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10)
“아무리 폐하의 결정이라지만 이해할 수가 없던데요. 아무리 그래도 안전을 위하는 마법사 단체인데 너무한 거 아닌가 싶네요.”
앞에 앉은 자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젊은 구인류가 웃었다.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그 사람은 학식이 느껴지는 상류층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웨이터를 불러 식사를 주문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죠? 지금 안 그런 사람이 없을 거예요.”
“예, 그런데….”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저녁 시간대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갑자기 커진 소음에 그들이 고개를 입구 쪽으로 돌렸다.
가게로 들어온 구인류들이 큰 목소리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상 보니 잘하긴 하더만.”
“아냐, 머리 굴리는 거야 요즘 김나지움 나온 애들 빠릿빠릿하고 그러니까 아무나 주워다 놔도 다 한다고. 인재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플레로마를 뽑아?”
“플레로마 아니라지 않나? 좀 못 미덥긴 해도 진짜 아니니까 폐하께서 뽑았겠지.”
“병원하고 말 맞춰서 헛소리 지껄여 놨을지 또 모르는 일이야. 저거 내가 보기에는 피 빨아먹으려고 일부러 자원한 거야.”
대체 폭주하는 사람 피를 어떻게 마실 거며 황실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겠냐는 문제가 있지만, 다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피로를 조금이나마 날려 줄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허허, 화가 많이 났군. 자네는 출범식에서 계란이라도 던져야 하는 거 아닌가?”
“저기 중학교 애들은 벌써부터 벼르고 있던데. 출범식 끝나고 황실 밖으로 나오기만 해 보라고….”
“애들이 벌써 됐네.”
구인류들이 킬킬대며 자리에 앉았다.
저녁 신문이 나오기는 했지만, 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다들 아침에 발행된 기사에 물들어 있었다.
언론이 불을 지핀 적의는 이런 식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말을 하다 끊긴 청년이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쪽도 같은 주제네요.”
오늘 수도는 온통 마법사 세계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그중에서도, 플레로마 학생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수많은 구인류들의 지루한 일상을 자극했다.
잘 들어 보니 이 가게에서도 열이면 열 모두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아마 전국에서 이 얘기만 하고 있을걸요. 폐하께서 플레로마를 황실에 들이시다니요.”
안경 쓴 구인류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다, 지금껏 나오지 않았던 추측을 한마디 던졌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이런 오해를 살 게 분명한데 왜 루카스 아스카니엔을 황실에 입성시켰을까요?”
“…….”
앞에 앉은 일행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중요한 건 왜 이런 말을 들을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을 넣었는가예요.”
“그러니까요, 그게 참 궁금한 지점이죠. 황실도 별생각 없었던 거겠죠?”
“황실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건 황실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하는데요.”
완전히 분위기를 깨는 발언에, 주위 테이블의 소리까지 일순 조용해졌다. 두 구인류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자 그제야 다시 주점은 조금씩 대화 소리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주점 안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알게 모르게 그 젊은 지식인 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황실 입장에서는 그 아스카니엔을 무조건 넣어야만 했다면? 내 생각에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봐야 합니다.”
“뭔가라뇨?”
“작년에 그 학생은 꼭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달라졌었죠. 그것만 봐도 미심쩍지 않습니까? 그건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에 이제는 황실이라니…. 어쩌면 황제 폐하와 안할트 사이에 얘기가 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르죠.”
“어떤?”
그러자, 이제는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지 안경 쓴 청년이 더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방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 설마…. 하하하, 그럼 다 됐다 쳐도 이번 시험에서 1등을 줄 이유가 없지 않나요? 공개하기에는 아까운 열쇠인데.”
“바로 이겁니다. 그 높으신 분들도 이런 반응을 유도한 게 아니겠어요? 어차피 우리가 지금처럼 그 학생을 비난할 테니 문제없지 않습니까. 그것과 별개로 이제 써먹을 때가 됐으니 능력만큼은 인정해 줘야지요. 계속 숨기면 활용할 수가 없잖아요.”
