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20)
“쉬어야 하지 않을까?”
의외의 대답이었다.
나는 눈썹을 올리며 그 말을 한 사람을 바라봤다.
나르케였다.
‘…레오가 그러지 않으니 이제는 나르케가 그러는군.’
처음 만났을 때 비해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변화했는지 느껴진다.
회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레오는 이제 나를 온전히 믿기 때문에, 또 내가 그와 한 약속을 믿기 때문에 나를 지지한다. 내가 이전보다 더 그를 믿는 것처럼, 그도 고작 아티팩트 때문만은 아닐 터다.
겉으로는 그래 보이지 않지만 남에게 무심해 누가 무엇을 하든 웃으며 방관하는 나르케는 이제 나를 말리고 있다.
시간이 흘러 관계가 변하며 내가 알던 이들의 다른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웃자 나르케가 곤란한 듯 눈썹을 좁히며 미소 지었다.
“오늘 너무 무리했어. 계란도 닦아야지. 머리랑 얼굴에 많이 묻었잖아.”
“아,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은 말고.”
나는 나르케의 장갑에 묻은 계란 흰자를 털어 내며 말했다.
“난 이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 도와줄래?”
“…….”
나르케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눈을 뜨자 내가 도착한 곳은 학군단 기숙사였다.
나는 하얀 건물 안으로 들어가, 3학년 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무작정 한 방을 두드렸다.
“누구… 아.”
한 3학년이 나를 보자 뒷걸음질 쳤다.
그의 시선이 내 비틀어진 모자와 눈과 어깨로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나는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관찰에 이제야 구역감을 느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나긋나긋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내 목소리에 영혼이 없었는지, 그가 다시 한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예…. 왜요?”
“종이랑 펜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종이…?”
3학년은 내 뜬금없는 부탁에 당황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빤히 보고만 있자, 그는 금세 안에서 손바닥만 한 메모지와 만년필을 가져왔다.
나는 글을 갈겨 적고 그에게 넘겼다.
“부탁합니다.”
3학년이 쪽지 겉면에 적힌 글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옆으로 향해 3학년 휴게실로 향했다. 복도에 지나다니던 다른 3학년 학생들이 내 표정과 옷을 보고는 당황스러워하며 비켜섰다.
그들이 나를 피한 이유는 내 표정이 이상하기 때문이며, 또 대부분의 학생과 국민들이 그렇듯 황실 소속을 상징하는 제복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2학년 1학기 학기 초의 그 구제 불능 플레로마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오히려 감개무량하게도 정반대의 뜻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신경을 긁기에는 충분했다.
나에게 잡힐 생각이 없는 그 범인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까부터 모든 것에 집중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하나씩 인식하고 넘어가는 이유는, 아마도.
나는 휴게실 문을 열었다.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감각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까마귀 하나가 날개를 펴고 활공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자,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앉은 자리가 이전의 자리와 같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끼익—
온통 까만 로브를 두르고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계란 냄새.”
“아세요?”
“비린내가 나는데 어떻게 몰라요.”
이 사람을 만나러 왔다.
변신 계열의 능력을 가진 내가 아는 유일한 마법사이자, 플레로마를 능가하는 공간 마법 기술을 보유한 단체의 마법사.
리히트호펜이 얼굴을 덮은 천을 턱 밑으로 내리고 로브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까 3학년에게 준 쪽지는 리히트호펜에게 공간 마법을 깔고 휴게실로 오라고 부탁한 쪽지였다.
범인이 감방에 가고 싶지 않은지 자꾸 몸을 사리니, 나도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줘야지.
“옷도 후배님 옷이 아니네요. 처음에는 잘못 들어온 줄 알고 놀랐습니다.”
“진짜 개코네요.”
“개니까요.”
뭐가 개야….
이 사람 자학 개그 하네. 카타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재미가 없는 건가 싶어 나는 정색하고 그를 바라봤다.
“하하하, 그 눈빛 좀 상처인데.”
“그냥 상처받으세요.”
그렇게 대답하자 리히트호펜이 미소 지었다.
“이제 좀 평소대로 돌아온 느낌이네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표정이 그래요?”
