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건 꼭 사야 해
기차 플랫폼을 빠져나오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도로에 말이 보이지 않는다. 마법으로 달리는 자동차만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일명 마동차라고 불리는 자동차를 처음 본 것은 아니다. 백작령에도 몇 대가 있다. 그런데 백작령만 해도 마차와 말이 더 익숙하다. 그런데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 같다.
지구의 문명을 경험해본 나로서도 이 정도인데 변두리 영지의 사람들이 왕도에 처음 온다면 어떤 충격을 받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벤 행정관이 적어준 주소지를 확인하기 전에 먼저 금괴를 정리하기로 했다. 기차역에서 파는 관광가이드에는 친절하게도 왕도 내의 어느 지역이 어떤 것으로 유명한지도 대략 나와 있었기 때문에 귀금속을 취급하는 것으로 유명한 상점 거리로 가기로 했다.
이미 나보다 앞서 나간 귀족들이 역 앞에서 택시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마동차를 잡아타는 것을 봤기에 나도 대기하고 있던 마동차의 앞에 섰다.
"어서 오십시오."
차 밖에 나와 있던 중년과 청년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택시 기사가 정중하게 인사하며 나를 맞이했다.
"이슬로프 귀금속 거리로 가려고 하는데요."
"네, 편히 모시겠습니다. 요금은 은화 3개 선불입니다."
어우야, 더럽게 비싸구나. 36골드짜리 기차를 타고 왔음에도 전생의 택시 요금을 생각하면 비싸게 느껴진다. 리무진 택시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요금을 지불하고 뒷좌석에 자리를 잡자 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손님은 왕도가 처음이십니까?"
"그렇게 보입니까?"
"아무래도 그렇지요. 이것도 몇 년 하다 보니 손님들의 반응을 보면 알게 됩니다. 처음 오신 분들은 시선이 돌아가는 것이 다릅니다."
눈썰미가 좋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인사를 할 때부터 느낀 것인데 이 택시 기사 오러유저다. 대략 3성 기사쯤 되는 것 같다.
"아, 제가 기사인 것을 느끼셨나 보군요? 느껴지기에 손님은 4성 기사이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젊으신데 대단하시군요. 영업용 차량의 경우에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으면 면허를 따는 데 아주 유리합니다.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다르니까요. 사고가 훨씬 적지요."
택시 기사가 진짜 기사였던 건가.
"아쉽지 않으십니까?"
"뭘요? 제가 마동차 기사가 된 것 말입니까? 아이고, 왕도에 3성 기사 정도야 넘쳐나지요. 전 이미 나이도 많고요. 그래도 일찍 이쪽으로 뛰어들어서 자리를 잡은 덕분에 벌이는 나쁘지 않습니다. 솔직히 어지간한 지방 봉신기사와 비교해도 훨씬 낫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격변기를 시대를 보는 것 같다. 빌어먹을 나는 왜 격변의 시대에만 살게 되는 거냐. 전생에는 대격변 이번 생에는 산업화의 격변을 경험하게 생겼다.
차를 타고 가다 보니 그래도 말과 마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내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화려한 마차가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 돈으로 마동차를 얼른 사지. 교통만 방해하고 저게 뭐래."
마동차 기사가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를 보고 불평을 털어놓는 것이 전생의 택시 기사와 똑같은 것 같다. 이것은 직업적 특성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어쨌든 나도 마동차를 한 대 사는 것을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얼핏 보니 구조와 방식은 전생의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내리막길의 황제였던... 은 아니고 5년 무사고의 베스트 드라이버로서 실력을 보여줘야겠다.
"이런 마동차는 한 대에 얼마나 합니까?"
"지금은 많이 내렸다고 해도 여전히 비쌉니다. 이런 차라도 금화 100개는 주셔야 하지요. 저는 부끄럽지만, 처가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거기에 10년 할부죠. 거기에 마법으로 움직이니 마석이 들어가서 유지비가 제법 듭니다."
비싸다. 그래도 못 살 정도는 아니다. 유지비가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한 대 장만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귀금속을 전문으로 하는 거리인 만큼 화려하게 치장된 상점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의 복장도 달랐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세련됐다. 멤파이 자작령에서 비싼 옷이라고 사서 입었지만 나 혼자 유행에 몇 년 지난 옷을 입은 꼴이었다. 누가 봐도 시골 촌놈이다.
