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96)
“끝났습니까?”
구치소에서 나오자,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공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손에 술 상자를 든 황태자가 수행원 한 명만을 곁에 두고 나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수행원은 나를 보자마자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어딘가로 워프해 떠나갔다.
“정말 눈물겹더군요. 어차피 교수님께서는 경이 제 제자인 줄도 모르실 텐데, 면회만 1시간이라니.”
“당신이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까?”
“전하라고도 안 불러 주는 건 서운하군.”
그가 내 코앞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리 내가 자네 교수를 이용했다지만 말이야. 내 사랑스러운 사촌 동생의 담임 교수라 요긴히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그것까지 덤으로 빼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러길 잘했어.”
피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나는 비웃으며 물었다.
“그러길 잘했다?”
“이런 거물이 그 안에 파묻혀 있었을 줄이야. 요하네스 론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자네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
그는 내 눈을 파고들었다. 그 표현이 적절하다.
내 홍채의 모양까지 관찰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그의 눈은 내 눈만을 집요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그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너무 날 세우지 말게. 교수는 앞으로 어떤 문제도 없이 평화롭게 타고난 수명 이상을 살다 세상을 떠날 걸세. 돈이 떨어지면 황실에서 지원할 것이고, 시종과 차와 집이 필요하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원할 걸세.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치료가 필요하면 그 또한 호엔촐레른의 이름으로 평생 지원받을 수 있게 할 것이고.”
“…….”
“믿기지 않는가? 내게 일주일을 빌려주었으니, 그 이상으로 되돌려 줄 걸세. 나는 내게 사용된 자들을 한번 풀어 주고 나면, 절대로 그들이 나쁜 삶을 살게 내버려 두지 않네.”
“웃긴 신념이군.”
“군주로서 내게 모든 걸 바친 신하에게 지극정성으로 보답해 주는 게 도리지. 안 그런가?”
그가 나를 돌아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 각하도 생각해 봄 직하지 싶은데.”
“내 대답은 전부 거절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만 낭비하실 생각이라면 이만 가겠습니다.”
“급하시군요.”
또다시 말투가 바뀌었다.
그가 내 앞을 살짝 가로막았다.
“오늘은 사과하려고 부른 겁니다. 경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
“한평생 아무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것이라 하면, 구미가 당기십니까?”
내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황태자는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내 곁에 서 내 팔꿈치를 붙잡았다.
“워프하겠습니다. 위험한 곳은 아니라고 약속하죠.”
그는 내 동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레오와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그가 바로 뒤쫓아 올 것이다.
그걸로도 안 되면 시간을 돌릴 것이고.
“가죠.”
눈을 감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숲?’
공기에서 청량한 나무 냄새가 난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정확히 하자면 숲은 아니었고, 나무가 많은 공원이었다. 물론 공원이라 하기에는 사람의 흔적이 정말 오래 닿지 않은 느낌이었다. 지금도….
‘아니, 하나 있다.’
지금도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 순간, 가스등 아래 누군가 몸을 기대 누워 있는 게 보였다. 거의 거지와 다름없는 차림새였다.
황태자는 그런 행색에도 개의치 않고 그 거지에게 다가갔다.
“다니엘.”
“…….”
“오랜만이지.”
황태자가 그의 앞에 앉아 손을 휘휘 흔들자, 거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으음.”
“정신 차려 보게.”
“아, 오랜만이군. 엘리제?”
황태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거지는 계속해서 입을 나불댔다.
“잘 왔군. 내가 어제 뭘 봤는지 아나? 코볼트가 내 다리를 뜯어먹었어. 이 미쳐 버린 괴물 놈들을 박멸해야 해.”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신이 좀 일반적이지 않은 자인가.
황태자는 익숙한지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코볼트라니? 그건 그저 민담에 나오는 요정일세, 다니엘. 이제 꿈에서 깨도록 하지.”
황태자가 가져온 술을 꺼내 그의 입가에 주저 없이 부었다.
“컥…!”
그가 술을 코로 마셨다가 몸을 벌떡 일으켜 기침했다.
