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장의 계절
마틸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얼음이 된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지구로 오갈 수 있는 통로를 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 큰 잘못은 아니다. 아니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그것은 가족을 포함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전생의 경험이다. 오래 살아남은 생존자 중에 소수는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벌리는 자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그리고 가족도 믿지 못하는데 아무리 같이 오래 살았다고 해도 하녀인 마틸다? 당연히 믿지 못한다.
이것은 나의 정신질환 중 하나이다. 뿌리 깊은 인간불신이다. 대격변 후 변이체들이 생존자들을 많이 죽였지만, 생존자들이 가장 많이 사망한 이유 중 첫 번째는 아사고 두 번째는 같은 생존자에 의한 것이었다.
생존자 그룹에서는 조금만 방심해도 칼부터 찌르고 보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그런 곳에서 20년 정도를 생활했던 내가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죽었다 깨어났어도 무리였다.
‘죽여야 할까?’
순간 마틸다를 이쪽으로 끌고 와 죽여서 입막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름 수년간 단련한 몸이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시체도 찾지 못할 테니 완전범죄다.
그때 마틸다의 입이 열렸다. 소리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마틸다가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입 모양으로 생각해볼 때는 대충 ‘이상하다 어디 갔지?’ 정도가 될 것 같았다. 설마 통로가 보이지 않는 건가?
마틸다가 옷장 문을 닫았다. 나는 곧바로 통로 저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마틸다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확인하자마자 밖으로 나가 마틸다를 쫓아갔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마틸다가 복도를 걷다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도련님, 어디 계셨어요?”
내가 정상인이라면 마틸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불신자인 나는 정말 마틸다는 통로와 나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옷장 안에 숨어있었는데 보지 못했지?”
“어머, 옷장 안에 계셨어요? 설마 해서 열어봤는데 안 계시던데?”
마틸다의 반응은 자연스러웠다. 정말 옷장 안에서 나를 봤다면 이렇게 반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틸다가 훈련받은 요원 같은 것은 아니니까.
“감쪽같았지?”
“도련님도 참 이제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숨바꼭질 같은 걸 하시는 거예요?”
부모님과 마틸다는 내가 숨바꼭질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전생의 습관대로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이 버릇이라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일단 마틸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마틸다를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통로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하진 않았다.
마틸다 같은 일반인은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마법사나 기사같이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을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아주 조금은 대담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한동안 중지했었던 실험을 다시 하기로 했다. 꼬이가 마력이 담긴 알을 낳는 것을 확인했기에 병아리를 더 투입해보기로 했다.
시장에서 병아리 스무 마리를 산 후에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사방을 확인한 후 통로를 열고 병아리들을 지구로 넣었다.
병아리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한 마리를 빼고 모두 죽어버렸다.
이쯤 되면 이것은 단순한 환경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꼬일과 꼬이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혼자 살아남은 병아리 꼬삼이는 꼬이를 어미로 생각했는지 졸졸 따라다녔다. 꼬이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잘 때는 꼬삼이를 날개 속으로 품어주었다.
그리고 가을이 금방 지나가고 겨울이 왔다. 내가 살고 있는 크리스타 백작령은 기후적으로 봤을 때 사람이 참 살기 좋은 곳이다.
여름에 그렇게 덥지 않고 겨울에도 기온이 많이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는 다르다. 더구나 태백산 중턱에 있는 기상연구소는 사람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춥다.
닭들이 겨울에 얼어 죽지 않기 위해 가을부터 많은 준비를 했다. 어차피 나도 그곳에서 수련을 해야하니 방한 작업은 필수로 해야만 했다.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만 했던 전생과 달리 이번에는 이쪽 세상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쉽게 가져갈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용돈이 모두 사라져야만 했다.
지금이라도 지구에 있는 물건들을 조금 내다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의심을 받을 것이다.
백작령이 제법 큰 영지라고 해도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다.