정확히 무슨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는 중인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들에게 쏠려 있었다.
“이 이유가 아니면 플레로마가 어떻게 황실에 입성하겠습니까. 분명히 귀족들만 아는 뭔가가 있어요. 귀족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잖아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가 목소리를 줄이며 물었다.
“…아까 말한 그거, 당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어요?”
“…….”
주위를 둘러보던 안경 쓴 청년이 손짓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점의 소음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이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을 흘끔댔다.
“…어?”
귓속말을 듣고 난 사람의 표정은 아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눈으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청년과 눈빛을 주고받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목을 가다듬었다.
“…….”
그 이상한 반응에, 몰래 그들을 관찰하던 구인류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어도 그들끼리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말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구인류가 제 테이블의 일행들과 눈짓하고는, 같은 결론이 나온 듯하자 두 청년을 불렀다.
“저기요.”
“예?”
“한번 자세히 들려줘 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같은 시각, 앞선 주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겉보기에 다 낡아 빠진 빈민가의 식당에서 시끄러운 고성이 들려왔다.
“미친 거지! 제국2교육원 교수들이 단체로 노망났어.”
“하하하, 그 사람들 100살도 안 됐는데? 노망은 마법사도 아니면서 60살이나 먹은 자네가 와야지.”
한 사람이 고기를 찍어 먹으며 웃었다. 쟁반에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는 금세 고함에 묻혔다.
“100살도 안 됐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지금 누가 누굴 지켜? 플레로마가 베를린을 누비고 다니게 둔단 말이야? 노망난 게 아니면 그냥 이 새끼들은 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린 거야.”
“흠, 난 지켜볼 만한 것 같은데 이 친구는 계속….”
“아냐! 소식 못 들었나 보군. 황실에서 그 친구 플레로마라는 증거 한번 제대로 잡아 보려고 일부러 꾀어낸 거라는 얘기가 있어.”
“뭐라고?”
그 말에, 뒷줄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한 중년이 고개를 돌렸다. 눈에 띄게 홀로 값나가 보이는 정장을 입은 사람이었다.
내내 아스카니엔 이야기를 하던 구인류는 반주만으로도 벌써 취기가 올랐는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경계를 풀게 하는 거지! 플레로마라는 증거를 잡아낸 다음에 콱 죽여 버릴 심산인 거야. 그런 게 아니면 황실이 플레로마를 들이는 짓을 할 리가 없잖나. 안 그래?”
“야…. 이게 진짜면 폐하께서는 정말 생각이 깊으시군.”
“그 아스카니엔은 미꾸라지 같은 놈이야. 마법부 차관이란 새끼가 싸고도니까 여태 아무것도 못 잡아냈잖아. 그 새끼도 참 제정신이 아니지. 출세하려면 동생부터 죽여야지 왜 그런 놈을 살려 둬? 이렇게 장성해서는 결국 누구도 손대기 어렵게 됐잖나. 황실이 직접 손을 대게 만들고!”
“…아니, 그런데 그건 어디서 들은 건데?”
“그래. 어디서 들은 건가? 진짜인가?”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에 기세등등해진 구인류가 더욱 목소리를 키웠다.
“진짜라니까. 한번 걸어 봐? 내가 보기에는, 그 학생 한 달 안에 무조건 플레로마 관련해서 사고 칠….”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군.”
불쑥 들려온 말에, 구인류들이 뒤를 돌아봤다.
이 지역에서 본 적도 없는 얼굴에, 묘하게 신인류 분위기가 나기도 하는—구인류 같았으나 완드를 찬 걸로 보아서 신인류 같기도 했다—중년이 앉아 있었다.
구인류들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모르고 그 학생을 황실로 거뒀을까? 당신이 황제 폐하라면 어땠을 것 같소?”
“갑자기 무슨? 끼어들지 말고….”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잖소. 비난이 쏟아질 걸 알면서도 황실로 거둬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는군.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 선택한 자요. 감히 플레로마를 그 자리에 올렸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내가 들은 것?
