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용사의 검
“아버지가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언제나 함께야. 라고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는 폴과 옆에서 울고 있는 제시를 바라보며 함께 슬퍼해야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겨우 이런 이야기로 슬퍼하기에 내 안에는 너무 닳고 닳은 인간이 들어있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크루가 가족들에게 반드시 기억하라고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당연히 저것이 반지의 암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크루는 영리하지 못했다. 아무리 반지에 암호를 걸어놨다고 해도 집으로 돌아온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식구들을 데려가 고문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오히려 우연히 반지가 나에게 넘어온 것이 폴과 제시를 살린 셈이다.
“그렇군. 크루의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도록 해라.”
슬퍼하는 연기는 하지 못해도 이 정도 말은 해줄 수 있다.
“네, 기사님”
폴과 제시는 이제 나를 기사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폴과 제시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내 신상을 간단히 알려줬기 때문이다.
옆의 백작령에서 살던 하네스가의 차남이고 4성 기사이자 마법도 사용할 줄 아는 마검사라는 것도 알려줬다. 이미 이곳에 데려온 것을 고유마법이라고 설명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기에 기사라고 불리는 것은 조금 그렇지만 4성 이상의 무인이라면 서임을 받지 않고도 그렇게 불리는 경우가 많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밤이 깊어져 모자가 모두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내 방에 숨겨두었던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암호를 말씀하십시오.]
예의 그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야.”
[암호가 확인되었습니다. 스트라이더 넘버 997번을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능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목록 확인은 1번, 반출 및 반입은 2번, 암호 변경은 3번, 용량 확인은 4번, 자폭 기능 활성화는 5번입니다.]
역시 암호는 맞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은 들었던 형식이다. 이거 전생의 전화 ARS 시스템 아닌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스트라이더 넘버 997번이라고 했다. 뒤에 번호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스트라이더라고 하면 약 400년전 마왕의 강림을 물리친 제국 적색마탑의 탑주이자 5명의 용사 중의 한 명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던 용사들이다. 그중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마법사로서 전무후무하게 10서클을 넘어 초월자의 영역에 닿았다고 알려졌었다.
그런 사람이 만든 아이템이라는 뜻이다. 목록 확인도 해보고 싶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3번”
[암호 변경을 선택하셨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변경하실 암호를 말씀해주십시오. 주변에 소음이 없는 곳에서 사용해주시길 권장합니다. 삐-!]
다시 들어봐도 ARS다. 설마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지구 출신의 환생자였나?
“마지막 생존자”
[새로운 암호로 마.지.막.생.존.자를 지정합니다. 스트라이더 넘버 997번을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록 확인은 1번···.]
ARS 설명을 끝까지 듣는 것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없지. 물론 지금의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1번”
[목록 확인을 선택하셨습니다. 무기는 1번, 방어구는 2번, 잡화는 3번, 장신구는 4번, 생활 물품은 4번, 기타 특수물품은 5번, 도서 및 문서류는 6번, 귀금속 및 재료는 7번입니다.]
일단 실험 목적으로 대충 선택해보기로 했다.
“1번”
[무기 목록을 선택하셨습니다. 검은 1번, 도는 2번, 창은 3번, 메이스는 4번···.]
설명이 끝도 없다. 이거 보통 아공간 물품보다 더 사용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공간 아이템의 단점이라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사용자가 완전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트라이더 997번은 그 단점을 해결한 물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너무 번거롭다. 일반적인 사용은 불가능할 듯 싶다.
“1번”
이번에도 실험의 의미로 1번이다.
[검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트라이더 997번에 보관된 검은 가이브아크 병사용 검 500자루, 가이브아크 기사용 검 10자루, 지르크 폰 가이스트의 슈바르거트 1자루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설명을 원하시면 1번, 뒤로 가기를 원하시면 2번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초감각으로 확인하니 다행스럽게도 폴과 제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이름이 나올 때 이상하긴 했지만, 이번엔 지르크 폰 가이스트다. 일명 광검제라고 불리었던 검에 미친 인간이자 다섯 명의 용사 중 일인이며 마왕의 1차 강림 약 100년 후 일어났던 마왕의 2차 강림에서 단신으로 마왕의 강림을 막은 용사다. 초월자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다른 용사들과 달리 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런 지르크 폰 가이스트의 애검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 물건이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전쟁이 날수도 있다. 값으로 치면 크리스타 백작령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답지 않게 흥분해서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른 것들도 확인하기 시작했다.
“2번, 2번”
그렇게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목록을 확인했다. 그것은 아침이 되어 폴과 제시가 일어날 때까지 이어졌다.
모자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하지만 나는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주변 순찰을 돌고 온다. 이곳에도 마수가 있어서 가끔 순찰을 해줘야 한다. 어쩌면 오늘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기상연구소에서 멀리 벗어났다.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스트라이더 997번을 더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기상연구소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계곡까지 달려왔다. 전에도 한 번 순찰을 위해 왔던 곳이고 전생에는 수십 번을 오갔던 곳이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을 때는 이곳에서 물을 길어 사용하기도 했었다.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계곡이지만 물은 매우 맑았다. 그야 지금은 공해를 일으키는 시설이나 자연을 오염시키는 인간이 하나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계곡 주변의 편편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목록 확인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밤새도록 바보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도서 및 문서류에 스트라이더 997번의 보관목록에 관한 문서가 있었다. 제국 사람이라고 이 시스템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 대비를 해둔 것이다.
하지만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스트라이더 997번은 엄청난 아이템이다. 안에 들어있는 무기와 방어구만 해도 모두 정확히 511개씩이다. 2500명의 정예병과 50명의 기사를 무장시킬 수 있는 물건들이 들어있다.
