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02)
‘이 새끼 뭘 하려고?’
루카스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그것이었다.
너무 뺀질뺀질 웃고 있었기 때문에 더 불길해 보이는 웃음이 의심을 더했다.
“…네가 뭐 언제부터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이었어?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그냥 해. 다 받아 줄 테니까.”
“그래~ 눈은 다시 감고. 나르케 지금 우리 시청에 있는 거 알면서도 안 오는 거 좀… 아니, 엄청 걸린다.”
엘리아스가 다짜고짜 천을 잡아당기더니 그것을 풀어 다시 제대로 묶어 주었다.
“루카, 내가 뭐 할 건지 알아?”
“알겠냐? 그냥 빨리 말이나 해라.”
“별거 아냐.”
엘리아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잠시 앞에서 사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을 때, 오스왈드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뭐야? 혹시 여기에 폭주 약물이….”
“오스왈드.”
좀 닥치라는 듯 낮아진 엘리아스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루카스의 손에 차가운 물병이 쥐어졌다. 루카스가 뭐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을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뭐?”
“루카. 나 믿지~?”
“…?”
뜬금없는 말에 루카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이걸 나보고 마시라는 건가.
그럼 아까 오스왈드가 폭주 약물 어쩌고 한 건 왜냐? 보기에 좀 구린 물인가?
머리가 아파져 이마를 누르고 있던 루카스가, 당장 물병을 부숴 버릴 기세로 그것을 쥐기 시작했다.
“아니?”
“흑흑….”
“이 새… 엘리아스 육성으로 우는데? 표정 좀 봐 줘.”
루카스의 험악한 목소리에 율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엘리아스, 무슨 일인지만 우리에게 말해 줄래? 루카스 입장에서는 많이 당황스러울 거야. 말해 주면 우리가 루카스를 잘 설득해 볼게.”
그 말에 루카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듣는 상식인의 말이었다.
역시 레오니 엘리아스니, 소설 주연 격으로 나올 만큼 유별난 부분이 있는 놈들보다 때로는 율리아처럼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하며 상식적인 친구가 마음이 편하다.
레오의 승리욕에서 비롯된 살기를 10여 분간 느끼고 와서 하는 생각이다. 전부 그것 때문이 맞다.
엘리아스의 마력이 율리아 곁으로 움직인 게 느껴졌다. 이내 율리아가 뭔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아, 그랬구나.”
“뭐가 그래, 율리아.”
“음, 이렇게 할까?”
율리아가 루카스의 손에서 병을 빼 가져갔다.
물 마시는 소리가 루카스의 귀에 크게 들려왔다.
“…으음.”
율리아가 다시 병을 루카스의 손에 넘겼다.
이제 병의 무게는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자, 나도 마셨으니까 이제 좀 거부감이 덜하지?”
“뭔지 설명은 안 해 주고?”
“하하, 전부 설명할 수가 없어서 내가 직접 마신 거야. 같이 한번 경과를 확인해 보자.”
“…경과…?”
대강 무슨 말뜻인지 파악한 루카스가 헛웃음을 쳤다.
같은 시각, 엘리아스는 루카스를 내려다보며 초조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여기서 루카가 너무 많은 걸 생각해 버리면 안 된다. 역시 루카는 매번 손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느낌이지만, 오늘만큼은 여러모로 제대로 손해를 입어 줘야 그게 우리의 큰 이득으로 돌아온다.
아마 루카도 알기에 이렇게 온종일 뒤에 빠져 있었던 것일 텐데—물론 그냥 빠진 게 아니라 나르케의 권능에 맞설 방법을 구한 것이므로 오히려 루카는 이미 득점했겠지만—이제 와서 모든 걸 계산해 버리면 전부 물거품이 된다.
‘그냥 뺏고 입에 들이붓는 게 나을까?’
엘리아스가 루카스를 내려다보며 절연 당하기 십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단숨에 병의 물을 털어 마셨다.
영문도 모른 채 불안한 눈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던 팀원들의 눈이 커졌다.
“뭐야, 마셨어? 율리아도 그러더니 어쩌려고?!”
“야, 엘리아스. 저게 뭔데? 우리한테라도 말 좀 해 줘.”
