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화 (1/206)

프롤로그

"치킨 먹고 싶네"

마지막 힘을 짜내 내뱉은 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3류 재난 영화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포칼립스에서 32년을 버텼다.

그래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내가 지옥 같은 아포칼립스에서 32년을 버텼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나보다 강한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나보다 오래 버틴 사람은 없다.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살아있는 인간을 본 지 3년은 넘었으니까.

죽지 못해 살았다. 그저 버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버티다 보면 게임처럼 짜잔!하고 엔딩이 나온다거나 거대한 생존자 세력이 나를 구하러 올 거라는 그런 희망 따위도 가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 버티기도 끝이다.

우습게도 내가 죽는 이유는 좀비 때문이 아니다. 아포칼립스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원인인 굶주림도 아니었다.

암이다. 이 빌어먹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나는 암으로 죽는다. 모든 문명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문명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의 병으로 죽는다.

몸에서 갑자기 힘이 훅 빠진다. 죽을 정도로 다친 적도 몇 번인가 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이게 죽음인가?

여한 같은 것은 없다. 서서히 눈이 감긴다.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라는 메시지가 지나가듯이 보인 것 같다. 밑에 몇 줄이 주르륵 올라왔지만 자세히 보지 않았다. 죽는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렇게 죽었다.

1. 새로운 나

정정한다. 죽을 때 스쳐 지나가듯이 보였던 메시지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마도 마지막 생존자였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몇 줄인가 주르륵 올라왔던 메시지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읽지 않았으니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쨌든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변경백의 기사로서 준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가문의 차남으로 다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하나가 있는 나름 화목한 가정이었다.

전생의 삶에서도 가족이 있었다. 대격변의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되진 않았고 그 이전에도 화목한 가정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무뚝뚝하지만 잔정이 많은 전형적인 기사인 아버지와 잔소리가 많지만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5살 위의 형은 막내인 나에게 가족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해주었다.

전생에 판타지 소설에서 보면 어딘가 차남으로 환생을 하면 가문의 계승권을 가지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그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적어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형과 사이는 좋았고 어머니도 계모가 아니며 애초에 준남작은 계승 작위도 아니다.

물론 가주가 은퇴할 때 자식들의 성취가 어느 정도만 된다면 준남작의 작위를 다시 내려주는 경우가 흔하지만, 확실히 계승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형은 어릴 때부터 검술에 재능이 있었다.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즉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부모님은 그래서 어려서부터 나에게 이런저런 교육의 기회를 많이 주었다. 어떤 것은 아버지의 봉급으로 빠듯할 정도로 비싼 교육들이었다.

형은 검술만 집중해서 아버지의 뒤를 이으면 되지만 나는 스스로 먹고살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잘하는 재주를 찾아주려는 노력에 맞춰서 나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몇 가지 소문을 달고 살았다.

여러 방면에 두루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소년 그것이 나였다. 누군가를 해친 적이 없고 천재들은 원래 괴짜라는 식으로 넘어가긴 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으니 어려서 남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에 전생의 기억과 별책부록처럼 같이 딸려온 여러 가지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내가 다시 태어난 이곳은 확실히 전생의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검과 마법이 지배하는 중세 판타지와 비슷한 세상, 하지만 마법 덕분에 완전히 중세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

돈만 많이 있다면 전생의 대격변이 오기 전의 현대적인 문명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대단히 많은 돈이 필요해서 수입이 많은 대귀족 정도나 가능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알려진 탓에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가본 변경 백의 저택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변경 백은 나를 제법 좋게 봐서 변경 백 가문의 가신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덕분에 변경 백 가문의 서재를 꽤 자주 이용할 수 있었고 행정관이나 집사에게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교육이자 일종의 평가이기도 했다. 평가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어딘가 이상한 아이.

일부러 그것을 노리기도 했다. 왜냐면 나는 변경 백 가문의 가신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녀석 때문이다.

“빅터 하네스”

“안녕하십니까. 소영주님”

변경 백 가문의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그놈이 다가왔다.

“네놈은 이제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드는구나?”

마리오 크리스타, 변경 백의 장남이다. 형과 동갑인 녀석인데 이 녀석은 대놓고 나를 싫어했다.

“백작님의 은혜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책을 덮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해야 그나마 조용히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흥, 그것은 아버지께서 네놈이 우리 가문의 가신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하지만 네놈의 시커먼 속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가신이 될 생각은 없지만 시커먼 속도 없다. 조용히 떠날 생각이다. 물론 마리오 녀석이 내 속마음을 간파하고 하는 말도 아니다.

녀석은 그저 질투할 뿐이다. 녀석은 형과 동갑으로 나와 다섯 살 차이가 나지만 영지 내에서 나름 천재로 불리는 나와 비교를 당해왔다. 한마디로 내가 녀석의 엄친아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내가 마리오 녀석이라고 해도 나를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조금 더 괴롭힘이 심해졌다. 그래서 본래 떠나려고 했던 계획을 대폭 앞당겼다.

원래 성년이 되면 집을 떠나려고 했지만 몇 년은 앞당겨야 할 것 같다.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이럴 때는 그냥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면 된다.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하긴 하지만 이것이 수십 년 전의 회사원일 때 터득한 꼰대를 상대할 때 최상의 방법이다.

“흥! 명심해라 내 너를 항상 지켜보겠다.”

웬일로 손찌검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녀석의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살기가 보였다. 이제 백작가의 서재도 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볼만한 책은 모두 보았다. 오늘 온 것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확인을 위해 잠시 들른 것일 뿐이다.

마리오가 떠난 후 보던 책을 마저 확인한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평소와 다르게 집안의 분위기가 달랐다.

원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백작님의 서재를 다녀온 것이냐?”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있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기사단에 있어야 했다.