'금괴나 빨리 팔고 옷을 새로 사야겠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크리스타 백작령이나 멤파이 자작령과 달리 이곳은 정말 어디에나 사람이 많다. 금괴를 가지고 나와야 하는데 통로를 열 만한 곳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통로 그 자체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장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다 눈에 들어온 곳이 차를 파는 곳이었다. 마동차가 아니라 이번에는 마시는 차다. 찻집에 들어가 적당히 아무거나 주문하고 화장실을 물어 들어가 기차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빨리 통로로 뛰어 들어가 금괴를 챙기고 나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주문했던 차를 마셨다. 처음 들어보는 찻잎이었는데 맛은 없었다. 그런데 이것도 비쌌다. 기본적으로 왕도의 물가는 내가 자란 크리스타 백작령의 4~5배는 되는 느낌이다.
차를 마시고 나와 거리를 돌아 보다.. 손님을 상대하는데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상점을 찾아 들어가 금괴를 전부 교환했다. 그런데 금괴의 교환비는 이곳이 멤파이 자작령보다 훨씬 좋았다.
멤파이 자작령에서는 금괴 하나당 금화 80개밖에 받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85개나 줬다. 그렇게 지난번에 바꾼 것을 합쳐서 700개가 넘는 금화를 가지게 되었다.
크리스타 백작령이었다면 꽤 부자행세를 하면서 살 수 있는 금액이지만 이곳에서는 생각보다 별거 아닌 금액이다.
금괴를 교환하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빠르게 처리하는 직원이었다. 도대체 이 왕도라는 곳에는 얼마나 많은 돈이 유통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벤 행정관이 적어줬던 주소를 보여주자 마동차가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번에 탄 택시의 기사도 진짜 기사였다. 수준은 약간 떨어져서 2성 기사였다. 당장 전쟁이라도 난다면 택시 기사만 모아서 돌격해도 엄청난 전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가 목적지의 근처에 나를 내려주고 주소에 따라 크리스타 백작의 옛 숙소를 마침내 찾았다.
'이게 뭐지?'
크리스타 백작이 왕도의 숙소로 사용했다는 집을 본 처음 소감이었다. 물론 이곳은 왕도에서도 극히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왕궁도 가깝고 관청도 가깝고 각종 번화가도 가깝다. 진짜 중심가 중의 중심가이긴 한데 집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전생에 일본에서 유행했다는 협소주택을 보는 것 같았다. 몇 평 되지 않는 땅에 억지로 집을 지어 올린 느낌이다. 벤 행정관의 말대로 진짜 작은 집이었다.
폴과 제시까지 세식구 사는데 3층 집이면 충분하지 싶었는데 이건 아니다. 나 혼자 살아도 부족할 것 같은 집이다. 이 집뿐만이 아니다. 이 구역 하나가 전부 그런 식으로 지어진 집들이었다. 예전에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집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집을 정말 사야 하는지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일 이 집을 사지 않는다면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는데 그것도 꽤 부담이고 내가 가진 돈으로 이보다 나은 집을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물론 이곳이 진짜 중심지에 속하는 지역이라 집값이 비싼 것일 수도 있겠지만 외곽으로 나간다고 해서 좋은 매물이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주변에 상점들을 둘러보며 옷도 몇 벌 새로 사고 지구에 보급해줄 음식 재료도 구입했다. 그러다가 상점 골목에서 상점 주인들끼리 하는 얘기가 귀에 들리는데 솔깃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저쪽 닭장 골목에 집 한 채 사둘 걸 그랬어."
"무슨 일 있어?"
"돌턴 상단에서 이번에 거기를 싹 허물고 새로 짓는다고 하더라고."
"거기 집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돈 좀 벌겠군. 그런데 상점이라도 지으면 우리에게 나쁜 것 아닌가?"
"호텔을 짓는다고 하네 그럼 우린 더 좋지."
닭장 골목은 바로 내가 집을 사려는 그곳이 분명하다. 그렇게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은 인근에서 거기밖에 없으니까.
얘기를 듣고 바로 돌아와서 빙 둘러보니 뭔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중심지에 어울리지 않는 닭장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 그리고 주변의 터질듯한 상권과 편의시설이 이어진다. 그런데 닭장 골목이 마치 동맥경화를 일으키듯 돈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여긴 무조건 재개발이다.'