그런데 나름 천재로 유명한 내가 갑자기 금덩어리나 신기한 물품을 내다 판다? 단번에 소문이 돌 것이다.
지구의 물건을 내다 팔려면 최소한 백작령을 벗어나야만 한다.
매일 수련을 열심히 했고 겨울이 끝나기 전에 나는 오러 1성을 쌓을 수 있었다. 오러홀에 오러가 쌓여서 하나의 단을 이루는 과정을 느끼는 것은 대단히 새로운 감각이었다.
그리고 오러와 반응해서 위기감지라고 부르는 초감각의 능력이 상당히 늘어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 좋은 점이라면 단번에 아버지에게 들통이 났다. 아버지는 4성 기사다. 그쯤 되면 1성이나 2성 기사의 기도는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대단하다! 13살에 1성을 깨우치다니! 내 아들이지만 정말 천재구나!”
난 평소 과묵한 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 조용히 말씀 좀 나눠도 될까요?”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아버지를 손을 붙잡고 내방으로 이끌었다.
“그래 조용히 할 말이 무엇이냐? 용돈이라도 줄까? 내가 비상금을 털어서라도 주마.”
아버지는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대단히 흥분해 있었다.
“아버지 이것은 부디 이것을 비밀로 해주십시오.”
“아니 소문을 내도 모자랄 정도로 경사가 아니냐?”
역시 아버지에게는 미리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 마리오 소영주가 저를 싫어합니다.”
내 말에 아버지의 흥분해 있던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흠,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미안하구나.”
아예 몰랐을 리는 없었다. 다만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이해한다. 보통 어린아이라면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아니요. 이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으시겠죠. 하지만 아버지가 알고 계신 것보다 소영주가 훨씬 저를 싫어합니다.”
마리오 녀석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녀석이 나에게 정말 해코지를 할 때는 사람이 없을 때에만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고쳐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입장만 난처해지겠지.
나는 마리오가 그간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했는지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허···.”
아버지는 한숨만 쉬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지에 남을 수 없습니다. 남기도 싫고요. 성년이 되기 전에 크리스타 영지를 떠나 독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다행히도 아버지는 이해해주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못난 아비를 둬서 네가 그런 꼴을 당하게 했구나.”
“괜찮습니다.”
아버지의 부성을 처음 느껴서 그런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버지는 나와 얘기한 대로 비밀을 지켜주었다. 형인 저스트는 자기 말로 1성 끝자락이라고 하기에 내 경지를 알아보진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2성이 되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안심이다.
어쨌든 1성에 도달하는 바람에 나는 더욱 집 밖으로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지나가는 영지의 다른 기사들 근처에 가면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닭 모이를 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장에 들를 적에 초감각의 사용법을 깨닫기 시작했다.
제법 멀리 있는 기사들을 느낄 수 있었다. 전생에는 근처에 변이체나 적의를 품을 생존자들이 왔을 때 느끼는 정도였다. 그래서 위기감지라고 이름 붙였었다. 그런데 1성 기사가 된 덕분인지 그 범위도 넓어지고 적의를 품지 않은 상대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사들이 있는 곳을 요리조리 피해서 시장을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조금 걱정했지만, 닭들은 겨울을 잘 버텨주었다. 가장 걱정했던 꼬삼이도 꼬이가 잘 품어준 덕분에 무럭무럭 자라서 성체가 되었다. 꼬삼이도 암탉이었는데 그래서 달걀 생산량이 두 배가 되었다.
두 배라고 해도 매일 알을 낳는 것은 아니어서 꼬삼이와 둘이 합쳐 일주일에 4개 정도의 달걀을 수확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 정도가 적당했다. 둘이서 매일 알을 낳는다면 일주일에 달걀 14개를 먹어야 하는데 그것도 고역일 것이다.
나는 전생의 영향 때문에 지금도 식사를 많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이 먹으면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한다.
오러를 쓰는 기사인데 소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고 심리적인 영향일 것이다.
