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17)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첫날 우리에게 업무를 소개했던 펜탈론 부서 사람이 죽을상을 하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직접 왕족을 모셔 본 경험이 적어 안전을 철저히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그렇게 많은 분이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이 내부 워프 좌표를 주시겠습니까? 혹시 모를 특수 능력자 탓에 저희 신분도 검사하시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 도착하기 전에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보통 인파가 너무 많지 않으면 사람들이 왕족 주위로 가까이 붙는 일은 없는데, 오늘은 결계 때문에 오히려 안심하고 결계에 달라붙어 있었던 듯하다.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황실 마법사연합회가 아드리안 아스카니엔 등장 이후로 대중 친화 전략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다른 왕족을 보았을 때보다 더 편안히 접근했을 수도 있다.
‘…진짜, 황실 마법사연합회가 형을 따라 해서 이 결과가 난 거면… 잘만 활용하면 좋긴 하겠지만 앞으로 조심 좀 해야겠네.’
우리는 레오와 황실 사람의 기나긴 대화를 듣고, 오전 검문지를 배정받았다.
나는 친구들의 의문과 걱정 어린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엘리아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안한데 장갑 다시 빌려줄 수 있어? 내 여분 장갑을 오늘 아침에 쓴 거라서.”
“아잇, 뭐가 미안해!”
엘리아스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러치에서 장갑을 꺼내 내 손에 씌웠다. 그러더니 활짝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오늘 활동 잘하고~ 이따 점심 때 보자.”
나는 그에게 마주 웃으며 인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레오를 향해 뒤돌았다.
오늘의 파트너는 레오다.
울리케… 아니, 루이제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에게 ‘난 너와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수없이 꼬드겨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놈은 우리를 조금이라도 친하게 만들어 팀 내 불화의 기미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게 분명했다.
우리는 말 없이 오늘 맡은 구역으로 이동했다.
게이트 A부터 H까지, 좌석과 대기실을 모조리 점검하는 게 오늘의 일이었다.
점검하는 동안 혹시 어디선가 보고 있을지 모를 시선 탓에 우리는 대화 한번 나누지 않았다. 원래 둘 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차음 마법을 걸고 가끔 떠들기라도 했는데 오늘은 단 한마디도 없이 있으니 새로웠다.
‘아티팩트는 보안팀과만 연결돼 있으니 이걸로 연락받을 수도 없고.’
혼자 일하는 기분이 난다.
종종 우리 말고 다른 용역을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들과 나누는 대화가 더 많았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려 밖으로 나왔을 때, 시계를 보며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오늘 너무 춥네요. 그 옷만으로 괜찮아요?”
딱 보아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는 몸이 둥그렇게 보일 때까지 코트 안에 스웨터를 잔뜩 껴입고 있었다.
반면 내가 입은 건 셔츠와 재킷과 코트가 끝이었다. 겉으로도 차림이 가볍게 보이기는 했나 보다.
“괜찮습니다. 어디 가세요?”
“3층이요. 마력등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나저나….”
그가 나를 흘끔 보며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예, 물론이죠.”
“그 옷 여름까지 입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헛웃음을 칠 뻔했다.
연세가 있는 분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뇨, 새 옷을 받을 겁니다. 아니면 좀 더 얇은 코트로 바뀌겠지요. 아직 전달받은 바가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
“그렇군요? 옷 정말 멋져요.”
나는 대충 미소지었다.
간단한 대화도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
아무리 범인을 직접 때려잡겠다지만, 나르케의 조언을 흘려들을 생각은 없으니.
다행히 그는 그 상태로 아무 미련 없이 내게 인사하고 위층으로 이동했다.
어제 날 빤히 보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와도 마주쳤다. 한 신인류가 오늘도 나를 계속해서 곁눈질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뇨. …좋은 점심이에요.”
“고마워요.”
그대로 모두가 갈 길을 갔기에 대화는 끝이었다.
그 뒤로 몇몇과 짧게 인사하고 또 레오의 인사를 구경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점심때까지 우리의 일은 순조로웠다.
또다시 뮐러가 나타나면 당장 잡아내지는 못하더라도 행동 분석의 기회로 삼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적어도 점심때까지는.
