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6화 (16/206)

16. 괴물들의 도시

뒤를 돌아보니 반가운 얼굴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벤 아르파 준남작, 크리스타 백작령의 행정관이자 내 스승 중의 한 명이기도 했던 사람이다.

역시 게릴 크리스타 백작이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 이상 마리오를 혼자 보냈을 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행정관님"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최대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려고 했고 벤 행정관도 그렇게 모신 스승 중 한 명이었다. 7살 아이에게 행정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처음에는 아버지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가 내가 배우는 속도를 보고 기겁을 했던 사람이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에게 영지 행정업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구와는 다른 점도 많았기에 벤 행정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행정 말고도 회계나 기타 사회에 대한 상식 같은 것도 아낌없이 가르쳐준 사람이다. 스승이었던 것을 떠나서 영지 내에서 아버지와 가장 친한 친구이니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 없다.

"네가 출가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 기차를 탔던 것이냐?"

"네, 멤파이 자작 영지에서 탑승했습니다."

"쯧, 네가 일반석은 타지 않았던 것 같고 그렇다면 마리오를 만났겠구나?"

아, 벤 행정관은 아직 마리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오는 그 일 이후에 자리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잘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아서 옆자리의 하셀브링크 자작이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네, 소영주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에인프라흐 공작과 내가 동행하고 기차 안에서 마리오와 공작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마리오가 에인프라흐 공작에게 무례하게 대했던 부분에서 벤 행정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혼이 빠지게 당해서 지금은 폐인처럼 처박혀 있다는 말에 오히려 기뻐했다.

사실 영지 내의 사람 중에 마리오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한 명도 없으려나? 소영주이기 때문에 곁에 달라붙어서 꼬리를 치는 사람은 있어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임자를 만났구나.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지. 잘 됐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조금 나아지려나?"

아닐 겁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걸 가르쳐준 사람이 벤 행정관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것은 진심이다. 나는 크리스타 백작령이 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 고향이기도 하고 부모님과 형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그런데 너는 어떻게 특등석에 탄 거냐? 요금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냥 일반석 요금도 12골드다.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런데 특등석은 36골드다. 어지간한 귀족에게도 부담이 가는 액수다.

"공작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처음 알았는데 공작에게 주는 특혜 같은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공작님이 너를 아주 좋게 보셨나보구나."

"공작가에 저를 영입하고 싶으신가 봅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일반석은 내가 사긴 했지만 그걸 업그레이드시켜준 것은 공작이고 영입하려는 생각을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

"그래, 너는 크게 될 줄 알았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변경백령에서 썩기에 너는 아까운 인재니까."

벤 행정관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벤 행정관이야말로 내가 보기엔 변경백령의 행정관으로 있기에는 넘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다. 뭐랄까 세상을 보는 시야가 무척 넓은 사람이다. 나와는 달리 인간성이 매우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노블레시아 시험을 본다고 했다면서? 공작가로 간다면 그것은 보지 않는 거냐?"

"아닙니다. 공작가로 들어가는 것을 미루더라도 노블레시아는 봐야지요."

공작가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지만 일단은 이렇게 얘기하기로 했다.

"그럼 그동안 어떻게 지낼 생각이냐? 알지 모르겠지만 왕도의 집세는 매우 비싸다."

대답이 잠깐 막혔다. 전생에 모아둔 금괴를 갖다 팔아서 집을 살 겁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고민 끝에 일단 공작을 팔아먹기로 했다.

"공작님이 지원을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작은 집이라도 한 채 구해서 있으려고요."

"그래? 그럼 얼마나 지원받는 거냐? 말했지만 왕도의 집값이 만만치 않다. 네가 생각한 것 이상일 거야."

"집값이 그렇게 비쌉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왕도의 집값까지 조사하고 집을 나오지는 않았다.

"이번에 백작님이 왕도에 새로 숙소를 구입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내 돈도 아니지만, 가격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더구나."

"원래 숙소가 있지 않았습니까?"

왕도에 올라오는 일이 잦은 고위 귀족들은 숙소 용으로 왕도에 집 한 채 정도는 가지고 있다. 물론 돈이 많은 귀족들은 저택을 가지고 있지만 크리스타 백작이 그 정도까진 아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작은 집이 300골드다. 그걸 팔고 조금 더 큰 집을 산다고 하시더구나. 그런데 중심가의 웬만한 집은 가격이 1000골드가 넘어."

