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211화 (211/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11)

‘…벌써.’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창을 보고 주춤한 나를 엘리아스가 받쳐 주고 있었다.

“루카 왜~?”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건물의 끝을 향해 걸었다.

‘성공했네.’

저들이 나를 보고 갑자기 충격을 받아서 10,000점을 준 게 아니다. 애초에 아직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야 그들이 내 활동 범위에 들어왔을 뿐이다.

이 체계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인상 점수가 0점이다 못해 바닥 뚫고 내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딴 걸 좋아하면 안 되는 건데.’

포인트 30점으로 창출할 이득이 너무나 달콤했다.

경험으로 알 수 있듯, 값이 마이너스라면 약간의 변화로도 점수를 올릴 수 있다.

사람들이 기사와 찌라시를 읽고 ‘내가 오해했구나! 오늘 저녁 신문을 다시 보니 사실 그 학생은 정말 좋은 학생이었구나!’ 따위의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저런 마법사들이 인정하는 걸 보면 정말 실력만큼은 괜찮은가?’, ‘혹시 황실과 안할트가 손을 잡았다는 게 진짜인가?’처럼 약간의 의외성과 의문만 주어도 1점은 빠르게 채워진다. -10과 -9의 차이는 그 정도다.

그때, 눈앞의 ‘축하합니다!’ 글씨가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질 즈음,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아… 설마.’

자기가 야심차게 준비한 제안을 너무 쉽게 달성했다?

웃기지 마라. 물론 어렵게 달성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베를린도 얻고 전국도 얻는 전략을 써야지 만 명을 만나 악수하고 돌아다닐 수는 없단 말이다.

‘좋아.’

순조로워.

앞으로도 이런 날만 있었으면 좋겠다.

가볍게 미소지은 순간, 눈앞에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띠링—!

호감도 10,800 달성 성공!

호감도 10,810 달성 성공!

호감도 10,820 달성 성공!

호감도 10,830 달성 성공!

음?

‘잠깐…, 잠깐.’

눈을 한번 떴다 감을 때마다 새 창이 우수수 쏟아졌다. 수가 무섭게 늘기 시작했다.

아니, ‘시작했다’가 아니다. 아까도 생각했듯 계속 오르고 있었는데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긴 하지.

그런데 이걸 대체 내게 왜 실시간으로 보여 주는가?

이 체계가 나를 당황시키려는 작정이었다면 성공했다. 막연히 올랐겠거니 하고 있을 때와 달리 실시간으로 대중의 반응을 확인하자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루카? 아까부터 왜 그래.”

엘리아스가 학교에서 늘 그러듯 어깨에 팔을 턱 올렸다.

내 걸음이 좀 늦어졌던 듯하다. 문 양옆에 늘어서 있던 친구들이 나를 돌아봤다.

띠링—!

호감도 11,000 달성 성공!

얄밉게 마지막 알림음까지 주고서, 창이 그쳤다.

엘리아스가 끼어들고서야 그친 창에 나는 체계가 뭘 의도했는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거 놀린 거네.’

순조로워서 좋다고 해서 그런가.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해라. 글자도 띄울 수 있으면서 항의를 이런 식으로 해?

헛웃음을 치자 엘리아스가 눈앞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더워? 쉬어야 해?”

“아니, 괜찮아.”

쉴 때일 리가.

이 기회를 잡을 때다.

문 앞까지 차분히 다가간 나는 차례를 기다렸다.

레오와 나르케가 먼저 나갔고, 엘리아스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엘리아스의 장화 굽 소리가 세 번 들렸을 때,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가리고 있던 건물이 사라지자 햇빛이 머리 위로 내리쬐기 시작했다. 건물 하나만큼 넓은 새하얀 무대에 비친 햇빛이 내 눈을 타고 들어왔다.

내 시선은 그 너머로 향했다.

아까 흐릿하게 보았던 인파는 약과였다.

무대 너머에, 출범식을 보기 위해 참가한 10만 명의 관중이 있었다.

그 순간, 함성이 뚝 그쳤다.

* * *

10분 전, 야외 1층.

황실 마법사 연합회의 젊은 마법사들은 무대 아래 2열에서 출범식을 관람하고 있었다.

