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16)
내 말에, 엘리아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신고해야지! 설마 장갑집착병 마법사한테 장갑 뺏겼다는 말하기 부끄러운 건 아니지?”
“아니야. 미친놈은 그놈인데 내가 왜? 어쨌거나 신고도 당연히 해야지. 내 말은 굳이 나르케까지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그럼? 왜 저걸 지켜보겠다는 거야? 나르케가 네게 사람하고 엮이지 말라고 했다며.”
오늘 아침, 나르케와 나는 대화했던 내용을 친구들에게 공유했다.
이런 건 재깍재깍 보고해야지 둘만 알아서는 안 된다.
“첫째로, 죄질이 약해 잡아넣기 힘들어. 나르케의 예언을 들은 우리 입장에서는 혹시 모르니 그 사람을 심도 있게 조사해야 할 것 같지만, 남들은 거기까지 몰라. 이 사건을 가지고 그자를 잡아넣어야 한다든가, 면밀히 조사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게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아.”
한마디로 ‘뭐 이거 가지고’ 상황이 벌어진단 말이다.
그자가 단순히 장갑집착병증이 있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나르케의 말대로 펜탈론까지 망치려는 범인이라면, 이 사건만으로는 거기까지 저지할 방법이 없다.
“…그럴 건수가 없긴 하네. 사실 생각해 보면 장갑 절도범도 그렇게 진지하게 찾아 줄 것 같지가 않아. 나르케의 예지를 말해 준다면 괜히 황실에서 나르케를 데리고 가서 어떻게 정보를 더 얻을 수 없는지 심문하려 들 것 같고.”
그렇다.
잡힌다 해도 금세 풀릴 것이다.
사람을 때린 것도, 귀금속을 가져간 것도 아니고, 장갑이야 모르고 가져갔다고 변명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적당한 건수를 잡아서 더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넘기거나, 정신조작마법을 사용해 정보를 터는 게 제일이다.
이때 문제는 내 안전인데….
“둘째로, 여기에 너희가 있잖아. 그것도 예지 덕분에 잔뜩 경계하고 있는 사람만 여섯이야. 예지를 듣기 전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사람과 안 엮이기는 글렀다.
이런 잡다한 검문 업무는 예고편 격의 업무에 불과하다. 우리는 적어도 개막식이 시작될 때까지는 이곳에 붙어 있어야 한다.
황실이 버젓이 여기서 일하고 있던 마법사 팀을 치운 뒤 우리를 경기장에 배치한 건 검문 때문이 아니라, 개막식 날 우리를 전세계 마법사 대표팀 앞에 내보이기 위함이었으니까. 나르케의 말로는 그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
엘리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이내 그가 눈을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
실수했다.
엘리아스가 내 양쪽 어깨를 붙잡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거의 인간에게서 듣기 어려운 소리를 냈다.
“우어어어엉….”
“이건 대체 뭔 소리지?”
“감동이야!”
“그래….”
분명 처음에는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친해지고 나니 이런 모습만 보게 되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 그저 웃으며 놈을 떼어냈다.
신고는 일사천리였다.
그들은 별것 아니어 보이는 문제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철저히 조사했다.
알렉스 뮐러는 지하 식당의 새 매니저가 아니었고, 식당에서는 매니저가 바뀐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신분증에 있던 정보를 모조리 상부에 넘겼으니 이제 알렉스 뮐러는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추측하기로 출입 통제는 별 의미 없는 짓이겠지만….’
수사국과 경찰에서 테러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사소한 것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확답을 듣고 나왔으니, 일단은 그것만으로 괜찮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그날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 * *
“네가 나랑 다시 훈련하자고 할 줄이야.”
그날 저녁, 나는 체링겐과 오랜만에 훈련했다.
체링겐이 웃으며 검을 다시 완드로 바꾸었다.
프림로즈 패스를 헤집고 다닐 때부터 3차 준비를 할 때는 훈련할 시간이 없었기에, 최근에는 그와의 주말 훈련이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체링겐과 훈련을 했느냐.
‘제안 끝내야지….’
그의 성향이 레오와 유사한 면이 있기에 그랬다. 레오가 좋아하는 것을 체링겐도 좋아할까 해서 한번 실험해 봤다.
‘역시 레오만큼 훈련에 목매는 놈은 아니야.’
그래도 기본적으로 마법이라면 즐겁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체링겐이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대련하니 좋네. 그새 실력이 더 늘었구나.”