저택도 아니고 조금 큰 집이 1000골드? 무슨 강남이야? 전생에 내가 모아둔 금괴는 10개였다. 하나는 집에 두고 오고 하나는 팔았다. 남은 금괴는 8개, 그것을 다 팔아도 1000골드가 되지 않는다.

"팔려고 하는 집이 얼마나 작습니까?"

"일단 3층 집이기는 한데 좀 아주 작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와 폴 그리고 제시 셋이 사는데 굳이 큰 집이 필요하지 않다. 작은 집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작을 줄 알았는데 귀족 기준이었나? 셋이 사는데 3층 집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그 팔려고 하는 작은 집, 제가 살 수 있겠습니까?"

"공작님이 그 정도나 지원을 해주시는 거냐?"

"아, 네 그렇다고 합니다."

"적은 돈이 아닌데 너에게 정말 많은 기대를 하시나 보구나?"

일단은 공작을 팔아 둘러대었다. 스트라이더 997번에도 금화 같은 것이 좀 들어있긴 한데 그것은 제국 금화다. 출처도 없이 팔려고 내놓는 순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앞으로 생활비와 일을 하려고 할 때 들어갈 돈까지 생각하면 당장 내가 가진 돈으로 구입하기에는 저 300골드짜리 집이 적당할 것 같다.

무엇보다 왕도에서 집을 구매하는데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전혀 모르고 중개인을 찾아가서 제대로 된 집을 소개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거기에 중개인 보수도 있다. 그에 비한다면 벤 행정관이라면 믿을 수 있다. 돈도 안 들고 여러 가지 행정절차도 도와줄 것이니 이쪽이 훨씬 이득이다.

벤 행정관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집 주소를 적어주고 왕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기차의 쉬는 시간이 다 되었기에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왕도에 한 정거장만이 남았을 때 아침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던 공작이 일주일 정도 굶은 너구리 같은 표정을 하고 있길래 예의상 말을 걸어 주었다.

"뭔가 심기 불편한 일이 있으십니까?"

"있지, 누군가를 포섭하는 데 실패해서 말이야."

결국 또 그 얘기였나? 이 양반 상당히 집요한 구석이 있다.

"자네. 내 덕에 상당히 이득을 봤지?"

이유와 과정이 어찌 됐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습니다."

"그럼 공작가로 들어오라고 안 할 테니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게."

뭔가 심상치 않다. 그래도 이건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면 뭔가 더 큰 게 올 것 같은 느낌이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네. 불법도 아니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지."

"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공작의 부탁이 크다면 그것은 그거대로 내가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아직 나는 기반이 없으며 공작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핑계로 에인프라흐 공작의 이름을 팔고 다닐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된다.

"나에겐 아들이 다섯이 있네."

"네, 알고 있습니다."

많이도 낳으셨다. 밤에 힘 좀 쓰셨어. 어쩌면 나는 하나도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에인프라흐 공작은 워낙 유명한 대귀족이다 보니 그 정도 정보는 알려졌기에 그것은 알고 있다.

공작가의 소영주는 공작 이상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미 백작위를 갖고 있기도 하다. 공작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소영주의 나이도 벌써 50살이 넘었지만, 공작이 이렇게 밖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는 소영주가 그만큼 유능하기 때문이다. 공작가의 운영을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천재였다.

"우리 집 또라, 아니 막내아들과 친구가 되어주게. 그것이 내 부탁일세."

방금 분명히 또라이라고 하려다가 만 거 같은데? 공작의 가족 사항을 대충 알고 있을 뿐이지 막내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내 자식 중에 그 녀석이 나를 가장 많이 닮았어."

"아, 네"

그런데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 또라이면 본인도 또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괘씸한 얼굴로 수긍하지? 크흠, 내가 말한 것은 검에 대한 재능일세. 자네와 비슷한 재능이 몇 명 있다고 했었지? 그중 하나가 내 막내아들일세."

