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여우를 잡는 것은 호랑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빠져나온 후 으슥한 골목길에서 통로를 열고 들어갔다.
좀 전에 안에 던져두었던 반지를 주웠다. 아까는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안에 던져뒀지만, 반지는 스스로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듯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반지의 재질은 살짝 연둣빛을 내는 백금과 같은 금속에 가운데 재질을 알 수 없는 검은색의 큼지막한 광석이 박혀있었다.
연둣빛을 내는 백금 같은 금속이라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책으로 보기만 했지 백작가에서도 본 적 없는 아주 희귀한 금속, 미스릴이다.
단순히 마법 물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스릴과 뭔지 알 수도 없는 광석으로 만들어진 반지다. 이것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겉으로 봐서는 이 반지가 뭐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으니 끼워보기로 했다. 반지가 손가락에 들어가는 순간 머릿속에서 울리듯이 소리가 전달되었다.
[암호를 말씀하십시오.]
역시 보통의 마법 물품이 아니다. 당연히 암호는 모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다시 뺐다. 폴과 제시를 구해야 하는 확실한 이유가 생겼다.
문제는 어떻게 구하느냐다. 이유가 어찌 됐든 폴과 제시는 멤파이 자작이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죽이지 않는다. 크루가 던전의 보물을 모두 가지고 도망갔고 그 보물이 있는 곳을 폴이나 제시에게 알려주거나 전달했다고 여길 것이다.
아마도 진짜 보물은 이 반지겠지만 암호는 분명히 내가 여관을 나왔던 그 순간에 폴과 제시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그런 눈빛을 보낸 것이다. ‘너 보물 가지고 싶으면 내 가족을 구해야 할걸?’ 같은 의미였으려나.
나는 중심가로 이동해 원래 계획대로 글씨는 지운 금괴 하나를 처분했다. 금화 80개가 생겼다. 환전 비율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상점 주인에게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옷가게로 이동해 좋은 옷감으로 만든 고급옷과 신발을 사서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춰보니 제법 그럴듯한 귀족 도련님이 있었다.
그리고 멤파이 자작의 영주성으로 향했다. 폴과 제시는 아마도 그곳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가는 도중에 겸사겸사 기차역으로 가서 기차표 한 장을 미리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주성으로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 멈추시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이래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여전히 여행복을 입고 있었다면 기사들이 이렇게 좋은 말로 나올 리가 없다.
“이곳에 돌루망 남작님께서 오셨을 겁니다. 그 일행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실해진 것이 있다. 아무리 영주성이라고 해도 기사들이 경비를 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멤파이 자작령에 비해 몇 배 규모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타 변경백의 영지에서도 이렇게 하진 못한다. 왕궁 정도나 된다면 모르겠지만 겨우 변두리 자작령이다.
크루에게 얼핏 들은 것처럼 이번 던전 탐색으로 병사들을 죄다 갈아 넣은 바람에 병사들이 그 정도로 모자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안에 연락을 넣어보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감사합니다. 빅터 하네스입니다.”
가는 말이 좋으면 오는 말도 좋은 법이다. 그리고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기사들을 자극할 이유도 전혀 없다.
기다리는 사이에 감각을 펼쳐 살펴보니 기사들의 수준은 역시 그리 높지 않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보다 약해 보이는 것이 3성 기사들인 것 같다.
보통 이런 지방 영지에서 4성 이상의 기사를 보유하기는 쉽지 않다. 자작령의 규모로 보면 2~3명 정도일 것이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기사 하나가 하인 하나와 같이 내려왔다.
“확인되었습니다. 이 하인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나는 인사와 함께 은화 몇 개가 든 작은 주머니를 기사에게 건넸다. 주머니를 받아든 기사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내가 누군가? 기사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결코 부패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가끔 이런 부수입이 생길 때는 맛있는 걸 사서 집에 돌아와 작은 파티가 열리고는 했다. 아마 오늘 기사의 집에도 비슷한 파티를 열리겠지.
하인을 따라 들어가는 도중에 감각을 이용해 영주성의 구조와 인원 배치를 파악했다. 역시 영주성의 경비는 터무니없이 허술했다.
문제는 톰과 제시가 어디에 갇혀있냐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도 내가 곧 만날 사람이 해결해줄 것이다.
나를 안내한 하인은 어느 방 앞에 멈춰섰다. 방앞에는 젊은 여자 하녀가 대기하고 있었다.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하녀가 안에 기별을 넣자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공작이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시 뵙습니다.”
“자네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드릴 말씀도 있고 겸사겸사 숙소도 해결할 수 있을까 해서요.”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 흥미가 생기는군.”
에인프라흐 공작이 앉아있던 자세를 바꿨다.
“혹시 자작령에 치안이 좋지 않아진 이유는 알아보셨습니까?”
“아니 뭐가 그리 바쁜 것인지 아직 자작과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네. 저녁 식사 때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더군.”
“그럼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실 겁니다.”
나는 공작에게 크루와 제시의 여관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내가 반지를 얻은 일은 쏙 빼놓았다.
“인신 공양 형식의 대형 던전이라면 보상이 상당했을 텐데 멤파이 자작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군.”
내 설명을 들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있는 것을 보아 뭔가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적어도 멤파이 자작에게 유리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 근방의 대형 던전이라면 제국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네.”
“가이브아크 제국 말입니까?”
내 조국인 라이브러쉬 왕국과 옆 나라인 제멜아크 왕국은 약 200년 전 가이브아크 제국이 둘로 나뉘면서 생긴 나라다.
“그렇네, 원래 두 나라가 하나였다는 것은 알고 있지? 지금이야 국경지대지만 제국이었을 당시에 이 근방은 황실직할령이었네. 제국이 멸망할 때 황실에서 찾아낸 보물이 많지 않아 많은 보물을 따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지만 결국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했지. 그래도 보물을 숨겼다면 아마 직할령이 아니겠나?”