“너도.”
깔끔하다.
눈을 뜨지 못할 때까지 몰아붙이는 레오와 달리 체링겐은 사람 사이의 예의를 갖추고 훈련에 임하니까.
물론 레오의 그런 스타일 덕분에 실력을 올릴 수 있었으니, 좋게 생각한다.
체링겐이 눈썹을 올리고 웃었다.
“아, 나도?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니 다행이야.”
그도 오늘 진을 다 뺐는지, 훈련장 한쪽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를 따라 그 주위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자, 체링겐이 가벼운 주제를 꺼냈다.
“오늘 사람들 악수 진짜 많이 하더라. 거의 쉰 번 한 것 같은데. 루카스 넌 몇 번 했어?”
“일곱 번인가.”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체링겐은 이제야 내 소문을 의식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는 대신 웃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루카스 넌 나랑 매일 악수해야 하는데, 벌써 많이 해 버리면 질리잖아.”
“매일?”
“응.”
체링겐이 내게 손을 펴 내밀기에 나는 그 손을 가볍게 쳤다. 그가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물병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같은 팀으로 활동할 줄이야. 작년 2학기까지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마실래?”
“괜찮아. 그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가 가볍게 웃으며 물을 마셨다.
새로 팀이 되어 친구 관계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는 시기가 됐다. 그전까지는 ‘뭔가 많이 바뀐 반 친구—반 우등생 친구’ 정도의 인식이었다면, 이제는 졸업 때까지 동고동락해야 하는 친구가 됐다.
시기를 이용하기에 딱이다.
“율리아.”
“응?”
“앞으로도 자주 같이 훈련하자. 네게 배울 점이 많아서 도움이 많이 됐어.”
띠링—!
호감도 +1
“…!”
율리아 체링겐
호감도 +5 [공략 가능 (3단계/5단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3이었는데, 그새 1점을 주고 오늘 또 줬다.
나를 바라보던 체링겐이 미소 지었다.
“그래, 좋아. 네가 훈련하고 싶을 때마다 불러.”
“고맙다.”
내 말의 어디가 호감도를 줄 만한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괜찮은 제안이었나 보다. 나 역시 체링겐의 정석적이면서도 레오와는 미묘하게 다른 그 스타일을 체득할 수 있으니 환영이다.
문제는 요새 친하지 않은 척하느라 레오와도 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인데… 그놈에게는 뭐라 말하지.
답은 간단했다.
‘말하지 않으면 된다.’
어차피 여전히 내 훈련 파트너는 레오다. 놈에게 쓸 체력만 제대로 준비하면 놈도 뭐라 하지는 않겠지.
뭐 어쩔 거냐. 내가 두 탕 뛰겠다는데.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는 나르케가 있을 방으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호감도를 1점 따냈으니, 이제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되짚을 차례였다.
‘별 미친놈이 다 있다.’
온종일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아까는 나르케를 닦달해 정보를 뜯어내려 했으나 나르케는 오늘 겪은 일, 그것이 그자의 진짜 목표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장갑에 남은 무언가를 채취하려는 것이냐 물었지만 그렇게 번지는 미래는 읽히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내 장갑을 가져간 이유로 남는 건, 나르케가 역겹다고 했던 대로 뭔가 비정상적인 생각이 될 뿐인데….
‘그게 진짜 목표일 리가 없는데.’
고작 나랑 맨손으로 악수하고 장갑 훔쳐 가는 게 펜탈론까지 위협할 불씨다?
그럴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신고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붙잡아 심문할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거지만, 상식적으로 이 일이 펜탈론을 망치는 일로 번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나르케의 도움을 받아 방으로 돌아온 나는 노트에 알렉스 뮐러라는 이름부터 시작해 오늘 본 인상착의와 행동을 정리해 열 가지 가능성을 추린 뒤, 자정이 되어 잠에 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뭐야.”
잠에 든 지 30분쯤 지났을까, 나는 누군가 내 손을 붙드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방금까지 은은한 스탠드 불빛만 들어와 있던 방이 완전히 환해졌다.
“어? 엄청 빨리 왔어.”
나는 내 방에 있었는데 웬 엘리아스 목소리?
몸을 벌떡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여기저기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에스체트 팀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어제 봤던 나르케 기숙사와 닮은 분위기였는데, 곳곳에 놓인 물건으로 보아서 레오의 방인 듯했다.
