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등 뒤의 사람
이틀을 걸어 펠론 마을에 도착했다. 펠론 마을은 변경백령에서 가장 큰 도시의 위성도시 역할을 하는 곳이라 결코 규모가 작지 않았다.
마을과 도시의 중간 정도의 준도시라고 볼 수 있었다.
“하네스가의 도련님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입구에서 경비병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니 마을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가 백작가의 오랜 가신 중의 하나인데 이곳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이곳에서 보급을 제대로 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알게 모르게 다들 아는 사이가 많다 보니 대량의 물자를 사는 것은 눈치가 보였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길게 보관할 수 있는 식량과 간단한 향신료들을 구매하고 큰 통을 사서 식수도 대량으로 보급했다.
그리고 바로 마을을 떠났다. 여관을 이용하지 않을 예정이라 굳이 마을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3일 후에 두 번째 마을인 아일론에 도착했다. 아일론은 펠론만큼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숙박시설이 대단히 많았다. 백작가의 영지 전체를 보면 아일론 마을이 중앙부근에 위치하는지라 교통의 요지까진 아니더라도 분기점 역할을 하는 마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재미 삼아 아일론 마을의 시장을 둘러 보았지만, 마땅히 사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찻잎이었다. 크리스타 백작령의 특산품인 사르피아 찻잎이다.
전생에 마셨던 녹차에 비교하면 조금 더 알싸한 맛이 있고 은은한 꽃향기가 느껴지는 차다.
나야 어려서부터 질리도록 마셨고 백작령에서는 그리 비싸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꽤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서 찻잎을 몇 통 샀다. 다른 곳에 가서 팔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타지에 가서 고향 생각이 날 때 마시려고 사는 것이다.
찻잎을 사고 인적이 없는 골목길로 들어가 통로 안에 찻잎을 던져놓고 골목 밖으로 나오는 순간 조금 멀리서 적의가 느껴졌다.
‘뭐지?’
일부러 그곳을 바라보진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를 떠서 마을 밖으로 나오는 내내 그 적의를 발산하는 무리가 따라붙고 있었다.
인원은 세 명이다.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슬쩍 돌아보며 확인해보니 허리에 검을 찬 사내 셋이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용병인 것 같은데 동네 불량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왜지?’
눈에 띄게 돈을 많이 쓴 것도 아니고 내 복장도 어디 부잣집 도련님들이 입을만한 옷이 아닌 평범한 여행복이다. 다소 새것이라 풋내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미행을 하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설마 마리오 소영주놈이 나를 제거하려고 사람을 붙였나?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마리오가 나를 싫어하기는 해도 그런 수를 쓸 것 같진 않았다.
질투심으로 가신의 자녀에게 사람을 보내 암살한다? 어떻게든 수습이 되긴 하겠지만 불명예스럽고 가신들의 충성심을 크게 잃을만한 사건이다.
물론 인간이란 것이 항상 상식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므로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미행이 붙었고 내가 한적한 곳에 가면 공격을 할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감각으로는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이라 내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마을을 벗어나 길을 따라가다가 적당히 수풀이 우거진 숲이 보이자 나는 재빨리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뒤를 따라오던 녀석들이 화들짝 놀라서 따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숲 안에 들어간 나는 통로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검을 준비했다. 놈들이 나를 따라 들어와 숲 안에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통로 밖으로 튀어나가 검집 채로 한 녀석의 뒷덜미를 강타했다.
퍽!
내가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아 덩치가 그리 크지 않다고 해도 4성 기사다. 아무리 수련을 한 일반인이라 해도 4성 기사의 일격을 버티긴 힘들다.
목덜미를 맞은 녀석이 힘없이 쓰러지기 무섭게 나는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래도 나름 이런 싸움에 익숙한 것인지 나머지 둘은 검을 뽑아 자세를 잡으며 싸울 준비를 했지만 내 상대가 되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녀석들은 검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나에게 한 대씩을 맞아 정신을 잃었다.
일부러 출혈이 나지 않게 해서 싸움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전생에서 몸에 밴 습관 중 하나다. 되도록 싸움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나는 녀석들을 통로 안으로 던져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잃은 놈들을 포박한 뒤 잠시 기다렸다. 죽을 정도로 때린 것은 아니기에 금세 하나씩 정신을 차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중의 한 놈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사태를 파악했는지 묶인 채로 머리를 땅에 박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네가 대장이냐?”
“네, 일단은 제가 대장입니다.”
그나마 사태 파악이 빠르다고 생각했더니 목숨을 구걸한 녀석이 대장이었다.
“너희들은 뭐지?”
“저희는 그냥 하급용병입니다.”
용병이 도적질을 겸업하는 것은 제법 흔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은 건가?”
“아닙니다. 저희가 그저 요즘 돈벌이가 되지 않아서 헛된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믿을 수는 없다. 믿지도 않는다.
“너희 말고 다른 동료들은?”
“없습니다.”
녀석들의 장비나 실력을 봤을 때 용병단 같은 것에 속해있는 것 같진 않았다.
“내가 만만하고 돈이 많아 보였나?”
“아니···. 네, 그렇습니다.”
녀석이 순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만해 보이는 건 이해하겠지만 돈이 많아 보인다고?”
“저기, 찻잎을 사지 않으셨습니까? 저희 같은 보통 서민들은 그런 거 사지 않습니다. 그리고 골목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셨을 때 찻잎이 사라져 있었지요. 분명히 아공간 아이템을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공간 아이템은 엄청나게 비싸니까. 충분히 노릴 만하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들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이런 짓을 한 것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너희들 눈썰미가 좋구나?”
“네, 그렇습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잘 합니다.”
“그래서 죽어야겠다.”
난 사람을 믿지 않는다. 처음 만난 도적놈들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아, 안 돼!”