“…오.”
엘리아스의 감탄에, 루카스가 테이블에 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믿는다. 됐지?”
“…….”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엘리아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루카스 옆에 앉아 늘 그러듯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 우리 루카 시원시원하네~”
“언제부터 우리야?”
알 수 없는 것만 늘어 그런지 조금 신경질적인 말투에도, 엘리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기울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루카.”
“뭔데.”
“분수대 투어 가자.”
* * *
“얘들아, 지금까지 수고했다.”
레오가 손뼉을 쳐 팀원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표정 없이 레오를 바라보는 학생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아티팩트가 부서져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울리케와 요제핀의 얼굴이 유독 어두웠다.
아티팩트로 연결만 되어 있었다면 레오와 나르케의 지원 요청에 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3팀을 제치고 승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책하는 중이었다.
레오가 그런 그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위로했다.
“이미 진흙탕 싸움이 된 지 오래야. 1점 내준 걸로 침울해하지 말고 앞으로 남은 1점에 집중하자.”
“그래, 얘들아~ 누구 잘못도 아니야. 자책하고 탓하면 결국 우리 손해니까, 앞으로 잘해보자는 각오만 다지자!”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였던 요제핀이 중얼거렸다.
“…누구 잘못도 아니라고? 처음부터 털리는 바람에 너희 발목만 잡았는데.”
“아니야~ 따지고 보면 나도 루카스에게만 집중하느라 율리아와 아우구스테에게 권능을 쓰지 못했어. 그 애들에게 썼다면 내가 바로 시청 좌표를 찾으러 갈 수 있었겠지. 레오도 마찬가지야. 잘하다가 엘리아스가 한 말 때문… 으읍?”
나르케가 눈을 굴려 제 입을 막은 레오를 올려다봤다.
환멸이 난 듯한 얼굴을 한 레오가 한숨을 푹 내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결론은 이거야. 아직 1점 남아 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야. 지금까지의 과오는 앞으로의 발판으로 사용하면 돼.”
아까보다 훨씬 비장해진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리케가 레오에게서 새 아티팩트를 받아 끼우며 말했다.
“그런데, 나르케 너 머리는 괜찮아?”
“하하, 아니~”
루카스가 눈을 가릴 때마다 정말 쓸데없는 정보들이 머리에 휘몰아친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북서쪽에서 불어오고 있다든지, 무언가가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다든지, 오스왈드의 마력이 자꾸 뒤에서 자신을 향해 닥쳐오는 것 같다든지.
이런 정보가 1분에 수백 개는 쏟아져, 이제는 눈앞이 핑핑 돌고 있다.
심지어 아까는 건물 이름과 워프 좌표를 수백 개나 읽는 바람에 함께 돌아 버릴 뻔했다.
‘그래도 이제는 좀 나을지도~’
루카스도 이젠 앉아서 쉬고 있다.
시청으로 간다 했으니 거기서 전략회의를 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능력을 다시 한번 발동시킨 순간, 옆에서 호들갑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괜찮아? 나르케 코피 나는데?”
“응? 진짜네.”
나르케가 클러치에서 닦을 거리를 꺼내 대충 피를 훔쳤다.
능력 한 번 더 열었다고 이렇게 되다니.
‘이제는 자유롭게 쓰지도 못하겠네.’
더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다. 이러다 정신을 잃으면 미메시스 밖으로 튕겨 나갈지도 모른다.
“좀 빨리 끝내야겠네~ 시작하자. 첫 번째 폭주자는 거지고, 두 번째 피해자는 시청 공무원이야. 이제 남은 한 명도 여기에 관련이 있는 사람이겠지~?”
“맞아.”
“둘은 우선 같은 장소에 있었고, 이론상 제일 가능성 높은 가설로는… 같은 무언가를 먹었을 거야.”
그 말에 팀원들에게서 의문스러운 물음이 들려왔다.
“뭘 마신 거야? 거지가 마시는 물을 이 공무원이 빼앗아 마셨나?”
“…그냥 시청 가서 자기 물 마시든가 하면 되지 굳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뭔가를 같이 먹었다기엔 단서가 좀 빈약하지? 그래도 아예 목록에서 지우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하이케. 그곳에서 다른 단서는 없었어?”
