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묘한 동행
“자네 수준이라면 그럴 만하지.”
역시나 내 경지를 꿰뚫어 보고 있다.
“어쨌든 갑자기 끼어들어 미안하네. 그런데 자네는 내가 누군지 물어보지 않는군?”
중년인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얼굴로 싱글거리고 있었다.
“빅터 하네스가 에인프라흐 공작님을 뵙습니다.”
나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국에 소속된 7성 이상의 기사 중 변방의 시골길에 혼자 지나갈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방랑 검성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에인프라흐 공작이다.
현재 이 라이브러쉬 왕국에서 어떤 의미로는 국왕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얼굴에 조금 진지함이 떠올랐다.
“재미있군. 그런데 하네스라?”
하네스 가문에 대해 떠올리는 모양이다. 당연히 모를 것이다.
“아버지께서 크리스타 변경백의 기사로 준남작위를 받으셨습니다.”
“더 재미있군. 자네 몇 살이지?”
준남작 가문에서 나 같은 인재가 나왔다는 것이 흥미로운 모양이다. 이 방랑 검성이라는 이명을 가진 공작은 원래 그런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심심하면 가문을 뛰쳐나와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선행을 하기도 하고 악인들을 벤다. 덕분에 백성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것만으로 끝나면 단순한 기행이겠으나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인재를 수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이명이 인재수집가이다. 그렇게 수집한 인재를 공작가에 끌어들이기도 하고 아니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서 관료로 등용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관료가 된 인재들은 공작가의 수족이 된다. 전생의 대기업들이 하던 방식인 기업 장학생 같은 것이다.
그렇게 인기도 얻고 명분도 얻으며 공작가의 힘과 영향력을 쌓는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인 것이다.
“한 달 전에 열다섯이 되었습니다.”
“호오, 열다섯에 4성 기사라니 마법도 조금 손을 댄 것 같고. 그래서 자네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인가?”
아무래도 내가 인재수집가의 촉을 건드린 것 같다. 공작가의 지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내 계획 중에 일부는 아주 쉽게 풀릴 수 있겠지만 반대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아닙니다. 전 차남입니다.”
“자네 형도 자네와 비슷한 수준인가?”
“아닙니다. 형은 평범합니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에인프라흐 공작의 힘으로 조금만 조사해도 다 알게 될 정보다.
“한마디로 자네가 천재라는 소리군?”
공작이 다시 장난스러운 얼굴로 농을 걸었다.
“아닙니다. 세상에 저보다 뛰어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건 아닌 것 같네, 내가 알기로 자네 또래에 비슷한 수준은 두어 명 있지만, 더 뛰어난 사람은 없네.”
나는 겸손하게 한 말이었지만, 나와 비슷한 수준이 두세 명이나 더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래서 자네는 혼자 어디로 가는가?”
“왕도를 가기 위해 멤파이 자작령에서 기차를 탈 생각입니다.”
“왕도는 왜?”
“노블레시아를 보기 전까지 왕도에서 공부를 좀 할 생각입니다.”
“마침 나와 방향이 같다니 잘 됐군. 동행하세.”
그럴 리가 없다. 누가 봐도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에인프라흐 공작은 뻔뻔하게도 동행을 선포했다. 물론 나에게 거절을 할 권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에인프라흐 공작과 동행이 시작되었다.
불편하다. 한없이 불편하다. 마치 전생 군복무 시절에 사단장이 병영 체험을 하겠다고 내무반에 들어와 내 전우조로 배정된 느낌이다.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급속 행군이라도 하듯이 최대한 빨리 걸었다. 나도 공작도 그렇게 움직여도 체력에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멤파이 자작령 중에 마도 기차가 다니는 도시는 그렇게 걸어도 최소 이틀은 가야 하는 거리다.
문제는 첫 번째 날 저녁부터 시작됐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나는 위장용 빈 배낭을 메고 있었다. 식사준비를 해야 하는데 꺼낼 것이 없던 것이다.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그러게나.”
나는 공작의 양해를 얻은 뒤 전속력으로 꽤 멀리까지 달려가 통로를 열고 배낭에 식기와 먹을거리를 담은 뒤 돌아왔다.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더니 돌아왔군?”
공작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제가 왜 도망을 가겠습니까?”
“갑자기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서 마법 아이템이라도 쓴 줄 알았네.”
그 거리까지 감지가 됐던 건가? 역시 무서운 인간이었다. 내 감각은 여전히 에인프라흐 공작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그사이 공작은 어디서 꺼낸 것인지 제법 그럴듯한 요리가 담긴 그릇을 손에 들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자네 먹을거리만 만들면 되네.”
허리에 찬 검을 제외하고는 빈 몸이었는데 갑자기 저런 것이 튀어나왔으니 아공간 아이템이었다. 공작쯤 되면 용량도 상당히 큰 고급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냄비를 걸어놓고 마법으로 가열을 해서 아무렇게나 집어왔던 육포와 채소 등을 넣고 끓였다.
경황이 없어 소금과 향신료들을 가져오지 못했더니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울 만한 끔찍한 요리가 탄생했다. 하지만 전생에선 이것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먹었었다. 아니 이만한것도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전생을 회상하며 맛을 최대한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배를 채웠다. 그러고 보니 지구에서 이불도 가져오지 않았다.
“허허, 자네 여행준비가 허술하구만?”