“뭐야?”
“활동 첫날 무사히 끝낸 기념~”
한 3시간 전에 봤던 율리아가 술병을 가리키며 웃었다.
“루카스 너만 기숙사가 다르니까, 아쉬워서 반장한테 데리고 와 달라고 했지.”
소파에서 이불을 둘둘 감싸고 있던 울리케가 들고 있던 술잔을 내게 주며 말했다.
반장? 레오가?
그를 바라보자 레오는 울리케에게 짜증 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연기는 잘하고 있는 듯해 다행이다.
“딱 한 잔씩만 하자. 내일은 5시부터 나가야 하니까, 절대 취하면 안 돼. 특히 엘리아스, 알겠지?”
율리아의 당부에 엘리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술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한테만?”
“하하, 왠지 너한테는 한 번 더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들이 뭐라 대화하든 나는 지금 어이가 없기만 했다.
‘어처구니….’
이러려고 날 끌고 온 건가. 그래, 이들은 아직 신나 있을 때지.
안 그래도 일할 때는 마주칠 시간이 없으니 여기서 호감도 좀 따고 가야겠다.
술을 받아 온 나는 소파 한 구석에 앉은 울리케 옆에 앉았다.
“술 마시는 거 좋아해?”
“응. 넌?”
나는 그의 잔에 가볍게 잔을 맞대고 대답했다.
“나도야. 앞으로도 종종 같이 마시자.”
“의외네~ 루카스 너 술 안 마실 것처럼 생겼는데.”
“그래? 아냐, 너희랑 같이 마시는 건 좋아.”
“이야, 진짜 너 작년이랑 완전 다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루카가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내가 지금껏 그를 대신해 쌓아 왔던 것에 적응할 수 있게 제대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그러고보니까 엘리아스가 널 루카라고 부르더라? 나도 그렇게 부를래!”
“그러….”
“아아아아!”
멀찍이 율리아와 대화하던 엘리아스가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이걸 어떻게 들었으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굳이 말만 늘여봤다 나만 귀찮아질 뿐이다. 나는 그 사자후에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안 된대.”
“그래? 그럼 그래. 자주 쓰는 이름 또 있어? 내 본명은 울리케 루이제 마르가레테인데, 어릴 때는 루이제를 자주 썼거든.”
이름 엄청 기네.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기에 놀랄 처지가 못 된다.
나도 그렇고.
상태창의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이라는 이름은 서류에 올라가 있는 루카 이름이 아니며, 루카의 풀네임은 루카스 카를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아스카니엔이다. 전부 아스카니엔의 조상 이름인 것으로 안다.
“자주 쓰는 건 없어. 왜? 별명으로 부르고 싶어?”
“어. 특별하잖아~”
“음….”
엘리아스가 시선을 계속 우리 쪽에 두고 있었기에, 내 풀네임을 알려 줄 수는 없었다.
“딱히 별명으로 만들 만한 건 없네. 내가 널 루이제라고 부르는 건 어때?”
“…….”
띠링—!
호감도 +1
‘진짜냐….’
좀 더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표시가 되어서 그런가.
에스체트 중에서 하이케 다음으로 호감도가 낮아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쉽게 주는 편에 속한다.
현재 호감도 좀 볼까.
울리케 클라이스트
호감도 +3 [공략 가능 (2단계/5단계)]
‘역시.’
이걸로 3점이 된 거면 전에는 2점이었던 건데, 중간 이상이긴 하나 높은 값은 아니지.
“괜찮은가 보네, 루이제.”
“와, 이게 몇 년 만이냐? 이거 내 고향 친구들만 부르는 이름인데. 진짜 친해진 느낌이라 좋네.”
울리케가 더 입에 붙지만 본인이 이 이름이 좋다는데 뭐 어쩌겠나.
이걸로 더 친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는 게 낫지.
한참 울리케와 대화를 나누다 20분쯤 지났을 무렵, 울리케가 내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데, 루카스. 너 레오랑 사이 안 좋지.”
“…응? 왜?”
“아니, 그냥. 우리 이제 같은 팀 됐으니까.”
“안 좋은 것까지는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울리케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들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울리케가 이불을 걷어내고 불쑥 일어났다. 그가 레오와 한참 작은 소리로 실랑이하더니, 다른 팀원들을 그의 방에서 내몰았다.
그가 레오를 떠밀며 말했다.
“자! 다녀와!”
