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0화 (10/206)

10. 대화없는 거래

한동안 잠잠했던 인간불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묵으실 건가요?”

“일단 하루만, 씻을 물과 식사를 준비해줬으면 좋겠군.”

속았지만 다시 나가기는 좀 그렇고 일단 하루만 이곳에서 지내보기로 했다.

“은화 한 닢 선불입니다.”

직접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백작령의 여관들은 이것보다 조금 더 비싸다고 들었는데 적어도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말없이 가격을 값을 치르고 거짓말쟁이의 안내를 받아 2층의 방 중 하나로 안내를 받았다.

“씻을 물은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거짓말쟁이가 날랜 움직임으로 사라지고 나는 배낭을 구석에 던져두고 안을 살폈다.

방 안의 청결 상태는 생각보다 좋았다. 벌레도 없는 것 같고 침대보도 금방 세탁한 것 같이 깨끗했다.

음식까지 먹어봐야 알겠지만 아주 거짓말쟁이는 아닌 모양이다.

방안을 살피는 동안 거짓말쟁이가 양동이 두 개를 낑낑대며 들고 올라와 방안에 넣어주었다.

이번 여행 첫 번째 난관이다. 눈앞의 양동이 두 개를 어떻게 사용하라는 것일까? 분명 양동이 두 개를 이용해 씻을 수 있는 요령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사용하지 않기는 뭐해서 대충 세수를 하고 손발만 닦았다. 제대로 씻는 것은 아무래도 지구로 넘어가야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용한 물을 밖으로 내놓고 통로를 열어 지구로 넘어갔다. 설마 공작이 여기까지 따라와 나를 감시하고 있진 않겠지?

처음에는 아노더스에서 물을 길어다 지구로 옮겼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생에 죽기 전 이곳 기상연구소를 거점으로 선택한 이유는 주위에 변이체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이유로는 자체적으로 물과 음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조경용인지 실험용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건물 안에 텃밭이 있었고 건물 자체에 빗물을 받아 재사용하는 시스템이 이미 갖춰져 있었다.

통로를 여는 법을 얻은 뒤 돌아갔을 때는 오랜 기간 관리가 되지 않아 파손된 부분이 있어서 상당히 손을 많이 봐야 했지만 2년 동안 열심히 고친 덕분에 이제는 사용할 수 있었다.

아직 초봄이었고 찬물이지만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며칠 동안이지만 돌보지 못한 닭들을 챙겼다.

그리고 배낭에 대충 구겨 넣었던 식기와 보존식품들을 꺼내고 전생에 수집해 놓은 금괴와 귀중품을 조금 챙겼다.

멤파이 자작령에서 이것을 환전하고 왕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준 돈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기회가 될 때 조금씩 환전을 하는 것이 의심을 피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배낭을 챙긴 뒤 밑으로 내려가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으니 주문한 적도 없는 음식이 바로 나왔다.

“오늘의 요리랍니다.”

따로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주는 대로 먹는 방식인 것 같았다. 스튜 한 그릇과 호밀빵 두 개 그리고 약간의 샐러드가 나왔다.

말로만 듣던 그 백년 스튜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이다. 안에 들어있는 재료가 제법 괜찮다. 고기도 큼직한 것이 몇 조각 있었고 들어있는 채소도 제법 상태가 좋았다.

한 수저 떠먹어보니 맛은 그냥 보통이었다. 맛이 없진 않은데 그렇다고 대단한 맛도 아닌 그런 수준이다.

이로서 거짓말쟁이는 3가지 장점을 홍보한 것 중에 절반의 거짓말을 한 셈이다.

물론 이것은 분명 내 잘못도 조금 있다. 초감각으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려고 하는 거짓말도 잡아낼 수 있다. 그런데 아까 거짓말쟁이 꼬마가 여관을 홍보할 때는 그런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그것을 믿어버린 것이다. 전생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즉,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엄마가 진짜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음식 솜씨도 최고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진짜라고 믿는 말은 거짓이라고 해도 감지할 수가 없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형 어때요? 진짜 맛있죠?”

