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6화 (6/206)

6. 선물 교환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별로 할 것도 없었다. 평소에 착실하게 준비해둔 부분도 있었지만 제대로 준비하려고 해도 내가 가진 용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오히려 오래 걸린 것은 마음의 준비였다. 처음에는 편지 한 장 써놓고 훌쩍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족이라는 존재가 생각보다 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 정도 어떤 식으로 말을 하고 떠날지 우물쭈물하는 사이 저녁에 마틸다가 서재에서 아버지가 나를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서재라고 하지만 책은 몇 권 없고 예비 무기 같은 것들이 가득한 그야말로 기사다운 방이다.

서재로 향하는 순간 나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감각으로 느끼기에 서재에는 아버지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당연히 어머니와 형일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끝까지 비밀을 지키지 못했다. 나의 인간불신이 이번에도 적중한 셈이다. 그런데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노크를 하고 서재로 들어서자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와 도끼눈을 뜨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거의 항상 그렇지만 오늘따라 더욱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괜찮다는 뜻을 담을 눈빛을 보내고 남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처음 포문을 연 것은 당연히 어머니였다. 온화하던 어머니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거의 30분 정도를 쉬지 않고 울분을 담아 몰아치는 어머니에게 나는 계속 죄송하다고 하면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은 형이었다.

“설마 나 때문이냐?”

형은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내가 설마 확실하게 계승될지 어떨지도 모르는 준남작 작위를 자신에게 양보하려고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바보형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오해는 풀지 못했다.

“그래 내가 너 같은 천재는 아니지, 그래서 집에는 네가 남고 내가 떠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비록 그 뜻은 고맙지만 나는 말 없이 일어나 벽에 걸려있던 단검 하나를 꺼내 들고 오러를 불어넣었다.

단검에 오러가 깃드는 것을 본 가족 모두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너?”

형은 손가락질까지 하며 입을 벌린 채 한층 강화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며 아버지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단검을 보고 계셨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고 있던 어머니도 표정이 풀려있었다. 검에 오러가 깃드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기사의 부인으로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는데 모를 리가 없다.

“얼마 전에 벽을 넘었습니다. 어디 가서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죠.”

이것을 보여주지 않아도 떠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보여주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떠나기 전에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렇겠구나. 허허. 괜한 걱정을 했어.”

아버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우리 아들은 나를 닮아서 천재야”

어머니가 일어나서 나를 안아주었다. 온화하고 착하고 좋은 어머니다. 하지만 어째서 어머니를 닮아서 천재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말 없이 어머니를 마주 안았다. 내 초감각이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한동안 가족들끼리 환담이 오가고 아버지가 어렵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언제 떠날 생각이냐?”

“당장 언제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계획은 있고?”

“세상 공부를 좀 하다가 노블레시아를 볼까 합니다.”

노블레시아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제도와 비슷한 것이다. 누구나 공부만 한다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제도인데 사실 유명무실한 제도이기도 하다.

시험에 통과해도 제대로 된 관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요직들은 대부분 유명 아카데미를 졸업한 귀족 파벌들에서 차지하고 노블레시아를 통과한 자들은 지방의 한직에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너라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걸 볼 필요가 있느냐?”

아버지도 그걸 알고 있으니 우려를 표했다.

“저도 시험만 볼 생각이지 관직에 오를 생각은 없습니다. 명예가 필요할 뿐이라서요.”

노블레시아를 보는 사람은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많다. 시험만 통과해서 자신을 증명하고 그것으로 대귀족의 눈에 띄어 채용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진짜로 명예가 필요할 뿐이지 대귀족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렇지 그런 의미라면 나도 찬성이다. 그런데 아직 한참이나 남지 않았느냐? 이렇게 일찍 떠날 필요가 없을 텐데?”

노블레시아는 성년이 되는 18세부터 시험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행동에 제약이 심해 공부를 하기 어려워요. 당장 교재를 구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요. 그리고 중간에 몇 군데 들를 곳도 있고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형이 감탄했지만, 형의 감탄 따위에 기쁘진 않았다.

“그래도 너무 일찍 떠나는 것 아니니?”

걱정이 유형화되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어머니에게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나서줬다.

“장성한 아들이 다 계획을 세우고 뜻을 펼치려고 하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막아서는 안 되오.”

“당신은 조용히 해요!”

하지만 어머니의 강력한 한방에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의 걱정이 한동안 계속 이어졌지만, 계획을 뒤로 미룰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가 방을 나가 창고로 가더니 커다란 배낭을 하나 가져왔다.

“이것은 병사들이 토벌을 할 때 가지고 나가는 군장이다. 안에 여행자에게 필수적인 물건들이 들어있다. 조금 이른 것 같지만 미리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해뒀던 것 같다. 그에 맞춰서 어머니도 나가더니 작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언젠가 네가 독립을 할 때 주려고 모아놓은 돈이야. 얼마 안 되지만 가져가도록 하렴.”

나에게 돈을 벌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당장 쓸 돈은 필요하다. 상자를 받는데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법 묵직하다.

아무래도 이건 나를 주기 위해 모은 비상금이 아니라 집안에 여윳돈을 전부 넣어서 가져오신 것 같다.

“감사합니다. 잘 쓰도록 할게요.”

그리고 형을 보니 눈동자가 쉴새 없이 빠르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뭔가 줘야 할 것 같은데 줄 것이 없나 보다.

“됐어, 형에게 뭘 바라겠어. 부모님이나 잘 모셔줘.”

“그, 그래”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먼 길을 떠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을 끊임없이 들었다.

정작 어머니는 본인도 영지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분이 뭘 그리 열심히 설명하시는지 들으면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제가 떠나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아신 거예요?”