“음? 나르케는.”
뭐라 물을 새도 없이, 레오가 깊은 한숨을 쉬며 나를 워프시켰다.
아까의 침실에 도착한 나는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울리케는 우리가 엄청 사이 나쁜 줄 알아.”
아, 그래서 친해져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만하지.”
“그래. 그리고 안 그래도 아까 줬어야 하는 걸 못 준게 생각이 나서.”
레오가 로브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건넸다.
니콜라우스가 아닌 루카스 아스카니엔에게 오는 편지는 모조리 학군단 기숙사로 간다.
“아까 알렉스 뮐러라는 사람이 널 찾았다고 했지.”
레오가 분홍색 편지봉투를 가리켰다.
‘이레네 뮐러.’
또 ‘뮐러’다.
[정말 부럽네요. 세상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기분은 어때요? 저 개미같은 군중들 생각따위 관심도 없고 그런가요? 아니면 관심을 받는 나 자신이 너무 잘난 것 같아 뿌듯한가요? 당신이 그걸 알려나 모르겠는데, 당신의 플레로마 같은 특성까지도 요즘 꽤 멋지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거 알아요? 플레로마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정의를 위해 황제 폐하께 충성하다니 얼마나 극적이에요? 그래서 당신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지요? 별생각 없을 것 같으면 속상하겠네요. 우쭐하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짜증 나긴 하겠어요. 사실 내가 당신을 응원하는 군중 중 하나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정신이 아득해진다. 묘하게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물음표가 몇 개야?
게다가 이건 질투인가, 응원인가.
지금보다 더 오랫동안 편지를 받아 왔던 현실에서도 이런 내용의 편지는 못 받아 봤다.
“…….”
“선배님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런 편지가 종종 온다더라고. 그분들의 경우에는 협박편지를 말한 거긴 하지만. 그런데 이게 지지자의 편지를 가장하고 있어도, 네 경우에는 어제 이상한 징조를 직접 확인했지.”
선배님들이면 황실 마법사연합회의 윗 기수를 말하는 거겠지.
“왜 하필 나냐?”
“그러게. 그냥 보기에는 별 문제 없는 편지지만, 조심은 해야겠어. 그렇지?”
“그래.”
“왕국 수사국을 시켜서 어디서 나온 사람인지 조사해 볼게. 그리고 코어는….”
레오가 손가락을 튕겨 내 코어의 마력을 강화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의 마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유지할게.”
“예고 좀 하고 올려라…. 아무튼, 그래. 고맙다.”
나는 그를 배웅하며 인사했다.
“내일 보자.”
그러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또 뮐러.
카타콤에 잠입하기 전 내 배에 칼을 박았던 로버트 뮐러에 이어, 알렉스 뮐러, 이제는 이레네 뮐러.
이게 무슨 의미일까.
무슨 의미인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역시 직접 때려잡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 * *
아침, 우리는 어제 그랬듯 펜탈론 경기장 앞 대로로 워프했다.
“홍보영상 이제 계속 틀고 있을 건가 보다.”
“개막이 코앞이긴 하네.”
친구들이 경기장 앞에 크게 걸린 아티팩트를 올려다봤다.
아티팩트에서 쏘아져 나온 빛이 하나의 영상을 이루고 있었다. 각국의 마법사들이 영상에 스쳐 지나갔다.
물론 내 관심은 이 화면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특히 이 길 건너, 펜탈론 경기장이 있는 부지에는 어제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다들 영상 보러 온 건가.’
모두의 시선이 우리와 같은 곳에 향하고 있었다.
슬슬 가자고 말하려던 때, 익숙한 국기가 화면에 지나갔다.
‘어.’
대한제국이었다.
두루마기를 입은 한 마법사가 스태프를 들고 화면 가운데 섰다.
[역칙천상공중지하, 소유일체작제장난….]
—천상과 허공과 땅 밑의 모든 세계에 명해, 있는 바 일체 모든 장애와 어려움을 제하리니.
장면이 지나가자 독일어로 번역된 문구가 새로 적혔다. 이 시대의 자막은 영상과 함께 나오지 않았다.
[불선심자개래호궤 청아소설가지법음.]
—선함 없는 자들 모두 와 무릎 꿇어라! 내가 설한 바의 가지 법음을 함께 들어라.