“네, 그런데 아버지는 일찍 돌아오셨군요?”

“다음 주에 마수 토벌을 나간다고 하더구나. 준비할 것이 있어서 조금 일찍 퇴근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시기가 되었다. 이곳 변경 백의 영지에서는 봄과 가을에 주변의 마수들을 토벌하여 수를 줄인다.

여름과 겨울에는 군사가 출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토벌해 숫자를 줄여야 사람에게 해를 덜 끼치게 된다.

마수라는 것은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나 한때는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전생의 세상이 생물이 변화한 변이체들에 멸망했다면 이곳에는 마수가 존재한다.

전생의 인류에게 과학의 힘으로 만들었던 화약 병기가 있었다면 이곳에는 오러와 마법이 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이곳의 마수들보다 전생의 변이체가 훨씬 더 강하다. 물론 대격변 초기에는 특별히 강한 변이체들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저히 대적 불가능한 변이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는 미국에서 핵무기로 제거하는 데 실패한 개체도 있었다고 한다.

변이체들이 강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인간의 화약 병기는 소모되는 양이 더 많았고 대격변 후 20년쯤이 지나면서 총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이곳 세상에는 오러를 사용하는 무인들과 마법사들이 있다. 인간의 전력은 이곳이 훨씬 위고 마수들은 변이체보다 약하다. 한마디로 전생에 비한다면 훨씬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는 형도 갑니까?”

“그래, 이번에는 저스트도 데려갈까 한다.”

형의 나이는 17살 이제 성년도 1년밖에 남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전투기술을 훈련받았으니 어지간한 병사들보다는 훨씬 강하다.

“저도 갑니까?”

“그럴 리가. 너는 아직 멀었다.”

데려갈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한번 해본 소리다. 나도 마수와 한번 싸워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수들의 시체는 제법 봤지만 살아있는 마수를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이곳 크리스타 변경 백의 영지에서 나가본 적도 없다. 아쉬운 부분이었다.

나도 7살부터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았다. 보통 아이들과 달리 강해지는 것에 강박증이 있는 나는 매우 진지하게 수업을 받았다.

30년이 넘게 하루하루 생존에 집착하다 보니 강해지는 것에 강박증이 생긴 것이다.

덕분에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강하다. 적당히 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생존에 필요한 일이었다.

생존자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힘을 모두 보여준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놈들은 대부분 일찍 죽었다.

“그래 요즘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느냐?”

나는 부모님의 지원으로 꽤 광범위한 부분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에게는 무력과 관련된 것을 배웠고 백작가의 가신들에게 행정과 회계를 배웠으며 초빙해온 스승에게 예술 부분까지 배웠다. 모두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내가 깊은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지금은 스스로 배움을 채우고 있는 수준이었다.

아버지가 준남작이 아니라 영지가 있는 남작 정도만 되었다면 아카데미 같은 곳에라도 갔겠지만, 우리 집이 그 정도로 부유하진 못했다.

“마법 쪽에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쪽으론 제대로 된 스승을 구해주기가 어렵다. 미안하구나.”

마법사는 비싸다. 백작가에 소속된 마법사가 있지만 작은 배움이라도 청하려면 집안의 기둥뿌리가 휘청거릴 것이다.

“아닙니다. 그저 작은 흥미가 있을 뿐입니다.”

물론 대답과는 달리 제대로 된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법사는 비싸다. 그래서 마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독립을 했을 때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백작가 서재에 있는 기초 마법서로 마법을 독학하기 시작했고 입문 수준 정도는 되었다. 물론 이것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백작가의 가신이 될 것이다. 물론 그전에 질투의 화신인 마리오 놈이 나를 지독히도 괴롭힐 것이다.

아버지와의 대화 이후에 금세 형이 집에 돌아왔고 나와 달리 매우 활발한 성격의 형은 첫 출전에 흥분해서 집안이 떠들썩하게 변했다.

저녁 식사가 평소보다 조금 더 호화스러웠고 조금 더 시끌벅적했다. 나는 그런 평화를 즐겼다.

밤이 되어 내방에 돌아와 혼자가 되어 침대에 눕자 다시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아주 오랜 기간 생존에 급급하여 피폐한 생활을 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 이런저런 정신질환을 앓았다. 치료는 꿈꿔본 적도 없다. 생각해보면 자살하지 않았던 것이 용했다.

그 반동이 새로운 생을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혼자가 된 밤에 심했다.

이런저런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지쳐 잠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고 3년 정도 살았던 태백산 기상센터가 보였다. 그런데 묘하게 달라진 것들이 있었다.

기상센터 안의 모든 것이 조금 더 오래되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나는 기상센터 안을 돌아다녔다. 내가 심었던 작물들과 내가 목숨을 걸고 모아두었던 여러 가지 물건들을 확인했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모든 물건이 시간이 주는 시련을 받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전생에 관한 꿈을 꾸는 것은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변이체에 쫓기다 죽는 꿈은 익숙할 정도다. 한때 동료였던 사람을 죽이는 꿈도 있었고 배신을 당해 죽는 꿈도 있었다.

때로는 내가 죽였던 사람들이 변이체로 나타나 나를 쫓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꿈 만큼은 특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생활했던 방으로 갔다.

“음···.”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곳에는 전생의 내가 누워있었다. 물론 시체다. 직접 내 시체를 보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마치 미라처럼 바싹 마른 채 내가 숨을 거두었던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바싹 마른 미라이지만 내가 죽었을 때의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 원망, 억울함, 슬픔

고통에 몸을 잔뜩 웅크린 미라의 얼굴에는 그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을 조금이라도 펴주고 싶었다. 그렇게 손을 뻗는 순간 잠이 깼다.

분명히 잠이 깼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내가 보았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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