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87)
나르케가 수단 안에서 십자가를 꺼내 입을 맞추었다. 내가 선 자리가 신력으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스태프를 들고 입을 열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기를 주셨으니, 우리의 죄악을 모든 불의에서 정화하시고 자기 소유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콰아앙―!
하늘에 마력을 쏘자 잘게 부수어진 신력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서 별이 내린다면 이런 광경일 것이다. 프림로즈 패스의 위장 마법이 녹아서 드러난 건물 벽에 하얀 신력이 반사되었다.
“누구야!”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르케가 바닥에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빽빽이 귀를 채웠다.
아직 새벽 2시다.
원래라면 그 어떤 술집도 문을 닫을 시간이 아니지만, 전에도 두 눈으로 확인했듯이 이곳은 달랐다. 깜깜히 어두워진 골목에 빛이 흐르자 골목에서 경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를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사제?”
“어디 소속….”
나는 대답 대신 낮게 속삭였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허사로다.
“…!”
쿠웅―!
사람 쓰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가자.”
나는 그들을 지나쳐 거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중간중간 경비 몇몇이 튀어나와 완드를 내질렀다. 그때마다 나는 스태프를 휘두르며 아까와 같은 주문을 외웠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허사로다.
콰앙―! 쾅!
지켜보고만 있었던 아까와 달리, 나르케가 그들에게 공격을 날렸다.
장막과 마력의 충돌로 굉음이 일었다. 그가 공격하는 동안 똑같은 주문을 외자, 그제야 경비들이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서 말했다.
“이미 우리가 쓰는 주문을 들었나 보네.”
“으음, 그랬겠지~”
상대가 대비하고 있다면 마법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입을 열지 않고 생각만으로 마법을 전개하자니, 거기에는 또 그것에 따르는 불리함이 있고.
다행히 놈들은 잔챙이에 불과해 간단한 협동만으로도 방어가 깨져 문제는 없었다.
이미 앞서 처리를 끝낸 덕인지,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한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귀신같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잘 어울리네요.”
쏘아 둔 신력의 빛이 다해 이제 암흑뿐인 거리에서, 흥미를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면무도회라도 가시나요? 성직복 입은 사람과 뭘 해 보려는 여자는 없을걸요.”
루도비카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인가요? 역시 신부님은 뭔가 다르시군요.”
“…….”
루도비카가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보며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어디 한번 사정이나 들어 볼까요? 그 모습으로 두 번째 테스트를 받으러 온 것은 아닐 텐데.”
“같은 처지라는 걸 알면 당신의 벽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해서요.”
“우리에게 벽이 있었나요?”
“…….”
이런 멘트를… 내가 내뱉을 때는 몰랐는데 역으로 당하니 할 말이 없다.
루도비카가 나를 발끝부터 쭉 훑어보며 말했다.
“제레마이야 씨가 제게 벽을 느끼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네요. 저는 왜인지 이 모습에 심리적인 벽이 더 느껴지는데요.”
“파문 걱정하는 건 아니죠?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까요.”
“당신은 파문 걱정 좀 하시지요.”
그 말과 함께 코앞까지 비트리올이 닥쳐왔다.
콰앙―!
나는 왼발을 한 보 뒤로 옮기며 스태프를 가볍게 휘둘렀다.
나야 그저 하던 대로 했지만….
‘빠르다.’
빠르고 묵직한 공격이었다.
괜히 그가 각하라는 경칭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루도비카는 날 공격할 작정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내가 방어하자 손을 들고 완드를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플레로마가 적을 눈앞에 두고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 흥미로웠는지 나르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도비카가 왜 바로 완드를 거뒀는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신력을 직접 보려 했다.’
진짜 사제가 맞는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나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루도비카가 중얼거렸다.
“로마 가톨릭이 먼저 가져간 인재다, 이건가…. 그런데 고작 사제?”
그가 차분히 말했다.
“이왕이면 내게 오시지요. 나는 당신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시겠지요.”
내 말에 루도비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멜리아 슈나이더 씨는 몬시뇰이시니까요.”
“…….”
루도비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미, 이전에 그의 상태창을 열어 봤다.
아멜리아 슈나이더
호감도 +6 [공략 가능(3단계/5단계)]
호감도는 왜 특성 없이도 벌써 저렇게 됐는지 의문스럽지만, 저 정도면 아주 대단한 수치도 아니니 과민반응 할 필요는 없다. 정확한 감정의 종류도 모르고.