거짓말쟁이가 스튜를 떠먹고 있는 내게 와서 확인을 받고 있었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놀리려고 저러는 것인데 물론 전자일 것이다.

“너 이름이 뭐냐?”

“전 폴이에요.”

“그래 거짓말쟁이 폴”

잔뜩 인상을 썼지만, 금방 대꾸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은 모양이다. 재수가 없어서 성질 더러운 용병에게라도 걸렸다면 말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원래는 진짜 맛있어요! 요즘 재료가 수급이 힘들어서 그래요!”

폴이 분한 얼굴로 항변했다.

“재료 수급이 힘들다고?”

말하고 보니 이해가 갔다. 관도에 숲지기 같은 중급 마수가 튀어나올 정도인데 당연히 유통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자작령 주변의 치안이 안 좋은 이유가 뭐지? 내가 알기로 이런 곳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내가 알기로 멤파이 자작령은 나름 건실한 영지로 알고 있다. 토벌을 몇 번 건너뛴 것처럼 주변 관리가 안 될 정도가 아니다.

“헤헤, 그건”

거짓말쟁이 폴이 어느새 탁자 위로 조그만 손을 올려서 벌리고 있었다. 이 정보는 유료라는 소리다.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폴은 혹시라도 누가 들으면 큰일 날 것처럼 내게 가까이 붙으며 귓속말을 했다.

“멤파이 자작이 6개월 전부터 병사와 기사들을 모두 소집해서 뭔가를 하고 있어요.”

전 병력을 소집했다는 것인가? 6개월 전부터 그랬다면 영지전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영지전을 벌이고 있었다면 도시에 이렇게 쉽게 들어오지도 못했겠지.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우리 아빠가 병사니까요. 6개월 전에 소집되서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크루?”

크루와 제시의 여관이니 당연히 거짓말쟁이의 아버지 이름은 크루일 것이다.

“네, 우리 아빠예요. 영지 병사 중에서 제일 싸움 잘해요. 헤헤”

거짓말은 탐지되지 않았다.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그 정도 되는 아버지를 뒀으니 거짓말을 하고 다녀도 크게 보복을 당하지 않았겠지.

영지의 전병력을 모아 6개월 동안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라면 바로 던전이다.

그것도 상당한 대형 던전일 것이다. 주위에 비밀로 하고 혼자 독식하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영지 주변 치안이 엉망일 이유를 알아냈다. 물론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대형 던전을 완전히 발굴하기만 한다면 멤파이 영지가 급격히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에인프라흐 공작이 끼어들었을 테니 멤파이 자작이 혼자 독식하기는 어려울 것도 같지만 오히려 에인프라흐 공작 같은 거물에게 일부분을 떼어주고 뒷배로 두는 것이 안전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어찌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작은 정보를 얻은 식사를 마치고 제시에게 잠시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말한 뒤 여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엄청난 덩치가 밀고 들어왔다.

누군가 달려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부딪힐 줄은 몰랐던지라 급하게 몸을 틀었음에도 한쪽 어깨를 강하게 부딪쳤다.

순간 오러로 몸을 보호했지만, 상대방의 덩치가 워낙 커서 충격이 대단했다. 바닥에 구르지는 않았지만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오히려 땅바닥에 구른 것은 그 덩치였다. 이것이 기사와 일반인의 차이다.

“이봐! 조심해”

나는 덩치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마리오처럼 성격 나쁜 녀석이었다면 어디 한군데를 잘랐을지도 모른다.

“아, 미안합니다.”

땅바닥을 구른 덩치는 의외로 순순히 사과했다. 사과를 받기도 했고 나도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어서 뒤돌아서 나가려는 순간 거짓말쟁이 폴이 꼬리에 불 붙은 다람쥐처럼 달려와 폴짝 뛰어 덩치에게 안겨들었다.

“아빠아!”

저게 크루인가? 집에 돌아왔다는 것은 던전 발굴이 끝난 모양이다. 6개월 만에 집에 돌아오는 것이라면 마음이 급해질 수도 있다.

“여보!”