확실히 공작의 아들 중에서는 7성 기사가 나오지 못했다. 물론 다들 뛰어난 사람이라고 알려지기는 했으나 공작의 무력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저와 아드님이 친구가 되어 검의 재능을 제대로 살렸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응? 어, 바로 그것일세!"

수상하다. 어딘가 불안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지금 왕국에서 나는 새로 떨어뜨린다는 공작가의 막내아들과 친구가 될 기회다. 보통 준남작의 차남이 공작가의 아들과 친구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좋습니다."

"괜찮겠는가? 내가 미리 말하지만, 이 녀석이 검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일세."

그런 의미의 또라이였나? 한동안 쉬었지만, 어차피 나도 수련은 해야 한다. 비슷한 수준의 대련 상대가 생기는 것인데 사양할 이유가 없다.

"대신 공작님의 명함 한 장만 주십시오. 아무에게나 주는 것 말고 좀 특별한 것으로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공작은 바로 아공간에서 순금으로 코팅이 된 명함을 꺼내서 주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나?"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왕도에서 불합리한 일을 당할 걱정은 조금 덜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다른 이유였지만, 공작은 흔쾌히 명함을 건네주었다.

공작의 부탁을 수락하고 조금 후 기차의 창밖으로 왕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규모 면에서 보자면 서울과 비교할만한 거대 도시다. 이윽고 기차가 도시를 관통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환생 후 봤던 도시라고는 크리스타 백작령의 도시와 멤파이 자작령의 도시만 봤던 나에게 이것은 작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규모와 발전도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왕도와 비교한다면 내가 살아왔던 크리스타 백작령의 도시는 정말 시골 깡촌에 지나지 않는다.

"자네는 이 안에 얼마나 많은 괴물이 살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옆에서 공작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는 전생에 지겹도록 봤던 나다. 나보다 인간의 밑바닥을 더 많이 본 사람이 있을까?

"그래, 자네라면 이곳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런 마음가짐을 내 아들에게도 가르쳐주게."

검술 때문에 친구를 맺어주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기차가 멈추자마자 가장 빨리 움직인 것은 마리오였다. 녀석은 도망치는 사람처럼 기차에서 내려서 사라졌다.

내가 그동안 안면을 튼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공작은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아는 얼굴들을 배웅한 뒤 기차역에서 왕도의 어디에 무언가가 있다는 설명이 들어있는 관광 가이드를 구입했다. 그래 나는 이곳에서 완전히 시골 촌놈이다.

하지만 주눅 들거나 하진 않았다. 생지옥과 다름없던 전생의 지구에서도 30년을 넘게 살아남은 나다. 그것에 비하면 너무나 좋은 조건이지 않은가?

후읍!

왕도의 조금 텁텁한 공기를 한번 크게 들이키며 기합을 넣었다. 이곳이 나의 새로운 터전이고 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소리없이 왕도의 기차역을 빠져나오던 에인프라흐 공작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기묘한 놈'

그곳에서는 아직 소년 티를 벗어내지 못한 녀석이 여러 귀족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저놈은 저 나이에 가질 수 없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가에 데려다가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무슨 자신감인지 끝내 자신의 제의를 거절했다. 하기야 저 나이에 저런 능력이라면 어디가서 굶어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큰 야망도 없었다.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야망이 없다면 공작가의 힘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자식 중에 가장 걱정이 되는 막내 녀석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막내도 녀석과 비슷하다. 넘치도록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야망이 없다.

그러나 막내가 저 기묘한 녀석과 어울리며 배웠으면 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저 녀석은 내가 막내의 검술을 키워주길 바라는 걸로 착각한 모양이지만 그것은 아니다.

막내의 재능이라면 그냥 내버려둬도 언젠가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오를 것이다.

투쟁심이라고 해야 할까? 강한 의지라고 해야할까? 일부러 몇 번 위기에 던져 넣었는데도 녀석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 냈다. 그런 주제에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녀석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느낌이다. 처음 봤을때 검술부터 시작해서 처세술까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노련하다.

저 나이에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공작은 자신의 막내 아들이 그것을 쟈연스럽게 배웠으면 했다.

"훗!"

녀석과 막내가 붙어다니는 그림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조만간 왕도가 발칵 뒤집힐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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