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양초 같은 사람
이것은 나도 조금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아직 제대로 오러나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 앞에서 통로를 열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러나 마나로 작용하는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낮은 경지의 기사나 마법사는 보지 못할 것이다. 저 괴물 같은 에인프라흐 공작 정도가 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인간들 앞에서 대놓고 통로를 열 일이 있을까?
내가 이런 모험을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단순하게 폴과 제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다면 그냥 공작에게 부탁했으면 아주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아마도 내가 공작의 밑으로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누구도 나를 이용하게 둘 수는 없다. 내가 이용하거나 적어도 서로 이용하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몇 초 정도일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시간이 지나갔다. 공작에게 끌려가다시피 한 자작에게 쏠려있던 시선이 다시 돌아왔을 때 통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사라진 나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이 사람 어디 갔지? 하는 생각을 하는 기사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공작의 심복 정도로 생각되는 내가 사라졌다고 해서 수색을 하겠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에인프라흐 공작으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고 남아있는 기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급자로 보이는 기사가 뭐라고 하자 기사 한 명을 남겨놓고는 모두 밖으로 나갔다. 아마 밖에 보초 정도는 세워두었을 것이다.
남아있는 기사와 폴과 제시 모자가 조금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알 수는 없었다.
기회가 찾아올 때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이 기사들은 6개월 동안 던전에 있다가 온 사람들이다.
사기는 최악이었고 피곤하고 지쳤다. 노예를 매매했다는 것이 왕국 최고 권력자에 발각되었으니 당장 영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기사들에게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30분쯤 지났을 때 방 안에서 폴과 제시를 감시하고 있던 기사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뭐라고 말을 하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재빨리 통로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화장실 좀 금방 갔다 올게. 잠시만 봐줘.”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번개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
“쉬잇”
손가락을 입에 대어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 후 묶인 채 의자에 앉아있는 폴과 제시를 양팔에 한 명씩 안아 들고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불과 2~3초 사이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내가 통로 안으로 몸을 던진 직후 화장실 간 기사 대신 문밖에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기사가 들어오자마자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지구로 넘어온 폴과 제시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죠?”
제시는 얼마나 놀랐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히려 제시보다는 폴이 또렷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선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주고 빠르게 설명했다.
“이것은 내 고유마법이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 일단은 넘어가고 너희가 자작에게 계속 잡혀있었다면 무조건 죽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
제시와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착한 일을 하고 싶어서 너희를 구해준 거야. 일단은 이곳에서 좀 버티고 있어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빠르게 식량이 있는 곳과 물을 쓰는 곳 그리고 화장실 등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혹시 여유가 생긴다면 저기 닭들 먹이도 좀 챙겨주고 저쪽에 가면 내가 몇 가지 심어둔 텃밭도 있는데 그것도 좀 봐주고. 아, 달걀은 마구 먹으면 안 된다. 그거 닭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달걀이 아니라서 여러 개 먹으면 너희들은 마력중독이 일어날 수도 있어. 하나 정도는 괜찮을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직 이들을 아노더스로 다시 돌려보내 줄지는 정하지 않았다. 내 가장 큰 비밀을 알아버린 이들이기도 하고 이곳에 사람을 둔다면 그것대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멤파이 자작이 살아있는 한 이들은 왕국 어디에 가서도 안전하지 못하다. 공작이 법대로 처리해서 사형이라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따로 얘기하겠다면서 끌고 간 것을 보면 그렇게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운이 좋다면 며칠 내로 내가 다시 들를 거고 아니면 2주 정도 돌아오지 못할 거야. 식량은 거기에 맞춰서 소비하도록 해. 여기까지 이해했나?”
정신이 반쯤 빠져있는 제시와 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통로 밖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방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킬 것이 없는 방에 뭐하러 기사들을 남겨두겠는가?
머리를 슬쩍 내밀고 감각을 펼쳐 살펴보니 문밖에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가 감각을 최대한 펼쳐 사람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원래 공작과 내가 만났던 처음 그 방으로 돌아갔다.
문 앞에 있던 하녀가 고개를 슬쩍 숙이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느긋하게 공작을 기다렸다.
20분 정도 지나자 에인프라흐 공작이 웃음을 지으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자네인가?”
밖에 그 난리가 났는데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네, 접니다.”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통하지 않을 상대이기도 하다.
“자네도 보물을 노리는가?”
“아닙니다. 내버려 두면 죽을 것이기에 구했을 뿐입니다. 애초에 그들은 보물이 어딨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폴과 제시가 보물이 어딨는지 모르는 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게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로는 보지 않았는데?”
“저도 제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그냥 변덕이라고 해두죠.”
“하하!”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몰라도 에인프라흐 공작은 크게 웃었다.
“멤파이 자작은 법의 심판을 받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했다.
“아니야. 그것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네. 대신 몇 가지 이득을 보았지.”
예상했던 결과였다. 공작이 대쪽같이 정의를 펼치는 그런 인물이었다면 왕국 최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멤파이 자작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돈? 아니면 충성? 그런 것들은 내게 그리 필요하지 않지. 하지만 이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겠나?”