그럼 내가 제국의 숨겨진 보물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멤파이 자작이 조용히 작업한 이유가 그거였군요?”
그 막대한 보물을 독차지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내가 그럴 생각이다.
“그럼 의미에서 우리 그 병사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보지 않겠는가?”
에인프라흐 공작의 눈에서 탐욕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앞장서는 공작을 따라 조용히 뒤에서 따라 걸었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깜짝 놀라 허둥댔지만, 감히 우리 앞을 막진 못했다.
공작은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처럼 거침없이 걸었다. 나도 감각을 최대한 살리면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초감각이라는 이능력을 각성했기에 그런 것이지 공작은 그런 것도 아니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공작과 내가 도착한 곳은 의외로 지하감옥이 아니라 영주성 구석에 위치한 방이었다.
방 안에서 여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폴과 제시를 신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 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십시오. 이곳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멤파이 자작에게 돌루망 남작이 보자 한다고 전해주게.”
하지만 기사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작님께서 지금은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전해두셨습니다. 나중에 다시 자작님을 뵈시길 바랍니다.”
“그런가? 그럼 이건 어떤가?”
에인프라흐 공작이 슬그머니 그 기세를 숨기는 반지를 뺐다. 나는 재빨리 뒤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공작에게서 폭발적으로 기세가 뿜어졌다. 뒤에 있던 나조차도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앞을 막아섰던 기사들이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보자 한다고 전해주겠나?”
공작이 지그시 무릎을 꿇은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지만, 그것에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공작이 기세를 조금 줄여주자 기사 중 하나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멤파이 자작으로 추정되는 포동포동 살이 찐 인물이 튀어나왔다.
“가, 각하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그러면서 슬쩍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그러자 멤파이 자작의 서늘한 시선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봤자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으로 드시지요.”
멤파이 자작이 한숨을 쉬며 안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안에는 기사 몇 명이 있었고 폴과 제시가 의외로 묶이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기야 기사들이 잔뜩 서서 지키고 있는데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제시와 폴의 시선이 공작의 뒤에 서있는 나에게 잠시 향했다가 사라졌다. 지금은 그들의 눈에 나도 멤파이 자작과 크게 달리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던전의 보물을 독차지했다는 병사의 가족들인가?”
에인프라흐 공작이 먼저 나에게 들었던 내용을 말하자 멤파이 자작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벌써 그것까지 알고 있는 것이지? 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예의 그 서늘한 시선이 잠시 나를 향했다.
“그렇게 쳐다볼 것 없네, 그래도 자작 자네는 너무 욕심을 부렸어. 희생도 너무 크고 말이야.”
멤파이 자작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고문은 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가족들을 심문한 성과는 있는가?”
“그, 그게”
멤파이 자작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눈치를 보고 있던 거짓말쟁이 폴이 외쳤다. 영악한 녀석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멤파이 자작이 에인프라흐 공작에게 꼼짝 못 하는 것을 보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아빠가 준 수첩은 벌써 자작님께 드렸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라고요!”
수첩? 그런 게 있었나? 설마 거기에 암호가 있진 않겠지?
“오, 그래? 그 멤파이 자작 나도 그 수첩 구경이나 좀 해보세.”
내가 당하는 것이 아닌 공작의 갑질은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재밌었다.
멤파이 자작이 썩은 표정으로 마치 슬로우 마법이 걸린 것처럼 천천히 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공작이 손을 살짝 들자 멤파이 자작의 손에 들려있던 수첩이 빨려 들어가듯이 공작의 손으로 이동했다.
“헙!”
멤파이 자작이 깜짝 놀라서 헛바람을 삼켰다. 나도 고위 기사들이 저런 것을 할 수 있다고 책에서만 읽었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 조금 놀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공작의 옆으로 이동해 공작이 보고 있는 수첩의 내용을 엿봤다. 혹시라도 그곳에 암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첩의 내용은 일종의 일기였다. 던전 공략 초기부터 시작해서 어떤 관문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멤파이 자작이 어떤 패악질을 부렸다. 같은 것이 처음 내용이었고 나중에는 강제적으로 마지막 관문에 투입된 약 300여 명의 사람이 처절하고 끔찍한 생존시험을 거친 내용이 적혀있었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있었으나 공작이나 나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크루가 마지막 관문을 돌파한 이야기로 수첩의 내용은 끝이었다.
‘없군.’
혹시 숨겨진 내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 보기에는 수첩에는 암호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었네.”
공작은 수첩을 자신의 품으로 자연스럽게 갈무리했다. 멤파이 자작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그, 그것은 돌려주셔야···.”
멤파이 자작이 힘들게 입을 열었으나 공작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잔인한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멤파이 자작, 자네 던전에 노예를 투입했더군? 알고 있겠지만 라이브러쉬 왕국은 인신매매가 금지라네. 귀족이라도 사형이지”
수첩에는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다. 멤파이 자작이 처음부터 병사를 제물로 바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관문이 300명이었지 그 전에 소모된 인원도 수백 명이었다. 그중 상당수를 어디선가 구해 온 노예를 투입했다는 것이 수첩에 적혀있었다.
“가, 각하 살려주십시오!”
멤파이 자작이 하얗게 질려서 공작의 앞에 부복했다.
“여기서부터는 둘만 얘기할 필요가 있겠군.”
공작은 바로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뭔가 거래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멤파이 자작을 데리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기사들은 자작을 따라가려다가 공작의 눈빛에 따라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추고 말았다.
기사들의 시선이 완전히 자작과 공작에게 쏠린 사이 나는 조용히 벽 쪽에 바짝 붙여서 통로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