“…응. 내가 못 찾은 걸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없었어.”
“흐음….”
학생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자 레오가 의자에 내려 두었던 신문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럴 줄 알고 아까 오는 길에 가판대에 있는 신문을 전부 가져왔는데, 좀 살펴봐.”
한참 신문을 뒤적이던 팀원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리케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딱히 연관 있는 이야기는 없어 보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줄게. 벤츠엔드씨에 3세대 마력 동력 자동차 발표, 김나지움 교사 지원 자격 강화, 8-24세 신인류 의무군사교육 연간 100시간으로 확대, 기업가연합회 구인류 고용가능연령 13세에서 9세로 하향 조정 요구….”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건?”
“펜탈론이지. 도시미관과에서 내보낸 기사야. 쓰레기 불법 투기 시 기존 벌금의 최대 다섯 배 부과, 베를린 내 사복 환경단속원 1,000명 배치, 수도 내 연 수입 100만 펠 이하 저소득층 수도권 구빈원 이주 및 신규 입소 장려, 상하수도 노후관 교체, 베를린 분수대 및 식수대 수질 점검, 오염 위험 높은 노점상 내달 19일 강제 철거, 펜탈론 종료일까지 내국인 주류 및 담뱃세 기존 50% 인상….”
마찬가지로 쓸데없어 보이는 소식들의 나열에, 학생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 레오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여기도 쓸모없는 소식이 껴 있긴 한데…. 노점?”
“응. 그런 저가 음식 판매대는 플레로마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19일에 전부 치워 버릴 거래.”
“그래? 이해는 되네. 플레로마가 노점상 주인으로 위장해 펜탈론 기간에 값싸게 음식을 팔면서 오염 물질을 퍼뜨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레오가 생각에 잠긴 채 대답했다. 그 말에 울리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잠깐, 그런 노점은 거지들이 접근하기에도 괜찮지 않아? 질이 어쨌든 길거리 음식은 훨씬 싸니까. 게다가 플레로마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고 정부에서 공인했잖아.”
학생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직도 막막한 상황이기는 하나, 조금씩 실마리가 보이고 있었다.
다른 학생이 손을 들어 주의를 집중시키고서 말했다.
“얘들아, 구빈원도 고려해 볼 만해. 도시미관과에서 거지 잡고 다닌다며. 그 둘이 구빈원에서 마련한 구호 식당에서 만났을 수도 있겠어. 최근에 구빈원에서 임시로 급식소 열러 나온다는 얘기를 좀 들었거든.”
“괜찮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하이케가 눈을 빛내며 조용히 말했다.
“…환경단속원은? 혹시 플레로마가 환경단속원인 척하고 둘과 접촉한 거라면? 단속원 관리는 도시미관과에서 주관하고 있는 데다, 환경단속원이면 거지를 직접 만났을 수도 있어.”
레오는 생각에 잠긴 채로 머리를 뒤로 젖히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전에 수집한 정보를 다시 한번 정리했다.
“좋아, 가능은 하겠어. 그래도 관련된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다지 느낌이 오는 가설은 아니야. 찾기 전까지 이 가설은 보류해 두자.”
말이 끝나자,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던 다른 학생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그 뒤에, 노후관 교체는… 거지가 교체 전문 기술자는 아닐 테고. 주류 세금도… 세금 때문에 암시장에서 술을 사 마셨을 가능성은 없나? 그게 오염돼 있었던 거지.”
“그 둘은 가능성이 작아 보여. 그다음 분수대 기사 있었지? 분수대는 솔직히 뭐 있어 보이는데, 어때?”
“내 생각에도 뭐 있어 보여. 근데 이 정도면 우리 이번 판 해 볼 만한데?!”
정말 그랬다.
전부 말이 되는 가설이다.
거지와 도시미관과 공무원 사이의 접점은 이제 꽤 나왔다.
이제 가설에 맞는 증거가 있는지 알아보면 된다.
“그래. 이것도 고려해 볼 만하네. 그럼, 다음으로….”
“어, 잠깐만.”
나르케가 머리를 붙잡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다섯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향했다.
