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218화 (218/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18)

옅게 웃고 있던 체링겐이 턱을 쓸며 생각에 잠기더니, 내게 말했다.

“아, 당황하면 안 돼, 루카스. 무르기도 없어.”

“음?”

“한번 최선을 다해 볼 테니까.”

체링겐은 재미있는 일을 앞둔 사람처럼 웃었다.

예의상 그런 기미를 감추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즐거움을 아예 지울 수는 없었다.

* * *

내가 체링겐에게 이걸 부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레오는 사이가 좋지 않은 연기를 하고 있기에 갑자기 친한 척을 해 봐야 별 의미가 없을 거다.

다음으로 엘리아스와 나르케.

심리적으로 이쪽이 더 편하긴 하다. 실제로 친하니까.

‘그런데 친구들이 웃음을 못 참을 것 같다….’

무조건이다. 친한 척을 하다가도 웃느라 자리에 엎어질 것 같다. 사실 그냥 얼굴만 봐도 웃길 때가 있는데 연기를 어떻게 시키나?

그렇다면 울리케나 하이케는?

그다지.

일단 그 둘과는 연기를 부탁할 만큼 막역하지 않고, 같이 있으면서 호감도쯤은 끌어올릴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스토커가 우리를 공격하려 들면 그걸 막아 낼 만큼의 판단력과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체링겐은 연기하다 웃겨서 쓰러질 사람이 아니며, 특수 능력 범죄자에게 대항할 실력을 갖췄고, 이런 부탁을 해도 어색해질 사이가 아니라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

오늘따라 레오의 한숨 소리가 귀에 박힌다.

우리는 오늘 다른 건물로 왔다.

개막식과 만국 친선 토너먼트전이 열리는 주경기장이 아닌 아이스하키 전용 경기장이었다.

주경기장보다 좀 더 파란색 장식이 많았고, 그곳보다 훨씬 사람이 적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건물에 우리 셋뿐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우리는 곳곳에 설치된 현수막과 패널을 보며 목적지까지 걸었다.

[1898 베를린 펜탈론]

[56개국 국가대표단 선수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블랙레터 서체로 되어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때 체링겐이 웃으며 말했다.

“아, 우리 셋이 오늘 같은 곳을 돌아야 하다니 즐겁네.”

체링겐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렇지, 루카스.”

“응.”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레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내가 뭘 계획하는지 모르기에, 굳이 체링겐을 끌고 온 내 선택에 의문을 느끼는 듯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체링겐이 손뼉을 쳤다.

“자, 난 여태 나르케랑 같이 움직였는데, 사실 우리는 방 하나씩 맡아서 했거든. 너희도 그랬어?”

“응.”

“그럼… 내가 이 방향 기준으로 1층 왼쪽 줄을 맡을게. 레오는 오른쪽 줄을 맡아 줄래?”

“루카스는.”

레오의 물음에 체링겐이 바른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응? 나랑 같이 가야지.”

“…….”

레오가 말없이 체링겐을 바라보다 뒤돌아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다.

체링겐과 함께 왼편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완드를 스태프로 바꾸어 내리찍었다.

내 마력에 부딪혀 반사되는 다른 마력은 없었다. 바닥 말고 벽을 확인하기 위해 스태프를 옮긴 순간, 체링겐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철컥—

“음?”

“하하….”

체링겐이 창가와 천장을 흘끗 바라보고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내가 의문에 잠겨 있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왜 그래, 마저 해.”

“…….”

나는 헛웃음을 치며 벽에 스태프를 가져다 댔다. 분홍빛 마력이 벽을 타고 흘렀다. 마찬가지로 이쪽에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방 중앙의 철제 선반에 스태프를 가져다 대려 발걸음을 옮긴 순간, 체링겐이 내 왼팔을 잡아당겼다. 그가 내 몸을 돌려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황금색 눈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규정상 왁스를 발라 모자에 넣었어야 할 머리칼이 이마에 닿았다.

‘이거 뭐냐?’

아까는 안일했다.

웃음 참기는 내가 실패할 것 같다.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누르며 체링겐에게 속삭였다.

“…율리아, 내가 네게 주문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 친구니까~”

“뭐가 친구니까야.”

자연스럽게 넘기는 거 봐라. 이놈 하는 꼴 보니 이미 몇 번 해 봤는데?

그래도 호감도 창이 뜨지 않는 걸 보면, 놈도 분위기에 쓸려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든가 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그저 연기하는 중인 듯했다. 약간은 창밖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미 나는 범죄자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여기에 왔다. 내가 추측하기로 범인이 창문을 통해 나를 지켜볼 가능성은 낮았지만, 내가 부탁한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 고마우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온 힘을 다해 웃음을 죽이고 있을 때, 문틈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

그 이변에 체링겐을 밀어내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콰앙—!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복도의 빛이 쏟아졌다.