구인류들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폐하께서는 플레로마를 제거하겠다는 의지가 강하신 분 아닌가. ‘대중에 공개할 수 없는 뭔가를 그 높으신 분들만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나?”
“그럼 자네는 뭘 알길래….”
“한번 걸자고 했지. 여보게!”
그 말에, 주방에 있던 주인이 자연스럽게 손을 털고 매장으로 내려왔다.
손에는 두툼한 장부를 든 상태였다.
이미 이 거리에서 도박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곳이었기에 그는 이런 대응에 익숙했다.
그는 누구도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익숙하게 물었다.
“예. 종목이?”
“그냥 양자택일. 루카스 아스카니엔 학생이 한 달 안에 사고 칠 것인지 아닌지 한번 걸어 보자고.”
“허허…. 이미 비슷한 주제로 한 건 잡혔는데. 그쪽으로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판돈은?”
“열 명 들어왔고 아직 십만. 전부 플레로마라는 쪽에 서셔서 반대 측이 필요하니, 그쪽에 거실 거면 이 게임으로 오시죠.”
“열 명인데 십만? 그냥 내 판으로 옮기게.”
“예?”
주인의 물음에 그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며 말했다.
“칠십만. 그 학생이 플레로마가 아니라는 데에 걸지. 이 정도면 미꾸라지들 잡아 오기 괜찮은 금액인가?”
숙소 세를 일 년 넘게 낼 수 있는 금액이 불리자 술집이 조용해졌다.
어차피 1펠만 걸어도 불법이니 천 펠을 걸든 만 펠을 걸든 잡혀가는 건 똑같았고, 그래서 주점에서는 판돈의 상한선을 걸어 두지 않았다.
어차피 이 지역의 소득 수준이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시작부터 이만한 금액이 불리는 경우는 적었다.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주인이 헛웃음을 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 동네를 잘 모르십니까? 여기서는 혼자 10만만 걸어도 높게 거신 겁니다. 이대로 반년 치 봉급을 잃으시면 가정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물론 선생님께서는 반년 치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봐, 이거 받아 가!”
“뭘 말려!”
가게 곳곳에서 사람들이 지갑을 꺼내 들고 외쳤다.
뒤돌아보려는 주인에게 그 중년이 손가락을 튕겨 주의를 집중시켰다.
“결국 그 학생이 한 달 안에 문제를 일으킬 거다 이건가? 확신이 서는군. 자네 같은 자가 많다면 난 곧 부자가 되겠어.”
“저는 손님께서 그리 재미를 보시지 못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일 뿐입니다.”
“안 되겠군.”
중년이 귀 좀 대라는 듯 손짓했다.
주인과 한참 속삭이며 무언가 말하던 구인류가 얼굴을 뗐다.
아까와 달리, 주인의 표정은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 겉으로는 불신을 드러내려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신반의하는 그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
“이제 판돈 넣을 친구들 좀 잡아 올 수 있겠지.”
“…허허….”
“주인장 자네가 어디에 서야 할지도 잘 알았을 거고 말이야. 한 달 안에 사고 칠 거란 생각을 하는 자들이 저리 많은데 재미를 못 볼까?”
중년은 주인 너머의 손님들을 바라봤다.
돈을 걸려던 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아까 그는 ‘내가 들은 것’이 있다고 했다. 왜인지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만 같은 옷차림에, 아무렇지도 않게 반년 치 월급을 던지는 태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으나 지금 주인의 반응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루카스 아스카니엔이 플레로마이며 그가 황실까지 들어갔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누가 보아도 이쪽이 정답인데도 저 중년은 당연히 반대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주인의 표정까지도 그걸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주저하는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저녁 7시.
황실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1팀 전원이 잠시 쉬려 엘리아스의 방으로 옮겨 가려던 순간, 한 사용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학교에서 온 편지입니다.”
엘리아스는 황실 사용인이 전달해 준 제국2교육원의 편지를 받자마자 봉투를 훅 찢어 버리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이 교수 맛집 탐방만 다니냐? 마법검술학이 아니라 베를린 박사네.”