놀랍게도 그는 금세 제정신으로 돌아온 눈빛을 하고 우리를 바라봤다.
“음, 그래. 이거야. 엘리제, 오랜만이군.”
‘뭐가 이거냐?’
“하하, 이제 좀 세상이 분별 되나 보군.”
“그래. 그래도 코볼트를 박멸해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내 귀에 들어와서 뇌를 갉아먹고 있거든.”
“아까는 다리가 아니었던가?”
“…….”
나는 여기까지 듣고서 확실히 깨달았다.
단순히 잠꼬대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정신적으로 평범치 않다.
거지가 내게 고갯짓했다.
“옆에는?”
“내 친구일세.”
“친구라니? 민폐 끼치지 말게. 옆에 있는 청년은 자네를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니엘이 나무라듯 말했다.
황태자는 그가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그가 뭘 말하든 부드러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래서 뭘 위해 왔나? 이 새벽에.”
“곧 아침이야. 거지는 일찍 일어나서 동냥하러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가 매일 챙겨 주는데 내가 왜.”
“하하하. 잘 지내는 것 같아 기쁘군.”
황태자가 그렇게 웃고는 나를 가리켰다.
“다른 게 아니라, 이 친구에 대해서 좀 알려 줬으면 하네. 이 친구가 모르는 것 위주로.”
“으엉? 안 돼. 그럴 거면 넌 나가 있어.”
나는 그 칼 같은 거절에 헛웃음을 칠 뻔했다.
나름 예의를 생각해 웃음을 참았건만, 정작 황태자는 격 없이 웃고 있었다.
“아, 내가 나가야만 들려줄 수 있다?”
“그래. 아니면 너도 이 청년 앞에서 네 이야기를 들려주던가.”
“음, 나쁘지 않아. 난 에른스트 경과 평생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겠지.”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좋아. 그전에 술 한 모금만 더 주게.”
황태자가 말없이 그의 입에 술을 털었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표정이 여전히 평온하고 동작도 능숙한 걸 보니, 자주 이래 왔던 듯하다.
거지는 술을 꿀꺽꿀꺽 받아먹고서, 약간은 총명해진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그래. 못 본 새에 자네는 업을 더 쌓았군.”
“업이라.”
“부모나 자식이나 헤롯과 다름없는 놈이야. 곡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프니 좀 적당히 하게.”
“엄청난 모욕이군. 그러나 종교는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명군이었으니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네.”
“그 기름칠 잘 된 입 좀 내게 빌려주게. 그걸로 말싸움하고 다니면 나도 오래오래 건강한 정신으로 살겠어.”
황태자는 그의 시답잖은 말에 대꾸하는 대신, 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다니엘은 킬킬대다 입을 열었다.
“이런 얘기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진 않으니, 거기 옆에 있는 청년이 마음에 들어 할 이야기나 하지. 인간은 유한과 무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자유와 필연의 종합체야.”
“쇠렌의 문구를 어디서 새로 배워 왔나 보군?”
“그렇다고 돌아가서 책을 뒤져 볼 건 아니겠지.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건 그자의 저작이 아냐. 그자는 인간의 자아에 대해 저런 서술을 했지만, 자아를 떠나 좀 더 다른 층위에서 판단해 보면….”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황태자의 눈을 바라봤다.
“유한하고 무한하고 일시적이고 영원하고 자유로우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자네야.”
“하하….”
“우연이 자네를 그렇게 만들었지. 내가 늘 그러지 않았는가. 엘리제, 자네가 나를 조언가로 두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
“섭리를 따르기 위함이야. 자네는 코볼트에게 뇌를 반쯤 파먹힌 노인네를 숙청할 수 있겠지만, 섭리까지 숙청할 수는 없어. 그것은 신성한 독일 제국의 황태자에게 달린 힘이 아니야.”
“물론. 그러니 내가 자네를 아끼는 것 아닌가.”
자네가 방금 말했듯이 섭리를 위해서.
황태자가 옅은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작은 자네 의지가 아니었더라도 이제 돌아갈 때가 아니겠는가? 이제 주인이 나타났다는 걸 자네는 알아.”