“루카스가 뭔가를… 마시고 있네.”
“마시고 있다고? 시험 중에?”
“응. 엘리아스가 무작정 뭘 먹여버렸는데.”
엘리아스가?
무작정?
레오가 눈썹을 올렸다. 저 두 단어가 붙으면 안 되는데? 왜인지 불길한 감각이 척추를 따라 타고 올랐다.
“뭘 먹였는데.”
“루카스도 몰라. 그냥 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우, 되게 역겨워하네.”
“물이면 물이지 물 같은 건 또 뭐야?”
“…….”
레오의 물음에 나르케는 한참을 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 얼굴이 파래진 나르케가 헛웃음을 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분수대… 물을….”
“…….”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그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나마 레오가 다른 학생들보다 빠르게 소리쳤다.
“…뭐?!”
“진짜 뭔 소리야, 나르케? 지금 루카스가 분수대 물 마시고 있다고? 제대로 읽은 거 맞아?”
울리케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물었다.
나르케는 대답하지 않고 머리만 싸맸다. 하이케 아인시델이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
“…나르케, 그러니까 지금 분수대 물 때문에 폭주한 건지 알아보려고 그거 마시고 있단 말이지?”
“…그렇겠지? 적어도 엘리아스의 의도는.”
“루카스 혼자?”
“아마도 율리아랑 같이….”
다른 팀원들이 완전히 질려버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쟤네 진짜 뭐야? 사고방식이 존X 범상치 않다. 이건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냐.”
“진짜 3팀에는 미친놈들밖에 없나 봐….”
“눈 가리고 시험 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르케가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조금만 더 생각해 볼까?”
“뭘?”
“우리는 둘째 폭주자와 그 피해자에 관한 정보가 없어. 그걸 알아야 우리가 아까 대화해 추론했던 그 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겠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째 폭주자와 피해자에 대한 정보는 3팀이 가지고 있어.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3팀과 만나야겠네.”
“그래, 그거야. 마침 3팀이 우리 가설 중 하나를 증명하려고 분수대를 돌고 있는 중이니까….”
나르케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팀원들을 바라봤다.
이어질 그의 말을 예측한 팀원들이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겸사겸사 3팀의 정보까지 가져오면 좋을 듯한데. 어때, 레오?”
“…나쁘지 않지. 대신 아까처럼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좋아! 그러면, 루카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 이렇게 잡아 오면 좋겠네.”
“또 다른 한 명? 루카스만 잡아도 되는 거 아니야?”
“루카스에게는 정신계열마법을 걸 수가 없거든.”
학생들이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경지가 높아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걸기 어려운 게 맞긴 하나, 나르케가 루카스에게 마법을 쓰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정신계열 마법에 걸렸을 때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지.’
아무리 시험 중이고 지금은 적이라지만, 그 전에 친구다.
몰랐다면 또 모를까, 비열하게 친구의 트라우마를 건드려 가면서까지 승리할 수는 없다.
목표가 정해지자, 학생들이 활기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지금 걔네 어디에 있어?”
“알렉산더 광장에서 세 블록 아래 공원. 그런데, 얘들아.”
“잠깐 기다려.”
나르케와 레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르케가 레오의 눈을 바라봤다.
어차피 같은 내용을 말할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나르케가 그에게 고갯짓해 순서를 넘겼다. 레오가 눈으로 인사를 하고서 말했다.
“여태까지 3팀 학생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어. 3팀은 루카스에게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거든.”
“그래.”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3팀이 어디에 있는지, 뭘 마시고 있는지 전부 알 수 있었어. 왜 이번에는 루카스에게 뭔가를 먹였지?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인트 발견 때였다면, 3팀은 루카스가 아니라 다른 학생에게 물을 먹였을 거야.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 봤어?”
“…그러게.”
학생들이 이제야 그것을 깨달은 듯 복잡해진 얼굴로 레오와 나르케를 바라봤다. 무언의 질문에, 나르케가 긍정했다.
“그래. 이걸 괜히 들려주지는 않았겠지. 엘리아스의 속임수일 거야. 그쪽의 목적은 당연히 우리를 유인하려는 거겠지. 유인해서 뭘 하려는 걸까, 생각해 볼 수 있겠지?”