식사를 마친 나는 분홍색의 얇은 쪽지에 적힌 글씨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식사할 때 술을 잘 마시지 않는군요! 자우어크라우트와 소시지 조합은 최고죠. 다음에 같이 먹어요.]
“…….”
나와 함께 식사한 레오가 내 손에 들려 있던 쪽지를 빼앗아 갔다.
그러더니, 표정 변화 없이 침묵했다.
휴게실 아래 문틈으로 누군가 날린 쪽지였다.
딱 봐도 수상쩍어 잡으러 갔더니만 밖에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최대한 귀족 대우를 받지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과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다. 점심을 그냥 우리 몫으로 배정된 휴게실 중 한 곳에서 먹고 있단 말이다.
물론 두 명당 휴게실 하나를 배정받고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출입할 수 없는 것만으로도 특혜기는 하지. 어쨌거나….
‘이대로면 안 되겠는데.’
레오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네.”
“그래.”
“정확히는 너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가 착잡한 듯 한숨을 푹 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코어의 치유 마력이 더 강해졌다.
그대로 두면 비텔스바흐의 마력이 겉으로도 느껴질 수 있어, 나는 치유 마법이 코어에 스미게끔 내 마력으로 아티팩트 마력을 눌렀다.
오후 4시, 모든 검문을 마치고 우리는 기숙사로 이동했다.
당연히 오늘 받은 쪽지까지 신고를 마쳤다.
‘이 새끼 내 앞에 직접 나타나야지 이러면 곤란한데.’
물론 직접 나타나 주지 않는 것이 안전상 더 괜찮은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러면 내가 못 때려잡지 않는가?
내가 썩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동안, 나르케가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환하게 웃었다.
“오늘도 끝냈네~ 신고는 잘 끝나서 다행이야.”
“그러게. 오늘 고마웠고 내일 보자.”
“루카스.”
나르케의 진지한 부름에,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르케가 문 앞에 가만히 서 나를 바라봤다.
“잘은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아. 오늘은 학군단 기숙사에 있을래?”
“느낌이 안 좋다고?”
“응.”
흠….
직접 나타나 주기라도 한다, 이건가?
그 정도였다면 나르케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니 그 이하의 사건이겠다.
“아니, 괜찮아. 거긴 내가 있을 자리도 없는 데다….”
나는 주위를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데이터를 모을 때야.”
“…….”
나르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 부드럽게 웃었다.
“데이터 모으다 또 안 좋은 기억 생기면 어쩌려고. 안 되겠네~ 내가 네 방에서 자는 게 좋겠어.”
“응?”
대답도 없이 나르케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씻고 나와 잘 준비까지 마치자, 나르케는 기숙사에서 짐을 바리바리 싸 와서 내 방에 풀고 있었다.
그가 반대편 침대에 털썩 눕고는 제 가방을 열었다. 웬 햄스터 같은 덩어리가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물론 뜀박질하는 게 완전히 토끼였기에 그게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다.
“루카스!”
이 동물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다.
물론 듣는 건 아니고 내 머릿속에 바로 인식된 것에 가깝지만.
파이에게 인사할 새도 없이, 나르케가 나를 밀어 눕히고 파이를 펼쳐 내 심장께에 올렸다.
“일부러 데리고 왔지. 파이 테라피~”
“그런 게 어딨어.”
“있어!”
그냥 우겨 버리네.
아무튼 따뜻하니 됐다. 파이는 나를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속도로 혼자 삑삑대고 있었다. 이불로 파이까지 같이 덮으려던 순간, 파이가 벌떡 일어났다.
“어!”
“왜?”
“루카스인데!”
루카스인데?
뒷말은 예상하지 않아도 알겠다.
파이가 레오의 마력을 느꼈는지 빙글빙글 돌았다. 동물 얼굴에서도 의문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오랜만에 다시 느낀다.
어쨌거나 치유력 있는 마력이니, 파이는 오히려 더 만족한 듯 다시 자리에 엎어졌다.
나는 파이에게 신력을 불어넣었다.
파이는 요새 주로 나르케의 방에 있는데, 내 기숙사가 바뀌어서 올 줄 몰라 오지 않는 것이다.
