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5화 (5/206)

5. 나와 같은 맹수

오러홀에서 별 3개가 회전하는 느낌은 새로웠다. 경지가 올라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시력이 조금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아니고 초감각과 연계가 되어 모든 감각이 더 활성화되는 느낌이었다.

3성에 올라서 확실히 느낀 것이지만 승급을 할 때마다 머리도 좋아진다.

2성에 오를 때 그리고 1서클을 달성할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 암기력과 이해력 같은 것이 승급할 때마다 늘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천재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결코 천재는 아니다. 전생의 경험과 지식이 있기에 또래의 어린아이들보다 더 나은 사고를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원래 평균 이하였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제법 수재 축에는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 단계 차이가 날 뿐이라 이번에는 아버지에게 발각되진 않았다.

“빅터야 너 설마 3성이 된 것이냐?”

물론 완전히 감각을 속일 수는 없기에 이런 질문을 받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곧 도달할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넘겼다. 아버지라고 해도 완전히 믿진 않는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말실수라도 해서 사실이 공개되었을 때 2성 기사가 된 것과 3성 기사가 된 것의 차이는 크다.

해가 바뀌고 14살이 되었다. 예상보다 경지가 빨리 오르면서 앞으로 계획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욕심도 생겼다. 어쩌면 이곳을 떠나기 전에 4성 기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3성 기사와 4성 기사는 한 단계 차이일 뿐이지만 가진 힘은 많이 차이가 난다.

4성 기사부터는 무기에 오러를 넣을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단순히 오러홀을 늘리는 것으로는 4성 기사가 될 수 없다.

보통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벽을 넘지 못하고 평생 3성에 머무르는 무인들도 많다.

받는 대우도 차이가 크다. 4성 기사가 되면 아버지처럼 대귀족 밑에서 단승 작위를 받을 수 있지만 3성 기사는 경비대장 같은 병사장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3성에 오르고 난 후 거동에 조금 자유가 생겼다. 보통 기사들은 이제 내 경지를 확실히 확인할 수가 없다. 백작령에 5성 이상의 기사는 3명 밖에 없고 내 활동반경에 그들이 나타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3성에 오르면서 초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늘어났기 때문에 기사들을 피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크게 마음먹고 실험에 나섰다. 영지를 떠나기 전에 통로에 대한 기능을 여러 가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기사나 마법사가 없는 곳을 골라가며 이런저런 실험을 했고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보통 사람은 통로를 보지 못했다. 아쉽게도 아직 기사나 마법사를 상대로 시험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던진 물건을 통로를 통과하지만, 타인이 던진 물건은 통로를 통과하지 못한다.

이 통로의 내구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시에는 일종의 실드 개념으로 사용도 가능할 것 같았다.

늦가을이 될 무렵 나는 3성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까지나 이제 단순한 연공으로는 오러홀을 늘릴 수가 없다. 깨달음이 필요한 영역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조바심을 내진 않았다. 나는 다른 할 일이 많으니까. 잠시 오러심법을 쉬고 그 시간에 마나심법을 더 하면 되는 것이다.

마나는 현재 2서클이었다. 오러홀의 성장에 비하면 조금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심법 자체가 성능이 많이 떨어지는 기초심법이었고 마법은 경지를 올린다고 해도 습득할 수 있는 마법이 없는 상태라서 조금 소홀할 면도 있었다.

심법을 수련하는 시간은 모두 마나심법에 투자하면서 다른 시간에는 김경수에게 배웠던 마구잡이 검법을 수련했다.

아버지에게 듣기로 깨달음은 검술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견습기사로 토벌전에 참가해 모시던 기사의 저녁 식사를 만들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백작가에 소속된 많은 기사도 의외로 전투와 전혀 관련 없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목검을 들고 마구잡이 검술을 수련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이 검술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검술을 수련하면 할수록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술이라는 것은 대체로 용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도 있고 마수를 상대하기 위한 검술도 있다.

거기에서 더 분류하자면 일대일에 특화된 검술이 있고 다대일 혹은 다대다 상황에 맞게 만들어진 검술도 있다.

마수를 상대로도 빠른 마수, 덩치가 큰 마수, 가죽이 단단한 마수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마수에 맞춰서 만들어진 검술이 있다.

가전 검술인 하네스 가문의 검술 같은 경우에는 전형적인 일대일의 기사대결을 위한 검술이다. 그리고 공격이나 방어 어느 한 곳에 치중되지 않은 밸런스형 검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검술이라고 보긴 힘들다. 가전 심법과 마찬가지로 잘해야 중하급 정도의 검술이다.

그런데 이 마구잡이 검술은 모든 것이 포함된 검술이다. 초식마다 사용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한 검술이고 나쁘게 말하면 완전히 잡탕이다. 확실한 것은 이 검술을 만든 사람은 김경수가 아니고 아마 대단한 검의 대가일 것이라는 거다.

목검을 휘두르며 가상의 상대를 상상한다. 첫 번째 검식을 전개할 때는 사람, 두 번째 검식을 전개할 때는 작고 빠른 마수 세 번째 검식 때는 대형 마수를 상상한다.

검식 하나하나의 용도는 다르지만, 이것을 합치면 하나의 검술이 된다.

결국은 하나다. 검술이란 상대의 생명을 끊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검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무의식 상태로 검을 휘두르던 때 초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즉시 검술을 멈추고 감각에 집중했다.

‘뭐지?’