나르케가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경계만 똑바로 한다면 나쁠 게 없어. 게다가 두 번째 폭주자의 정보가 없는 데다, 아까 세운 가설을 검증하기 어려운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그래서?”
“그러니까, 한번 따라가 보자고.”
* * *
같은 시각 공원 분수대 앞, 3팀 팀원 셋이 모여 있었다.
“진짜 장난해?”
루카스의 손이 자연스럽게 머리 뒤로 옮겨갔다.
엘리아스가 잽싸게 그 손을 쳐냈다.
“안 돼, 루카. 붕대 풀지 말고 토하지도 마~”
“토 안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
옆에서 율리아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도 루카스와 똑같은 감상을 느끼는 중이었다.
루카스가 속에서부터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엘리아스.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냐’고 했지. 이게 네가 말한 그 방법이야?”
“그런 셈이지!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리는 없고, 내 생각에 이건 분수대 물이 아니고….”
“어어?! 그만! 생각 그만~”
엘리아스가 루카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붕대 너머로도 루카스의 미간이 좁혀지는 게 보였다. 엘리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좌표나 다시 외울까. A부터 가자고~”
“…….”
“외우고 있지? 어디까지 갔어? 아냐, 대답하지 마. 내 생각엔 D까지는 갔을 듯한데, 이쯤에서는 말해도 되겠지. 잘 들어, 루카.”
엘리아스가 목소리를 줄였다.
“넌 조금도 생각하면 안 돼. 레오가 전부터 계속 너랑 나랑 생각하는 게 닮았다고 그러는데, 내가 보기에도 좀 맞는 말 같거든. 네가 잠깐이라도 생각해 버리면 금세 내 계획을 파악할 거야. 그러니까, 조금 속이 뒤틀려도 일단은 참아. 차라리 콜라에 자우어크라우트 담가 먹는 상상이나 해. 나르케 역겨워서 다시는 안 열어 볼걸.”
“엘리아스 너 진짜 나한테 원한 있냐? 본론부터 말해.”
“좌표 계속 외워. 첫째로, 1팀이 이 정보를 찾고 있을 거야. 오스왈드랑 플로리안이 찾은 피해자는 폭주자와 똑같은 도시미관과 공무원이었어. 애들이 찾은 정보, 아직 들은 적 없지?”
“어.”
“지금 빠르게 불러 줄게. 40대 신인류, 남색 체크무늬 재킷, 탈취제 냄새, 껌 종이, 명함, 만년필, 손가락 하나 크기의 휴대용 향수병, 접혀 있는 벌금 청구서 다섯 장, 손바닥만 한 수첩. 비가 와서 그런지 엎어진 자리 그대로 재킷이 젖어 있었어. 수첩은 텅 비어 있었고 벌금 청구서도 아직 특정인에게 부과되지 않은 청구서야. 미국산 만년필에 잉크색은 짙은 남색이었고 향수 색깔은 연한 분홍색이었는데 이런 것까지는 필요 없겠지?”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도 내내 좌표를 외우는 중이었다.
“자, 이제 둘째야. 루카, 파우스트랑 로잘린드 연기 엄청 잘하던데. 특히 로잘린드 때는 놀랐어. 너랑 성격이 그렇게 다른데도 꼭 진짜 그 인물처럼 말할 수 있다니~?”
“…….”
엘리아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진지해졌다.
“루카. 이제부터 1팀을 만나면, 네가 절대로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해.”
* * *
“또 좌표 외우네~”
“어, 나르케….”
나르케가 통찰 능력을 끄고 자리에 서자, 그와 같이 온 요제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았다.
“나르케 벌써 눈도 다 터졌어. 괜찮아?”
“실핏줄이라고 정확히 말해 줘….”
나르케가 헛웃음을 치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이제 졸음이 오고 있다.
‘안 되지.’
나르케가 뺨을 착 치고 아티팩트를 만졌다.
“울리케, 힐데. 도착했지?”
[응.]
“레오, 하이케는?”
[우리도 왔어.]
별것 없다.
우리는 3팀의 진로를 예측해, 그들이 갈 만한 목적지에 미리 도착했다. 두 팀은 다른 분수대로, 그리고 나머지 한 팀은 식수대로.