어차피 좋은 게 좋은 것이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몬시뇰이면 주교 바로 아래, 사제 중 가장 높은 분이시죠. 대부분 일반 사제에 머문다는 걸 생각하면 큰 공을 세우셨거나, 교황의 직속 대리거나, 실력이 남다르다거나….”
나는 손가락을 접다 말고 그를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거나. 그렇겠지요.”
“잘 아시는군요. 당신 그 능력도 탐이 나네요.”
루도비카가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그보다 당신 같은 사람을 제국에서는 루스트몰흐라고 하는데 알고 있나요? 영어로 말해 줘야 알아들을지도 모르겠군요. 당신 같은 사람이 가톨릭 사제라니, 난 아직도 내가 뭘 보고 있는지 믿기지 않는군요.”
“…….”
모를 리가.
무슨 뜻인지는… 됐고, 하여튼 내가 진짜로 모른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건 아니겠지.
중요한 건, 내 의도가 제대로 통했다.
이곳에 오면서 나는 루카스도 니콜라우스도 아닌 제레마이야가 사제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지. 총 두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하나는 벌써 충족이 되었다.
루도비카는 제레마이야 카에타니를 사제라고 믿고 있다.
내가 니콜라우스일 것이라는 의심은 조금도 사서는 안 된다.
들켜도 좋은 때는 나중에. 내가 일을 끝내고 온전히 루도비카를 상대할 수 있을 때여야 한다.
나는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가장 제레마이야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안 해 봤으면서 그렇게 판단하는 건 너무한데요….”
“바로 이런 말이 파문감이지요.”
루도비카가 늘 그랬듯 내 말을 헛소리로 흘려 버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아무리 제레마이야 씨라도 이런 식으로 프림로즈 패스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면… 테스트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부터 어려워지겠는데요.”
“재산이라.”
“다짜고짜 경비들을 잠들게 하는 건 우리의 재산을 건드리는 일이지요. 내가 이 거리의 책임자인 만큼 나와 회장의 관계 역시 껄끄러워지고요.”
회장 이야기가 나와, 나는 침묵했다.
루도비카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나를 죽이러 온 겁니까?”
“…….”
내가 대답하지 않자, 루도비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지요. 그래요. 이쯤에서 빠지시죠. 당신이 손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친절하시군요.”
“인간 대 인간으로 충고하는 겁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이 됐든, 뭘 하는 인간이든, 그레고리오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에는 당신만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지금은 그와 내가 적이 아니다. 알고 있었다.
왜냐? 플레로마는 회장을 제거하고자 하고 나 역시 회장을 제거하고자 한다. 아마도 루도비카에게는 교황청이 내게 입김을 넣은 것으로 받아들여졌겠지.
교황청이 뒤에 있든 뭐든, 플레로마와 내가 공동의 적을 둔 지금은 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루도비카도 나를 더 공격하지 않고 바로 완드를 홀스터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플레로마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건 상상만 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우리 교단이 일선에 내보내는 사람은 전부 죽어도 될 사람이니까요. 나 역시 교단 입장에서는 회장에게 죽어도 될 사람이겠지요.”
“…….”
그걸 알면서 플레로마에 붙어 있다니, 역시 그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나를 말리지 않는 것일지도.
뼛속까지 플레로마에 충성하는 자였다면 그냥 나를 죽였겠지만, 회장이 사라지면 자신의 생이 보장되고 몇몇 이득도 생길 테니 나를 내버려 두는 것일 테다.
“그것과 별개로, 당신이 날 죽이려 한다면 당신은 브란덴부르크 교구 전체를 상대해야 할 겁니다.”
이쪽은 자폭 마법이 걸려 있지 않나 보군.
더 현명한 방법이다. 아마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해 준 사람이나, 중요한 책임자와 연결이 되어 있겠지.
나는 제레마이야의 톤을 유지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나랑 사업하기로 해 놓고 그런 생각이나 하는 거예요? 진짜 끔찍한 발상이네요.”
“…….”
루도비카가 미소 지었다.
그가 결심한 듯 숨을 들이마시고는 완드를 뽑아 스태프로 바꾸어 냈다.
그 표정에서, 그가 우리를 돕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공간 마법 위입니다. 아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어느 순간부터 바닥에 마법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다른 공간에 와 있다.
“당신이 어떻게 회장을 알고, 왜 그쪽을 공격하려 하는지 굳이 묻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이 내게 여러 말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또 나야 골머리 썩던 문제가 해결되면 좋으니까요.”
“그래요. 고마워요.”
