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212화 (212/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12)

출범식은 30분 뒤 끝이 났다.

이제는 황궁에서 진행되는 축하연이 있을 차례였다.

끼이익— 쿠웅—

[와아아아아….]

10만명이 만들어 내는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등 뒤에서 점점 희미해졌다.

친구들은 마치 거사를 끝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숨 돌리기도 전에, 울리케가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빨리! 빨리 뛰어가!”

“…….”

“하하, 이제 곧이긴 하네. 분장만 하면 시간 다 가겠어.”

체링겐이 웃으며 말했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30분 뒤면 연극 공연이다.

우리 동아리는 예술제 날, 최우수 팀에 뽑혀 황실에서 공연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게 오늘이었다.

“괜찮아. 이미 하고 올라온 거라 시간은 충분해.”

연극식 분장은 부담스러웠기에 21세기에서 카메라 앞에 서던 대로 받았는데, 그 탓에 체링겐은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듯하다.

어쨌거나 이것이 오늘 있을 마지막 호감도 수급 기회다.

‘사실 여기까지 해야 10,000점을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10,000은 무슨.

이제 50,000점이다.

나는 지금도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는 호감도 창을 밀어내며 생각했다.

‘이렇게 된 거 10만 찍자.’

그냥 찍자고. 이 체계가 계속 내 앞에 호감도 창을 띄우는데, 당황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그냥 즐겁다….

연극 관객으로는 출범식에 참석했던 10만 명 중 딱 1만 명만 남으니, 남은 5만점의 호감도를 이 1만 명에게 얻어 내는 거다.

인당 5점씩만 올려도 되겠다. -5였으면 0점으로 말이다.

‘여기까지만 하면 자유다.’

이제 막 제안을 끝냈으니 당분간 비슷한 제안은 안 보겠지. 이놈도 축하연 끝나고 나면 실시간 호감도 창을 띄우지 않을 테고.

‘그나저나….’

나는 호감도 창을 날리고 엘리아스를 바라봤다.

울리케처럼 들떠 있어야 할 엘리아스는 차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친황제 노선을 타지 않은 자들에게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가 평범치 않았다.

엘리아스가 지난 10월 연방위원회에서 메펜의 오염 모기 사건을 해결한 뒤 처음으로 가지는 공식 석상이었다. 그동안 쌓인 지지도를 황제와 황태자에게 확인시켜 주었으니, 마음이 편할 수 없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엘리아스가 빙긋 웃었다.

평소처럼 체통 없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하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복도 하나를 건너 가자, 사용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아스카니엔 님.”

이제 대기실로 이동해야 한다는 걸 알았는지 울리케가 웃으며 말했다.

“기대할게! 네 로잘린드 진짜같아서 또 보고 싶었는데, 신난다~”

“나도.”

하이케 아인시델이 늘 그렇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나르케를 바라봤다. 그가 나와 친구들을 번갈아 보며 장난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비밀이야.”

나르케에게 그렇게 당부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만큼은 잘 지키는 놈이다.

안심하고 뒤돈 순간,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알림음이 다시 들려왔다.

띠링—!

〈 Chapter 6. 올바르게 행하고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라 〉

제안 3: 기한 내 에스체트 호감도 +12 (0/12) (167시간 59분 59초)

* Route 1 — 〈 Chapter 6 특별 보상 〉

* Route 2 — 〈 제안 4 〉

* * *

“비밀이야.”

루카스는 나르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사용인을 따라갔다.

그로부터 20분 뒤.

이제 연극 시작으로부터 10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뭐가?’

뭐가 비밀이지?

공연장에 들어온 울리케는 턱을 괸 채 에스체트에게 할당된 좌석에 앉아 있었다. 만 명의 열기가 이 3층짜리 공연장에 느껴졌다.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니까.”

뒷자리, 우리 학교 학생들의 기대 가득한 반응이 공기에 맴돈다.

다들 이유는 똑같을 것이다. 루카스의 연기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으니까. 비록 공연은 저번에 보았던 ‘당신 뜻대로’지만, 이전에 본 로잘린드가 뇌리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걸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벌써 즐거웠다.