“글쎄.”
황태자는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이만하면 됐어, 다니엘. 내 옆에 앉은 분은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분이니, 이분 이야기나 더 깊게 해 주게.”
“싫어. 자네가 달력을 돌려놓지 않는다면 난 자네 입에 밥 한 톨 넣어 주지 않을 거야.”
황태자가 말없이 술을 가져와 그의 입에 부었다. 그가 발작하듯 일어나 한참 쇳소리 나는 기침을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따라가기고 힘들 만큼 보통 미친 광경이 아니었으나 그는 익숙해 보였다.
황태자는 못 이기겠다는 듯 반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여기 있다가는 평생 입만 다물고 있겠군요. 나는 잠시 나가 있을 테니, 끝나면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깔끔히 이 공간 밖으로 사라졌다.
거지가 숨을 잘못 쉬었는지 딸꾹거리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걱정말게. 난 이 시간이 지나면 전부 잊으니까. 특히 돌려받아야 할 것이 있는 자의 비밀을 함부로 말하지는 않아.”
“…….”
나는 이자가 무언가를 읽고 황태자에게 정보를 넘길 것을 고려해 시간을 돌려야 하나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걸 말하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정확히 답변했다.
‘그냥 거지가 아니겠군.’
황태자는 일부러 그를 곁에 두고 있다.
그건 이자의 말이 들을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비록, 아까처럼 난해한 말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암호야 곱씹어서 풀면 되며, 나는 아까 그가 황태자에 대해 했던 그 난해한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어쨌거나, 밑져야 본전이지.
나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순간, 거지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
“뭡니까?”
“아니, 딱 보니 이것이 먼저 보이는군. 자네는 그렇게 로잘린드가 되기 싫었는가?”
로잘린드?
그게 왜 여기서?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원래는 올랜도를 맡았구먼?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제야 맞는 자리에 갔어. 자네는 로잘린드로 살기 위해 온 거야. 그로서 살아야만 해.”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의 흐리멍덩한 눈을 바라봤다.
“그럴 준비가 되었잖아. 그렇지?”
‘…역시.’
아브라함이 괜히 데리고 있는 게 아니지.
이자는 연극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다른 세계에 와야만 했던 이유.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니면 아직도 멀었는가? 뭐든 상관은 없네. 자네에게 선택권은 없으니.”
나는 침묵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아 내가 해야 할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보통 인간이 아니라 예상했지만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까지 알다니.
그러나, 금세 내 입꼬리는 위로 올라갔다. 이런 사람을 어디서 구해 와서 저만의 공간에 넣어 둔 건지 몰라도, 이건 다시 없을 기회가 맞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정보라 해도 기회가 왔을 때 들어 두어야만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다.
“게다가 자네가 이미 아벨인데 올랜도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미 그건 자기 자신인데. 형이 친동생 죽이려 드는 연극을 몇백 년 동안 잘도 하는구먼. 땅에 스민 아우의 피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결말이었다면 다들 학을 떼었을 텐데, 결국엔 다들 얼렁뚱땅 좋을 대로, 그야말로 ‘뜻대로’ 살고 있잖은가? 내 생각에 이건 단단히 글러 먹은 연극이야. 여기 내 눈앞의 아벨은 지옥을 걷는 중인 데다, 인생은 셰익스피어 희곡처럼 얼렁뚱땅 사랑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고.”
아벨.
형 카인의 질투에 의해 죽임당한 창세기 인물이다. 정황상 나보다는 루카의 이야기에 가깝다.
이제는 또 내가 아니라 루카 이야기를 하다니.
“제 형님이 카인이라는 말입니까?”
“나는 자네의 형님이 누군지 몰라. 하지만 자네의 피가 땅속 깊이 스며들어 죄 없음을 부르짖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건 내 피가 아닙니다.”
“신만이 알겠지. 잠이 오는군. 들었다시피 뇌가 반절이나 사라져서….”
뭘 또 뇌 타령인가.
비록 전부 헛소리처럼 들리더라도 여기서 대화를 마무리할 수는 없다. 나는 술병을 잡고 물었다.
“드시겠습니까?”
