이 당황하셨겠군요.”
“…!”
나는 그의 눈에 녹은 본능적인 공포심을 느끼고 미소 지었다.
눈치챘다.
놈은 내가 자신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음을, 안다.
“플레로마의 자폭 장치죠. 아무리 봐도 놀랍군요. 좀 더 걸어 드릴까요?”
“아, 아니, 내가 당신에게 뭘 했다고…!”
콰앙―!
나는 그를 책상에 엎었다. 그의 손을 뒤로해 묶고 완드를 뽑아 나르케에게 던졌다.
다행히 놈은 충격의 연속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가 하는 대로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아델베르트는 그저 입만 쩍 벌리고 나를 보았다.
‘평소에 이런 식으로 심문하지는 않는데.’
전에 봤다지만, 그래도 괜한 선입견만 생기겠네. 플레로마만 아니었어도 다짜고짜 중범죄자 대하듯 하지는 않았을 거다.
나르케는 옆에서 계속 그에게 완드를 겨누고 있었다.
“그레고리오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하시지요. 내가 당신에게 시키려는 건 이게 아닙니다만, 한번 읊어나 보십시다.”
“그, 그레고리오…?”
“아시겠지요. 플레로마를 변절해 새 종교를 만들려는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감시를 맡았고.”
“…!”
그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나, 난, 그걸 어떻게, 조직을 배반할 수는….”
“플레로마를 배반하는 것…. 글쎄요. 이 자리에서 녹아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전 시간대에서 내게 모든 것을 줄줄이 실토하던 자였지.
그 얄팍한 충성심과 생명에 대한 강한 욕구를 잘 보았다. 그 욕구는 활용 가치가 아주 높았다.
녹아 죽었던 자의 성향에 대해서는 데이터가 없어, 이번에는 이자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당신이 그레고리오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지 알고, 어떤 것을 증언해 줄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께는 제 말이 단순 협박 같고 못 미더우시겠죠? 한번 시험이나 해 보죠. ―좁은 문으로….”
“자, 자, 잠깐! 잠깐!”
그가 몸을 비틀었다.
내가 말을 멈추자, 그가 나를 진정시키려 하듯 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진정해야 할 쪽은 그였다.
“잠깐. 잠깐만요, 경…. 전 그러면 죽습니다. 죽는다고요….”
나는 벌써부터 울먹이며 횡설수설하는 그의 팔을 잡고 몸을 뒤집었다.
“죽기 싫으시겠지요. 내 말을 따르면 플레로마에 죽을 테고, 플레로마에 충성하면 지금 내게 죽을 테고.”
놈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안심하세요. 당신에게 플레로마를 변절하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교단에는 이렇게 말하시죠. 회장의 낌새가 이상해 그에게 압력을 주기 위해 니콜라우스 에른스트를 이용했다…고.”
“…!”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뒤에서 나르케가 짧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베르트는 저 멀리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의원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해 아십니까?”
“아, 아브라함…? 아뇨.”
“좋군요. 당신은 잠깐 내게 장단을 맞춰 준 것뿐입니다. 플레로마에는 내가 먼저 의원들 대상으로 프림로즈 패스와 회장에 대해 인터뷰 요청을 했다고 전하세요.”
“…….”
“그런데, 마침 그레고리오가 아브라함이라는 이명으로 프림로즈 패스의 구인류를 제 종교 집단에 끌어들이려 한다는 증거를 당신이 얼마 전에 포착한 겁니다. 때마침 시기 좋게 들어온 니콜라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회장에 대한 정보를 알리면 그의 힘을 빌려 회장에게 압력을 줄 수 있을 거고, 거기서 더 나아가….”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 얼굴을 가까이했다.
“어쩌면 니콜라우스 에른스트를 죽이거나 플레로마에 끌어들일 묘책을 찾을지도… 모르지요.”
“…….”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제안한 시나리오를 플레로마에 전하시죠. 목숨도 유지하고 그 자리에도 계속 있게 해 드리지요.”
나는 그의 멱살을 놓고 완드를 그의 얼굴에 들이댔다.
“둘째, 이 자리에서 녹아서 죽는 겁니다.”
그가 눈에 띄게 경기를 일으켰다.