‘카메라 반입 안 되는 게 아쉽다.’

그래도 이전에는 한 장 찍어 놨는데, 루카스가 그날 연극 사진을 찍어 갔던 사진부에 들이닥쳐 필름을 전부 찢어 버렸다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괴소문을 듣고 나니 그날 찍은 연극 사진을 줄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주지도 못할 거 찍어 봤자 의미가 없긴 하다.

생각을 마친 울리케는 옆자리에 앉은 레오에게 말을 걸었다.

“반장 너도 전에 루카스 공연 봤나? 파우스트는 당연히 봤을 거고.”

“봤어.”

내내 관심 없는 눈을 하고 있던 레오는 이번에도 간단히 답했다.

‘무뚝뚝하기는.’

루카스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서늘해진다.

“어땠어? 연기 진짜 잘하지 않아? 진짜 로잘린드 같아서….”

“180 넘는 로잘린드는 처음 보네.”

레오의 빈정거림에, 울리케가 속으로 팀 활동의 운명을 걱정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관객석의 조명이 모조리 꺼졌다. 이제 공연장은 암흑뿐이었다.

‘헉.’

떨린다.

울리케가 당장 반대쪽 옆의 율리아를 붙잡아 기대평을 줄줄이 늘어놓고 싶은 심정을 누르고 나름대로 점잖게—본인 생각이었다—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엘리아스는 루카스와 놀 때가 아니면 황궁에서는 늘 조용했기에 오늘도 마찬가지였고, 율리아와 나르케는 그래도 꽤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레오는 아까부터 쭉 차가운 표정이었다.

저쪽은 루카스를 좋아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이제 같은 팀인데~ 조금만 살갑게 대해 주지.’

기질이야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플레로마 사상도 갖고 있지 않은 듯한데. 게다가 그 기질마저도 이제는 나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저렇게 탐탁지 않아 하다니.

‘이따 끝나면 루카스 상심하지 않게 나라도 제대로 호응해 줘야겠다.’

그때, 막에 조명이 쏘였다. 황가의 문장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곳곳에서 들려오던 작은 속삭임이 완전히 그쳤다.

고요함 속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은 채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덤.]

“…?!”

울리케가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내가 잘못 들었나? 이건 남자 주인공 격인 올랜도의 대사다.

그런데 지금 내 귀에 들려온 목소리는 루카스의 것이었다.

탁—

조명이 켜져, 분홍색 눈동자가 그 아래서 빛났다.

‘어어어?!’

이번엔 로잘린드가 아니다. 그는 올랜도 차례에 무대에 나와 있었다.

‘아니, 저번까지 여자 주인공이었는데 이제는 남자 주인공을 맡는다고?’

대본을 두 개나 외운 거야? 왜 로잘린드는 다시 안 하고?

울리케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루카스의 머리칼에 고정했다.

배역도 배역인데, 지금 또 놀라운 것이 있었다.

그의 머리칼이 잿빛 금색이었다.

이 나라에 널리고 널린 게 저런 어두운 금발이긴 하지만, 매일 검은 머리로 살던 친구가 머리를 바꾸고 온 걸 보니 새로웠다.

옆자리의 하인 배역을 맡은 배우도, 객석도 아닌 어딘가를 보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님께서 유언으로 1,000크라운을 내게 남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내 형 올리버에게 날 잘 키워 달라고 부탁하셨지요. 축복을 받고 싶다면 말이에요.]

울리케의 머리가 혼란으로 가득 찬 상황에, 루카스의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게 내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걸.]

하인 역을 맡은 학생과 적당히 떨어져 선 루카스가 이제는 객석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힘이 들어간 그의 손짓이 미묘하게 신경질적인 동작을 만들어 냈다.

[형은 작은 형 제이퀴즈를 대학에 보내 주었는데, 듣기로 작은 형의 성적이 꽤 훌륭하다 하덥니다. 반면 형은 나를 시골뜨기처럼 집에 묶어 두고 있지요. 자세히 말하자면 집에 내버려 둔 채 방치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나처럼 가문 있는 신사에게 마땅한 대우입니까?]