“야.”

내 앞에 있던 체링겐이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레오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순간 코어에 격통이 닥쳤다.

레오가 어이가 사라진 표정으로 체링겐의 셔츠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너희 뭐 해.”

“우정 교류? 좀 더 친해져 볼까 해서.”

“웃기지 마.”

레오가 짜증 난 목소리로 체링겐을 복도 밖으로 떠밀고 문을 거세게 닫았다.

체링겐이 나가니 마력의 밀도가 더 높아져, 숨이 턱턱 막혔다.

“뭔데, 이거. 지금 여기가 학교야? 아니, 학교여도 너희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어.”

“이따.”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레오는 이제 내 앞에서도 싸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에 어이가 없어졌는지는 분명했다.

“오해가 있네. 미안하다. 좀 해명해 보자면, 지금 널 납득시키기는 어렵다는 걸 알지만 이건 정당한 딴짓이었어.”

“정당하다라….”

“…….”

이 서늘한 비웃음을 듣고 있자니 현타가 온다. 레오는 난생처음 보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나라고 신났을까? 이건 어디까지나 범인이 제 발로 나오게끔 유도하는 과정이란 말이다.

코어가 미친 듯이 따끔거린다. 나는 그의 코어를 뒤집어엎으려다, 내가 일터에 와서 썩 바람직하지 못한 계획을 모의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관뒀다.

“설명할게. 일단 너만 일하게 두고 농땡이를 피우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가 봐라.”

“언제.”

말을 다 잘라먹고 물어봤지만, 무엇에 대한 언제인지는 분명했다.

“오늘 안에.”

지금은 설명할 수 없다.

그놈이 어디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을지 모르고, 내가 세운 가설이 맞다면 차음 마법도 소용이 없다. 체링겐이 저렇게 노력해 줬는데 모든 걸 말해서 망칠 수는 없지.

레오가 나를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피하고 있다가 그를 마주 보자, 그제야 내가 거짓을 말하지 않은 걸 확신했는지 그가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뒤를 바라보며 따라 나갔다.

‘얘는 관리자 하면 잘하겠다.’

절대 딴짓 못 하게 매의 눈으로 감시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나는 이미 그가 반장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레오가 넥타이를 다시 매고 있는 체링겐에게 다가가 그를 왼편 방으로 밀었다.

“바꿔. 내가 루카스랑 같이할 테니까 너 혼자 해.”

“왜? 이왕 같이하게 된 거 내가 루카스랑 하고 싶은데.”

“왜?”

레오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

지금 왜냐고 물었냐 이거지.

저 반문하는 말투며 눈빛이며 모든 것이 숙련자의 그것이다.

체링겐이 못 당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

체링겐이 나를 붙잡아 레오에게서 서너 발짝 떨어졌다.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체링겐이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범인 잡기 전에 레오한테 컷 당하겠는데?”

“워낙 FM 덩어리다 보니….”

노는 곳도 아니고 대체 뭐하냐는 생각이겠지. 아까도 그래서 여기가 학교냐고 다그쳤던 거고.

할 일은 다 하고 있으며, 완벽한 단체 행동 상황이었다면 이러지도 못한다.

그래도 있는 줄도 몰랐던 체링겐의 막무가내 직진 성향에 제동을 걸어 주었으니, 예상치 못한 레오의 필요성을 발견했다.

“하하하하! 너도 저 친구 원리원칙주의자인 거 아는구나. 흠, 우린 그냥 할 일 하면서 노는 건데….”

그가 웃으며 말을 흐리고 다른 주제를 꺼냈다.

“여기 다 돌고 부속 건물로 가면 아침 식사할 때겠어. 식사 시간 때 보자.”

“그래.”

나는 체링겐과 간단히 인사하고 레오를 따라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다.

괜히 이런 섬뜩한 분위기에서 함께 있고 싶지 않아, 나는 레오를 지나쳐 앞으로 갔다. 다른 방을 점검하는 게 시간도 아끼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여지없이 나는 아까의 체링겐처럼 셔츠 깃을 붙들렸다.

“…….”

반격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고등학생의 FM 기질에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낼 거며, 레오가 보기에는 내가 헛짓거리나 하고 있었던 걸로 보일 테니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여러 의미로 숨이 막히는 3시간을 보내고, 아침 8시.

나는 그제야 체링겐과 만날 수 있었다. 체링겐이 황실의 하청의 하청에서 준비한 식사를 우리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음~ 오늘 아침 샐러드야.”