“아, 그래. 그래. 좋아.”
그가 떨리는 손으로 술을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취하기는커녕, 정신이 더 맑아지는 듯하다.
거지가 또렷하게 눈을 뜨고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우리의 지고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카인이 동생을 죽였더라도 그를 절대 에덴 밖으로 내몰지 않을 것인데. 그러게 왜 그런 결정을 했나?”
“제가 무슨 결정을 했다는 말입니까.”
그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멋대로 말을 이었다.
그런 것처럼 들렸다.
“카인은 에덴에 살게 됨으로써 하느님께 그 존재를 허가받았어. 그런데 이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아덴 숲에서 뭐든 다 해결해 버리지! 카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그곳에 뭐가 있든 결국 그 숲에서 모든 갈등을 끊는 것이 바로 야훼와 셰익스피어의 뜻이었던가? 나는 현자가 아니라 모르지만 자네는 알겠지.”
그가 생각에 잠기듯 눈을 감았다가, 바람이 불어오자 천천히 떴다.
“이 세상은 무대이며 모든 인간은 그저 배우에 불과하네. 그들은 시작과 결말을 거듭하며, 한 인간은 자신의 생애 동안 많은 역할을 연기하게 되지.”
“…….”
“그리고 자네는 모든 인간으로 살아왔어. 그러니 이제는 다른 어떤 인물들보다 로잘린드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해.”
“제가 여기에 온 것과 그것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군요.”
로잘린드가 되어라.
어떤 의미에서 말인가.
희극 로맨스 작품 주인공? 그런 것은 이미 현실에서 수도 없이 했다.
10대 후반부터 내 커리어는 모조리 그것으로 채워졌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게는 가치가 없는 감정을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감정으로 여기며 연기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었고 나의 일이었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21세기에서 나는 늘 로잘린드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이 되어야 한다?
“자네는 이미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
그가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그는 아까부터 내 질문에는 하나도 대답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제 할 말만 잔뜩 늘어놓는다.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이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왜냐 묻고 싶겠지?”
“…….”
“이제 가이사리아가 코앞이야. 즐거운 여행 되시게.”
인자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지어졌다.
그 직후, 그의 얼굴이 푹 고꾸라졌다. 마치 전원을 끈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해하지요.”
황태자의 목소리다.
“다시는 드릴 수 없는 선물이니 잘 간직하시지요.”
“어디서 데려온 자입니까?”
“오래전입니다. 남부 프로이센에 소름 끼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정신병자가 있다는 말에 찾아가 봤더니….”
그가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웃었다.
“저런 좋은 물건이 있지 뭡니까. 해석만 잘 해낸다면 유용할 겁니다. 날 지금껏 승리로 이끌어 준 좋은 분이었는데, 이제 감이 떨어진 건지, 뭔지. 니콜라우스 경에게 목숨을 저당 잡히게 만들 줄이야.”
해석만 잘 해내면 유용할 것이다.
동감이다.
카타콤과 내 꽃다발에 들어 있던 문구에 이어, 이제는 이것도 해석해야 하게 생겼다.
그가 내 팔을 붙잡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당신이 뭘 들었는지 알면 좋을 텐데.”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이동하자는 뜻으로 고갯짓하자, 그가 알아서 워프했다.
다시 눈앞에 펼쳐진 곳은 검찰국 주변의 거리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내 팔을 놓은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새벽하늘을 보며 말했다.
“원하는 대로 되어서 만족스럽겠군요. 회장도 죽이고, 교수님도 일상으로 돌려보내고, 프림로즈 패스도 무너뜨리고… 니콜라우스로서의 입지는 이 일이 있기 전보다 더 단단해졌고.”
그가 이제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졌습니다.”
“…….”
“그러니 오늘의 선물은 앞으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의미에서 드리는 겁니다.”
“평화라.”
“내 정보까지 드리지 않았습니까. 뭐, 그자가 하는 말을 해석할 수 있을 때여야 유용하겠지만.”
나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황태자는 오늘은 더 붙잡을 생각이 없는지, 하늘의 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지요.”