연합회에서 요직을 맡은 게 아니라면 출석이 자유였지만, 오늘은 모두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들도 평민들처럼 아스카니엔을 궁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학생은 평생을 집에 처박혀 있었으니 같은 귀족이라고 해서 그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나마 실험대회니 체포 당시 인터뷰니 1-1차 시험이니 해서 얼굴이 나온 언론 기사가 있기는 했지만, 체포 인터뷰는 제국2교육원이 접근 금지 조치를 취해 버린 데다 실험대회에서 그자의 얼굴을 찾아내려면 장장 6시간에 달하는 영상을 뒤져야 했다.

아니면 이미 나온 지 두 달 된 안할트 일보를 찾아보든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루카스 아스카니엔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대상이었다.

게다가, 같은 황실 소속 마법사라고 해서 루카스의 황실 입성에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좀 괘씸하지?’

마법사 연합회 99기 단체장을 맡은 마법사는 지루함에 꼬이는 몸을 풀어내며 무대를 바라봤다.

그 플레로마가—이제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여전히 그런 이미지가 있었다—고작 5개월 배운 실력으로 황실에 입성하다니.

때마침, 이제 에스체트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동료 마법사가 비딱하게 말했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출범식은 12시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인사말과 정부 요인들의 축사, 짧은 공연을 지나 이제 1시간이 지났다.

아직도 에스체트는 나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황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시작한 게 아니니까.’

익숙해지기 힘든 지루함을 느끼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 황제의 비서가 저 멀리 앉은 둘째 황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하.”

아델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발 앞으로 나간 그가 황가의 스태프를 가볍게 바닥에 내리쳤다.

자리에 앉아 있던 제국2교육원 학생과 황실 마법사 연합회원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델베르트는 그 걸음 소리를 듣고서 주먹 쥔 손을 가슴께로 옮겼다. 뒤에 선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동을 따라 했다.

“와아아아아—!”

꼭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손뼉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델베르트는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이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 황제의 연설이 있을 차례였다.

그 순간, 무대 앞에 선 황제가 손을 들었다. 함성 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존경하는 신민 여러분.]

그는 한번 뜸을 들이고, 저 뒤로 넓게 펼쳐진 광장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분들께, 우리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릴 수 있어 기쁩니다. 우리는 오늘 황실 마법사들의 출범식을 위해 모였다는 걸 아실 겁니다. 이 자리에서 소개할 이들은 오랜 시간 제국의 엄격한 훈련을 받아 왔으며 우리 세계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헌신할 희생정신을 확인받은 마법사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앞으로 베를린 곳곳에서 제국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에 맞서 싸우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더 발전된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 유망한 마법사들입니다.]

“이제 슬슬 때가 됐는데. 벌써 1시 30분이야.”

곧 나오겠지.

마법사는 동료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렇다고 황제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눈은 황제 뒤편의 문으로 향해 있었다.

[…항상 최고를 추구하는 우리 제국은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를 선도할 것입니다. 어떠한 역경도 우리의 목표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 출범식을 시작으로, 우리 제국은 오늘 공식적으로 황실에 이름을 올릴 이 일곱 명의 마법사들의 헌신을 통해 평화를 되찾고 번영할 것입니다. 제국의 1억 신민들을 위해 끝까지 헌신할 것을 약속합니다. 신민 여러분의 지지와 격려가 그들의 끝없는 열정과 헌신에 더욱 큰 힘을 불어넣으리라 믿습니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 그가 선 자리 뒤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함성 소리가 귀를 찢을 것처럼 커졌다.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황제는 왕홀 모양의 스태프를 바닥에 한번 두드리고 확성 마법을 키웠다.

[황실 마법사연합회 101기, 에스체트입니다.]

레오나르드 비텔스바흐. 언젠가 사교계에서 한 번쯤 마주쳤던 마법사가 먼저 걸어 나와 무대 오른편에 섰다.

주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은 봐도 봐도 신기하네.”

신기하게 여길 만했다.

지금껏 살면서 봐 온 사람들 중에서 제일 인간 같지 않게 생겼다.

