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크고 아름다운
공작은 바로 반지를 뽑진 않았다. 다만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백작님은 같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중대한 일이 생겨 바쁘시다. 그보다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크리스타 백작은 기차에 타지 않은 모양이다. 이 시기에 대성회를 빼먹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아버지에게 전해준 정보로 인해 멤파이 자작령을 치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멤파이 자작도 대성회에 불참인지 기차에 타지 않았다.
마리오 녀석이 대리인으로 참석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 녀석을 혼자 보냈을 정도로 백작이 생각이 없진 않을 텐데?
누군가 같이 오긴 했을 텐데 그쪽은 일반석에 타는 것 같다. 설마 아버지가 포함된 것은 아니겠지?
어쨌든 이 세상 넓을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버릇은 좀 가르쳐줘야겠다. 나에겐 지금 언제든지 뽑힐 준비를 하고 있는 아주 크고 아름다운 칼이 있다. 무려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칼이다.
“그건 그렇지요. 어쨌든 조금 전에는 언사가 과하셨습니다. 돌루망 남작님에게 사과하십시오.”
마리오 놈은 화장실에서 일주일 만에 볼일을 보고 결과물을 확인하는 표정으로 다시 에인프라흐 공작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콧방귀를 끼며 중얼거렸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이것은 욕인가? 칭찬인가? 왕국 최고 권력자와 끼리끼리 논다는 것을 보면 나에겐 칭찬인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사과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모양이다. 마리오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여기서 조금만 더 약을 올리면 될 것 같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공부를 안 하셨다고 해도 이것은 귀족으로서 기본 소양입니다. 사과하십시오.”
“네놈이 감히!”
마리오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어려서부터 나에게 가지고 있던 열등감을 제대로 후벼팠다. 여태까지는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다른 곳에서 반응이 왔다.
“조용히 좀 합시다.”
“기차를 혼자 쓰는 것도 아니잖소.”
“듣자니 먼저 실례를 한 것도 공자 아닌가?”
마리오가 소리를 지르자 특등석에 듬성듬성 타고 있던 다른 귀족들이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특등석에 탔다는 것은 일단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귀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는 말은 영지가 있는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물론 마리오 녀석은 이런 것을 생각지도 않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눈앞에 허름한 복장의 공작과는 달리 다른 귀족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서 사과하시고 조용하고 즐거운 여행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에게 권유했다. 물론 녀석이 이것을 들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허! 네놈은 두고 보자꾸나.”
예상대로 마리오 녀석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끼더니 몸을 홱 돌려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작을 슬쩍 바라보니 약간의 분노와 장난기가 동시에 보였다. 이 정도면 딱 좋지 않을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공작이 마리오를 때려죽이기라도 하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다.
“어이, 애송이 거기 서라.”
나의 크고 아름다운 칼이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는 마리오를 낮은 음성으로 불러세웠다.
“뭐?”
마리오가 뒤를 돌아보며 공작을 노려보았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이 비루한 남작 놈이 감히 나에게? 같은 표정이었다.
어느새 꺼냈는지 공작이 자신의 신분증을 마리오를 향해 휙 던졌다.
공작의 신분증은 처음 봤다. 신분증이 무려 미스릴로 되어있었다. 참고로 내 신분증은 그냥 철이다. 그래도 귀족 끄트머리쯤이라도 된다고 코팅 같은 것이 되어있긴 하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아오는 공작의 신분증을 받아든 마리오는 그 범상치 않은 신분증을 읽고서는 눈이 찢어질 듯이 크게 떠졌다.
“아, 아니 분명 남작이시라고···.”
“그것은 이 친구가 내 암행을 도와준 것이지. 그래 네가 게릴의 아들이라고?”
게릴은 마리오의 아버지이자 현 크리스타 백작의 이름이다.
“그, 그렇습니다.”
기세등등하던 마리오가 갑자기 겁먹은 토끼가 되었다. 워낙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더니 그래도 에인프라흐 공작 앞에서는 겁을 먹긴 하는구나. 그래도 그 정도의 사리 분별은 있어서 다행이다.
공작이 손을 내밀자 마리오가 겁먹은 하녀처럼 허리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신분증을 공작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게릴의 아들아.”
“네, 넵”
“우린 많은 대화가 필요하겠구나.”
“아, 아닙니다.”
“아니라고?”
“아, 아니 맞습니다.”
마리오 놈이 저렇게 위축된 것은 처음 본다. 백작에게 호되게 혼이 나면서도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강한 자에게 유난히 약해지는 타입이었나?
“어이, 빅터군”
“네, 공작님”
공손하게 대답하며 슬쩍 공작을 바라보니 나 잘했지? 하는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마리오에게 보이지 않게 슬쩍 엄지를 세워줬다.
“내가 여기 게릴의 아들과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자리를 바꿔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타쌍피, 마리오에게 엿을 먹이면서 공작에게서도 멀어질 기회를 잡았다.
나는 마리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마리오가 내 손을 보더니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이제 마리오는 나에게 그다지 두려운 상대가 아니다. 비록 부모님이 크리스타 영지에 묶여있긴 하지만 내가 왕도에서 자리만 잡는다면 부모님을 모셔와도 된다. 형은 음, 알아서 하겠지.
“기차표를 주십시오. 제 좌석과 바꿔드리겠습니다.”
마리오가 지옥에 끌려가는 죄인 같은 얼굴로 기차표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내 기차표를 마리오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다시피 했다.
이때 마리오는 몰랐다. 진짜 지옥행 기차에 올라탔다는 것을···.
마리오의 좌석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었고 나쁜 점도 있었다.
