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과거를 묻다.
잠시 감회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린 건 나를 어미 닭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병아리들이 발밑에 와서 비비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을 잠시 밀어두고 전생의 나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꿈에서 봤던 것처럼 여러 가지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이 보였다.
특별히 장례를 잘 치러주기는 뭐하지만 그대로 놔두기는 마음에 걸렸다.
내가 나의 장례를 치르다니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딱히 예를 차리거나 거창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깔려있던 이불을 둘둘 말아서 땅에라도 묻어줄 생각으로 시체를 옮기려고 손을 대는 순간 오싹한 기운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온몸의 감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에게는 매우 익숙한 느낌이다. 대격변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부터 생겨난 능력이다.
모두에게 생겼던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뭔가 하나씩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 생기고는 했다.
나는 이것을 위기감지라고 스스로 이름 붙였었는데 내가 32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의 9할은 이 능력 덕분이었다.
위기감지라고 명명했었지만, 정확히 설명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초감각이다.
그것이 지금 전승되었다고 해야 할까? 전생의 나에게서 옮겨진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잠시 새로워진 감각에 적응한 후 나는 원래 계획대로 내 전생의 육체를 이불로 둘둘 말아서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온 후 어디에 묻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양지바른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안에서 땅을 팔만한 도구를 꺼내와 땅을 파고 시체를 묻었다.
그리고 묘비로 용케도 썩지 않은 책꽂이의 칸막이를 떼와서 이렇게 적은 후 묘 앞에 꽂아 넣었다.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 강한수 이곳에서 과거가 되다.-
그리고 나는 그 강한수의 현재인 빅터다.
전생의 내 묘를 만드는 것만으로 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서둘러 돌아갔다.
통로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다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 문제 없이 내방으로 돌아왔다.
땅을 파느라 몸을 써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매일 밤 멸망한 지구를 방문했다. 가는 김에 병아리들이 먹을 것과 보충해주고 낡아서 망가진 기상청의 이곳저곳을 수리했다.
이것은 혹시라도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눈에 띌 각오를 하고 도망칠 수단이 될 수 있기에 안에 여러 가지 물품들을 조금씩 옮겨놓기도 했다.
위기감지 능력을 다시 얻었기 때문인지 매일 밤 지구를 오가기 때문인지 몰라도 불면증이 사라졌고 악몽도 꾸지 않게 되었다.
밤에 지구로 건너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잠을 자는 시간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원래 불면증과 악몽으로 잠이 적었기 때문에 오히려 잠을 푹 자는 지금이 더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나는 멸망한 지구에서 느껴지는 그 서늘한 기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지구로 건너가 병아리들과 노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앉아서 오러심법을 시작했다.
이것은 아버지에게 배워 7살부터 하루에 30분 정도는 늘 해오던 것이었다.
하네스 가문의 오러심법은 사실 그리 좋은 마나심법은 아니다. 좋은 오러심법의 조건이라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일단은 오러를 쌓는 속도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네스 가문의 오러심법은 아무리 잘 쳐줘도 중하급 혹은 하급 정도에 불과했다.
다만 아버지의 말로는 하네스 오러심법으로 쌓는 오러는 매우 깨끗하고 정순해서 종합적으로 보면 중급이라고 했지만, 그냥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외에 좋은 오러심법이라고 하면 오러에 특성을 부여하는 아주 특수한 오러심법이 있지만 당연하게도 하네스 오러심법은 전혀 그런 기능이 없었다. 하네스 오러심법이 그렇게 좋은 것이었다면 아버지가 준남작일 리가 없지 않은가?
‘이게 뭐지?’
어쨌든 나는 지구에서 오러심법을 처음으로 돌려보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구에는 마법이 없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당연히 지구에는 마나가 없거나 있어도 희박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오러심법을 돌리니 지구의 마나농도가 환생한 세계인 아노더스보다 월등히 높았다.
정확한 수치는 잘 모르겠지만 유입되는 마나를 생각하면 거의 10배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대박이다.’
이것은 진짜 엄청난 것이다. 고위 귀족가나 마탑 같은 곳에서 엄청나게 돈을 들여 유지한다는 최상급 마나집적진의 효율도 내가 알기로는 5배를 넘지 못한다.