공작은 품에서 크루의 수첩을 꺼내 흔들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으로 발굴된 제국의 유산이네. 그런 제국의 던전을 공략한 유일한 기록이지 던전의 관문이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지 아주 자세히 써있는 공략집이란 말이지.”
“아···. 그렇군요.”
만약 왕국 영토 내에서 또 다른 제국의 던전이 발견될 때 저것은 아주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법으로 단죄하는 것보다 그냥 내버려 둬도 멤파이 자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네. 오히려 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더 오래 걸릴걸? 내가 받아줘도 손해란 말이지.”
그것은 나도 조금은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역시 권력의 정점은 아무나 해먹는 것이 아니다.
“기차가 올 때까지 이곳에 머무실 겁니까?”
“자네는 아닌가?”
“네, 밖에 볼 일이 좀 있어서요.”
“그렇겠지.”
공작은 내가 폴과 제시를 밖으로 탈출시킨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공작은 의외로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폴과 제시를 빼돌린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속이 좁은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여유롭게 영주성을 빠져나왔다. 얼마 안 되는 기사와 병사들이 영주성 화단의 꽃밭까지 창으로 쑤셔가면서 수색을 펼치고 있었고 포동포동했던 멤파이 자작이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얼굴이 반쪽이 되어 쉴새 없이 고함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휘청거리는 그 모습이 마치 마지막까지 타들어 가서 꺼지기 직전의 양초를 보는 듯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는 내 앞을 막으려고 하다가 나를 알아보았다.
“볼 일은 다 보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나가셔도 됩니다.”
기사의 태도가 부드러웠다. 역시 들어올 때 돈을 쓴 보람이 있었다. 사람이 없어진 것이지 물건이 없어진 것이 아니기에 나를 막을 명분도 없었겠지만, 자작이 있었더라도 공작의 심복으로 생각되는 나를 막을 순 없었을 것이다.
영주성을 벗어난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용병사무소였다.
그곳에서 사무원에게 펜과 종이를 사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멤파이 자작령에 도착한 것과 중간에 에인프라흐 공작을 만난 것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적었다.
대충 요약하면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멤파이 자작령은 지금 던전을 공략하느라 병사들이 거의 다 사라졌고 영지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다. 이것을 크리스타 변경백에게 알리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도 이 편지의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멤파이 자작령에서 던전을 공략한 것 그러나 보물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금방 소문이 퍼질 것이다.
병력이 없는 영지는 주변 영지에게 던전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명분은 만들면 되는 것이다.
영지를 점령하진 못하더라도 적당히 압박해서 일정 부분의 영토를 빼앗거나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법으로 단죄하지 않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이것을 이야기 한 것이다.
주변 영지들이 먹이를 발견한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멤파잉 자작령을 산산조각낼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공을 세웠으면 했다.
내가 아는 크리스타 변경백은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빠른 정보를 가져온 아버지는 무조건 공을 세운 셈이 된다. 그리고 영지전에서 공을 더 세우게 된다면 단승 작위이긴 하지만 잘하면 남작으로 승작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작성한 편지를 긴급으로 해서 용병사무소에 의뢰를 맡겼다. 적잖은 돈이 들었지만, 이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날이 저물기 전에 상점 구역으로 가서 식량과 이불 같은 것을 구매해 시선이 없는 곳을 찾아 지구로 넘어갔다.
내가 의외로 빨리 찾아오자 폴과 제시는 안심과 의심이 섞인 눈빛을 했지만 최소한 나에게 적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폴과 제시에게 지금 밖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쪽에는 경험이 꽤 많이 있다.
생존자 쉘터에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달래는 일이 많았다.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거나 혼란에 빠진 사람의 실수 한 번에 쉘터 하나가 전멸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 사고를 미리 방지하는 임무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설득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실 나는 그쪽 일을 훨씬 더 잘 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거짓말쟁이 폴은 제시보다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이 빨랐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설마 이놈도 나처럼 환생 같은 걸 한 것은 아니겠지?
“멤파이 자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자작의 자식들까진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그리 힘을 쓰진 못하겠지. 최소한 멤파이 자작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는 이곳이 바깥보다 안전할 거다.”
“멤파이 자작이 죽지 않으면요?”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면 그때는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일단은 그렇게 알려주었다. 바깥의 소식이야 내가 전해주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으니까.
“나를 의심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한가지는 알아줬으면 한다. 나는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꽤 큰 위험을 감수했다.”
“가, 감사합니다.”
제시가 먼저 감사 인사를 하자 폴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엎드려 절받기 느낌이지만 이런 것은 각인시켜줘야만 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지.”
원래 있던 재료와 새로 사온 재료들을 합쳐 제시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고기를 많이 사 왔기 때문에 제법 먹음직한 스튜가 완성되었다.
스튜는 여관에서 내왔던 스튜보다 오히려 훨씬 나았다. 폴이 말했던 것처럼 제시의 요리 솜씨는 제법이었다.
사람은 배가 부르면 안심을 하게 된다. 식사를 마치고 제시와 폴은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중엔 아주 결정적인 이야기가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