칼질 세 번에 녀석들의 생명이 사라졌다. 지구에 데리고 들어온 시점부터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악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선인도 아니다.
어쨌든 녀석들 덕분에 주의해야 할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맨몸으로 다니지 말고 허리에 검도 차고 가방이라도 메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확실하게 녀석들 외에 따라붙는 인원은 없었지만 나는 하룻밤 동안 아노더스로 돌아가지 않고 통로 밖을 살폈다.
혹시나 녀석들의 다른 동료들이 시간을 두고 찾아올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동안 녀석들의 장비 중에서 쓸만한 것을 빼놓고 시체를 밖으로 끌고 나가 땅을 파고 묻었다.
세 명을 묻으려고 하니 땅을 파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빨리 마법을 배워야 한다.
하룻밤을 보내는 사이 다른 사람들이 통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확인한 뒤 밖으로 나가 다시 길을 걸었다.
백작령 안에서 마지막 마을인 파론 마을에 들러 물과 음식을 조금 더 보충했다. 이번에는 가방을 메고 다녀서 쓸데없는 의심을 줄였다.
늘 그랬듯이 볼일을 보고 바로 파론 마을을 벗어났다.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백작령의 경계를 벗어났다. 딱히 경비초소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길에 경계를 나타내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 경계에서부터 멤파이 자작령의 도시까지는 제법 길이 멀다. 그래서 전의 파론 마을에서 말을 한 마리 구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계속 데리고 다니며 관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내가 첫 번째 목적지로 멤파이 자작령을 선택한 이유는 주변 영지 중에서 유일하게 기차가 연결되어있는 영지이기 때문이다.
나도 언제까지 걸어 다닐 생각은 없었고 목적지는 왕도이기 때문에 멤파이 자작령에서 기차를 타는 계획을 짰다.
백작령에서 바로 기차를 탔어도 됐겠지만 그럼 바로 영지에 좋지 않은 소문이 났을 것이다.
아노더스는 겉으로는 중세문명처럼 보여도 지구의 과학 문명과 유사한 것들이 대부분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운용되고 덕분에 엄청나게 비싸다.
마도 기차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타 백작령에서 왕도를 가는 기차 편도 가격이 무려 12골드다.
부자들에겐 별것 아닌 금액일 수도 있으나 4성 기사인 아버지의 연봉이 10골드 정도다. 대격변 전의 지구의 물가로 생각했을 때 12골드면 1억 원이 넘는 수준일 것이다.
멤파이 자작령으로 들어와 길을 가다 보니 사방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모든 영지가 치안이 좋은 것은 아니다. 크리스타 백작령은 그중에서 특별히 치안이 좋은 편이다. 처음이라 잘 몰랐지만 멤파이 자작령은 치안이 좋은 편이 아닌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온 뒤쪽 길가에서 큰입 메로가 튀어나왔다. 형이 첫 번째 토벌전에 나갔을 때 두 마리를 상대해서 고전했었던 그 녀석이다.
뒤를 따라왔던 도적놈들 덕분에 허리에 검을 차고 다니던 나는 바로 검을 뽑았다. 그곳에 큰입 메로가 있는 것은 진즉에 감각을 통해 알고 있었다. 몸을 숨기고 있던 것도 어설펐고 대놓고 살기를 마구 뿜어내고 있는데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수준이었다.
커엉! 커엉!
큰입 메로 세 마리가 성대가 고장난 개처럼 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직접 마수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형처럼 살기에 눌려 떨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전생의 내 삶이 너무 격렬했었다.
나는 가볍게 큰입 메로의 돌진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굳이 검에 오러를 넣을 필요도 없었다.
사악! 사악!
메로의 피부는 그렇게 질기지 않다. 그렇기에 가장 약한 마수 중 하나다.
세 마리가 돌진해왔으나 내가 있던 곳을 지나간 녀석 중 살아남은 것은 한 마리뿐이었다.
마수의 특징 중 하나라면 인간을 향한 끝없는 적개심이다. 그 말은 어지간해서는 인간과 싸우면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 살아남은 큰입 메로는 이 정도 전력 차이라면 도망갈 법도 하건만 곧바로 몸을 돌려서 다시 나에게 돌진해왔다.
이번에는 달려오다가 갑자기 튀어오르며 내 상체 쪽을 노렸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검에 길게 베인 큰입 메로 한 마리가 더 늘어났을 뿐이다.
나는 길에 쓰러져있는 큰입 메로 시체들을 발로 툭툭 밀어서 길가로 치웠다. 이것은 여행자들의 기본 예의라고 한다. 물론 책에서 읽은 것이고 실제로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조금 실망인데?”
처음 겪은 마수와의 싸움이 기대 이하였다. 도대체 바보 형은 어쩌다 이렇게 약한 놈들에게 당한 걸까?
전생에 내가 보았던 진화한 변이체들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상급 마수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할 것 같았다.
“뭐가 그리 실망인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놀랐다. 초감각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 말을 하지 않았다면 등 뒤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이 빙긋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특징이 있는 옷차림도 아니고 나와 비슷하게 평범한 여행객들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다. 다만 허리에 찬 검을 한 자루 차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보통 검이 아닌 것 같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경지의 차이를 넘어 그런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태어나서 마수를 본 것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약해서 조금 실망했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했다. 상대는 강자다. 나 같은 것은 손짓 한번에도 죽일 수 있는 그런 강자다.
6성 아니 최소한 7성 이상의 기사다. 왕국에 7성 이상의 기사라면 3명이 있다. 왕실을 지키는 근위기사단장 그리고 에인프라흐 공작 마지막으로 에르하트 후작이다.
후보를 좁혀놓고 보니 이런 변방의 시골길에 나타날 만한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