좋은 점이라 하면 고통받는 마리오의 소리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고 나쁜 점은 공작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작이 정체를 드러내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몇몇 귀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작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감히 에인프라흐 공작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귀족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 새로운 좌석 옆자리의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제이미 하셀브링크 자작이라고 하네, 자네는 공작 각하와 어떤 관계인가?”
“안녕하십니까. 자작님. 저는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에인프라흐 공작님과는 우연히 여행 중에 만난 사이입니다. 영광스럽게도 공작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요.”
물론 거절했지만,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굳이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인재수집가로 유명한 공작이 그런 제안을 했다면 나도 그런 인재 중의 하나로 인증받는 것이니까. 함부로 하지 말라는 은연 중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군. 공작 각하께서 그런 제안을 할 정도면 자네 대단한 인재인가 보군.”
“작은 재주가 있을 뿐입니다.”
효과는 좋았다. 하셀브링크 자작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 후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자작은 여러 방면으로 막힘이 없는 내 지식에 놀랐고 나중에 내 나이를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품속을 뒤적이더니 은으로 만든 명함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내 명함일세 언제든지 하셀브링크 자작령에 올 일이 있다면 사용해주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셀브링크 자작의 명함을 얻은 것은 제법 큰 수확이었다. 자작은 왕국 남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는데 자작령의 특산물이 설탕이라고 했다. 마법의 발달로 소금은 조금 흔해졌지만, 설탕은 여전히 평민들은 구하기 어려운 고가의 상품이다.
지구의 제과를 재현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는 나에게 설탕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인맥을 얻게 된 것은 제법 큰 수확이었다.
그러는 동안 저쪽 뒤편의 마리오는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고 있었다.
“그래 내가 지저분하고 음침하다고?”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지금 내 귀가 잘못됐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럼 내 머리가 잘못됐다는 거로군. 나를 노망난 늙은이로 만들었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보니 에인프라흐 공작은 누군가를 괴롭히는데 대단히 재능이 있었다. 어쩌면 8성에 이른 검술보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에 더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도 기차 특등석의 화려한 기내식이 나왔을 때.
“이 시국에 자네는 밥이 넘어가는가?”
“네, 넷?”
이렇게 밥도 못 먹게 하고.
밤이 되어 다들 좌석의 수면 등을 끄고 잠이 들려고 할 때.
“자네는 그 실력에 잠이 오는가?”
“네, 아니 아닙니다.”
이렇게 밤에 잠도 안 재우고 연공을 시키고.
“그래서 내가 화인그레이의 마수를 토벌하고 촌장에게 물었지. 이제 되었소? 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촌장이...이보게 듣고 있는가?”
“네, 넵”
“내가 방금 얘기했던 촌장의 이름이 뭐라고?”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허허, 지저분하고 음침한 공작의 얘기 따윈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다는 말이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듣겠습니다.”
이런 꼰대짓도 하면서 마리오를 줄기차게 괴롭혔다. 그렇다고 마리오가 불쌍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동안 해왔던 악업에 비하면 이 정도는 당해줘야 한다.
그동안 나는 특등석의 여러 귀족과 안면을 트며 명함을 수집하거나 역에 정차할 때마다 잽싸게 내려 역에 설치된 매점에 가서 특산품과 지역의 유명한 먹을거리를 산 후에 화장실로 뛰어가 통로를 열고 안에 들어가 폴과 제시에게 전달한 후에 다시 기차로 돌아왔다.
비록 직접 여행은 못 하더라도 여러 지역의 특산물과 먹을거리를 제공받는 폴과 제시는 매우 기뻐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투자다. 맹약의 스크롤을 사용할 것이지만 진짜 내 사람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그렇게 3일이 지났을 때 마침내 마리오의 정신이 무너졌다. 생각보다 나약한 녀석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공작 각하”
“살려달라니? 내가 자네를 죽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래도 살려주십시오.”
“나를 완전히 흉악범으로 만드는군?”
공작의 꼰대질에 듣고 있던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헝헝헝!”
마침내 마리오가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말게 그러면 내가 자네를 매우 괴롭힌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괴롭힌 것이 맞지만 공작은 매우 뻔뻔했다.
“갑자기 어디가 아픈 모양인데 그럼 저기 빅터군에게 가서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해서 좀 쉬게. 하지만 절대로 강요를 해선 안 될 것이야.”
아, 며칠 편했는데 이제 그것도 끝이로구나. 마리오가 마치 7성 기사처럼 빠른 움직임으로 나에게 달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려다오. 부탁이다.”
마리오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시커먼 사내놈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매우 꼴불견이었다. 옆을 보니 하셀브링크 자작도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거절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내가 거절하면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아서 기차표를 바꿔주었다.
“알겠습니다. 바꿔드리죠.”
“고맙다. 고맙다.”
마리오는 내 손을 잡고 몇 번이나 흔들며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공작이 그리 악랄하게 괴롭힌 것도 아니었다.
마리오가 지구에서 군대를 다녀왔거나 회사생활을 해봤다면 웃으면서 넘겼을 것이다. 나약한 중세 판타지 귀족 놈, 다시는 지구인을 무시하지 마라.
자리를 바꿔서 공작 옆으로 돌아오자 공작이 웃으면서 나를 반겨 주었다.
“며칠 편안했는가?”
순간 회사원 시절의 부장님이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려와 달리 기차 여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로웠다. 가끔 역에 정차할 때마다 막간을 이용해 특산품을 사서 지구로 넘겨주었고 아직도 나를 영입할 꿈을 버리지 못했는지 시험을 치듯이 정치, 경제, 사회, 군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대해 질문을 하는 공작에게 성심껏 답변을 해줘야 했다.
그렇게 십여 일이 지나고 왕도에 도착이 가까워졌을 무렵 역에 정차해 특산품을 사기 위해 기차에서 내려 매점으로 향하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불렀다.
“거기 빅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