나는 하네스 오러심법을 수련한 뒤 이번에는 마법 입문서에 있던 기초 마나심법을 시작했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오러심법이 숨을 통해 마나를 단전에 저장하는 것이라면 마법사들의 마나심법은 피부를 통해 흡수해 심장에 저장한다.
나는 기사보다는 돈이 되는 마법사 쪽에 흥미가 있었다. 다만 제대로 된 마나심법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런 농밀한 마나라면 기초 마나심법으로도 충분히 수련을 할 만했다.
보통 기사나 마법사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은 하나만 집중해도 대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있지만 엄연히 마검사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 평생 연공을 해도 6성 기사나 6서클 마스터가 되기 어려운데 양쪽을 동시에 수련하면 결국 3성 기사이자 3서클 마법사라는 어중간한 결과만 남기 때문에 잘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라면? 충분히 해볼만 하다 어쩌면 역사에 남을만한 마검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매일 밤 2시간이 넘게 오러와 마나심법을 수련했다.
그런 사이 아버지와 형이 토벌전에서 돌아왔고 첫 전투를 치른 형은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처음 조우한 마수에 놀라 칼도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큰입 메로 두 마리에게 거의 죽을 뻔 했다는 모양이다.
큰입 메로는 다리가 달린 아귀처럼 생긴 마수로 1미터 정도의 키에 짧은 다리가 네 개을 가진 마수였다.
몸의 절반 이상이 입이고 그 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달려있어서 물리면 큰 상처를 입히는 데다 짧은 다리를 가진 것치고는 제법 빠른 녀석이지만 마수 중에서는 거의 최약체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보통 숙련된 병사라면 한 마리를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다. 그런데 견습기사가 겨우 두 마리에 죽을 뻔했으니 망신스러운 일이긴 했다.
평소의 형의 실력이라면 대여섯 마리와 싸웠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형은 어쩌면 의외로 쫄보였던 건가?
나는 실의에 빠진 형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야수의 심장을 가져라.”
라고 위로해줬지만 돌아오는 것을 꿀밤뿐이었다. 기껏 위로해줬더니 돌아오는 것이 폭력이라 이번에는 조금 괘씸해서 우는 척을 하며 어머니에게 안겨 잔소리를 잔뜩 먹게 해주었다.
아이들의 시간은 빨리 간다던가 정말 무럭무럭 자랐다.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다.
병아리들이다. 병아리들이 먹는 것이라고는 내가 몰래 가져오는 빵과 야채 조각 조금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이미 병아리라고 할 수는 없을 정도로 크기는 이미 어지간한 닭이었는데 생긴 모습으로 보면 아직 성장이 끝난 것 같진 않았다.
혹시 내가 닭의 병아리가 아니라 다른 종을 사 온 것이 아닌가 해서 시장에 가서 확인까지 했지만 내가 사 온 것은 분명히 닭의 병아리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성장에 차이가 나는 걸까? 단지 지구에서 키워서? 그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대격변 이후로 가축들이 워낙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개나 고양이 같은 것들은 꽤 오래 그리고 많이 살아남았다.
오히려 개들은 야생화가 되면서 들개떼가 되어 인간을 사냥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몇 세대가 이어졌어도 변이나 진화를 했다는 소리를 듣진 못했다. 진화한 것은 오로지 변이체뿐이었다. 생물 들은 오히려 퇴화했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물의 생식능력이 퇴화하면서 식물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동물은 새끼를 낳지 못했다.
짐작하기로는 아노더스의 생물이 지구로 넘어가서 성장한다면 변이를 겪는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도 그것에 포함되야 한다. 하지만 아직 특별히 신체적으로 성장이 빨라진다거나 하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또다시 몰래 병아리를 몇 마리 더 구입해 지구에 넣어보았다. 이번에는 마틸다에게도 걸리지 않았고 집에 가져오자마자 바로 지구에 넣었기에 완벽한 작전이었다.
이번에 투입한 병아리는 5마리였다. 이번에도 특이한 성장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했다.