나는 엘리아스가 넘기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베를린 지도에 색색의 잉크로 X표시가 되어 있었다.
어림잡아 스무 곳은 되는 듯했다.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 찾았네.’
오후 2시부터 4시간 동안 열심히도 수집한 게 보인다.
아까, 나는 트라우트에게 베를린에서 각각의 계층 사람들이 자주 모이고 흩어지며 가십과 소문이 주로 생산되는 장소를 알아 오라고 시켰다.
부르주아 계층, 노동자 계층, 그중에서도 평균 이상의 계층과 빈민층. 각각의 특성에 따라 공략 방향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트라우트는 베를린에서 산 지 오래고, 그의 인맥도 대부분 베를린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나도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비슷한 장소들을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왜 해.’
남 시킬 수 있을 때 열심히 시켜 둬야 한다.
그래야 과로사 안 한다.
게다가 단순히 부탁하는 것으로는 이렇게 빠르게 결과물을 받기 힘들다.
협박을 통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그는 ‘위르겐 벡의 동맥을 묶어 가면서까지 아스카니엔의 둘째를 방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집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빠져나가자, 엘리아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교수한테 베를린 맛집 지도나 만들어 오게 시키다니 루카 너도 보통은 아니구나.”
“맛집 아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소문 퍼트리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엘리아스가 말했듯, 전투의 핵심은 정보다.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고 진실을 거짓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것이 승리에 가까워질 방법이다.
사람들이 자극적인 이야기가 필요해서 내 비판을 소비한다?
그러면, 또 다른 자극적인 이야기가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어차피 둘 다 거짓이라면, 내게 유리한 거짓을 퍼트리는 쪽이 낫지.
“엘리아스. 지금 저택으로 같이 워프해 줄 수 있어?”
“엉? 당연하지~”
엘리아스가 제 방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를 꽉 붙잡은 채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눈앞이 저택 입구로 변했다.
사실 황실에서 이렇게 바로바로 워프하는 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신원이 학교에 의해 보증된 학생들이라 자유롭게 워프할 수 있게 허가를 받았다.
‘어차피 황실 별관에만 처박혀 있는데 허가 안 해 줄 이유도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엘리아스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나 네가 여기 왜 왔는지 알겠다.”
“알겠어?”
알아야지. 엘리아스라면 알 수밖에.
내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트라우트의 인맥을 활용해 구인류 사이에 찌라시를 뿌릴 경우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트라우트가 내 기사를 내리기 위해 사용한 인맥은 형의 충실한 신하들이다.
우리 반 교수에게 부탁할까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베를린 태생이기에 트라우트보다 인맥이 단단하지 않았다.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은 자이기도 했고.
반면 트라우트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안할트 출신에 아드리안 아스카니엔 지지자라는 특성이 있기에 같은 특성을 공유하는 자들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인력을 내가 과도하게 활용할 경우….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여론을 조작했다는 빌미를 형 지지자들에게 주게 되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워 먹는 꼴이다. 아무리 포인트 30점을 따내고 싶어도 그렇지, 이렇게 눈에 쉽게 보이는 바보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신력을 써서 기억을 지우면 되지 않는가?
물론 좋은 방법이다. 이미 트라우트에게 맛집 지도—엘리아스에게는 뭐라 했지만 괜찮은 표현 같다—만들라고 명령하면서 천천히 정신조작마법을 섞었으니까.
하지만 트라우트 한 사람에게만 신력을 쓰는 것이라면 몰라도, 트라우트의 인맥과 그들 산하의 첩보 인력을 찾아다니면서 모두 신력을 써야 한다면 답이 없어진다.
내게는 그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지 않은가?
나는 내 옆에서 계속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아스에게 부연했다.
“네 예상이 맞을 거야. 내가 아는 구인류께 부탁 좀 할까 해서.”
“오~ 역시.”
마리안 바움에게 편지를 보내러 왔다.