딱히 고마울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대충 대답했다.
“고맙긴요. 서로 의견이 맞았을 뿐인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당신은 모르겠지만 회장이 우리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문제라 하면 나는 회장과 표면상으로 우호 관계에 있다는 점이지요. 내가 당신들과 싸우고 있는 것으로 알 테니, 이곳에서 나갈 때는 둘 중 한 명만 나가셔야 할 겁니다.”
다른 한 명은 루도비카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위장할 생각이겠지.
그나저나 회장이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니. 세례를 택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나는 생각을 지우고,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당신은?”
“이곳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나요?”
“…….”
“내 생각에는 당신도 그래서 날 공격하지 않고 있는 듯한데. 내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루도비카가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괜히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내심 의회 플레로마 놈에게 했듯이 협박해서 원하는 바를 이뤄 내야 하나 싶었는데, 내 판단이 부족했다. 그의 상황 판단력은 높게 살 만하다.
나는 미소 지었다.
“아멜리아 몬시뇰.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 * *
콰아앙―!
나는 스태프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바닥에 아까와는 다른 마력이 감돌았다. 공간 마법이 부수어지는 게 느껴졌다.
루도비카의 공간 마법은 감쪽같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내가 이걸 깨부수어 나왔다고 해도 내가 서 있는 곳은 아까 있던 곳과 같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까와 달리 가로등의 빛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에타니 씨.”
중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계획대로 흐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심장에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났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톱이 있을 자리를 훑고서, 뼈의 감각을 느꼈다. 내 코어가 미친 듯이 불안정해졌음을 깨달은 비텔스바흐의 마력이 코어를 억눌렀다. 이 모든 것이 찰나의 변화였다.
나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뒤돌았다.
지팡이를 짚고, 남색의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제 코어 부근에 있던 십자가 목걸이에 입을 맞추고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웃으며 물었다.
“날 아십니까?”
이전과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이전과 다를 것이다.
나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답을 알지 않습니까?”
“하하하!”
회장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중얼거렸다.
“그래요. 알다마다요.”
누구도 말하지 않아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말없이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를 그분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분을 만났으니, 다시 소개하지요. 나는 아브라함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를 회장이라 부르더군요.”
“…….”
“이미 알고 있겠지만요.”
틀렸다.
‘나’가 아니라, 지금 그가 쓰고 있는 몸 주인에게 세례를 주었을 뿐이지.
그가 지팡이를 가볍게 바닥에 두드리자, 주위의 공간이 커다란 방으로 바뀌었다.
“스태프는 이만 내려놓고 앉읍시다. 폭력을 사용해서는 해결되는 것이 없으니, 피차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가 저 혼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아니면 이것도 알고 계십니까? 별 의도는 없습니다. 정말로 대화하길 원하는 것뿐입니다.”
안다. 저자는 피를 마시지 않았으니, 내 동의를 얻어 봐야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왜?
‘당연히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서지.’
내가 어디까지 준비되어 있으며, 자신이 준비해 온 무기로 나를 처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기 위해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새로운 목적이 하나 더 있을 것이다.
그는 여유롭게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비록 차를 내올 수는 없지만 앉으시지요. 그나저나, 이럴 때는 일찍 거리의 문을 닫은 것이 좋군요. 반쯤 강제된 단축 영업이지만 결국 당신을 한시라도 더 빨리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만족합니다.”
“압수수색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그렇지요. 날 이해해 주다니 고맙네요.”
나는 자리에 앉아 미소만 지었다.
그가 뜬금없는 주제를 꺼냈다.
“제레마이야 씨,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아십니까?”
“내 이름을 아시는군요.”
“그럼요. 우리 거리에 온 손님인데 몰라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답은?”
“이 나라에서 모르는 인간도 있나요?”
“하하하! 그렇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성서에 나오는 죄악의 도시이지요.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 내용을 다시 읽고 있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환장할 지경입니다.”
“보기보다 쓰는 표현이 바르지 않군요.”
“아니라고는 못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비슷한 언어를 사용해야지요, 제레마이야 씨.”
내가 프림로즈 패스에서 쌓은 이미지를 말하고 있다.
속으면 안 된다. 그가 날 그 이미지로 믿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시대의 맥락에 따라 읽어야 한다지만, 일차적으로 우리는 거기서 인간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야만에 가까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야만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야만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수치 속에서 죽지 않았을 테지요.”
여기까지는 뭐,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 뒤에 무엇이 나올지 안다.