“계란을 맞아서요.”
“아, 그래요? 옆에서 구경했어야 했는데.”
“…….”
내가 할 말을 잃고 미소 짓기만 하자 놈이 웃었다.
나는 아까와 달리 미세하게 변한 공기의 마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리히트호펜의 공간 마법이 이 장소에 깔렸다. 범인이 아무리 나를 보려 해도, 내 이야기를 엿들으려 해도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더 대화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계란은 딱히 별생각 없고,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 그래 보이네요. 이 나라에 당신에게 계란을 던질 만큼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세요? 의외네요.”
“단순히 살짝 껄끄러운 것과 악의를 행동에 옮길 만큼 증오하는 건 다르니까요.”
내가 인식하는 내 이미지와 타인이 인식하는 내 이미지는 다른 모양이다.
안 그래도 내 상태창의 인상 점수도 상승세를 탔고, 생존 가능성도 한 달 만에 15%p나 올랐으니 이제는 예전과 다를 수밖에 없지.
다음 달 생존 가능성 상승분은 30%p 기대해 본다. 30%p를 얻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주먹이 덜 운다.
“스토커가 생겼습니다.”
“예?”
리히트호펜이 뭘 들었나 싶은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웃으려는 건지, 내 말을 못 믿는 건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인류한테 스토커라….”
“저도 놀랍네요.”
“스토커가 아니고 암살자이지 않을까 싶은데. 황실 소속의 마법사들에게는 암살 위험이 자주 따라붙죠.”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 온 계란이었던 쪽지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리히트호펜이 비린내 때문인지 인상을 썼다.
“으….”
“개들은 음식 냄새 좋아하지 않나?”
“사람이라서요.”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읽어 보세요.”
리히트호펜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내가 아직 풀지 않은 쪽지였다.
“…생각해 봤는데 그 분홍색 눈이 유전되면 좋을 것 같아요. 마력이 분홍색이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내 눈 색이 유전된다면 폐기하고 분홍색 눈이 나올 때까지 계속 합성해야겠습니다.”
“…….”
리히트호펜이 그대로 굳어 있다가 못 만질 것을 만진 사람처럼 쪽지를 테이블에 던졌다.
“맞군요. 이게 뭐죠?”
“스토커라고 몇 번 말해야 해요.”
리히트호펜이 답지 않게 내 표정을 살폈다. 그가 평소처럼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색이 좀 독특하긴 하죠. 사람들은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과 별개로 마력 탈취당하지 않게 조심하시는 게 좋겠군요.”
“위로를 특이하게 하시네요. 그건 됐고 부탁이 있습니다. 개로 변해 주실래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예의를 차려 빌드업할 기력이 없어 그냥 쭉 무미건조한 투로 내뱉었더니, 상당히 당황스럽게 다가온 모양이다.
“…개로 변해 보라고요?”
“실례라는 걸 알지만 한번 부탁드립니다.”
“흐음….”
리히트호펜이 뭔 어이없는 말을 다 듣겠다는 듯 웃더니 나를 훑었다.
“왜요.”
“아니, 해 드려야죠. 안 했다가 코어를 터트릴지 어떻게 알고?”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
그가 의뭉스러운 미소만 짓고 있기에,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제야 리히트호펜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그가 헛웃음을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기분이 나쁜데.”
“선배님께서 그런 사람인 걸 어쩌겠습니까.”
강제해야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다.
카타콤에서도 저주술에 가까운 자경단장의 시야 공유 마법을 스스로 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경단장의 뜻에 순응했다. 갈수록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걸 느끼자 하극상을 주도하긴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강제를 핑계로 대며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본심과 당위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는 거겠지.’
지금 이 경우에는, 자신이 아는 자신은 자신의 동물화 능력을 혐오해야 마땅한데도 현재의 본심은 딱히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괴리가 생긴 것일 테다. 그러니 내게 코어를 들먹인 거고, 내가 공격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 잠시 제동이 걸렸겠지.