객석을 보던 올랜도가 다시 하인을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그가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외양간에 갇힌 황소나 다를 바 없습니다. 큰형이 타는 말이 차라리 나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걸 아시겠지요. 그것들은 잘 먹어서 번질번질하고, 길들이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기수까지 고용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명색이 동생인 나는…!]

나는?

울리케는 이미 한번 보았던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올랜도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중얼거리면서 시작해 점점 격앙되어 가던 말이 그치고, 그의 시선이 다시 우리에게 향했다. 억울함을 주체하지 못해 하인에게 따지는 듯한 그 몸짓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런 것도 없이 형 밑에서 몸만 커질 뿐이지. 이따위 혜택쯤은 쓰레기통을 뒤져 먹는 가축도 받고 있습니다.]

‘어.’

올랜도의 서늘한 목소리와 눈빛이 몸을 꿰뚫는 것처럼 보여,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떤 울리케는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울리케는 박수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이전에 다른 올랜도의 공연을 보아서 그런지, 쾌감이 느껴졌다.

‘이 부분 저번에 1학년 후배가 했을 때는 많이 화난 말투였는데.’

루카스의 올랜도처럼 중간에 쉬지 않고 계속해서 감정이 깊어지는 형태였다.

그때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강세를 이전보다 앞에 두고, 모인 집중을 잔잔한 말로 한번 빼내니 오히려 올랜도가 느끼는 감정이 더 풍부하게 와닿았다. 억울함과 비통뿐 아니라 다음 행동이 있으리라 예상케 하는 복수심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내용이 아직 단 한 줄도 없는데도.

초반인 만큼 이런 시도를 했다가는 괴리감만 늘어날 법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목청은 급격한 변화 없이 여전히 컸기에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과해지지 않기 위한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왜 우리 학교 연극부 황실 왔는지 알겠다.”

매너가 아님에도 뒷자리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리케는 그 말에 내심 동의하며 올랜도의 대사에 다시 빠져들었다. 올랜도는 다시 아까 같은 뚜렷한 강세를 주지 않고, 아까의 톤을 유지하며 약간의 변화만을 주고 있었다.

[주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자연이 나에게 주신 것마저 빼앗을 낌새가 보입니다. 가문 사람 대우는커녕 자기 하인들과 함께 식사하게 하고, 나를 가능한 천박하게 길러 선량한 천성을 짓밟아 부수려 들고 있습니다. 애덤, 나는 이게 슬프단 겁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은 내 정신이 지금의 노예 같은 대우에 반항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요.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이걸 피할 수 있을지, 좋은 방법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저기 제 주인님. 도련님의 형님께서 오십니다.]

하인의 말이 시작되자 울리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인 역을 맡은 학생의 연기가 모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올랜도의 독백에서 빠져나오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올랜도는 하인에게 손짓하며 무대 끝을 가리켰다.

[자, 애덤. 저리 서 계시지요. 형님께서 나를 어떻게 모욕하는지 어디 한번 지켜봅시다.]

로잘린드 때도 완벽히 로잘린드 같다고 생각했고, 그가 아닌 로잘린드는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라 다른 배역 따위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틀렸다.

‘볼 때마다 제일 잘 어울리는 배역이 바뀌네.’

다만 이번에는 왜인지 더 강렬한 장악력이 느껴졌다. 올랜도의 대사가 모두를 압도하고 상대역이 아닌 배역마저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그 탓에 다른 이들의 연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카스 아스카니엔의 흔적은 껍데기뿐이고, 내가 지금 마주한 사람은 올랜도다. 올랜도라는 배역이 아니라 형을 피해 아덴 숲으로 도망칠 귀족가 청년을 보는 것 같았다.

울리케는 루카스에게 눈을 고정했다.

돌아가서 묻고 싶은 것이 수두룩하게 생겨나고 있었다.

* * *

호감도 +95,410 달성!

호감도 +95,420 달성!

호감도 +95,430 달성!

연극은 정말이지 최고의 수단이다.