그래도 딱히 놀라운 점은 아니었는데, 비텔스바흐 가문 사람들은 구인류 시대부터 용모가 잘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번 기수의 마법사 팀은 연방기 색을 사용할 생각인가?

마법사가 살짝 빈정 상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만약 그렇다면 황실은 에스체트를 제국을 대표하는 팀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솔직히 제국의 속내가 너무 뻔히 보이긴 했다.

바이에른 차기 국왕을 황실 안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긴 하지.

‘그래도 왕세자는 왜 거절을 안 한 건지 모르겠네. 저 정도 급이면 빠져나가도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사는 새로 들어오는 이들을 구경했다.

교황령에서 온 마법사와 호엔촐레른 한 명이 적당한 간격을 가지고 따라 들어왔다. 친황제파 노선을 타지 않은 쪽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들려왔다.

‘저 호엔촐레른이야말로 그냥 사퇴서 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남아 있냐.’

생각에 잠긴 채 무대를 보고 있던 마법사가 새로 들어온 누군가를 보고 굳었다.

‘나왔다.’

루카스 아스카니엔.

그림자에 가려 있던 그의 얼굴이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그 순간,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함성 소리가 그쳤다.

“음?”

마법사가 허리를 펴고 앉아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다. 아니, 멀쩡한 걸 넘어서….

“생각보다….”

동료 역시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니, 이 친구뿐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일 테다. 아스카니엔이 들어오면서부터 저 구인류 좌석까지 모조리 조용해졌다.

반감 탓에 의도적으로 응원을 줄인 건 아니었다.

당황한 관중은 꼭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잊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때, 다른 학생들이 그랬듯 표정 없이 굳은 얼굴로 들어오던 아스카니엔이 무언가를 보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그는 다시 평정을 찾고, 아까처럼 담담한 얼굴로 호엔촐레른 옆자리에 멈춰 섰다.

맨 처음의 거대했던 함성은 다음 차례가 돌아와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장 마법사 자신만 해도 차기 바덴 대공과 융커 출신 둘이 아니라 루카스 아스카니엔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플레로마라면 응당 악인처럼 생겨야 할 것 아닌가? 눈앞의 학생은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이 생각나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실 마법사 연합회의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도자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플레로마?’

직접 보니 플레로마고 뭐고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건조한 표정의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을 보는 것 같았다.

옆자리에서 동료가 아직도 평정을 찾지 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제대로인데?”

“제대로 사는 사람처럼 생겼다고?”

“아니… 이게….”

동료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심정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상이 완전히 깨져 버리자 마법사는 왜인지 다른 곳에서 편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허우대 멀쩡한 사람인 줄 몰랐지만—막연히 뭔가 이상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어딘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유별난 요소가 있을 테다.

왜인지 그래야만 지난 10여 년간 믿어 왔던 그 플레로마 소문이 약간은 신빙성 있는 소리라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례가… 이제 마법 좀 보여 주고 연설하는 걸로 아는데.’

똑바로 된 놈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장이다.

황제가 그들에게 경례하자 그들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황제가 경호를 받아 내려간 뒤, 가운데 섰던 루카스 아스카니엔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가 허리춤에 찬 완드를 뽑아 팔을 앞으로 뻗어, 완드를 한 손으로 끝까지 쓸었다. 완드가 황실의 스태프로 변한 순간 아스카니엔이 그것을 한 바퀴 가볍게 휘저었다.

콰앙—

스태프 끝의 독수리 장식으로부터 시작한 마력이 햇빛을 받아 불처럼 반짝이며 스태프를 집어삼켰다. 마력이 만든 파공음이 마치 폭발음처럼 들렸다. 그 마력이 희미하게 이 먼 거리까지 닿았다.

‘힘을 거의 들이지 않았는데….’

위력이?

마법사가 눈가를 좁히며 그 광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역시나 아스카니엔답게 마력량이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단순 마력량뿐 아니라, 컨트롤 실력으로 보아서 초심자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마력은 분명 좋은 재능이지만, 다루기 어려운 재능이기도 하다. 마력량이 지나친 마법사들은 그것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컨트롤에 집중하느라 팔에 힘이 좀 더 들어간다든지.

