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2화 (2/206)

2. 나는 돌아왔다.

‘뭐지? 잠이 덜 깬 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봤으나 변하지 않았다.

‘혹시 아직 꿈인가?’

그런 경험은 이미 많이 있었다. 아주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볼을 살짝 꼬집어 보니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꿈인가?’

침대에서 내려오다 발을 잘못 놀려 침대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찧고 말았다.

“끄흡!”

새끼발가락에서 시작된 아찔한 통각작용이 뇌까지 직통으로 이어져 비명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고로 이것은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치 둥그런 거울처럼 전생에 내가 사망한 모습이 보이는 그것의 옆으로 슬쩍 돌아가 보았다.

그것은 전혀 두께가 없는 것처럼 옆에서 보니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놀랍게도 뒤편에서는 저쪽 세상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건 새로운 정신병인가?’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내 정신상태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다시 앞쪽을 돌아오니 여전히 미라가 되어버린 전생의 내 육체가 보인다.

전생과 현생의 지식을 모두 총동원해 생각해봐도 이런 종류의 정신병이 있던가? 내가 정신과 의사도 아니었는데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전생에 미쳐버려서 환각을 보는 생존자들을 여럿 보긴 했지만, 지금의 나와는 증상이 전혀 달랐다.

나도 모르게 그 거울과 같은 면으로 손을 움직이다가 멈췄다.

무슨 판타지 소설처럼 손을 대자마자 쑥 빨려 들어가거나 하면 어쩌지?

저 지옥 같은 세계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방의 구석에 세워둔 수련용 목검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찔러보았다.

목검의 끝이 거울을 통과해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다. 목검을 빼자 다시 이쪽 세상으로 넘어왔다.

이번에는 곧 버릴 예정이었던 장난감을 가져왔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줬던가 하는 못생긴 인형이었는데 아버지에겐 미안하지만 한 번도 가지고 놀아본 적이 없다.

못난이 인형을 저쪽 세상을 향해 휙 던졌다. 못난이 인형은 몇 년간 침대 머리맡에서 구속되어 있던 한을 풀려는 것인지 팔과 다리를 아주 자유롭게 펄럭이며 날아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거울을 통과해 저쪽 세상의 바닥에 떨어졌다.

거울의 뒷면으로 가서 확인했으나 그곳에는 못난이 인형이 없었다.

‘환각이 아니구나.’

다행스럽게도 정신병이 아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이걸 누군가 본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갑자기 전생의 세상과 통하는 통로가 생긴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는 이상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믿어줄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눈에 보이는 실물이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꿈에서 보고 갑자기 생겨났으니 다시 잠을 자야 할까? 아니다.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짓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는 것은 사양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저쪽 세상의 통로를 노려봤다.

‘저거 그냥 없어지진 않겠지? 부탁이다. 좀 없어져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라졌다.

“뭐지?”

너무 허무하게 사라지는 바람에 오히려 당황했다.

‘그럼 다시 나오라고 생각하면 나타나나?’

하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키워드가 이게 아닌 건가? 그럼 부탁이다. 나타나라.’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앞에 다시 그 통로가 나타났다.

부탁한다는 키워드가 들어가야 하는 모양이다. 대체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모양이다.

다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통로를 사라지게 한 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물건이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확인했다. 그렇다면 나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전생의 세상을 왕복할 수 있다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꽤 여러 가지가 있다. 지금의 나에겐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전생의 나는 여러 가지 물건 수집에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저 태백 기상센터에만 해도 내가 모아둔 물건들이 상당히 쌓여있다. 물론 죽기전까지 그것을 제대로 써먹어 본 적은 없지만, 그것들을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이건 생각보다 대박일지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만약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전생의 나는 대격변 이후 32년을 살았다.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변이체들과 적대적인 생존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지만 자살하지 않았던 것이 더 기적이다.

그런데 지금 몸으로 저쪽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면 12살의 내가 저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남겨진다면 혼자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걸까? 그때는 정말 자살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꾹꾹 눌러두었던 정신질환들이 실시간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침대로 뛰어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전생에 있었던 불면증이 다시 찾아온 모양이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나는 아침나절에 집에서 공부를 조금 하는 척 했다. 아니 실제로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모아둔 용돈 조금을 가지고 시장에 갔다.

시장을 조금 둘러보던 나는 여러 가지 가축을 파는 상인에게서 병아리 두 마리를 샀다.

개나 고양이를 살까 생각도 했었지만 일단 병아리보다 훨씬 비싸기도 하고 혹시라도 잘못되면 치우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병아리를 산 것은 과연 생물도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올 수 있느냐 하는 실험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트 안에 숨기긴 했지만, 병아리 두 마리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오자 하녀인 마틸다에게 바로 걸려버렸다.

“도련님 그걸 어디에서 키우시려고 가져오셨어요?”

“친구가 잠시만 맡아달라고 해서 하루 이틀만 데리고 있을 거야. 어머니에겐 모른 척해줘”

마틸다는 형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다. 형과 나에게는 유모이자 두 번째 어머니와 다름없는 존재다.