“아, 그래? 좋네.”

코어가 쿡쿡 쑤셔 오는 것이 느껴진다.

단순히 대화하는 것에 눈치를 주면 어쩌자는 건지? 나는 테이블을 손으로 가볍게 쳤다.

그제야 레오의 신호가 그쳤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식사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체링겐의 어떤 말이 들려 오자 레오의 마력이 코어 주위에서 미친 듯이 성깔을 드러냈다.

“전에도 물었지만, 아티팩트 내가 새로 주면 귀 뚫을 생각 있어? 정말 네가 써 줬으면 하는 게 하나 있어서.”

“…미안.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볼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테이블 밑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 탓에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거린 레오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찼다.

체링겐이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이는 레오를 보고 내게 웃었다.

“그래. 내가 널 너무 다그쳤나 보다.”

“아니야. 제안 고마워.”

그 뒤로, 다시 5시간이 지났다.

이 작전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침 식사를 넘어 점심 식사까지 마쳤는데, 오늘은 쪽지를 받지 않았다.

‘좋아. 그냥 그대로 꺼져라.’

그리고 이왕이면 한 대 칠 수 있게 해 주고 가라. 모순되지만 이게 내 솔직한 욕구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미소 지었다.

물론, 범인으로부터의 평화는 얻었지만 대신 레오에게 멱살 잡힐 위기를 몇 번 넘겨야 했다.

나는 또다시 체링겐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고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내게 다가오는 레오에게 말했다.

“너 왜 자꾸 나한테만 뭐라고 하냐?”

내 말에 놈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이 새끼도 나랑 너무 친해진 거지. 그러니까 체링겐 멱살은 안 잡고 나만 갈구는 게 분명하다.

아니면 내게 뭔가 기본적으로 기대하던 수준이 있었거나.

물론 놈은 정도를 아는지 아직 멱살을 잡지는 않았다. 다만 그럴 기세로 위협할 뿐이었다.

그가 아까의 체링겐처럼 코앞까지 다가와, 섬뜩할 만큼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를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루카스, 일하라고.”

“하잖아.”

“체링겐하고 온종일 떠드는 게 일이야? 아, 참 어려운 임무 맡으셨군….”

“…….”

레오가 비린 웃음을 지으며 날 비꼬았기에, 나는 미소 지으며 양손을 맞잡아 비틀었다.

“…!”

레오가 몸을 푹 숙였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코어가 있는 자리를 매만졌다.

나도 습관이 되어 속으로 율리아를 체링겐으로 부르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건 다른 문제지.

게다가 반장 자아와 모범생 자아에 가려져 있어 본연의 비꼬기 실력을 반쯤 잊고 있었는데, 역시 한 성깔 한다.

‘정치인으로 살려면 이 정도 성깔은 가져야 하나.’

아무튼, 뭣 때문에 이렇게 빡빡하게 구는지 알지만 태도는 고쳐먹을 필요가 있다. 물론 먼저 농땡이 피운 것처럼 보이게 군 건 나니 더 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따 설명해 준다고.”

“…….”

레오가 뭐라 말하려다 그냥 한숨만 쉬고 뒤돌았다. 짜증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나는 밖으로 나가, 레오 탓에 종일 넥타이만 고쳐 매게 된 체링겐에게 다가갔다.

“율리아. 저 새… 반장 좀 말려 봐. 쟤 왜 저래?”

“…으음, 하하하! 말린다고 되지 않을 텐데.”

“왜.”

한참 고민하던 체링겐이 흘려보내는 듯한 말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음, 국익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으니까. 너도 그랬겠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컸잖아.”

국익?

뜬금없지만 감이 잡힐 듯한데. 내가 좀 더 자세히 물으려 하자, 체링겐은 그러기 전에 내 어깨를 붙잡았다.

“우리 이제 또 뭐 할까?”

“지금까지 뭐 했는데. 온종일 이상한 분위기 잡기?”

“하하~ 우리 내일 서먹해지는 거 아냐?”

“알면 자중해라….”

하지만 정말 효과는 최고다.

범인은 열이 뻗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잠잠하다.

또 아까도 생각했듯, 호감도 창이 뜨지 않는 걸로 봐서 체링겐은 그 웃음 참아야 하는 분위기에 휘말리지도 않은 것 같다.

이대로면 뜬금없는 사적 감정으로 팀 활동 죄다 말아먹는 미래 없이 팀워크는 팀워크대로 유지하되 범인 속을 긁는 초기의 구상을 이룰 수 있겠다.