그러나 그는 마치 공기를 다루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가진 상황에서는 그런 사소한 디테일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낸다. 황실 마법사로 활동해 온 시간이 길었던 그는 알 수 있었다.

“…어어!”

“어!”

그가 불 같은 마력에 휩싸인 스태프를 양손으로 잡자 곳곳에서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것이 마력이라는 건 알지만 붉은색 마법은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으므로 모두에게 불처럼 받아들여졌다.

곁에 선 여섯 마법사들이 완드를 뽑아 하늘에 겨누었을 때, 아스카니엔이 스태프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굉음 속에서도 확성 마법이 걸린 차분한 목소리가 군중에게 분명히 들려왔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그가 스태프에 마력을 흘려보낸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선 자리에서부터 붉은 마력이 훅 퍼져 나갔다. 마법사의 얼굴에 거센 바람이 닥쳤다.

“…!”

마법사가 눈을 크게 떴다.

바람 탓이 아니었다. 하늘이 깨진 것처럼, 위에서부터 햇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마력이 쏟아져 내렸다.

마법사가 동료를 바라봤다.

그도, 다른 황실 마법사 연합회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것을 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마력임에도 신력같은 깨끗함이 느껴졌다.

[강건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마법사는 불길이 제가 앉은 자리를 헤쳐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예상은 다시 한번 박살 났다.

그의 목소리는 멀쩡했고,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 또한 없었으며, 아직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긴 하나 마법 역시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에는 여전히 반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남아 있었으므로 아직 긍정적인 인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

이상하게도 주관 없이 관성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거부감만큼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아스카니엔이 스태프를 거두었다. 다채로운 불길에 집중하고 있던 군중 속에서 어디선가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그 뜻밖의 반응에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허.’

플레로마는 무슨, 그 정반대의 인간상을 꼽으라면 저런 느낌이 들 것만 같아 마법사는 이제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헛웃음 쳤다.

그러는 동안 아스카니엔은 이제 세 발자국 앞으로 나아왔다.

그가 완드를 휘둘러 확성 마법을 걸고서, 익숙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신민 여러분.]

“…….”

마법사는 귀를 의심했다.

손뼉 소리가 앞자리부터 시작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시작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아스카니엔이 그 호응에 부드럽게 미소짓더니, 적당한 타이밍에 손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처음 만납니다. 황실 마법사연합회의 일원이 되어 프리드리히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 여러분을 직접 만나 감회가 새롭습니다.]

당황하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는다.

정치인이 아님에도 이미 정치 생활을 해 본 것만 같은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통치가문 출신이다 이건가.’

여전히 꺼려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상황을 휘어잡는 힘이 느껴졌고, 그 힘에 어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신기하네.”

옆자리에서 동료가 무언가를 구경하는 듯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마법사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걸 끝으로, 그들은 이어지는 아스카니엔의 연설에 집중했다.

* * *

내 연설이 끝나고, 우리는 축사 지옥에 빠졌다.

마법부와 제국1교육원, 제국2교육원의 축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물론 지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호감도 49500 달성 성공!

호감도 49510 달성 성공!

체계는 내 앞에 호감도 창 좀 그만 띄워라. 제안 끝났잖아….

나는 정신력이 탈탈 털리고 있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다행히 내 나이가 한 자릿수일 때부터 표정 관리하는 데에는 도가 터 있었기에, 아직 내 정신력이 털리고 있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없어 보인다.

‘대체 어디까지 의외일 건데.’

내 원래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었지만, 뭐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의외라고 호감도를 하나씩 던져 주니 내 입장에서는 이래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포인트를 얻고 나서 잽싸게 매력 특성을 올린 덕도 있다. 많은 사람 앞에 설 기회가 그리 많지 않으니, 이럴 때 쓸어담아야지.

제국1교육원과 2교육원의 장황한 축사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출범식에서 남은 건, 황실 마법사 연합회장의 배지 수여식과 우리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다음으로, 배지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저 사람들 안 피곤한가.’