아무리 싫은 능력이라 해도 그의 일부다. 자신이 만든 자신에게 갇혔다는 걸, 매 순간 혐오만 하고 살 수 없다는 걸 알 터인데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내가 뭘 어째야겠는가?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갑자기 왜? 그 스토커가 나랑 같은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신인류면서 구인류로 변신했거든요. 거기에 또 다른 특수 능력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요.”
리히트호펜의 눈이 커졌다.
“…변신 능력?”
“예.”
“나뿐이 아니었군요.”
한참 침묵하던 리히트호펜이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운이 좋네요. 인간형 변신 능력자라니.”
그는 그렇게 받아들일 만하지.
나는 그에게 별말 하지 않고 기다렸다.
리히트호펜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게 말했다.
“인간형은 저와 조금 다를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딱히 다르지 않을 거라서요.”
그가 발을 한번 굴렀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뜬 사이 내 앞에는 사람이 아니라 새까만 늑대 크기의 개가 서 있었다.
암만 봐도 늑대로밖에 안 보이는 개가 내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자, 개가 놀리려는 건지 펄쩍 뛰었다.
콰앙—! 쿵—
나는 옆에 있던 나무 협탁을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 앞에 있는 개가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 앞에서 빙빙 도는 개에게 허탈하게 물었다.
“선배님 뭐 하세요?”
그 말에 개가 다시 사람으로 변해, 내 앞에 털썩 앉았다.
“개 무서워하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무서워하지는 않는데요.”
비주얼이 늑대인데 어떻게 안 놀라고 배기나?
저세상 한순간이다. 인간의 본능이 빨리 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리히트호펜이 바닥에 떨어진 검은 개털을 집어 들고 후 불어 날리며 물었다.
“그래서, 이 정도면 됐나요?”
“여쭐 게 좀 있습니다. 변신했을 때 마력이 세게 느껴지지는 않는군요.”
“컨트롤할 수 있거든요. 인간 상태일 때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진짜 동물과 분간할 수 없을 때까지 마력을 낮출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대강 대답하고 다시 물었다.
“마력 소모량은?”
“딱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수사국에서 아직도 잡지 못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저처럼 변신에 크게 마력을 소모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대단하시네요. 엘리아스 앞에 자주 그렇게 가 보세요.”
“하하하, 미운털 박히라 이건가?”
알긴 아네?
개인 줄 알고 열심히 쓰다듬고 놀아 줬던 엘리아스는 그날 구역질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한 번만 더 그렇게 나타나면 진짜 관계가 파탄 날 수 있을 것이다. 또 모르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유전이에요?”
“아뇨. 유전이었다면 진즉 자부심을 가졌거나, 해결책을 찾았겠죠.”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그런데 두 몸의 장기 배열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변신이 가능합니까? 교복은 왜 없다가 다시 생기는 거죠?”
“난들 알아요? 하지만… 예전에 카타콤에서 마법학 교수로 계시는 분께 가능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는 같은 성분의 코어를 가진 존재가 이 세계에서 교체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이 세계를 A세계라고 부르고, 우리가 알 수도 갈 수도 없는 마력만의 세계를 B세계라고 부른다고 쳐요. 이 둘은 공존하고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건 A세계뿐입니다.”
“예.”
3차원 세계에서 4차 이상의 고차원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신이 그의 권능을 우리에게 주었다는 신학적 해석 다음으로, 꽤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이다.
“개로 변할 때, 내 육신은 B세계로 이동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B세계에 있는 개가 A세계로 이동하는 거죠.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개의 몸은 막스 리히트호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겁니다. 물론 코어와 의식은 남고 말이에요. 그 탓에 저는 개에게 묶이니, 이 세계에서 개 상태로 감각을 느끼는 주체는 나지만요. 이제 교복 이야기도 해결되었겠지요?”
“아하… 그럼 코어가 핵심이라면, 개에게서 일부만 떼어 오는 건 안 되는 건가요? 선배님 후각을 보니 되는 것 같은데.”
“왜 떼어 와야 해요?”
“개로서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인간 상태일 때 냄새로 사람을 판별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개의 후각세포만 가져오는 건 안 되고 꼭 개로 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리히트호펜이 고개를 저었다.
“훈련이 잘된다면 능력만 가져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정말 말도 안 되게 피나는 훈련을 전제로 하지만요.”