세 팀으로 찢었으니 이 중 하나는 걸릴 테다.
그렇게 해서 3팀 학생 중 하나를 잡는 것이 목적이나, 아마도 3팀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엘리아스는 일부러 우리를 여기로 유도했어.’
그에게는 분명히 계획이 있다.
그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어울려 줘야지.
피하지 않고 어울려 주는 것이 엘리아스의 전략에 대한 우리의 전략이고,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르케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둘이 분수대 앞으로 워프했다.
“엘리아스랑 루카스네.”
요제핀이 속삭였다.
그렇다.
역시나, 엘리아스와 루카스가 다른 분수대로 왔다.
이렇게 다른 곳까지 다 돌다니, 정말 어느 분수대 물에 접촉해서 폭주한 것인지 알아볼 심산인 듯했다.
“나르케. 어떻게 할까? 근접전 유도해서 워프시키는 게 제일이겠지?”
“…….”
나르케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분수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숨에서 쇠 냄새가 난다. 피가 목 뒤로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효과는 분명했다.
“하하하…. 이거 환영이네. 가짜야.”
“뭐?!”
“가자. 환영과 대치할 필요는 없지. 여기 있으면 시간 낭비야.”
그렇게 말하자마자, 눈앞의 환영이 사라졌다.
환영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챈 자가 생겼으니 능력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 나르케는 웃으며 귓가를 두드렸다.
“울리케, 힐데.”
[응?]
“아우구스테가 지금 우리의 동선을 파악했어.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어. 아까처럼, 이번에도 우리 발목을 잡을 작정일 수 있어. 떨치고 그대로 지나쳐.”
[지금 눈앞에 루카스랑 엘리아스 있는데? 저거 가짜라고?]
“그래. 가짜야.”
[…안 사라지는데.]
그야 의심뿐이니까.
능력을 직접 사용한 나르케 본인은 그들이 가짜라는 걸 확실히 알지만, 통찰 능력이 없는 나머지 팀원들은 의심의 단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괜히 대치했다가 시간만 버리겠어. 이제 우리는 구빈원에 가서 조사할게.]
[그래, 레오랑 하이케도 빨리 피해. 이거 괜히 우리 주의만 분산시키려는 작정이야! 또 아까처럼 우리 발목 잡고 자기들끼리 단서 찾고 있는 중이겠어.]
같은 시각,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오와 하이케가 나무 너머 분수대 앞의 루카스와 엘리아스를 바라봤다.
“가짜라고.”
“레오, 이 공간에서 그 폭주자 둘이 만난 흔적도 없어.”
이 땅의 기억을 읽은 하이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르케랑 팀원들 말에 일리가 있어. 아까도 네가 말했듯이, 엘리아스가 루카스 뇌에 분수대라는 정보를 넣어 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지금처럼 우리가 단서를 찾지 못하게 시간을 끌 작정이겠지. 가짜라고 했으니까 그냥 바로 넘어가자.”
“그래. 우리도 다음 좌표로 넘어가야겠네. 그런데….”
레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2월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폐를 가득 채웠다.
솔직히 후각이 특출나게 뛰어난 편은 아니나, 평생 식물에 둘러싸여 살아온 만큼 이런 공원에서의 탐색에는 이점이 있었다.
비에 젖은 흙냄새에 이어 소나무와 노간주나무 냄새가 느껴진다.
그리고….
백향목 냄새.
이 조그마한 공원에서 맡기엔 지나치게 깊은 향이다.
“밑져야 본전이지. 하이케, 루카스 마크해.”
“뭐? 이러면 3팀 계획에 놀아나는 건데…!”
콰아앙—!
눈이 아플 만큼 밝은 하늘빛 마력이 공중에서 터졌다.
어느새 완드를 스태프로 바꿔 낸 엘리아스가 그것을 하늘로 쳐들고 레오의 공격을 막았다.
“너무 티 나는 거 아냐~? 공격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레오!”
레오는 크게 반응하지 않고 그저 완드만 계속해서 휘저었다.
특별한 주문도 공격법도 사용하지 않은 채였다.