다른 것을 빼고 무기와 방어구만 해도 그 정도다. 그 엄청난 중량과 부피를 차지하고도 용량 확인을 해본 결과 55퍼센트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 아공간 아이템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병사와 기사용의 물건들은 지금 나에게 큰 쓸모가 없다. 그것들을 줄 병사와 기사도 없을뿐더러 제국의 문양과 제작형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들을 꺼내 쓰다간 반역자로 몰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실제로 스트라이더 997번은 그런 용도임이 확실했다. 이것은 가이브아크 제국이 위기에 빠질 것을 대비해 만든 황실 비밀창고다. 이 정도 무장과 물품이면 어지간한 공작이나 후작의 병력을 무장시킬 수준이다.
이런 것을 어째서 활용하지 못하고 제국이 망해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런 창고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문서류에서 찾아낸 문서 중에는 이런 황실의 비밀창고가 7개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그 위치가 나와 있진 않았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스트라이더 997번은 정말 나에겐 대박이다. 나에게 그동안 부족했던 것들이 이곳에 모두 들어있었다.
다른 것보다 보관 도서들이 대박이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탑주로 있었던 적색마탑의 마법서와 마나 심법이 있었다.
탑주의 비전 같은 것은 아니고 적색 마탑의 상급 제자용 마나심법에 불과했지만 기초심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상급 제자용 마나심법이라 해도 화염계 마법에 특화된 충분히 상위권에 포함될 수 있는 심법이었다.
그리고 제국 황실 기사단의 오러심법도 있었다. 하네스 가문의 선조님들에겐 죄송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사용했던 하네스 가문의 오러 심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급의 심법이다.
그리고 분류마다 보물 혹은 명품에 해당하는 것들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광검제의 슈바르거트였고 창에는 마헤트예거라는 명품이 있었다. 그리고 스태프 중에 스트라이더 317번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좋은 물건이었다.
그 외에 잡화에 스트라이더 520번의 망토와 장신구에는 수많은 마법 반지와 목걸이들 그리고 특수물품 항목에 많은 종류의 포션들과 무려 엘릭서가 하나 있었다.
엘릭서는 제국이 멸망하면서 제작방법이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 만들어놓았던 엘릭서가 수십 년에 한 번씩 어디선가 튀어나오거나 던전에서 출토되기도 하지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운 것임에는 불명하다.
저장 목록이 기록된 문서를 찾으며 생각보다 일찍 일을 마친 나는 점심이 조금 지났을 때 기상연구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잠이 들었다.
저녁에 일어나 모자와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왕도로 간다. 멤파이 자작이 처리되는 것을 떠나서 너희들은 어차피 멤파이 자작령에서는 살 수 없을 거야. 왕도에서 지내는 편이 나을 거다.”
“저희가 왕도에서 살 수 있을까요?”
제시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도 집을 구해야 할 테니 그곳에서 거주하며 일을 해도 좋다. 물론 급료도 줄 것이고 그렇게 돈을 모아 독립해도 좋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스트라이더 997번에서 얻은 것이 너무 많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폴과 제시를 꺼내줘도 대비할 수 있는 아이템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맹약의 스크롤이다. 마탑에서 사려고 하면 굉장히 비싼 물건이고 가격을 떠나 그 용도 때문에 알게 모르게 주목을 받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스트라이더 997번 안에 맹약의 스크롤이 다수 저장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직 맹약의 스크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스크롤의 사용을 거부하고 이곳에서 계속 살 것 같진 않았다.
할 일이 많아졌다. 제국의 오러심법과 적색마탑의 마나심법도 익혀야 하고 수많은 마법서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저장된 도서 중에는 그런 것 말고도 많은 책들이 있었다.
제국의 역사서를 비롯해 지리, 천문, 문학, 예술을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이 구비되어 있었다. 변경백의 서재에 있던 것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좋은 책들이었다.
내가 원래 학구파는 절대 아니지만 내 목적과 계획을 위해 이것들은 필요한 것들이었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대격변 이후에 생존에 급급한 생활을 하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회사원 생활을 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일이었다.
생활용품에 들어있던 마법 등불과 난로를 꺼내 모자의 방에도 놔주고 내 방과 꼬꼬들의 사육장에도 설치했다. 아직 봄이라 이곳 태백산은 꽤 춥다. 나야 오러를 사용할 수 있으니 추위에 내성이 좀 있었지만, 꼬꼬들이 여태까지 겨울을 잘 버텨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내 방으로 돌아와 제국의 역사서를 읽고 있을 때 폴이 혼자 내 방으로 찾아왔다.
“기사님”
“무슨 일이냐?”
폴은 금방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시간을 끄는 것이 더 실례다.”
“저, 저도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세계의 꼬마들이 다들 하는 생각이다. 더구나 지금의 폴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이해가 간다.
“왜 기사가 되려고 하지?”
“제가 힘이 있었다면 아버지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그건 아니었을 거다. 나라도 힘들었겠지.”
폴의 눈이 크게 떠지고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4성 기사라도 당시 상황에서는 어려웠을 거다. 상대 기사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인성이 썩어서 이렇게 냉정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폴의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그래도 힘이 있다면 앞으로 네 어머니는 지킬 수 있겠지.”
“네···.”
“이리 가까이 와봐라.”
오러나 마나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누구나 오러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면 하급 심법만 구하면 누구나 기사나 마법사가 되었을 거다. 그리고 그 타고난 재능 중에서도 죽을 때까지 4성 기사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주뼛거리며 다가온 폴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지금부터 네가 기사가 될 수 있는지 시험을 할 거다. 조금 아플 수도 있으니 참아라.”
“네!”
씩씩한 폴의 대답을 들으며 오러를 조심스럽게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