전과 달리, 그는 깔끔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중에 다시 봅시다, 에른스트 경.”
* * *
그로부터 3시간 뒤, 나는 학교에 도착했다.
“되게 졸려 보이네, 루카스~”
나르케가 나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졸려 보일 수밖에.
대체 며칠을 밤새 움직인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미 아침 수업이 없어진 것에 적응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침 8시부터 불러대는 건 썩 익숙지 않았다.
‘그래도 왜 아침부터 불렀는지는 알겠다.’
나는 미소지으며 우리 반 임시 담임 교수를 바라봤다.
교수가 이런저런 안내사항을 말하다, 조례를 마무리 지을 즈음 웃으며 학생들을 둘러봤다.
“여러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2학년 마법학과 2분반 교수님께서 이번 주 금요일, 3차 시험날 돌아오시기로 하셨습니다.”
“예?”
“교수님이요? 휴직하신 것 아니었어요?”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검찰에 구속된 것까지는 몰라도, 갑자기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져 아쉬워하던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교수가 목소리를 키웠다.
“교수님이 돌아오실 테니, 3차 시험이 끝나면 아침 수업도 이제 정상화될 겁니다. 좋지요?”
그건 좋지 않았는지 학생들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가 돌아온다는 사실 덕에 다들 표정이 밝았다. 담임 교수가 평소 어떻게 우리 반 학생들을 대했는지를 이 광경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임시 담임은 학생들의 시시콜콜한 질문에 답변해 주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이제 3차 시험까지 연습할 날이 나흘 남았습니다. 컨디션 조절 잘 하시고, 마지막까지 팀원들과 팀워크 유지하면서 최선을 다해 훈련하세요.”
“교수님, 저희 3차 어떻게 나와요?”
“그걸 말해 줄 수는 없죠, 허허허. 확실한 건 여러분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이미 부담 가진 학생은 없다.
2차에서 기차역에 이어 알프스까지 등장하는 돌발 상황을 맞이했기에, 어떤 필드를 들이대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 알다시피 3차가 끝나면 바로 최종 합격자와 팀이 발표됩니다. 교수님께서 딱 3차 시험날 오시는데, 우리 2분반 학생들이 당당히 1팀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생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이제 정말 막바지였다.
한 달간의 1-3차 시험이 이제 끝나고, 2월 초에 외부에 동원될 팀이 결성된다.
폭주 건수는 1월 초보다 훨씬 줄어 수도에서 하루에 평균 50명에서 많게는 100여 명쯤 폭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절대로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 여럿이서 한 명을 처리하는 게 보통이니 마법사 50팀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 조례는 여기까집니다. 훈련하러 가세요.”
3차에 진출한 학생들이 평소보다 활기차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적당히 나가려 느적느적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가려 한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루카스.”
“어, 율리아.”
“많이 피곤해 보이네. 주말에 훈련을 많이 했나 봐?”
“하하….”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우리 팀은 평일에는 몰라도, 주말까지 그리 꽉 채워 연습하지는 않았다. 프림로즈 패스 처리해야지 훈련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물론 우리 팀뿐 아니라 대부분 그렇긴 했다.
그때, 체링겐이 우뚝 멈춰 섰다.
“아.”
“왜?”
“귀 뚫었네, 루카스.”
죄진 것도 없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형에게 들키면 안 됐던 시절이 바로 얼마 전이라 아직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지 교란 마법 걸었는데?’
물론 마법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체력을 상당히 소모하니 세게 걸지는 않았지만, 이 조그마한 것을 바로 알아챈 게 신기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코어가 찌릿거렸다.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하니, 복도 맨 끝에서 친구들과 함께 훈련장으로 가고 있던 레오가 이쪽을 돌아보는 게 보였다. 레오가 학교에서 늘 그렇듯 싸늘한 눈으로 이쪽을 보다 뒤돌아 사라졌다.
‘이 새끼 뭐 하냐.’
혹시라도 더 코어에 신호를 보내면 그의 코어를 공격하려 준비했지만 다행히 레오는 더 이상 깐족거리지 않고 그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코어를 쓸어내리며 체링겐에게 물었다.