초감각의 능력향상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기상연구소 주변의 탐색을 조금씩 시작했다.
변이체는 대격변 25년 이후로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죽기 전 3년간 이곳 기상연구소로 온 이후로 변이체를 만난 적은 없었다. 만약 만났다면 아무리 위기감지가 있다고 한들 피하지도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변이체들은 줄어든 대신 남아있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강력하게 진화한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다시 최하 13년이 지났을 것이고 변이체는 더욱 줄어들었을 테니 변이체에 대한 위험은 다소 줄어들었겠지만, 주변 탐색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언제까지 기상연구소에만 남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멸망한 세계이긴 하지만 지구에 남아있는 많은 자원을 내가 독점할 수 있다면 나는 아노더스에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
지금 기상연구소 밖은 여러 가지 의미로 미묘한 상태다. 생식능력 저하가 불러온 여파다.
나무를 제외한 생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곤충의 경우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전생에 살아있을 때도 주변에서 위협이 될만한 생물은 거의 없었다.
매일 방위를 정해서 연구소에서 꽤 멀리까지 정찰을 해봤지만, 변이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변이체도 지구에서 멸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만에 하나 지금까지 살아남은 녀석을 만난다면 지금 내 수준으로는 무조건 죽는다고 봐야 한다.
정찰을 통해 최소한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다시 수련 삼매경에 빠졌다. 그리고 영지를 떠나 독립할 것을 아버지에게 미리 알리기도 했겠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기 전에 나는 형보다 빨리 2성 기사가 되었고 1클래스의 마력을 달성했다.
이것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13살에 2성 기사라면 명문가의 적통이 집중적으로 지원을 받았을 때나 가능한 수준이다. 참고로 그렇게 지원을 받았던 소영주 마리오 녀석은 얼마 전에 2성 기사가 되었다. 형과 동갑이니 나보다 5살이나 많은 녀석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 정도 수준이니 본인이 게으른 것도 있겠지만 애초에 자질이 형편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대단히 기뻐하고 놀라워했지만, 이 소식을 누구에게 알리지 못한다는 것에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어머니에게라도 알려주면 어떻겠냐고 내게 물었지만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꼬이와 꼬삼이가 달걀을 전보다 많이 낳았고 그 덕분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러와 마나를 모으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아니면 본격적으로 검술을 단련하기 시작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전생에도 본래 검술을 한가지 알고 있었다.
수원의 생존자 쉘터에 있을 때 김경수라는 사람에게 배운 것인데 환생하고 아버지에게 왕국 기본검술과 하네스 가문의 검술을 배우며 느낀 것이지만 김경수라는 사람이 사용하던 검술은 지구의 검술이라기보다 아노더스의 검술에 가까웠다.
내가 처음 보았던 김경수는 그야말로 초인이었다. 정말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검 한 자루를 들고 진화한 변이체들을 무 썰듯이 썰고 다니던 모습에서 나를 비롯한 모든 생존자는 희망을 보았다.
나는 그를 동경했고 그에게 달라붙어서 검술을 배웠지만, 그와 같은 힘을 쓸 수는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김경수는 오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에게 오러심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그랬을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정말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정말 성심껏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착한 사람 김경수는 진화한 변이체 수천 마리가 몰려왔던 초대형 웨이브에서 쉘터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길을 막았고 그렇게 죽었다.
어쨌든 내가 그때 김경수에게 배웠던 검술은 하네스 가문의 가전 검술보다 몇 단계는 위의 대단한 검술이었다.
김경수는 이 검술을 마구잡이 검술이라고 했었는데 전혀 마구잡이가 아니었다. 확실히 체계가 잡힌 정통검술이었으며 익히면 익힐수록 새로운 오의를 깨달을 수 있는 대단한 검술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겨울이 찾아왔고 겨울이 끝나기 전에 나는 원래 집을 떠나기 전에 목표로 했던 3성 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