내가 트라우트에게 맛집 지도 작성을 요구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부탁할 대상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대상이면서도, 약간은 모자란 정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난감한 부탁이지.’
소설에서도 여기서도 늘 바이에른에서 활동해 온 사람이 베를린 지리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고 카타콤의 베를린 구인류를 동원해 달라는 요구는 그에게 당당히 월권을 요구하는 행태이므로, 과한 부탁이다.
이건 내가 트라우트에게 ‘기사 좀 막아 봐라’고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급의 무리수다.
그러니, 예의를 갖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먼저 준비할 것은 준비하고 설득해 봐야지.
“오셨군요.”
온통 남색으로 뒤덮인 복도를 지나쳐 내 방이 있는 곳까지 가자, 또 다른 사용인이 나를 반겼다.
나는 웃으며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음?”
이 저택에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다.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뒤집자 낯선 글자가 보였다.
[D.G.에게]
“이거….”
잘못 왔네.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책상 옆으로 민 순간, 엘리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네 거 맞는데? 루카 한발 늦었네.”
“…….”
한발 늦었다고?
엘리아스의 말에 나는 봉투를 열었다.
“…!”
봉투를 열자마자 적힌 이름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디트리히 그라나흐라고 부르는 이에게 온 편지였다.
“…그래, 엘리 네 말대로 한발 늦었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편지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계획한 걸 그가 그대로 해냈다.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카타콤의 프로이센 구인류를 모아서 그들이 아는 집결지에 풀었다. 심지어 한 명씩 푼 것도 아니고 팀 단위로 넣은 듯했다.
[…카타콤에 한번 오라고 말한 지 2주가 넘었는데 어떻게 얼굴 한번 안 비추죠? 2월에는 꼭 오세요.]
장난스러운 문구가 편지 맨 마지막에 쓰여 있었다.
당시에 마리안 바움이 내게 카타콤에 오라고 했을 때, 나는 카타콤 사람들이 꺼릴 것을 걱정했었다.
결국 그는 카타콤 사람들이 날 꺼리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는 셈이다.
그렇겠지. 그가 날 위해 실행한 계획을 읽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지금 투입된 프로이센 카타콤 사람들도 자의가 아니라면 나 하나를 위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때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보고 있음에도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쉽게 믿기지 않았다.
내게는 매일매일이 이곳에 처음 떨어진 날 같다. 뭐든지 다 내 손으로 잡아 뽑는 게 너무 익숙해서, 협박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먼저 날 위해 움직여 줄 수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그분 타이밍이 대단하시네? 통찰 능력자라도?”
“이제는 이미지 바닥 찍을 때가 아니니까.”
상태창이 +10,000짜리 제안을 내민 시기는 아주 적절했다. 지금 이 순간이 이미지를 뒤집기에 좋은 시기다.
황실의 꿍꿍이가 뭐건, 나는 금요일부터 황실이 공인한 안전한 마법사가 되었다.
그럼 그 이득을 잘 활용해 줘야 할 것 아닌가? 마리안 바움도 여러모로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뭐, 그래도 뭘 어떻게 알고 날 도왔는지는 좀 들어 볼 만하긴 하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빠르게 일이 풀린다면, 나도 한시라도 빠르게 움직여 줘야지.
트라우트에게서 뽑아낸 정보는 실제로 정치계 및 언론계 고위 인사들이 정보원을 뿌리는 지점만 모은 정보다.
카타콤의 베를린 사람들이 그곳 지리에 능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대부분 소시민들이다.
실제 정치계에서 사용하는 정보를 주어서 두 사건의 교집합을 만들면 일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나는 트라우트에게서 받은 지도를 워프 우편 봉투 안에 넣고, 짧은 감사 편지를 적어 나갔다.
* * *
그냥저냥 괜찮은 주말이 지나갔다.
언제 또 이렇게 잔잔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팀의 결속력이나 팀원에 대한 애정까지 생기기는 어려운 시간이었기에 그냥 평소대로 학교에 있는 기분만 들었는데, 그렇기에 오히려 편안했다.