“많이 티나?”
“아니. 잠깐 봐도 돼?”
티가 많이 안 나는데 어떻게 발견했냐. 역시 이놈도 레오처럼 전투마법에 능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관찰력이 좋다.
“상관은 없는데, 본다고? 굳이?”
“응. 괜찮을까?”
“봐라….”
“하하, 고마워.”
체링겐이 아티팩트 앞으로 손을 가져다 대다, 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 반응에 의아해하기도 전에 그가 미소지은 채 말했다.
“하늘색이네.”
“그래? 색깔 거의 없을걸.”
“루카스.”
“…….”
갑자기 이름은 왜 부르는지….
설마 반장 마력을 느꼈다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체링겐을 응시했다.
그러나 들려온 말은 의외의 말이었다.
“아티팩트 하나 선물하면 받아 줄 수 있어? 마침 네가 쓰면 좋을 것 같은 아티팩트가 있는데.”
“…아.”
이 얘기냐?
나는 확 풀린 긴장에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 빼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하나 더 뚫는 건 어때?”
“성능 좋은가 보네?”
이놈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 본다.
사실 훈련이나 마법 외의 대화를 한 적은 거의 없어서 데이터가 없지.
체링겐이 제 귓가를 가리켰다.
“응, 좋아. 나도 매일 끼고 있거든. 코어 유격을 잡아 줘서 훈련할 때 도움이 돼. 이런 부류는 아티팩트 마력이 스며들어서 나중에는 뺐을 때도 효과가 꽤 유지되거든.”
“음, 좋아 보이네.”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줘.”
“알겠어. 그리고….”
나는 미소지으며 목걸이가 있는 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전에 네가 줬던 아티팩트 잘 썼어. 고맙다.”
세례 받을 때 잘 썼지.
덕분에 인간성 잘 보존했다.
체링겐이 눈을 크게 떴다가 환히 웃었다.
“뭘. 저녁 점호 때 보자.”
체링겐은 내게 손을 흔들고 훈련장으로 사라졌다.
나는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나르케에게 고개를 돌렸다.
“루카스! 오늘 하이케가 같이 저녁 먹자는데. 이따 같이 갈래?”
“그래.”
그 뒤로 나르케는 훈련장에 가기까지 계속 수다를 떨었다.
이곳은 학교고, 지금 나는 루카스로 있으니 여기서 프림로즈 패스나 그외의 일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게 맞는데도 오랜만에 친구와 잡담을 나누니 느낌이 새로웠다.
나르케는 아티팩트 이야기를 하다, 이제는 훈련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었다.
“아, 맞다. 1팀 팀워크 안 궁금해?”
1팀이면 레오와 체링겐이 있는 팀이지.
둘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 넷이 모조리 최하위권이어서, 팀 합격이 아닌 개별 합격만 남은 이제는 가산점을 위해 팀끼리 화합했던 이전과 달리 그들 각자가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전에 이렇게 생각했지.
“걔네 그래도 어떻게든 제대로 팀 만들어 놨던데.”
초반에는 잠깐 삐걱거렸으나, 그들은 금방 조화를 이뤘다.
각자도생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팀워크를 만들어 낸 그 둘의 능력에 감탄만 나올 뿐이다.
“어, 들었구나. 역시 레오랑 율리아는 뭔가 다르지~ 그래도 우리 팀이 더 잘할 거야!”
“그렇겠지.”
나는 우리 팀 훈련장 문을 열며 대답했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 3차 훈련은 평화로웠다.
정말이지, 최근 들어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이 되는 동안 놀랍게도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나는 프림로즈 패스의 아브라함 수사 기록을 정리해 각국 수사국에 실시간으로 뿌려 황태자의 허튼짓을 막았다. 바이에른을 정화하고, 비텔스바흐에 약품에 들어갈 신력을 공급하고, 황실의 폭주 사건 자문에 답변해 주는 것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이제야 아브라함 등장 전까지의 나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게 맞는 속도인데 현실감이 안 생기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나흘이 지났다.
금요일.
3차 시험 당일이 되었다.