상인들의 말이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이곳은 조만간 무조건 재개발이 들어갈 곳이다. 무조건 사야 한다.
이런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은 전생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다. 바로 벤 행정관에게 배운 것들이다. 크리스타 변경백이 병사를 많이 보유해야 하는 국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부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벤 행정관의 그런 행정 능력 덕분이다. 벤 행정관은 나를 데리고 같이 영지를 다니면서 넓은 시야를 가지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돈의 흐름을 읽는 법을 알려주었다.
해가 저물고 행인들의 이동이 조금 뜸해질 때까지 주변을 탐색하다가 미리 봐둔 닭장 골목의 집과 집 사이의 좁은 틈 사이에 통로를 열고 들어갔다.
미리 사둔 식량과 생필품을 꺼내주며 톰과 제시에게는 드디어 왕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집 문제로 바로 나갈 수 없다는 점도 알려주었다. 물론 아직 멤파이 자작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알지 못하니 나갈 수 없는 이유는 충분했다.
폴과 제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수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의 생활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은 얼마 전부터 제대로 공부시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제시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서 폴을 가르치고 있었다. 원래 제시는 멤파이 자작가의 하녀였는데 사고로 얼굴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쫓겨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밖으로 나오게 되면 기초를 가르치는 학원이라도 보낼 생각이다.
폴은 지구에서 꼬꼬들과 친구가 되었다. 사실 이곳에서 아이가 정을 줄 곳이 꼬꼬들 밖에 없긴 하다. 이제는 거의 독수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꼬꼬들이라 폴도 처음에는 무서워했으나 짐승이란 자고로 밥을 챙겨주는 사람에게 온순한 법이다.
그리고 제시는 내가 여행길에서 채집했던 식물들을 심어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쪽 성과는 썩 좋지 않았다. 살아남은 녀석들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병아리들이 죽어 나간 이유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당장은 연구할 수단과 방법이 없었다.
오랜만에 지구에서 잠을 자고 행인들이 많아지기 전인 아침 일찍 통로에서 빠져나온 후 벤 행정관을 기다렸다.
"어이, 오래 기다렸니?"
"아닙니다. 방금 왔습니다."
벤 행정관이 조금 늦은 아침에 나오는 바람에 사실은 좀 많이 기다렸다.
"보니까 어떠냐? 아직도 사고 싶으냐?"
"네, 사고 싶습니다."
"잘 생각했다."
벤 행정관은 잘 성장한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투자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이곳을 오래전에 150 금화에 샀는데 지금 시세가 350금화 정도라고 하더구나."
"그럼 350 금화에 파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크리스타 백작님은 그걸 모르지 그냥 제자 할인이라고 생각해라."
"감사합니다."
"오히려 더 깎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네 덕분에 멤파이 자작 영지를 차지하게 생겼는데, 그래서 이번에 크리스타 백작님이 왕도에 집도 새로 사는 것 아니겠냐?"
역시 그것과 관련된 것이었나. 그러고 보면 멤파이 자작이 나에게 해준 것이 참 많구나. 고마운 사람이다. 잠시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도해 주었다.
"그럼 인수 절차를 밟으러 가자."
"네"
벤 행정관과 관청에 가서 서류를 작성하고 대금을 건넨 후 정식으로 집의 소유권을 인도받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세금으로 집값의 10퍼센트를 내서 금화 30개가 추가로 지출되었다.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세금으로 나가는 돈은 액수를 떠나서 더욱 아깝게 느껴졌다.
벤 행정관에 집 열쇠를 건네받았다. 벤 행정관은 마리오가 여전히 바보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할 일이 많다며 서류작업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들어와서 보니 밖에서 볼 때보다 더 좁았다. 전생에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에 살던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의 원룸보다 좁은 느낌이다.
4평 정도 될까? 거기에 올라가는 계단까지 있으니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야말로 잠자고 씻는 것이 전부인 곳이다.
이런 집이지만 그래도 전생을 통틀어 처음 생긴 내 소유의 집이라는 것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벤 행정관은 집에 원래 있던 가구들도 내가 그대로 쓸 수 있게 그대로 두고 간다고 했다. 물가가 비싼 왕도에서 이런 것들도 새로 사려고 하면 다 돈이니 제법 이득을 본 셈이다.
며칠 동안 왕도의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때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