‘물론 지금은 편하지 않다.’
출범식으로부터 약 1시간 전.
지금 황실의 분장사는 한 시간째 내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저 멀리로 간 사이, 친구들에게 속삭였다.
“너희 매번 이러고 살았냐?”
오랜만에 내 원래 몸 생각이 난다….
여기 와서는 그냥 세수만 하고 바로 교실로 튀어 가는 삶을 살았더니 이런 생활이 귀찮게 느껴진다.
체링겐이 웃으며 말했다.
“루카스는 이따 무대까지 설 거면서 뭘~ 미리 준비한다고 생각해.”
하여간 왕족 놈들….
그냥 귀족이 어떻게 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런 통치가문 사람들, 즉 왕족들은 겉모습에 예민했다. 머리가 돌이 될 때까지 왁스칠하고 보석을 온몸에 두르고 나오는 것만 봐도 다르긴 다르다.
‘뭐… 다른 놈도 아니고 왕족이 동네 나가는 폼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날 수는 없긴 하지.’
지위에 맞는 인상으로 나타날 때 호감도를 더 주는 건 당연하니 그냥 하는 게 맞다.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남이 해 주는데 굳이 이득을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쾅—!
남들은 호감도 창도 못 보는데 자연스럽게 호감도라고 표현하다니.
내가 정신을 깨우려 벽에 머리를 박자 엘리아스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뭐, 뭐야? 왜?”
“그런 게 있다….”
나는 생각을 돌리기 위해 재빨리 제안 창을 켰다. 물론 제안 창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그걸 또 봐서 뭐 하겠냐마는, 선택지가 없었다.
빨리 끝내고 치워 버리는 수밖에.
제안 2: 기한 내 호감도 +10,000 (552/10,000) (111시간 59분 52초)
0.0552% 진행됐다.
‘자연 증가 속도로는 놀랍네.’
상승세 탔다.
10,000이 답 없어 보여서 적어 보일 뿐이다. 학교와 황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얻은 것일 텐데, 이전 미션을 고려하면 굉장히 빨리 오른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칭호: 니콜라우스 경
체력: +4.0 [+7.0]
정신력: +4.3
마력: ?
기술: +5.1 [+8.1]
인상: -4.1 (+1.7) [+3] [+8.126]
행운: +5.0
특성: 여명777, 신력, 매력 (Lv.5), 재시도 (Lv.3)
2주간 1.2 늘었던 인상값이, 48시간 만에 1.7 올랐다.
언론이 나와 긍정적인 키워드를—예를 들어 마법사로서의 자질—엮어 보도한 덕분이다.
그리고, 카타콤의 작품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는 다스로테 오늘 자 신문을 펼쳤다.
[황실의 계획은 어디까지?]
— 황실과 안할트의 비밀 공조… 플레로마의 기질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는 학생 A, 사실 황실의 야심 찬 플레로마 대비책?
‘A라고 하면 다냐?’
누가 봐도 나다.
다스로테 때문에 인상 점수가 뚝뚝 떨어졌던 경험 덕에, 이 황색신문이 일반 대중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알았다.
물론 이득이다.
‘…플레로마의 사상을 믿지 않는다면 플레로마의 자질을 가졌다 해도 우리 신민의 편에 설 수 있다. 일각에서는 플레로마에게 타격을 줄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황실이 학생 A의 성적 평가 결과를 받아들여 황실 마법사연합회 소속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자식들은 수도에 떠도는 찌라시를 그대로 갖다 적었다. 늘 그래 왔던 놈들이니 이상하지는 않았고, 이게 카타콤이 원한 바일 테니 고마울 뿐이다.
나는 적당히 기사를 읽다, 엘리아스의 딱딱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왜 옷이 머리보다 늦게 나오나 했다. 30분 전에 옷을 주는 건 뭔 경우인가 했어.”
사용인 몇몇이 우리의 예복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엘리아스의 표정을 보고서 멀찍이 물러섰다.
나는 책을 덮고 또다시 싸늘해진 대기실을 바라봤다.