좌표를 외워서 마법 쓰는 동물은 아니니, 다음에 한번 직접 이곳으로 오게끔 훈련을 시켜 봐야겠다. 그러면 내 방에도 자주 있겠지.
“파이는 여기 결계에 안 걸리나 보네.”
“그렇지.”
크기가 너무 작고 워프하는 데에 드는 마력량이 미미해서 그렇다. 그래서 이전에 마법약 실험실에 갇혔을 때도 파이를 워프시켜서 의사소통했지.
다른 팀원들은 몰라도, 파이만큼은 편하게 데려올 수 있어 좋다.
‘파이가 지금보다 500배쯤 커져서 내가 파이 배를 베고 잘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내가 양심 없는 생각을 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파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엉?”
“미안.”
“왜?!”
“그런 게 있어.”
나는 빨리 자라는 뜻으로 파이의 귀를 손으로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파이 모두가 잠에 빠졌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다음 날 아침, 파이가 창문 앞에 떨어져 있던 분홍색 쪽지를 입으로 물고 왔다.
“안 자고 계속 깨어 있었는데, 4시에 한 번에 쪽지가 창문에 부딪혔어.”
나르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쪽지를 물고 오는 파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랑 같이 있길 잘했다.”
“…흐음, 아냐. 내가 없었어도 여기서 그쳤을 거야.”
나르케가 시선을 쪽지에 고정한 채 영혼 없이 대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래도 혼자서 아침을 이딴 식으로 맞이하는 것보다는 같이 신고해 줄 인간 하나라도 있는 게 낫지.”
“하하, 그런가. 그렇기도 하겠어.”
나르케가 입으로만 웃으며 쪽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력을 느끼려는 건가 싶었지만, 쪽지에는 느낄 수 있는 마력이 없었다.
나는 장갑을 낀 채 쪽지를 하나씩 풀었다.
[낮에 나랑 대화했을 때 꽤 친절하더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일 줄 알았습니다. 다음에도 그렇게 맞아 주세요.]
“허.”
소름이 끼쳤다.
나랑 낮에 대화했다?
오늘 나와 짧게나마 대화한 사람이 다섯은 되는데, 무슨?
그들 모두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음 쪽지를 펼쳤다.
[저 쥐 같은 친구는 종이 뭐죠? 국내에는 없는 동물 같은데.]
[방이 너무 바이에른풍 아닌가. 안할트의 독수리가 얼마나 멋진데 저런 투박한 사자 장식을 내버려 두는 건지?]
커튼을 쳐 뒀는데 그걸 어떻게 봤는가.
일단 그게 가장 큰 문제였고, 둘째로는….
이 새끼는 품평을 하러 온 거야, 뭘 하러 온 거야?
그런 생각에 쪽지를 뒤집자, 새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당신이 원해서 쓰는 거라면 마음에 드네요.]
“…….”
나는 새 쪽지를 펼쳤다.
[답장은 그냥 아무 데나 두셔도 읽을 수 있어요.]
* * *
‘…나랑 대화한 사람이라.’
내 손을 잡은 사람은 신인류면서 구인류 여성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무얼 의미하겠는가?
이 범죄자는 변신 능력자다.
그런 능력자가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는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 하며, 어떻게 해서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내 손을 떨쳐내고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가 어떤 인두겁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거다.
“안녕하세요. 또 보네요.”
“…….”
온통 하얀 경기장 내부 건물, 주철로 된 승강기 앞에서 나는 어제 만났던 노인을 다시 만났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기만 하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너무 춥길래 발열 아티팩트를 빌려서 조끼 안에 넣어 뒀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따뜻해서 덥군요.”
“하하….”
“젊을 때 뼈 관리 잘해요. 신인류라 구인류보다 뼈가 더 단단하니까 괜찮겠지~ 했다가는 나처럼 됩니다. 젊을 때 하루의 반을 운동하는 데 썼거든요. 할 때는 그냥 미친 듯이 했는데, 그렇게 수십 년을 사니 영….”
띵—
그가 말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승강기에 탔기에, 나는 미소 지으며 모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그도 미소 지으며 나와 같이 인사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한 아이가 내 눈을 보고 펄쩍 뛸 것처럼 놀라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여기 22번 출구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아마 내가 나인 줄, 그러니까 플레로마 아스카니엔인 줄 몰랐던 듯하다.