기상연구소 주변에 뭔가 커다란 생명체가 있다. 변이체는 아니다. 변이체가 이 정도로 다가왔다면 명백한 적의를 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노더스로 돌아가 구석에 잘 모셔져 있는 진검을 들고 다시 지구로 돌아갔다.

아직은 몸이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기에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짧은 검이다. 보통은 아직 진검을 선물 받기엔 이른 나이지만 내 경지를 알고 있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선물해준 검이다.

보통 검에 비교해 검신이 짧은 검이지만 날이 잘 서있어 무언가의 목숨을 끊기에는 충분한 무기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줄이면서 생명체가 감지되는 곳을 향했다. 생명체가 움직이는 방향은 명백히 기상연구소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면 맞서 싸우거나 쫓아내야 한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상대방에 대해 더 자세히 느껴지고 있었다. 경지가 높아지면 능력이 대폭 향상된 초감각의 능력은 대단했다.

분명히 내가 마지막 인간이었기에 사람은 아닐 것이고 변이체도 아니라면 대형 동물이다.

한반도에는 대형 동물의 종류가 그다지 많지 않다. 대격변 초기에는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들도 간혹 볼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수십 년 전의 초기 때 이야기다.

내가 큰 동물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죽기 10년 전쯤이다.

그때 동료들과 고라니를 사냥해서 먹었다. 질기고 냄새가 났지만 오랜만에 먹는 고기라서 너무 맛있었다.

그 후 중형 이상의 동물을 본 적은 없다. 보였다면 당연히 잡아먹었을 것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동물의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큰 동물이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크기를 생각해 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멧돼지였다. 그런데 느껴지는 형태를 봤을 때 멧돼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벽을 돌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등이 보였다.

크고 검은색의 덩치가 움직이고 있었다.

‘곰?’

곰이다. 저것은 확실히 곰이다. 설마 아직도 곰이 살아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길 수 있나?’

바로 다음에 한 생각이었다. 3성 기사라고 해도 아직 성장이 덜된 청소년의 몸이다. 싸움이라는 것은 체급을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곰과 싸워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한 대만 제대로 맞으면 나는 전투 불능이 되는 것이 확실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냥 통로를 열고 아노더스로 도망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때 뭔가를 느낀 것인지 천천히 곰이 뒤를 돌아보았다.

곰의 얼굴에는 수많은 상처 자국이 남아있었다. 뒷모습만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몸을 돌릴 때 보니 몸 구석구석에도 털이 자라지 않는 깊은 상처 자국이 보였다.

곰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곰은 늙었다. 그래서 약하다.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곰과 시선이 마주쳤다. 곰에게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기상연구소 주변 상황만 봐도 곰이 먹이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나를 아주 오랜만에 만난 먹이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곰에게 검을 겨누었다.

쿠워워워!

늙은 곰이 마지막 힘을 짜낸 포효가 태백산을 울렸다. 곰이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차고 뛰어온다.

하지만 느렸다. 늙은 곰에게 남은 힘은 겨우 그 정도였다.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나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전생에 변이체와 마주했던 것이 수백 번이다. 대격변 초기에는 변이체를 제법 많이 싸우기도 했고 이긴 적도 많았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아마 눈앞의 곰도 같은 시간을 살아왔으니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곰은 이제 너무 늙고 병들었다. 마치 전생의 내가 죽기 직전의 상황을 보는 것 같았다.

휘둘러진 곰의 앞발을 피하며 곰의 목덜미에 가볍게 검을 깊숙이 찔러넣었다가 빼고 몸을 피했다.

끄워워!

내 검은 정확히 목의 동맥을 끊었고 찔린 상처에서 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곰이 고통스럽게 울었다. 검을 찌른 사람으로서 생각하기에는 모순적이지만 곰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다.

그 순간 오러홀에 하나의 별이 더 싹을 틔웠다. 그리고 검에 오러가 깃들었다.

나는 전보다 가벼워진 몸을 날렸고 곰이 움찔하며 반응했지만, 늙은 몸이 따라주질 못했다.

서걱!

스산한 소리를 내며 오러가 깃든 검이 곰의 목덜미를 완전히 베었다. 질긴 가죽과 단단한 뼈도 오러가 실린 검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곰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곰의 앞에 서서 그 최후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구에 남은 마지막 곰일지도 모른다.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곰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원망이나 분노가 담겨있지 않았다. 이것은 내 생각뿐일지도 모르지만, 곰에게서 적의가 사라진 것은 확실하다. 곰의 눈에서 서서히 생명의 힘이 꺼져갔다.

‘너도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행복해라.’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왔던 동지로서 기도하며 손을 뻗어 곰의 커다란 눈을 감겨주었다.

그 순간 오싹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이것은 지구에 처음 넘어와서 내 시체와 닿았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누구도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생에 처음 초감각을 얻었을 때도 그랬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생존자가 특수한 능력을 얻을 때 마찬가지였다.

재생력, 그것이 생겼다. 아마 곰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전승받은 모양이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재생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곰의 몸에 있는 몇 개의 큰 상처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노더스에서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때가 있을는지 잘 모르겠지만 있다고 손해 볼 것이 없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4성 기사가 되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제 독립하더라도 어딘가의 대귀족 밑에 가서 기사서임을 받을 수 있다.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나고 15살이 되었다. 본래는 성년인 18살에 집을 떠나기로 생각했었지만 내 성장이 빨라짐에 따라 계획이 대폭 앞당겨졌고 나는 집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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