“커험…. 얘들아. 왜 이렇게 분위기 나쁜 건지 설명 좀 해 줄 사람?”
울리케가 팀원들을 흘끗대며 물었다.
늘 그렇듯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하이케와 프로이센 융커인 울리케를 제외한 나머지, 엘리아스와 레오와 율리아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굴 만하네.’
온통 까만 롱코트에 빨간 넥타이.
셔츠는 원래 보통 흰색이지만, 어쨌거나 이 세 가지 색깔은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흑백적, 독일 제2제국의 국기 색깔이다.
하얗고 파란 우리 교복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다.
“옷 꼬라지 봐라.”
엘리아스가 혀를 차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레오는 담담히 대답했다.
“프로이센 블루 아닌 게 어디야.”
아마 황실은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프로이센 블루는 오래전부터 프로이센의 군복으로 쓰여 온 색깔이며, 그렇기에 예전에는 황실 산하의 수많은 마법사 팀들이 프로이센 블루 제복을 입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프로이센 출신이 아닌 타국 통치가문 학생이 셋이나 되는 점을 고려했는지 아예 제국 연방기 색상을 이용했다.
제국도 아니고 프로이센의 ‘군복’을 연상시키는 제복을 주는 건 그들 스스로도 속 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해 한발 물러났을 테다.
이번 선발 후 황실로의 이적은 협의되지 않은 일이었으니, 노골적으로 프로이센의 신하로 삼아 버리면 바덴과 바이에른의 항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무늬만 민주성을 띤 이 국가에서 제국에 대한 충성은 곧 황제에 대한 충성이다. 심지어 제국 연방기의 흑백은 프로이센기의 색상이며, 흑백적은 또다시 호엔촐레른 왕실기의 색상이다.
결국 눈 가리고 아웅한 꼴이나 다름없으니, 엘리아스가 저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하다.
어쨌거나 황실이 출범식 시간이 닥쳐서야 이걸 준 건….
왜겠는가. 우리의 항의는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별것 아닌 것이라도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역시나 고집이 대단들 하다.
엘리아스도 지금 이 자리에서 반기를 들 생각은 없는 듯하다. 그가 우리를 한 번씩 둘러보고는 숨을 크게 내쉬고 손짓했다.
그제야 사용인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 뒤로, 나는 출범식 시작 시간이 다가오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오늘을 위해 주말 내내 준비했으니, 이제는 터져 줘야 한다.
오늘 출범식에서 이번 제안을 끝내지 못하면, 그냥 30포인트는 날렸다고 봐야 한다.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의 사람들.’
저번 호감도 산정 기준이었다.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가 대체 무엇일까. 나의 생활 반경에 있으며 내가 언제든 눈으로 볼 수 있고 나와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
여태까지 경험적으로 알아낸 바로는 그랬다.
‘그럼 지금까지 얻은 552점은 전부가 아니지. 그렇다면 결국….’
의전 담당 부서 사람들이 대기실에 들어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끄러웠던 친구들은 이동할 시간이 되자 조용해졌다.
우리는 햇살이 들어오는 통로를 거쳐 쭉 나아갔다. 저 멀리 짙은 갈색으로 된 거대한 문이 보였다.
아까부터 계속 들려온 악대의 북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황궁 안으로 입장한 수많은 사람들과 양옆에 도열해 있는 경비병들의 모습이 저 멀리에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지금까지 얻지 못한 점수는 이제 얻을 수 있겠지.’
“…와아아아아—!”
띠링—!
호감도 1,000 달성 (1,000/10,000)
그 창으로부터, 수많은 창이 겹쳐 나타났다. 알림음 탓에 사람들이 내는 함성이 들리지도 않았다.
글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달성창의 속도에 당황한 순간, 마지막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호감도 10,000 달성 (10,000/10,000)
축하합니다!
‘제안 2: ‘기한 내 호감도 +10,000 (10,000/10,000)’ 성공!
‘Route 1 — 〈 제안 3 〉’을 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