공작은 어느새 1인용 텐트같은 것을 아공간에서 꺼내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그곳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알면서 일부러 저러는 건가?’
그런 의심이 떠올랐다.
이미 모포가 없는 것이 탄로 났으니 오늘 밤은 이불 한 장 없이 야영을 하게 생겼다.
한동안 사라졌던 불면증이 도지는 느낌이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것 나는 땔감을 모아 불을 지피고 그 앞에 앉아 심법이나 수련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다시 태어나서 야숙을 하는 것도 처음이다. 전생에는 참 지긋지긋하게 많이 했었다.
무너진 집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다행이었다. 오히려 버려진 빈집은 보여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안에 변이체라도 있다면 만나는 순간 죽으니까.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아노더스에서 심법을 수련하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다. 효율이 10배가 차이가 나는데 굳이 그동안 아노더스에서 심법을 수련할 필요가 없었다.
공작은 텐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숨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도 소리가 차단되는 기술을 사용했든지, 아니면 텐트에 그런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내가 통로를 사용하려고 움직이면 이번엔 분명히 공작이 따라온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결국 심법을 운용하며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자 텐트 안에서 공작이 슬그머니 나와 식사를 시작했다.
지금 보니 공작이 끼고 있는 반지가 아공간 아이템인 것 같다.
나는 어제저녁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재료들을 물에 넣어 끓이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공작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자네는 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이렇게 나를 만나고 정체를 안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말을 한다네.”
그야 그럴 것이다. 공작과 어떻게든 선을 연결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작의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자신이 있다.
“저는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대격변 시기에 인간불신과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다른 사람과 말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사회성이 마이너스가 됐다고 할까.
“나에게 원하는 것이 없나?”
에인프라흐 공작은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바로 핵심을 찔렀다.
“제가 공작님에게 무언가를 바라면 그것을 주십니까?”
“무언가를 얻을 기회는 줄 수 있지.”
“제가 바라는 것은 크지 않기에 공작님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나는 고위관료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높은 작위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화롭고 안온한 삶을 원한다. 물론 그것을 이루려면 조금 많은 돈과 약간의 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공작의 도움이 없어도된다.
“자네···. 야망이 없군?”
공작은 조금 가늘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바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는 야망이 없다.
“이상하군. 보통 자네 나이 또래에 그 정도 실력이면 욕망과 야망이 막 샘솟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야.”
환생해서 15살이지만 전생에 60살까지 살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야망이 없다기보다는 제가 원하는 것을 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름 살기 좋고 평화로운 세계에 환생했고 지구를 오갈 수 있는 기연을 얻었지만, 이것을 이용해 구체적으로 뭔가를 크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수긍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공작가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가? 공작가에서 생활하다 보면 자네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때는 내가 자네를 지원해주겠네.”
결국, 영입제의가 들어왔다. 당연히 제의가 있을 줄 알았고 밤새 연공을 하며 고민했다.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와 아닐 때의 장단점이 명확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정말 영광스러운 제안이고 감사하지만, 일단은 혼자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의외로 에인프라흐 공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넘어갔다. 어쩌면 정말로 공작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내가 공작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공작가에 피해가 갈 일은 전혀 없으니까.
공작과 나는 다시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오히려 걷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전투적으로 빨리 걷기를 하는 도중 멀리 숲속에서 무언가가 감지됐다. 그것은 꽤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숲속에서 저런 덩치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일단은 마수다. 아직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봐서는 우리를 본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마수가 감지된 쪽을 바라보자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경지에 비해 감각이 좋군?”
“그런 편입니다.”
“어떤가? 어제는 실망했으니 다시 도전해볼 텐가?”
“굳이 일부러 싸우려는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니 저 정도면 자네와 좋은 승부가 될 것 같군.”
처음부터 내 의사와 상관없었던 모양이다. 공작은 손에 낀 반지 중 하나를 뺐다. 공작의 왼손에는 반지 3개가 끼워져있었는데 하나는 아공간 반지인 듯 하고 다른 하나의 정체가 드러났다.
반지를 빼자 에인프라흐 공작의 기세가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산이 갑자기 앞에 나타난 느낌이었다.
‘이게 8성 기사의 느낌인가?’
왕국 최강의 기사 셋 중에서 유일하게 8성에 다다른 초강자의 기세는 대단했다.
초감각으로 감지가 되지 않는 것은 특수한 기술인가 했더니 방금 뺀 저 반지가 힘을 숨겨주는 용도인 듯 했다. 저런 아이템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이런 기세를 감추지 않고 다니면 몰래 신분을 감추고 방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마수가 느껴진 방향을 향해 강하게 기세를 발산했다.
그러자 저 멀리 마수에게 강력한 적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덩치가 있지만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저 멀리 숲이 흔들리고 조금씩 마수의 일부분이 시야에 보이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숲지기군요.”
“처음 보는 것일 텐데 지식도 해박하군?”
환생해서 가장 흥미를 가졌던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마수다. 책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은 열심히 공부했다. 숲지기는 중급 마수에 해당한다. 보통은 4성 기사 둘이서 안정적으로 사냥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라도 잡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공작이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보다.
혹시 공작이 자기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수를 이용해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공작에게서는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숲을 벗어난 숲지기가 완전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워워어어어!
숲지기가 살기가 가득한 눈을 뒤룩거리며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