나는 저 멀리까지 서 있는 청중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벌써 행사는 3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살면서 실제로 보기 어려운 왕족들이 나오기 때문인지 이미 번호표 뽑아서 가둬 둔 탓인지 그들은 여전히 제대로 서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나는 아까 내가 들어왔던 문을 흘끗 바라보고 친구들을 바라봤다. 나르케의 표정에 황당함이 녹아 있었다.

왜 그러나 궁금해할 새도 없이,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트 호엔촐레른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

연합회장은 어디가고?

그 순간, 열린 문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델베르트와 같은 레몬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

내가 헛것을 들은 게 아니었다.

엘리아스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사전에 전달받지 않은 사항이라 그런지, 레오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어?!”

“와아아아아—!”

우리와 달리 국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오늘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지 않던 왕족을 운 좋게 보았으니, 당연했다.

황태자가 나를 흘끗 보고서 미소짓고는 무대 맨 앞의 발표 장소로 나아갔다.

어쨌거나, 지금 이 인간이 왜 나오냐고 따질 상황은 아니다.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친애하는 신민 여러분. 우리는 이 자리에서 국가 발전과 안전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마법사들의 출범식을 영광스럽게 기념하고자 합니다.]

황태자가 짧게 연설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들은 축사 중 제일 짧았다.

[…마지막으로, 신인류와 함께 우리 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는 모든 신민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더욱 발전된 제국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가 잠시 청중의 환호 소리를 듣고는, 수행원이 든 상자에서 배지를 뽑아 레오에게 다가갔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한 자리에 설 때마다 시간이 꽤 걸렸다.

레오와 나르케 차례에서는 그냥저냥 평범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엘리아스 차례에서 우리는 그에게 나오는 살기를 정리하려 애써야 했다.

그리고, 네 번째.

내 순서가 되었다.

황태자가 차음 마법을 걸고 말했다.

“일주일만이지요?”

시작부터 아는 체할 줄 알았다.

나는 입 모양을 읽히지 않게끔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예.”

그가 내 옷차림을 휙 훑어보고는 덕담이라도 건네듯 말했다.

“내 두 번째 선물은 잘 활용하고 있는 듯해 기쁘군요.”

두 번째라.

첫 번째가 다니엘이었던 건 알지만, 두 번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다.

에스체트의 황실 입성은 그의 짓이겠다.

나는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신민들은 이제 당신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는데, 그건….”

“…….”

“자네가 니콜라우스 경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겠지? 어떻게 해야 대중을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할 수 있는지 제국에서 제일 아는 자인데 실패할 리가 있나.”

황태자가 니콜라우스에게만 쓰던 말투로 여유롭게 말했다.

순간, 그가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1m 밖에 서 있던 친구들이 나를 바라봤다. 황태자가 내 마력 탓에 온통 흐트러진 제 마력을 정리하고서는 천천히 손을 떼며 웃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이지? 자격 논란이 아직도 계속되는 걸 알 텐데.”

“이 선택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직 어린 레오나르드 왕세자에게 넘기기에는 이미 완성된 인재인데, 우리 호엔촐레른이 왜 이 기회를 놓쳐야 할까.”

뭘 넘기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날 말하고 있다는 건 뻔한 사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차피 나는 왕국 소속이다. 상관의 나이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자네 팀에는 신력을 꼭 주교급 이상으로 써대는 자도 하나 있지. 이참에 왕세자도 호엔촐레른의 아래에 넣고, 우리 소중한 사촌동생도 있을 자리로 돌아오고. 바덴의 차기 대공도 가질 수 있는데… 자네라면 놓칠 것 같은가?”

“…….”

그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미꾸라지 둘 때문에 모든 걸 버릴 수는 없지.”

이제 와서는 윤곽이 보인다.

하이케 아인시델을 7위로 넣는 짓을 누가 했는지 알겠단 말이다.

“그렇게 부를 거면 아인시델은 왜 통과시켰습니까?”

“내가 그런 명령을 줬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

그럼 네 짓이 아니다?

나는 말 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주위에 선 친구들이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미소를 지었다.

“왕세자궁 3층, 서고 옆 방. 날 만나러 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겁니다.”

왕세자가 내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 내 옆의 체링겐에게 넘어가며 말했다.

“이따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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