* * *
[지금부터 2학년 학생군사단 3차 선발을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이곳에 왔다.
나는 곳곳에 붙은 1교육원 로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체육관이 아니라, 1교육원 학생군사단이 사용하는 훈련장이었다.
“드디어 3차네.”
“이걸 한 달 기다렸다는 게 말이 돼? 이제야 최종이라니.”
시작을 앞두고 자리에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잡담이 들려왔다.
그때, 공중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2학년 3차 진출 학생 여러분께 알립니다. 곧 시험 규정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발표에 앞서, 3차 선발 대진표를 공개하겠습니다.]
‘음?’
대진표?
의외의 말이다.
학생들의 반응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3차 시험은 팀별 시험이라기보다는 개별 합격 시험이기 때문이다.
앞의 학생들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 뭐야. 이번에도 가산점 나오나 보네?”
나는 표를 확인했다.
1팀과 3팀, 그리고 2팀과 4팀.
두 경기에서 이긴 두 팀이 가산점 1점을 받아 간다.
‘흠.’
가산점이 저렇게 낮은 이유는 둘째 치고….
‘1팀과 3팀이라. 한 칸 건너뛰어서 붙일 생각인가?’
1팀과 3팀이면 레오와 엘리아스가 붙는 광경을 보게 되겠다.
나는 2팀이라 남의 이야기다.
4팀에는 멜빈을 제외하면 친한 사람이 없는지라, 4팀과 싸워야 한다면 이건 꽤 잘된 일일 것이다. 게다가 4팀에는 특별히 마크할 사람이 없다. 아주 특출난 이들이 없는, 평이한 상위권 팀이다.
‘둘이 붙는 게 안됐네.’
레오와 율리아, 그리고 엘리아스.
피터지는 시험이 될 것이다.
이미 2차에서 진정한 실력 미달자들을 걸러낸 뒤라, 이 시험에서는 가산점을 건 팀 대결이 있어서는 안 됐다. 왜냐?
‘전부 잘하니까.’
특히 저 1팀과 3팀은 호각을 이루므로, 대체 어느 팀이 이길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뭐,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니 엘리아스 팀과 레오 팀이 서로 반대 진영에서 서서 가산점으로 싸우는 거나 잘 지켜봐야지. 보기 드문 광경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1팀 발표하겠습니다.]
“발표?”
주변에서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나 역시 거기에 이상함을 느꼈다.
팀은 이미 발표되어 있다.
그런데 뭘 한다고?
[1팀: 요제핀 루온 / 힐데가르트 블롬베르크 / ….]
“어?!”
“뭔 소리야? 나 4팀인데?”
“응? 뭐지? 팀이….”
내 옆에 서 있던 나르케가 당황한 얼굴로 대진표를 바라보다, 그 뒤에 나온 이름에 입을 벌렸다.
[… / 나르케 파르네세 / 레오나르드 비텔스바흐]
“어어?”
“…?”
나 역시도 당황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르케는 나와 같은 팀이다. 그런데 갑자기 레오랑 같은 팀이 되었다고?
‘이 미친놈들이 당일에 뭔 짓을?’
역시.
3차 훈련을 하는 내내 ‘훈련이 지나칠 정도로 순조롭다’고 생각했지.
그래. 너무 순조롭다 했다.
제국2교육원답다. 다짜고짜 장비도 안 주고 알프스 산맥에 떨구는 학교가 최종 시험에 이런 평화를 용인할 리가 없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2팀입니다.]
[2팀: 빅토리아 비어만/ 요아힘 글라이헨 / ….]
이럴 때가 아니다.
생각할 때다.
1팀은 팀원 모두가 상위권이다. 심지어 범접도 하기 힘든 놈들이 둘이나 있다.
반면 2팀은 전원 중-하위권.
여기는 1팀에 비하면 구성이 빈약하다. 문제 없다. 이들은 1팀이 아니라 4팀과 붙을 테니까.
그럼, 저 쟁쟁한 1팀과 붙을 3팀에는….
[3팀 발표하겠습니다.]
[3팀: 루카스 아스카니엔 / ….]
“…….”
나르케와 레오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