마틸다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나는 마틸다가 바로 어머니에게 일러바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눈 감아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내가 말했던 하루 이틀 정도는 어머니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작은 동물을 집에 들고 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형인 저스트도 어렸을 적에 더러운 길고양이를 잡아 왔다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혼난 적이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길고양이는 형이 땅에 내려주기가 무섭게 밖으로 도망갔었다. 그것에 비한다면 병아리 두 마리는 얼마나 귀엽고 정상적인가?

예상대로 마틸다는 나를 보내주고 난 후 곧바로 안주인인 마리를 찾아갔다.

“작은 도련님이 병아리 두 마리를 안고 오셨어요. 친구가 며칠만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면서요.”

“풉!”

마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에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천재라도 아이는 아이인 거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니까.”

“작은 도련님에게 친구가 없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나저나 정말 친구를 사귀셔야 할 텐데요.”

“병아리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금방 닭이 될 텐데요. 잡아먹을 때 울지나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어머니인 마리와 하녀 마틸다가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아주 성공적인 병아리 밀수 작전을 자축하고 있었다.

밤이 되고 나는 밖이 조용해지자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옷장에 넣어둔 병아리들을 꺼냈다. 잠을 자던 병아리들이 깨어나 삐약거리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실험은 금방 끝날 것이다.

‘부탁한다. 나타나라.’

생각하기 무섭게 옷장 안에 통로가 열렸다. 지난밤 시험을 할 때 통로가 같은 자리에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열리는 자리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제 혹시라도 갑자기 누군가 들어온다면 옷장을 닫아버리면 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됐다. 물론 생각만 해도 사라지기에 큰 걱정은 없지만,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오랜 습관이다.

병아리를 안으로 살짝 던져보았다. 아직 내 신체 일부를 통로에 직접 닿게 하기는 거부감이 든다.

그런데 병아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넘어가질 못했다. 병아리가 워낙 가볍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살짝 던졌기 때문에 병아리가 다치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란 것인지 울음소리가 커졌다.

‘뭐지? 뭐가 다른 거지?’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제 안으로 던졌던 못난이 인형은 여전히 저쪽 편에 남아있었다.

‘생물의 경우에는 넘어가는 방법이 다른 건가?’

남은 방법은 하나다. 병아리 한 마리를 손 위에 올리고 통로 안으로 손을 뻗었다.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는 손끝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기후의 문제가 아니다. 대격변 이후로 그런 느낌은 점점 강해졌었다.

손과 함께 병아리가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다. 나는 병아리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고 손을 뺐다.

생물이 넘어갈 때는 내 신체 일부와 함께 넘어가야 하나 보다. 이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이용할 수 있을 듯 하다.

나머지 한 마리도 저쪽 세상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준비해두었던 빵가루를 안에 뿌려주었다.

며칠은 지켜볼 생각이다. 예전 무슨 영화에서 보았듯이 다른 문명에 노출된 생물은 아주 작은 바이러스에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

그리고 대격변이 일어난 후 세계는 알 수 없는 무언가 생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물론 전생의 나도 그런 영향을 받았었다.

며칠 동안 나는 빵가루와 물을 저쪽 세상에 넣어주며 병아리들을 지켜보았다.

병아리들은 생각보다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집에 가져왔던 병아리들을 어떻게 했느냐고 어머니에게 추궁을 당했다. 나는 다시 친구에게 돌려줬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믿지 않았고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하찮게 대해서는 안 된다면서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아마도 내가 병아리들을 죽이거나 어딘가 갖다버렸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정작 그 병아리들은 아주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 무척 억울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와 형이 봄맞이 마수 토벌 때문에 집을 비우고 출진했다.

매번 아버지가 토벌전에 나설 때마다 눈물로 배웅하는 어머니가 이번에는 형이 추가되면서 눈물을 두 배로 흘리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형은 첫 전투를 치를 생각에만 빠져 잔뜩 흥분하고 있어서 불효자를 응징하기 위해 몰래 뒤로 다가가 엉덩이를 발로 차 주었다가 꿀밤 세 대를 맞았다.

5년만 내가 일찍 태어났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참기로 했다.

아버지와 형이 떠난 날 다시 불면증이 찾아왔다. 옷장을 열고 저쪽 세상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빵조각을 쪼아먹고 있는 병아리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의 경험으로 이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매우 잘 가는 일이다.

전생에 어떤 수학자가 비둘기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새로운 이론을 떠올렸다고 하던가? 병아리 두 마리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나도 수학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병아리들이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움직인다.

한쪽 구석에 있는 전생의 내 시체 물론 그것에 딱히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병아리 똥을 맞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저쪽 세상으로 언젠간 들어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도 있었다.

안으로 한 발자국을 떼었다. 잠시 몸이 멈칫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몸이 조금 굳었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공포심을 억누르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싸늘한 기운과 함께 너무나 익숙한 느낌의 퀴퀴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돌아왔다. 빌어먹을 멸망한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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