대사를 읊던 중 한방에 300점이 올랐을 때는 대체 뭘 보고 그러냐는 생각 탓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이득이니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이제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커튼콜까지 마치고, 나는 대기실로 돌아와 눈앞에 뜨는 하얀 글자를 읽었다.

제안 3: 기한 내 에스체트 호감도 +12 (1/12) (167시간 59분 59초)

‘장난하는 건가?’

호감도 지옥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우리 팀원 일곱 중 여섯에게서 12점의 호감도를 얻어 내야 한다.

연극을 하던 중 누군가 1점을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11점이나 남아 있다.

12점이라고 하니 굉장히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팀원들 호감도가 전부 양수니까.’

별 접점이 없었던 울리케 클라이스트까지 모조리 양수다. 의외성만 가지고 1점씩 던져 줄 대상이 아니다.

나르케와 레오와 엘리아스의 호감도는 올해부터는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의 태도를 숫자로 판단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왠지 좀 미안하기도 하고.

게다가 이 셋의 호감도는 이미 천장 가까이 찍었을 테니, 이번 제안에서 고려할 수 없다.

‘…그러니까 값이 낮은 사람들부터, 일단 율리아랑 울리케 공략하는 걸로….’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략이라니? 친구들에게 무슨?

안 돼. 벌써 익숙해져 버렸다.

나는 뺨을 착착 치고 심호흡했다.

‘일단 율리아와 울리케, 그 둘과 좀 더 친밀해지는 걸로 하자.’

물론 여기도 문제는 있다.

그들의 호감도가 +5짜리라고 하면,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는 +7~8쯤이라 봐야 한다. 현재 그보다 더 낮다면 일주일간의 최대치는 +5가 되겠고.

정말 사람 마음에 관련된 문제라, 지금 호감도가 0점이라고 해서 그에게서 10점을 뽑아낼 수 있다고 여기면 안 된다.

그러니 과연 둘에게서 11점이나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 봐야지….’

헛웃음이 절로 난다. 팀원들의 환심을 사는 게 대중의 환심을 사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고 부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검은색 덩어리들이 눈앞에 보였다.

“어.”

“루카스! 진짜 올랜도 같았어! 진짜!”

물개처럼 손뼉을 팍팍 치며 눈을 빛내는 울리케가 눈앞에 있었다.

최우선 공략 대상… 아니, 친밀해져야 할 대상을 이렇게 바로 마주친 것도 놀라웠지만, 세상에 박수를 진짜 저렇게 치는 인간이 있구나 싶어 그 부분에서도 살짝 놀라웠다.

엘리아스가 내 어깨를 불쑥 잡으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루카! 나한테는 말해 줬어야지~?”

“재밌었어. 아, 나도 연극부 들어갈까?”

나르케가 웃으며 말했다. 그나마 엘리아스는 본래의 장난기를 좀 찾은 듯했다.

울리케가 그 둘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이래서 나르케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랬던 거구나~ 로잘린드 아니어도 진짜 멋졌어! 봤는데도 또 보고 싶더라.”

“그랬어? 고마워.”

그렇게 웃으며 말하고 나서, 나는 진한 현타를 느꼈다.

나도 모르게 연기했기 때문이다.

내가 울리케의 호감도를 따내려는 걸 알아차렸는지, 나르케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그렇게 웃어댈 거면 호감도 주고 웃어라….’

나는 그 말을 누르고 울리케에게 미소 지었다.

연회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울리케는 계속 옆에서 중얼중얼댔다.

그와 친밀해져야 할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연회장 문이 열리기 직전, 울리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루카스. 우리 축하연 끝날 때까지 계속 마시기로 했는데 너도 그럴 거지?”

좋지. 호감도를 얻으려면 계속 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울리케와 친해지는 것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아, 난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들를 곳?”

“어. 그거 끝난 다음에 마시자.”

* * *

연극을 하는 동안 이미 해가 져서, 이제 황궁은 전에 왔을 때처럼 어둑어둑했다.

왕세자궁까지 걸어 도착한 나는 그 정문에서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그들이 내 머리칼을 의심스럽게 한번 보고는, 내 눈동자를 빤히 보다 몸을 옆으로 돌렸다.