이게 스토커의 연기가 아니라 진짜 아이라면 말이다.
나는 미소 지으려 노력하며 옆 통로로 손짓했다.
“…여기서 왼쪽 통로로 이동하신 다음 뒤로 쭉 가시면 나옵니다.”
“고맙습니다.”
아이가 여기에 왜 있지, 생각한 순간 뒤에서 엘리아스가 말했다.
“저 애 마력이 필요한 곳이 여기에 있나 보네?”
음….
나르케와 하이케의 사례를 여기서 또 만나다니.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과 태도를 종합해 보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는 가짜가 없는 듯하다.
그래, 어제 자신이 다른 누군가로 위장했다는 걸 말해 놓고는 오늘 또 내 앞에 나타나는 건 하수지.
온종일 내 신경은 뮐러에게 가 있었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일단 나타나면 그 기회에 때려잡아야 하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또….
‘인간적으로도 신경이 쓰이기는 하네.’
때려잡을 각오를 배제하고 봐도 누군가가 나를 온종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왜 나냐?’
물론 여기 있는 다른 여섯 명에게 이런 범죄자가 들러붙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세상에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게다가 그 새끼가 보낸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서,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보다는 질투가 반쯤 섞인 듯하다. 그것마저도 애정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나를 질투하는 자가 곁에 있다는 건 정말 최악이다.
그나마 엘리아스가 내 곁에 붙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해 준 덕에 날이 서 있던 신경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또다시 4시가 되어, 우리는 기숙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나르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친구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학군단 기숙사에서 자야겠다.”
“어? 진짜? 내 방에서 자! 나르케랑 나랑 같은 방이잖아.”
엘리아스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첫째로는 경계해야 해서.
둘째로는, 엘리아스가 내가 왔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 술과 보드게임을 꺼내 왔기 때문이다.
“루카 너무 잘하는데? 한 번 때려 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안 지네.”
엘리아스가 나르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그에게 붙잡힌 나르케는 엘리아스에게서 최대한 몸을 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으아아아~ 왜 나만?”
짝—
나르케의 손등을 후려친 엘리아스가 시원하게 웃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 이걸로 저번에 하이케 집에서 맞은 거 갚았다.”
“아니, 그게 그 정도로 마음에 남았다고?”
나르케가 빨개진 손등을 매만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 보드 펼치니까 기억났어!”
“하하… 응?”
나르케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 표정을 굳혔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을 열었다.
“…….”
나르케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순간 내 얼굴도 그처럼 굳었다.
분홍색 쪽지였다.
나는 쪽지를 받아 풀었다.
[자리 옮기면 내가 모를 줄 아는 건가? 표정 볼만하네요. 아직 안 봤지만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군요.]
“…….”
엘리아스가 아티팩트를 두드려 경찰에 연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지을 줄 알고?
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느끼며 주먹에 들어가는 힘을 풀려 노력했다.
제출해야 하니 찢어서는 안 되지. 대신 필터에 씌워서 인두로 지져야 한다. 아스만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순간, 무언가가 창문을 한 번 더 때렸다.
탁—
나르케가 다시 일어나 쪽지를 가져왔다.
[아, 정말 감동이네요. 내 편지를 평생 사라지지 않게 보관하려고? 섬뜩하네요. 어쨌거나 당신도 나랑 같은 과인 거죠.]
정말로 한숨도 못 잤다.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오기 탓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어젯밤 받은 쪽지를 수사국에 제출하고, 신변 보호를 위해 마법사 다섯 명을 붙여 주겠다는 약속을 듣고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마법사 다섯의 일일 인건비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게 맞아 보였다. 물론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대체 얼마나 공을 들였겠냐마는.
그건 구인류나 약한 신인류에게만 도움이 되는 경호지, 내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범인이 멀리서 나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황에 그놈을 잡아 달라고 했지 내가 언제 신변 보호를 해 달라고 했나. 저들 다섯보다 레오 하나가 더 쓸 만할 것이다.
그래서 마법사는 숙소 주위에만 배치하기로 했다. 그것도 딱히 도움은 안 되겠지만.
지금은 바이에른 출신 수사관들이 내 숙소를 조사하고 있을 것이다.
‘피곤하다.’