“…뭐, 그래요. 어쨌든 능력은 굉장하군요.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무적이네요.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대로면, 개 상태로 치명상을 입고 바로 인간으로 돌아오면 인간의 몸에는 아무 상처도 남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개와 나는 각각 다른 개체니까요. 당신 스토커는 인간형 능력자니 사람 몸만 두 개나 쓸 수 있는 거죠.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 거고요.”
몸을 두 개나 쓸 수 있다.
사실상 B세계의 다른 몸을 가져와 거기에 빙의하는 것에 가깝겠다.
이 얼마나 좋은 능력인가. 공격받아 봤자 의미가 없다니.
그 능력자를 적으로 둔 나로서는 웃음만 나는 능력이다.
“그럼, 약점은?”
“개의 약점…? 그냥 다른 개들과 똑같겠죠. 아니, 애초에 인간과 크게 다를 게 있나?”
“능력을 못 쓰게 되거나, 아니면 변신했는데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내가 다시 한번 정확히 질문하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아~”
리히트호펜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러면서도 경계하는 눈으로 물었다.
“그걸 알려 주면 난 어떡하죠?”
“내가 니콜라우스라는 걸 제국신문에 알리세요.”
리히트호펜이 침묵하며 미소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그가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그럴 일 없다는 걸로 알아듣겠습니다. 변신했는데 마력이 고갈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마력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왜인지는 제가 아까 말씀드린 원리를 생각하시면 알겠지요.”
“경험담?”
“네.”
어쩌다? 마력이 자연적으로 고갈될 일은 거의 없는데, 인생 참 스펙타클하군.
어쨌든 값진 대답이었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으며, 말 한마디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뽑아낼 수 있는, 그런 정보였다.
이래서 자원은 최대한 많이 쌓아야 한다. 우리의 아군이기는 했지만, 처음 리히트호펜이 우리에게 술을 먹였을 때 우리가 보복한답시고 그를 저세상으로 보내 버렸다면 지금 이런 정보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무작정 보내 버리는 건 하수나 할 짓이지.
나는 후련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요. 더 물을 건 없나 보죠?”
“예. 없습니다.”
“그자를 만나면, 내게도 만나게 해 줄 수 있나요?”
“…….”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의도는 알겠다.
능력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희망을 거는 거겠지.
확실히, 능력을 없애기 위해 귀족 신분으로 카타콤까지 들어가 10년 넘게 살아온 그에게는 한번 심문해 봄 직한 사람일 것이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나는 이제 가 보겠습니다.”
리히트호펜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손뼉을 쳤다.
“아, 당신들 임무 바뀐 거 알아요?”
“예?”
“에스체트 말이에요. 내일부터 우리랑 똑같이 9급 폭주자 처리를 맡는다던데.”
처음 듣는 소식이다.
내가 눈썹을 올리자, 리히트호펜이 헛웃음을 쳤다.
* * *
“폭주자 처리 맡자마자 신기록 찍었네.”
“얘네 오늘만 열 건 한 거 맞아? 어제부터 한 거 아니고?”
“미쳤네….”
다음 날.
학군단 총괄 지휘 본부, 울리케와 나는 완전히 땀에 절어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다른 팀 학생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종이를 들고 떠들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미치긴 했지.’
9급 폭주자는 그리 어려운 수준의 희생자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셋씩 짝지어서 세 팀을 만들고, 신고가 들어오는 대로 제일 먼저 선수 쳐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에 각각 서너 건씩 처리하는 건 미친 짓이었던 게 분명하다.
오늘은 호감도를 위해 울리케와 같은 팀이 되었다. 놈이 날 레오와 짝지으려 했지만, 오늘만큼은 거절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 과정에서 울리케는 내게 호감도를 2점이나 더 줬다.
‘역시 오래 붙어 있는 게 최고다.’
위기 상황에서는 더 친밀해지기 쉽다. 우리 둘 다 마법 쓰는 걸 좋아하니,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도 있고. 울리케의 전투 감각이 뛰어나 큰 마찰 없이 일을 끝낸 것도 한몫했다.