“지금 우리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만큼 발전했지만, 아직도 야만 속에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돔의 거민들이 우리 주위에 있지요.”
대답하지 않자,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생각이 다른가 보군요. 야만은 별 게 아닙니다. 프림로즈 패스에서 일어나는 반인륜적인 행위들이 모두 야만의 영역에 속하지요. 여기까지 말하니 드는 생각인데 야만이 어떻게 시장경제의 원리 속에서 작동하는가를 물을 만큼 일차원적이지는 않겠지요?”
“계속 말씀하시지요.”
“나는 인류의 조화를 위해 프림로즈 패스의 사업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과 고객의 가치관에 공감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일례로 내가 원숭이에게 과일 주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가 원숭이의 마음가짐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지요. 그저 ‘원숭이는 과일을 좋아한다’는 지식만으로도 일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나는 이전 시간대와 달리 좀 더 원색적으로 변한 비유에 웃음 지었다.
이전처럼 정교하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이렇게 나온다니.
다짜고짜 이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서부터 짐작했지만, 그도 나와 길게 대화할 생각이 없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구인류에게 매춘을 공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구인류처럼 사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매춘은….”
“인간성의 최저선을 시험하는 일이겠지요.”
“…….”
그레고리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도 내가 보낸 신호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어쩌면 한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을 듯합니다. 나는 매춘이 윤리적으로 올바르냐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내 사업의 운명이 달린 질문이지만 나는 신인류이자 선도자로서, 그리고 제국의 인프라를 이용하는 사업가로서 윤리적으로 사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알아서 질문하고 알아서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프림로즈 패스를 운영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구인류의 야만이 우리에게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을 천천히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인류는 약합니다. 우리 두발짐승은 불도 무기도 없이 토끼나 잡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혼자서는 사자 밥이 되기 딱인 우리는 생존 전략으로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맹수들이 먹고 남긴 뼈에서 골수 찌꺼기나 뽑아 먹던 나약한 짐승이 지구의 패권자로 등극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집단은 우리가 최상위 포식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이고, 인간은 지금까지도 집단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집단은 개인의 사고를 빼앗습니다. 개인의 성찰을 방해하고 그들의 사고를 집단의 규율에 들어맞도록 정렬하지요. 집단이 피를 물이라 명한다면 그것은 그 순간부터 물입니다.”
“…….”
“나의 논리가 비약 같습니까? 우리 사회에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 경제 체제 구상과 각국의 국수주의를 생각해 보시지요. 그 얄팍한 이념과 사상이 동족을 어떻게 죽이고 있습니까? 피를 피라 하는 자는 집단에 의해 죽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의할 필요도, 반박할 필요도 없다.
결론이 무엇으로 흐르는지 알기 때문이다.
“집단의 안정을 깨부수고 반기를 드는 것은 곧 집단의 분열을 의미하고, 집단이 분열되면 야생에서 그들은 죽게 됩니다. 본능이 이성을 압도하는 구인류는 이처럼 생존본능에 따른 비이성적인 집단 운영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약이군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악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집단의 목표를 자신의 욕구로 착각하는 수많은 범인은 그 존재 자체로 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인이 악인 줄도 모릅니다. 이 얼마나 총체적인 죄악입니까?”
그가 반쯤 한숨을 내쉬며 창을 바라봤다.
“야만은 구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악 속에 살면서 신의 권좌를 찬탈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 이성적인 자들이 본능에 휘둘리는 자들을 지도하였기에 그나마 그들이 멸하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인데, 구인류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
“어떻게 될 것인지는 당신도 분명히 알 겁니다. 그들은 집단이라는 환상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고 그 거짓된 희열에 사로잡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광대이지요.”
“익숙한 말이군요.”
“내 사업은 구인류가 그들의 부족한 능력을 인정하고 본성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들을 그들의 자리에 머무르게 돕는 사업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노리고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끌 겁니다.”
그때 했던 말과 다르지 않다.
그는 구인류 지도자의 탄생을 막기 위해서 내분을 이용하거나 구인류를 유흥과 오락에 심취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런 단어를 사용해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걷어차면서 ‘이런 활동’이라고 했으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회장이 내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 자라지 않은 아이에게 불을 쥐여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
“당신의 재능에 감탄했습니다. 당신이라면 나의 지향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줄 것 같군요. 나와 함께 하시지요.”
그는 신뢰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과 달리 인간적으로 나온다 했다.
이번 시간대에는, 나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의 목표 중 하나다.
나는 그의 투명한 회색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