이윽고 주방에서 제시도 달려 나와 크루에게 안겨들었다.

가족들의 해후에 끼어들 생각은 없기에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멀리서 적의가 가득한 인간들이 이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달려 들어온 크루와 그 뒤를 쫓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들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것은 한가지뿐이다. 던전에서 뭔가 가지고 도망을 온 것이다. 그것이 발각된 것이고.

“폴, 제시 잘 들어! 이럴 시간이 없어.”

내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크루는 가족들을 붙잡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여관 밖으로 나왔다. 굳이 시끄러운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여관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서 기사와 병사들이 섞인 무리가 전력을 다해 뛰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손끝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반지?’

느껴지는 형태로 보아 분명히 반지다. 내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진 않았으니 둘 중의 하나다. 조금 전 크루가 이 반지를 일부러 내 옷에 넣었거나 아니면 우연히 충돌하는 과정에서 들어왔던가.

이 반지가 뭔진 모르겠지만 반갑진 않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듯 하다. 하지만 믿는 구석은 있다. 나에겐 증거인멸을 하기에 최적화된 능력이 있으니까.

달려온 기사와 병사들이 문을 부술 듯이 거칠게 열고 크루와 제시의 여관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기사와 병사들이 멍청해서 다행이었다. 나라면 여관 주변을 포위하게 했을 것이다.

그사이 나는 가까운 골목으로 슬쩍 들어가 재빨리 통로를 열고 그 안에 반지를 던져넣었다.

여관 안에서 거칠게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사들에게 붙잡힌 크루가 끌려 나왔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흔적이 역력했다.

크루의 뒤에 거짓말쟁이 폴과 제시도 끌려 나오고 있었다.

“이 더러운 놈들! 생목숨 수백 명을 제물로 바쳐서 얻은 재물로 잘 먹고 잘살 것 같더냐!”

끌려 나오던 크루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 힘이 얼마나 좋은지 양쪽에서 팔을 붙잡은 기사들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병사 중에 가장 싸움을 가장 잘한다더니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었다.

‘인신 공양 형식의 던전이었나?’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는 던전 중에 그런 방식으로 문을 여는 던전도 있다고 한다. 가장 더러운 형태의 던전이다. 물론 저기서 인신 공양으로 바쳐진 사람들은 병사들과 잡일을 하기 위해 따라간 죄 없는 일꾼들일 것이다.

“나와 함께 그곳에 던져진 244명이 나에게 부탁했다! 이곳을 나가거든 멤파이 자작을 용서하지 말라고!”

“뭐하나? 입을 막아라!”

“그리고 멤파이 자작이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다!”

크루는 입을 쉬지 않았다. 크루가 살아돌아온 것을 보면 완전한 인신 공양의 형식은 아니고 수백 명을 던져놓고 그중의 살아남는 한 명만이 관문을 통과해서 보물을 독식하는 그런 형식이었던 모양이다.

크루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기사 중에 상급자로 보이는 기사가 명령하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달려가 크루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했다.

“아악!”

재갈을 물리려고 하는 기사의 손을 크루가 물어뜯고 얼굴에 박치기를 날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팔을 잡고 있던 두 기사 중 한 명의 힘이 풀렸는지 크루가 팔을 빼내고 나머지 팔을 붙잡고 있던 기사를 통째로 휘둘렀다.

“우아아!”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엄청난 완력이었다. 제대로 수련만 했다면 대단한 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다.

“친구들아, 나는 약속을 지킨다!”

붙잡고 있던 기사들을 떨쳐낸 크루가 쓰러진 기사가 허리춤에 달아놓았던 단검을 뽑아내 곧바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아빠!!!”

“여보!!”

거짓말쟁이 폴과 제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생명의 힘을 잃고 점점 흐려지는 크루와 눈이 마주쳤다. 크루가 일부러 나에게 반지를 넣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 반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크루의 눈빛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한가지는 지켜주겠소.’

큰 소란에 이미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크루가 나에게 바랐을 것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켜주기 위해 나는 조용히 군중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쩌면 엄청난 것을 받아버린 것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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