“환영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루카스 아스카니엔이 찾아올 거라고 말해 뒀겠지.

나를 식별할 도구가 내 눈동자 색이라니, 헛웃음 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전에 왔듯이 푸른 기가 도는 이 왕세자궁에는 사용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 장화에서 나는 굽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궁을 한번 둘러보고는 계단을 향해 걸었다.

의구심이 가시질 않는다.

‘굳이 아인시델 가문 놈을 팀에 넣다니.’

아브라함은 플레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플레로마에 아인시델이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아인시델은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높으니—아인시델 가문에서 우리는 그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이 경우 제레마이야 때 썼던 논리처럼 구인류 모계 측이 아인시델이었을 가능성과 방계 중에서도 직계의 사진첩에 들어가는 것이 어색할 만큼 아주 먼 친척이라면 우리가 그 증거를 찾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된다—그의 혈연을 거둬 아인시델에게 협박할 심산일지도 모른다. 보통 인간이라면 자기 친족이 자기 때문에 해를 입는 걸 즐겁게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플레로마도 감정이 있으니까.’

그때 만났던 의원 플레로마가 강력한 예시다.

또, 플레로마 아인시델이 베르너 스트라우치의 죽음에 집착하며 나더러 스트라우치가 돼라 말했던 것을 보면, 제것에 대한 애착이 굉장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니 첫째로, 피를 공유한 하이케는 꽤 괜찮은 협박 도구가 될 수 있을 테다.

이건 하이케와 플레로마 아인시델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아브라함은 내가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둘째.

하이케 아인시델의 ‘공략 불가능’은 내가 전에 추측했듯, 그가 장차 아델베르트보다 더 심한 악역이 되리라는 증표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내가 모르는 하이케 아인시델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고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전에 왔을 때와 달리 온통 하얀 모슬린 커튼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그 옆방 문을 두드렸다.

끼익—

문이 절로 열렸다.

책을 읽고 있던 황태자가 나를 보더니,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제 그는 아까의 예복 대신, 실내용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잘 어울리는군.”

“…….”

“아까도 생각한 건데, 거기서 말하기는 좀 그래서 말이지. 눈 색과 비슷해서 교복보다는 그게 더 잘 어울려.”

다짜고짜 이 이야기를 괜히 꺼내는 것은 아닐 테고. 괜히 생색내는 것처럼 평가하는 걸 보니 에스체트 옷도 이 자식이 맞춘 게 분명하다.

그가 내 넥타이를 빤히 보고 있기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을 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시군요. 언제까지 세워 두실 겁니까?”

“…하하하. 앉게.”

그때, 사용인 하나가 쟁반이 놓인 트롤리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황태자가 손가락을 튕겨 문을 닫았다.

“자네는 그 머리색이 마음에 드나?”

“들고자시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색깔일 뿐입니다.”

“그냥 색깔이라…. 난 자네를 위해 아직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연방기 색을 사용했는데 색에 대해 별 감상이 없다면 안타깝군.”

역시 이 새끼가 제복을 그렇게 맞춰 놨군.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행히 황태자는 알아서 말을 시작했다.

“에스체트의 황실 입성을 자네 평판을 고칠 도구로 활용하다니. 이제 10만 명의 관중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서 자네에 대한 이야기만 종일 늘어놓겠지. 꽤 괜찮은 확산 효과가 있겠어.”

“그렇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는 보람이 있으니 마음에 드는군. 그래, 이번 결과를 보고 형님께서는 뭐라 하시지?”

“…….”

아무것도.

형은 내게 세 장짜리 편지를 보냈다.

그것 외에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쓸 것이 참 많겠어. 자네의 안위를 걱정하는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군.”

쓸데없는 잡담을 할 때는 아니다.

이 정도면 오래 들어 줬다.

“하이케 아인시델을 왜 여기로 데려오셨습니까?”

“너무 급하지 않나? 일주일 만에 만났으니 좀 더 근황 이야기를 해도 좋을 듯한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전하께 공유해 드릴 만한 근황이 없습니다.”

“상처군.”