체링겐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평소처럼 그 위를 가볍게 치자 체링겐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

나는 또 웃음을 참아야 했다.

체링겐이 입술을 깨문 걸로 보아서 그에게도 그런 기미가 보였지만—솔직히 웃음을 참는 것도 정도가 있지, 둘 다 한계였다—, 그가 얼굴 근육에 들어간 힘을 풀려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표정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목을 가다듬은 그가 미소 지으며 내 눈을 들여다봤다. 투명한 노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가 내 손에서 흐르는 마력을 계속 제 쪽으로 흡수하며 중얼거렸다.

“네 마력 정말 특이한 거 알아?”

“당연히 알지. 색부터 너희랑 다르잖아.”

“하하, 그걸 말한 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니 분홍색 마력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겠구나.”

“그래.”

나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미소 지었다.

“그럼, 내가 왜 계속 손 달라고 하는 건지 알아?”

“모르지?”

“정말? 그럼 계속 모르는 게 낫겠다.”

체링겐이 화사하게 웃었다. 난 왜 말을 하다 마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마력이 특이한 것과 손을 달라고 하는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 하나는 알겠다.

그때, 체링겐이 웃으며 손을 놓았다. 이 정도면 관심은 확실히 끌었으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은 그 직후였다.

나는 뒤에서 난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헛웃음을 쳤다.

체링겐이 손을 놓은 건 레오가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으로 우리를 흘끗 보고 지나칠 뿐이었다.

“…….”

그 표정을 본 체링겐이 애매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꿉친구의 18년 빅데이터가 발현된 듯했다.

물론 나도 직감했다. 같은 인간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말을 안 들어도 보통 안 듣는 게 아니니 이렇게 나올 만도 했다.

체링겐이 내 손을 잡고 레오의 뒤를 쫓았다.

“같이 가, 레오.”

“…….”

레오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체링겐을 보고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우리가 따라오건 말건 레오는 손에 들고 있던 지도를 펼쳐 위치를 확인하고, 제 앞에 있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체링겐은 싸늘해진 분위기를 알면서도 일부러 입을 열었다.

“와, 넓네~”

비품실이라 적혀 있었지만 사실상 창고였다. 오래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냄새가 났다.

한쪽에는 일상적인 물품이, 다른 한쪽에는 아티팩트가 잔뜩 모여 있었다. 마력등부터 라디오, 영사기까지 전부 전기를 쓰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는 용도를 알기도 어려운 보수 설비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마력 이상 반응 보이는 거 찾으려면 오래 걸리겠네. 항상 이런 곳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체링겐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마력 물품이 든 선반을 완드로 두드렸다.

레오가 그의 옆을 막아섰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을 맡았다. 마력 없는 물건들이 있는 곳이었다.

“와, 펜탈론 시작하면 영상 컬러로 내보낼 건가 보다. 레오, 이번 펜탈론 자본금에 너희 가문 마력도 들어갔지?”

체링겐이 창고에 든 아티팩트를 살피며 말했다.

컬러 영상은 돈이 더 많이 들기에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마력을 염색해야 해서 그렇다.

“…….”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체링겐이 진지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기분 안 좋구나. 미안해.”

“일 안 하고 노는 사람이 둘인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을지 모르겠네.”

레오가 웃음을 섞어 대답했다. 당연히 조소에 가까웠다.

‘놀지 않았는데.’

그래도 분위기를 해치긴 했다. 연기하는 우리 역시 소름이 잔뜩 돋았는데 제삼자가 보기에는 얼마나 구역질 나겠는가.

‘이건 인간적으로 정신적 보상을 해 줘야 한다.’

범인 하나 때려잡으려다 친구 비위까지 상하게 했으니.

돌아가서 놈을 달랠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그때, 시야 왼쪽의 문이 흔들렸다.

콰앙—!

“어?”

“…….”

모두와 눈이 마주쳤다.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레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동시에 마력등의 불이 꺼졌다.

‘마력등이 나가?’

아티팩트의 수명이 다하거나 공기 중의 마력이 차단되지 않는 이상 나갈 일 없다.

문이 닫히면서 수명이 절로 다했을 리는 없고, 공기 중의 마력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복도에서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빛도 사그라들었다.

완전한 암흑이었다.

철컥—

레오가 바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렸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잠겼다는 걸 깨달은 순간 방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율리아, 레오. 너희 방금 밖에서 사람 마력 느꼈어?”

“아니.”

“…전혀. 애초에 이 건물에는 우리밖에 없었어.”

나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명백했다.

당초 계획대로 면대면으로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드디어 나왔네, 이 새끼.’

편지 외의 행동을 보였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이제,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