새로 투입한 병아리 5마리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원래 병아리가 닭이 되지 못하고 죽는 일이야 흔하니 환경이 바뀐 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실험을 중단했다.
병아리 말고 개나 고양이를 넣어본다면 확실한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굳이 지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너는 꼬일이고 너는 꼬이다.”
이미 닭이 되어버린 녀석들이지만 늦게나마 이름도 붙여줬다.
성장하면서 보니 꼬일은 수탉이었고 꼬이는 암탉이었다. 지구처럼 성별을 구분해 파는 것이 아니다 보니 다행히도 암수가 맞춰서 온 모양이다.
나는 소영주 마리오를 피해 웬만하면 집에서 나가지 않았고 어머니와 마틸다의 눈을 피해 지구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고 낮에도 지구에 넘어가고는 했다.
덕분에 오러홀과 마나서클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집을 떠나기 전에 확실히 오러는 3성급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마법은 2서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검술은 그나마 지구에서도 수련할 수 있지만, 마법은 1서클의 기초마법 외에는 아는 것이 없기에 제대로 된 마법서를 구하기 전에는 서클이 늘어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름이 끝나갈 즈음에 드디어 꼬이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꼬일과 꼬이의 덩치는 보통 닭보다 거의 두 배는 될 만큼 크게 자라났다. 덕분에 먹는 양도 늘어서 집에서 몰래 빵이나 푸성귀를 빼돌리는 것으로 감당이 되지 않아 용돈을 털어 닭 모이를 사서 넣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치킨을 만들어 버릴까 심각하게 몇 번 고민했지만 나름 정도 들었고 이름까지 붙여준 녀석들을 잡아먹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상연구소 바깥에 풀어놓으면 먹이값을 아낄 수 있겠지만 야생동물의 공격에 당할 수도 있었고 근처에 흔적이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위험한 변이체를 끌어들일 수도 있기에 용돈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덩치가 큰 만큼 꼬이의 알은 보통 달걀 크기의 두 배가 넘었다. 원래 초산에는 작은 알이 나온다고 하던데 그럼 나중에는 얼마나 큰 달걀을 낳게 될지 궁금했다.
병아리의 탄생을 기대하며 알을 수거하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꼬이는 아예 알을 품지 않았다. 무정란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꼬일과 꼬이도 생식능력의 퇴화를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럼 설마 나도? 고자가 되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아직은 아침마다 건강함을 몸이 증명하고 있고 오러와 마나의 성장이라는 이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꼬이가 낳은 알은 상하기 전에 먹기로 했다. 아노더스 쪽으로 가져가 마틸다에게 줄까 생각했지만 보통 달걀보다 너무 큰 달걀이기에 의심을 사느니 그냥 나 혼자 먹기로 했다.
지구에 남아있는 조리도구가 너무 낡아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날달걀이다.
대격변 후에는 불을 사용하기가 어려운 환경이 많았기에 어쩌다 달걀이 생기면 늘 생으로 먹고는 했었다.
그런 기억을 되살리며 껍데기를 조금 깨고 입을 대고 쭉 빨아먹었다.
“음”
뭔가 다른 것을 기대했지만 그냥 보통 달걀 맛이었다. 그런데 날달걀이 목구멍을 넘어 뱃속으로 들어가자 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달걀이 마나를 가질 수도 있는 건가? 꼬이의 달걀은 조금이지만 분명히 마나를 품고 있었다.
나는 앉아서 오러심법을 돌리며 뱃속에 들어온 달걀에서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많은 양은 아니었기에 달걀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를 품고 있는 식품은 대단히 고가이다. 많은 양의 마나를 품고 있는 식품을 영약이라고 부른다. 아노더스에도 그런 약초 같은 것이 존재했다. 물론 그런 영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은 양이라고 마나를 품은 식품은 상당히 고가로 거래되고는 한다.
나중에 독립해서 돈이 궁하다면 꼬이의 달걀만 팔아도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물론 파는것보다는 먹어서 내가 성장하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그렇게 심법을 마치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통로를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혹시라도 이럴까 봐 낮에 지구로 넘어올 때는 옷장 문까지 닫고 넘어오건만 통로 저편에서 마틸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