“우리가 못난 부모지만 15년을 옆에 두고 기른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것 같니? 얼굴에 다 표가 나더라.”

놀랍게도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은 어머니가 먼저였다고 한다. 물론 떠난다는 생각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뭔가 다른 것을 눈치챘고 아버지를 슬쩍 떠봤다가 꼬투리를 잡고 집요하게 추궁했다는 것이다.

모처럼의 가족 모임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떠나는 날을 정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오늘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바로 떠날 생각이다.

어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떠날 때 어머니가 울고불고하면 마음만 무거워질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남길 편지를 썼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마틸다에게도 따로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지구에서 가족들에게 남길 선물도 꺼내왔다.

전생의 나는 수집벽이 있었다. 대부분 생존자는 당장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에도 바빴는데 나를 비롯해 일부는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것도 모으는 부류가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기상연구소에도 내가 그렇게 모아놓은 것들이 조금 있다.

어머니에게는 목걸이 하나를 남겼다. 여자용 금목걸이인데 펜던트에 커다란 루비가 박혀있는 아주 화려한 목걸이였다.

그리고 마틸다에게는 보석이 박히지 않은 금반지를 하나 남겼다.

먹을 수도 없고 쓸모도 없는 금붙이 같은 것은 대격변 초기에는 화폐 대신 거래되기도 했으나 금방 예쁜 쓰레기로 전락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모으는 수집벽이 있었다.

아버지와 형을 위해서 연구소 안의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몇 개 뜯어왔다. 녹여서 검을 만들라는 메모도 적어놓았다.

지구의 문명에서는 흔해 빠진 것이 스테인리스 스틸이었지만 아노더스에서는 운철이라고 해서 꽤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된다. 운철을 섞어서 만드는 검은 매우 비싸다.

내가 앞으로 돈을 버는 방법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곳 기상연구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얼마 안 되지만 도시로 가면 널려있는 것이 스테인리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kg 금괴 하나를 남겼다. 어머니가 나에게 준 상자에는 은화가 무려 200여 개나 들어있었다. 이것은 예상대로 집의 여유자금을 모두 털어온 것이 맞다.

금괴 1kg이라면 여유자금이 모두 사라진 집안의 경제 사정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혹시나 해서 금괴에 새겨진 문자들은 모두 손으로 뭉개서 없앴다. 환전을 하는 것이 조금 문제이긴 한데 그것은 아버지가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새벽이 되어 탁자 위에 편지와 물건들을 올려두고 나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초감각으로 확인하니 가족들은 모두 아직 잠에서 깨지 않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집을 향해 꾸벅 인사를 올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새벽에 일을 시작하는 일꾼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틈에 끼어 도시를 빠져나왔다. 평상복 차림에 빈손이었기 때문에 일꾼 사이에 끼니 오히려 눈에 띄지 않았다.

아버지가 챙겨준 여행 물품은 모두 지구에 옮겨뒀다. 무겁게 들고 다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첫 번째 목적지는 가장 가까운 마을인 펠론 마을이다. 말로는 하루 거리고 보통 사람이 걷는다면 3일 정도 걸리는 곳이다.

그렇게 백작령 안의 마을 3개를 거쳐서 백작령을 벗어나 멤파이 자작령으로 가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물론 보통 사람의 속도로 그렇고 4성 기사인 내가 속도를 조금 낸다면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속도를 올리진 않았다. 처음으로 나온 도시 밖이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빠듯한 일정도 아니고 백작령 안의 치안은 제법 좋은 편이다. 나는 여행을 즐기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노숙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구에 넘어가서 자면 되니까.

식사도 지구에서 할 생각이다. 굳이 길바닥에 앉아서 육포를 씹는 궁상을 떨 필요는 없다.

기상연구소 주변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요즘은 지구 쪽에서도 불을 피워 식사를 만들고는 했다. 그래서 더이상 달걀을 생으로 먹지 않아도 되었다. 익혀서 요리할 수만 있다면 꼬이와 꼬삼이가 낳아주는 달걀은 매우 훌륭한 요리 재료가 된다.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처음 보는 나무와 풀들을 관찰했다. 그동안 공부했던 책에서 본 것들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가끔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풀이 보이면 채집해서 통로를 열어 슬쩍 던져두기도 했다.

아노더스의 식물을 지구에 심으면 어떻게 변할지 시험을 해볼 생각이다. 닭들처럼 변화가 보인다면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가다 보니 하루가 금방 지나가고 해가 떨어졌다. 온종일 쉬지 않고 걸었지만 피곤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즐거운 하루였다. 물론 이 즐거움이 오래가진 않겠지만 지금은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해가 떨어져 주변이 어두워지자 나는 통로를 열어 지구로 넘어가 식사를 하고 잘 준비를 했다.

그동안 많은 공을 들여 기상연구소의 많은 방 중 하나를 내가 살기 편하도록 완벽하게 꾸며놓았다. 얘기를 들어보았을 때 호텔이 아니라면 이 세계의 여관들의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여관보다는 좋을 것이다.

아침을 먹으라는 부름에도 빅터가 응답이 없자 하네스 가문의 안주인인 마리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바로 어제 저녁에 떠난다고 했던 작은 아들이 벌써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빅터 좀 불러와 봐요.”

“제가 올라가 볼게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큰아들 저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위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동생 방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저스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동생이 없는 텅 빈 방뿐이었다. 작은 탁자 위에 올려진 편지 몇 장과 번쩍거리는 물건들이 보였다.

똑똑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매정한 동생 놈이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을 확인한 저스트는 주인이 사라진 방안을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이상한 놈, 침대와 책상은 어떻게 가져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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