문제는 아직도 7점.
5점이나 더 남았다는 점이다.
하이케에게서 좀 더 올리면 좋으련만 놈은 내게 호감도를 주지 않았다.
놈과 따로 만나서 놀아야 하는 게 분명하다.
복도를 지나 우리 팀 친구들이 와 있을 회의실 문을 열기 전, 나는 울리케에게 손을 펼쳐 내밀었다.
“오늘 수고했다.”
“너도. 아, 우리 오늘 진짜 일다운 일 했다.”
잡일도 일인데… 여태까지 했던 건 하기 싫었다 이건가.
나는 그다운 발언에 작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 울리케는 짧게 내 손을 쳤다.
“그런데 이거 율리아가 너한테 자주 하던 거 아냐?”
“아, 옮았네.”
“하하하! 그래, 다 같이 친해지면 좋지.”
울리케가 웃으며 문을 열었다.
우리가 제일 늦게 끝냈는지, 팀원들이 모조리 이곳에 몰려 있었다.
레오는 내게 어제 바덴 어쩌고 했던 것과 달리, 프로 정치인답게 금세 평정을 찾았다. 인사 한번 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엘리아스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들었다.
“왜 이렇게 늦어!”
“우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출동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나는 종례를 마치고 이곳에 와 있는 담임 교수에게 인사했다.
담임 교수가 허허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고 우리의 내일 일정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앞으로 한 달간 8~9급 폭주자 처리에 투입되고, 베를린을 넘어 브란덴부르크 전역을 맡게 됐다.
그리고 곧 있을 개막식 하루만 다시 펜탈론 주경기장으로 이동한다.
광고용으로 써먹을 계획은 여전한 듯했다. 그 외의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이제 내 새로운 계획만이 남았다.
놈에게도 대가리가 달려 있었다는 걸 간과했던 어제와 달리, 실패를 거울삼아 보완하고 리히트호펜에게서 얻은 정보를 적용한 처리 계획.
놈이 감방에 가고 싶지 않아 머리를 쓴다면 나도 새롭게 써 주는 수밖에 없다.
이제 남은 건 실행 시기였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펜탈론 직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할까, 아니면 재료가 준비된 뒤 바로 실행해야 할까.
하지만 그건 내가 놈의 광기를 저평가해서 한 쓸데없는 고민일 뿐이었다.
그날 새벽 4시.
[계획이 바뀌었어. 우리 오늘부터 다시 주경기장으로 가야 해. 아니, 정확히는 그랜드호텔하고 황립 중앙병원.]
“…….”
나는 아티팩트 너머로 레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분홍색 쪽지를 내려다봤다.
저택에 와서 같이 깨어 있었던 엘리아스와 나르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했습니다. 나 때문에 결국 폭주자 처리나 맡다니…. 당신을 복귀시킬 방법으로 골라 봤습니다. 이제 다시 편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당신에게 궂은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만나서 사과하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겠죠.]
그 복귀시킬 방법이란 일반적으로는 절대 생각하지 못 할 짓이었다.
나는 쪽지를 옆으로 치우고 그 아래의 기사를 읽었다.
[알렉산더 광장 그랜드호텔, 해외 국가대표선수단 18명 폭주 사망-9명 중환자실 이송]
‘마음 같아서는 만나서 사과하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겠죠’?
누구 마음대로 그럴 수 없는가? 이렇게 된 이상 만나서 사과를 듣는 수밖에 없다.
레오와의 연결이 끊겨, 엘리아스와 나르케는 아티팩트를 완전히 종료시켰다.
레오는 이제 내게 개인 회선으로 연락했다. 내 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
“그래.”
왜 그가 내게만 다시 연락을 했는지는 명백했다. 어차피 둘을 제외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시간이 되겠지만, 그는 철저했다.
“시간 벌어 줄 테니까 지금 바로 내가 12월 초에 썼던 약 하나만 구해다 줘. 장부 뒤지면 나올 거야.”
[알겠어.]
그래, 좋다.
아직 나만은 레오와 연결이 끊기지 않았다는 걸 안 엘리아스와 나르케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재시도 창을 열며 말했다.
“이따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