우리 팀 집결지에 도착해 소지품을 캐비닛에 정리해 넣은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 중 누가 범인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다.
척추와 어깨가 경직되는 기분이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어제부터 감각이 증폭되어 전등의 소리까지도 내게 들리는 것 같다.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는 아치형의 건물 천장과 그 가운데 달린 마력등 빛이 눈에 어른거린다. 신경이 잔뜩 곤두선 탓인지 빛이 무슨 색인지도 정확히 알아볼 수 없다.
물론, 주먹 하나는 생생히 살아 있었다.
내 눈앞에 나올 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때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앞으로 나오라고 새끼야….’
안 나오고 종이로만 깔짝대니 내가 잡을 방법이 없잖아.
‘그래. 이제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 이거지.’
뜻은 이해했다.
내 앞에 드러나지 않아도, 내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으니 나를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둔 것 같은 착각에 잠겨 있겠지.
이미 반쯤 원하는 대로 이뤘는데 굳이 내 앞에 나타나서 붙잡힐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방법이 있다.
“루카스. 안색이 안 좋네.”
체링겐이 나를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가?”
“응.”
체링겐이 제 가방에서 콜라를 내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좋아하지? 전에 2차 치를 때 계속 이거 마셨잖아. 마시고 조금이라도 기분 전환 하자. 기운 나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네.”
“아, 고맙다.”
콜라는 그냥 반가워서 마신 건데, 좋아하는 걸로 받아들여질 만큼 자주 마셨었나.
마음이 고맙다.
그나저나….
‘이 율리아는 진짜가 맞겠지.’
나는 멍한 시야에 초점을 잡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율리아.”
“응?”
내가 손을 내밀자, 체링겐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손을 가볍게 쳤다. 그의 마력이 내 손에 스며들어 피부가 살짝 따끔거렸다. 비텔스바흐의 마력이 체링겐의 마력이 닿은 자리로 확 퍼져 치유 마법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공격하는 쪽의 마력이 가만히 있는 쪽으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줄곧 내가 그의 손을 쳤던 만큼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오늘 내게 닿은 마력은 대련할 때 느꼈던 그의 마력이 맞다.
“네가 맞구나.”
“…….”
체링겐이 입을 살짝 벌렸다가 미소 지었다.
“그래. 우리 화요일에 대련도 했었지?”
“의심해서 미안하다.”
“아니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그리고 이렇게 철저해야 맞지.”
나는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짓고 말했다.
“율리아. 네게 부탁할 게 있는데, 한번 듣고 생각해 줄 수 있을까?”
이 역시도 처음 보고 듣는 태도였는지, 체링겐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도 진척이 없고, 범인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채로 쪽지만 보내는 상황이야. 이대로면 그 사람을 잡아들일 방법이 없어.”
“그렇지. 정말 이대로면 난감하네. 처리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오늘 나랑 파트너로 있어 줄 수 있어?”
“아, 물론이지! 그런데 울리케가 오늘도 널 레오랑 붙이려고 할 텐데.”
“…그건… 그렇네. 레오랑 나랑 너랑 셋이서 다니는 건 어때.”
“그래. 그렇게 짤 수 있다면 난 상관없어.”
이미 어제도 엘리아스와 레오와 셋이서 다녔기에 허가는 날 것이다.
내가 더 말하지 않자, 체링겐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부탁이었어? 난 뭐든 더 도울 수 있는데.”
“음, 사실 하나 더 있어.”
끝이 아니지.
체링겐과 파트너가 된다고 범인이 눈앞에 나타날까?
그럴 일은 없다.
그를 불러내려면, 여기서 한 가지 행동을 더 취해야만 한다.
“조금 당황스러운 부탁이겠지만, 오늘 나랑 친한 척 좀 해 줄래?”
“친한 척? 우리 친하잖아. …아.”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체링겐이 입을 벌렸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내가 굳이 이 말을 꺼낸 이유를 알아챈 듯했다.
“우리 친하지. 그런데 좀 더, 대놓고 드러내 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하하하하, 뭘 의도하는지 알겠네~ 나한테 맡겨 봐.”
“고마워.”
체링겐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답했기에, 나는 감사의 의미로 미소 지었다.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좋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럼,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