영상 속 마법사가 주문을 외며 스태프를 바닥으로 내리찍자, 경기장으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흑백 화면이었기에 신력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어 외국어에 능한 것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독일말로 유창하게 말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모든 세계의 마구니를 제압할 때 읊어 왔던 항마진언입니다. 우리 대한제국 대표팀은 독일 제국과 펜탈론의 평안을 빕니다.]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불경 외고 마법을 쓰는 것을 보니 느낌이 새롭다.
물론 종교보다는 문화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긴 한다.
제국도 그렇고, 교황청도 그렇고, 동아시아도 예외 없이 다들 문화와 민족 차원의 알력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각국의 역사성 있는 무언가를 마법과 엮으니까.
저 주문을 가지고 동아시아 삼국이 누가 더 정통성 있게 한자로 된 불경을 다루고 있는지 피터지게 싸우고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보다….
“…….”
느낌이 새롭다.
한번 다들 직접 만나 보고 싶네. 그들 눈에는 내가 그냥 외국인일 뿐이니, 의미는 없겠지만.
생각에 잠긴 사이 영상은 서아시아 국가로 넘어갔다.
내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자, 앞서가던 엘리아스가 뒤돌았다.
“루카~?”
“갈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 그의 곁에 서자, 그가 몸서리치며 말했다.
“진짜 꼼꼼히 살펴야겠다. 저렇게 여기저기서 오는데 혹시나 뭐라도 터지면… 으.”
나는 그의 말에 미소 지으며 앞을 향해 걸었다.
그것보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우리를 흘끗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점점 몰리고 있다. 여기에 통치가문 놈들만 넷이니 관심도로 따지면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이거 영상 보러 온 게 아니네.’
이곳에서 우리가 일한다는 걸 듣고 왕족 한번 보러 온 사람들일 것이다.
레오도 상황을 알아챘는지, 앞에서 이곳 보안팀을 부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친구들의 곁에 결계를 친 상태로 쭉 앞으로 걸어갔다.
레오는 제게 악수해 달라는 신민들에게 그저 미소로 답했다. 결계를 친 상태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고, 어제 일 이후로는 악수 금지령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내 방문을 두드리고 문손잡이를 돌려….]
그때, 누군가의 평온하고 잔잔한 노랫소리가 귓가에 크게 박혔다.
어제 들어 본 목소리인가 생각해 봤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친구들이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 소란 속에서 사람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의도적으로 확성 마법을 깔았다는 뜻이다.
팀원들이 결계를 강화하려 완드를 빼 들었다.
콰아아앙— 쨍그랑—!
“아아악!”
“뭐야?!”
그들이 마력을 불어넣은 순간, 역방향으로 거센 마력이 닥쳤다.
나는 팔을 들어 내게 닥치는 결계 조각을 막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느낀 것은 경악이었으나, 이어서 느낀 것은 당혹이었다.
어제 그 신인류의 체격에 맞는 손 크기가 아니었다. 따지자면 체구 작은 구인류 여성의 손이 아닐까.
철퍽—
젖은 솜 같은 것이 내 손을 옥죄었다.
아니, 상대방 구인류의 장갑이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젖어 있었다.
‘뭔?’
내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팔을 힘껏 잡아당긴 순간, 언제 있었냐는 듯 손에서 그것이 사라졌다.
워프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생각하신다. 바람이겠지. 어머니도 생각하신다. 바람이겠지. 아버지는 생각하신다. 그냥 바람이겠지. 어머니도 생각하신다. 그냥 바람이겠지.]
민요다.
저지독일어로 된 민요. 비록 이 지방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제목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Dat du min Leevsten büst, That you are my dearest.
헛웃음이 난다.
나르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장갑 절도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대놓고 내게 힌트를 주는 걸 보니, 그가 더 계획하는 것이 있긴 하겠지. 나르케의 예언도 있었고 말이다.
“루카!”
“괜찮아? 너 손 뭐야?”
결계가 깨진 탓인지 사람들은 전부 물러났다. 레오의 요청을 듣고 온 보안팀 마법사들이 주위에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흘끗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보다.’
구인류의 손이었는데, 확성 마법을 건다?
카타콤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이 구인류라는 단서를 주면서 동시에 마법을 쓰지 않는다.
그렇단 말은, 높은 확률로 내 손을 잡은 자는 구인류가 아니라 신인류라는 말인데….
‘아, 이 새끼.’
잡기 힘들겠네.
직감적으로 스친 생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웃음이 났다.
이런 놈일수록 잡을 때 희열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