“알렉산더 클루거 의원님.”
“예, 예….”
“아직 40대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기는 아까운데요. 앞으로 자연적으로 110년을 더 살 수 있는데 말이죠. 사실 그보다 더 오래 살고 싶어서, 더 강해지고 싶어서 플레로마의 힘을 빌렸을 텐데….”
그 말에 그가 울음을 참으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는 그것을 못 들은 체하며 태연하게 속삭였다.
“이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의회 청사 회의실에서 녹아 죽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나라고 해서 플레로마를 모조리 죽이는 건 아닙니다. 협력할 수 있으면 협력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의원님의 안전을 위해 이런 대책까지 구상해 왔는데….”
“…….”
“대답이 느리시군요. 의원님께서 생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의 눈이 살짝 풀렸다가 돌아왔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심장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고 있었다. 그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만!”
“아니?”
“하, 하겠습니다. 할게요. 당신 뜻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까 신력은 그만….”
“잘 생각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가 멍하니 내 손을 바라봤다. 아델베르트도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나와 그의 등에 묶인 손을 번갈아 봤다.
“아, 이런. 악수할 수가 없지요.”
나는 고민하는 척하다 그를 살짝 안았다.
“이렇게 인사하죠. 앞으로 잘해 봅시다, 클루거 의원님.”
나는 심장이 있을 등에 손을 대고, 그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그가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떤 종류의 개운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게 예속된 인간만 넷이다. 별로 이런 걸 늘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기에, 나는 레오에게 했듯이 손뼉을 쳤다.
“커헉…!”
그가 순간 몸을 푹 숙였다.
‘생각보다 더 아픈가 보네.’
하긴, 심장을 치는 느낌일 테니까. 레오에게 미안해진다. 그에게는 이것보다 더 심하게 비틀기까지 했는데 잘도 참았다.
“당신의 코어는 플레로마뿐 아니라 내게도 묶여 있으니, 날 배신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래도… 안전장치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너무 오랫동안 채찍질만 하면 일할 동기가 떨어지지.
나는 부드럽게 목소리를 바꾸어 냈다.
“약속하지요. 나는 당신이 양쪽 집단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걸 어디에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플레로마에 가서 내가 이런 요구를 했다는 걸 말한다면… 죽는 건 오직 당신이 될 겁니다. 플레로마 입장에서는 이미 들켜 버린 패를 계속 가질 이유는 없으니까요.”
“예, 예. 압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이제 긴장이 풀렸는지 눈물까지 짜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당신이 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 *
준비는 반 이상 끝났다.
아니, 사실 전부 끝났다고 봐도 되었다.
이제 내가 해결할 일만이 남아 있다.
“갑자기 사제복을 왜 찾나 했더니.”
“내 아들 찾으러 가야지.”
그 말에 나르케가 웃었다.
수단 위에 걸친 망토가 펄럭였다.
성직에 오른 지 몇 달 되었지만 자주 입는 옷은 아니라서, 아직 낯설었다.
반면 나르케는 이제야 제게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추기경복이 아니라 일반 사제의 옷이었지만.
나보다 세 걸음 앞서가던 나르케가 뒤돌아 말했다.
“너도 잘 어울려~”
“그래… 고맙다. 생각은 그만 읽고.”
나는 푸르게 변한 나르케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은 밝게 빛났다.
나를 빤히 보던 나르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어울리는 건 어울리는 건데 낯설긴 하네. 그 얼굴로 그 옷을 입을 줄이야. 그것도….”
그 사람도 엄연히 난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가르마를 타지 않고 내린 제레마이야의 얇은 금빛 머리칼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나르케가 이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 사제복을 입고 이런 곳에 발을 들이는 정통 성직자는 우리가 처음일 거야, 제레마이야.”
그렇겠지.
사제복을 입고 와야 했던 곳은 학교가 아니라 이곳이고, 사제복을 입어야 할 사람은 루카스도 니콜라우스도 아닌 제레마이야 카에타니다.
“뭐 어때.”
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완드를 굴렸다.
프림로즈 패스의 칠흑 같은 길에 별들이 흩날리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햇살 같은 빛이 굽이치며 완드가 교황청의 스태프로 변했다.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