애냐?

내가 말없이 그를 빤히 보자, 그가 내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울리케 클라이스트를 7위로 강등시키고 하이케 아인시델을 6위로 올려 볼까 했지만 그런 점수 조작은 썩 예의가 아닌 듯하더군.”

음.

인정했다.

하이케 아인시델을 데려온 자가 황태자 자신이라는 걸 말이다.

“게다가 우리 대책본부 자문위원장께서는 학생들이 사지에 몰리는 걸 정말 싫어하시니, 나로서는 한 명 줄이는 것보다 한 명 더 채워 넣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자문위원장을 앞에 두고 하실 말씀은 아니군요.”

“아니네, 경.”

그가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맞잡고 몸을 소파에 푹 기댔다.

“여섯 명으로 팀을 꾸린다면 결원이 생길 경우 다섯만으로 플레로마를 처단하고 폭주자를 구제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좀 어렵지 않겠나? 결원이 생길 것에 대비해 일곱 명으로 만들어 두어야 한 명쯤 빠져도 4급 폭주자를 안전히 처리하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결원이 생길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는군요. 전하께서 꼭 결원을 만드실 것처럼 들립니다.”

“정확하군.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가 턱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자의 성씨가 문제라는 걸 말이야. ‘아인시델’이라. 플레로마 오스나브뤼크 교구의 교구장 주교 아닌가.”

아인시델에 대해 알고 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내 무표정을 관찰하더니 미소 지었다.

“역시 경도 아는가 보군. 내가 경을 내 손에 넣길 포기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아인시델 가문의 일족을 내 손에 넣을 기회를 포기할 수 있을까? 7등이나 했다면 정원 하나쯤 늘리는 건 일도 아니지.”

황태자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이건 플레로마의 교구장 주교를 잡을 좋은 미끼가 될 걸세.”

미끼라.

내가 아까 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이다.

“난 적어도 플레로마가 세상을 장악하길 바라지 않아, 경.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같은 편이지.”

“장악하길 바라지 않겠지요. 전하께서는 전하만의 교단을 만들 생각이니 말입니다.”

그가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싱긋 웃고는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하이케 아인시델과 플레로마 아인시델은 능력이 같지. 같은 고유능력을 가졌다는 건 그 둘이 꽤 닮은 마력과 피를 공유하는 친족이라는 뜻이야. 먼 친척이라 해도 어쩌다 닮게 나올 수도 있는 일이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차치하고….”

그의 눈이 흥미를 담고 내게 향했다.

“플레로마가 교구장 주교 아인시델을 왜 데리고 있는지 아나?”

“…….”

“그 기억을 읽는 고유능력 때문이네. 그 능력이 아인시델의 가치야. 똑같은 능력을 가진 인간을 플레로마가 놓칠 것 같은가?”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 바닥을 테이블에 대고 굴렸다.

“자네는 내게 피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지.”

“그래서.”

“자원을 끝까지 활용해야 하지 않겠나? 피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게 아니야.”

“그러니까 당신을 활용해라?”

그의 눈동자가 찻잔을 떠나 내게 향했다.

“그래.”

“…….”

“모든 성과는 경의 앞으로 돌려 주지. 마침 자네도 아인시델 가문의 똑같은 능력자가 참으로 미심쩍지 않았던가. 왜 미심쩍게 여기는지는 궁금하지만 묻지 않도록 하지.”

그는 나를 관찰하다 말을 이었다.

“이대로면 하이케 아인시델은 교구장 주교든 뭐든, 플레로마에 붙들려 갈 운명이야.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애는 이 세상에 두어 봤자 파멸을 만들게 되어 있단 말일세. 그러니….”

“본론부터 말하시죠.”

이어질 그의 말이 슬슬 예측된다.

그의 사고방식과 그의 능력으로 할 만한 짓은 단 하나다.

어둠 속에서 무서우리만치 밝게 빛나는 그의 황금색 눈이 살짝 휘어졌다.

마르코의 기억에서 읽었던 어린아이의 눈이 그에게 겹쳐 보였다.

“하이케 아인시델의 피를 가져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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