이미 한차례 무차별 난사만 했음에도 승기를 잡았던 전적이 있어, 루카스와 함께 있는 엘리아스를 상대할 때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뒤의 루카스다.
콰앙—! 쾅!
몸이 흔들릴 만큼 커다란 굉음 속에서, 레오가 엘리아스와 루카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우구스테가 정말 보통 능력자가 아니네. 너무 똑같아서 솔직히 분간이 안 돼.”
“뭐라고, 레오?”
하이케가 소리치며 물었다.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숨겼던 나무 밖으로 나와 엘리아스를 향해 돌진했다. 눈앞에 새파란 마력이 닥쳤다. 장막에 부딪히며 난 굉음과 섬광이 감각을 방해했음에도, 레오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엘리아스에게만 달려들었다.
채앵—!
“오우, 급하긴. 별론데~”
엘리아스가 레오의 검을 막아내며 씩 웃었다.
저 멀리, 루카스가 하이케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아스 뒤를 흘끗 보았던 레오가 다시 엘리아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게 중요해?”
“그럼?”
레오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지금 공간 마법 안 깔았어, 엘리아스.”
“그래서~? 우리 레오는 아까부터 자꾸 집중을 안 하네.”
“실망이네. 당장 도망가려면 갈 수 있는데 왜 나와 대치하고 있지?”
검 너머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검에 실리는 힘이 조금 불안정해졌다.
레오의 눈이 엘리아스 어깨 너머로 향했다.
이미 하이케는 레오의 고유능력 도움을 받고서 루카스를 제압한 상태였다.
“왤까. 왜 엘리아스 너답지 않게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걸까.”
“글쎄~?”
“그건 네가 계산된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상황에 맞춰 유동적으로 사고하는 진짜가 아니라….”
끼긱—
레오가 다시 엘리아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명령을 받고서 이 자리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가짜라서. 틀려? 솔직히 이번에는 허술하네, 아우구스테.”
그 순간, 눈앞에 있던 엘리아스가 사라졌다.
레오가 공중에 남아있던 마력이 흩어지는 걸 느끼며 중심을 잡았다.
역시, 나르케의 말대로 이건 가짜다.
‘허술하다고 했지만….’
허술하지 않다.
엘리아스가 주장한 방위 블러핑은 블러핑이 아니다.
인정한다. 지금 한 말이야말로 진정한 허세였다.
아우구스테의 능력은 정교하고, 정말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아까 혼자만의 힘으로 루카스의 진위 여부를 분간했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나르케의 언질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번엔 반대라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엘리아스는 가짜였더라도, 루카스는 진짜다.
왜냐?
레오가 숨을 한번 고르고, 어느새 벽돌 틈에서 무성히 자라난 풀들을 마력으로 누르고는 하이케와 루카스에게 다가갔다.
아까도 맡았던 백향목 냄새가 점점 더 가까이서 난다. 그에 섞인 다른 풀 향도 느껴졌다. 루카스가 본래의 신원으로 있을 때 쓰는 향이다. 루카스는 매번 챙기는 걸 귀찮아하는 것 같지만 오스왈드와 필립 같은 초감각 능력자들이 학교에 널려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안 쓰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아우구스테는 알 턱이 없는 그 증거가, 이 루카스가 진짜 루카스라는 증거가 내 눈앞에 있다.
레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엎어져 있는 루카스 곁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카스.”
“…….”
대답은 없었다.
레오가 머리 뒤의 끈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시험이 시작된 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팀을 속 썩였던 이 짜증 나는 방어 도구는 손짓 한 번에 쉽게 풀렸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이어, 웃음이 녹은 분홍색 눈동자가 레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냥 갑자기 웬 친구 얼굴이 튀어나와서 웃긴 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건지, 계획대로라 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지금 잘 짜인 게임 위에 서 있고, 그건 루카스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득점을 위해 3팀이 가진 정보가 필요한 지금 이 순간, 나는 왜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루카스와 마주쳤을까.
“무슨 작정으로 혼자 남았는지 얘기나 들어 볼까? 분명히….”
“…….”
“이유가 있을 텐데.”
레오가 계산을 감추려 바른 미소를 지으며 제 친구를 내려다봤다. 루카스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