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두껍아 두껍아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단정하게 정장을 입은 20대 중반 정도의 사내가 있었다. 일단 공작이 보낸다던 막내아들은 아닐 것이다. 내 또래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돌턴골드 상단에서 온 찰리 데커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빅터 하네스 본인이 맞으십니까?"
"네, 제가 빅터 하네스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 척했다. 며칠 적응하는 동안 이곳에 관심이 있다는 돌턴골드 상단 흔히 돌턴 상단이라고 부르는 곳에 나름 조사를 했다. 아직은 정보 수집을 위한 인맥이 없어서 그냥 주변 상인들에게 넌지시 물어보는 정도였으나 그 정도 정보면 충분했다.
돌턴골드 상단은 왕도에서도 제법 큰 규모의 상단이었다. 주로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는 종합 상단이었다.
"며칠 전에 이 집을 매매하셨더군요. 저희가 예전부터 구매하려고 하던 곳이었는데 저희 연락이 미처 닿기도 전에 주인이 바뀔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들어와서 말씀하시죠."
사실 집을 파는 것 말고도 상단과는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찰리 데커라는 상인을 관찰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제법 많이 있다. 작은 움직임이나 시선 그리고 눈빛 같은 것들이다.
찰리 데커는 상인답지 않게 움직임에 예절이 배어있었다. 예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심스럽다. 처음 방문하는 집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차이가 좀 있다.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다. 쓸데없이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목적이 확고하다는 뜻이다.
"마침 제가 차를 한 잔 마시려고 하는데 같이 한잔하시겠습니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입술이 말라 있어 먼저 차를 마시자고 권했다. 땀을 흘리고 있진 않으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이 집을 인수한 것 때문에 상사에게 쪼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직장인의 숙명 아니겠는가.
고향에서 사 온 크리스타 백작령 특산품 사르피아 차를 끓여서 한 잔 내주었다. 차를 마시는 동작 자체가 귀족의 예법이다. 한숨 돌릴 시간을 주고 난 후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집을 사고 싶어서 오신 거겠죠?"
"네, 그렇습니다. 전 주인인 크리스타 백작령에 연락을 넣었는데 답장이 없어서 알아보니 영지전 때문에 출정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백작님의 부재중 대리인이라는 소영주와 행정관을 찾았더니 대성회 때문에 두 분 다 왕도로 오시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조금 느긋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집의 주인이 바뀌었더군요.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멤파이 자작령의 정보를 넘겨준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간다고?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우연이 겹쳐 나에게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어디까지 조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버지가 크리스타 백작령에서 종사하고 계십니다. 말씀하신 행정관님이 어린 시절 제 스승님이시고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집주인이 이렇게 바뀐 것이 이해되는군요."
거기까진 조사하지 않았던 건가?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구역의 매입은 얼마나 진행 중이십니까?"
"이 구역의 90퍼센트 이상을 이미 매입했습니다."
손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생각보다 진행률이 높다. 그렇다는 것은 가격을 후하게 쳐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군요. 상당히 유능하신가 봅니다."
"제가 아니라 돈이 유능한 것이겠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300 금화에 이 집을 매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00 금화 드리겠습니다. 집을 파시죠."
실망이다. 겨우 그 정도 수익을 바라고 이 집을 구매한 것이 아니다. 집을 살 때 들어간 세금과 새로운 집을 구할 때 들어갈 세금을 생각하면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다.
거기에 이 집은 닭장 골목의 딱 중간쯤이다. 이 집을 사지 않고서 호텔을 지을 수 없다는 얘기다.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놀이인데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알박기라고 어른의 놀이였다.
"글쎄요. 400 금화로 왕도에서 제가 이만한 집을 새로 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요."
"부족하신가 보군요. 그럼 450 금화 드리겠습니다. 제 권한으로 드릴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찰리 데커는 곧바로 가격을 올려서 불렀으나 뒤에 나온 말은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미약하지만 적의가 느껴졌다.
"저도 이곳에서 며칠 동안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에 호텔이 지어질 것이라는데 맞습니까?"
"네,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이 집을 인수하지 못하면 호텔 지을 수 있습니까?"
찰리 데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상인치고 표정 관리가 좋지 못하다.
"잘 모르시나 본데 돌턴골드 상단이 항상 정당한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 위압적인 어조로 말을 했지만, 오러 사용자도 아닌 사람이 그래봐야 나에게는 전혀 영향이 없다. 전형적인 전개다. 회유 다음에는 협박. 협박 카드가 조금 빨리 나온 것은 아마 내가 어려서 그런 것이겠지.
"그래요? 그런데 조사는 아직 안 하신 것 같지만 제 아버지는 크리스타 백작령의 기사이고 준남작입니다. 거기에 전 차남이고요."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참고로 아버지는 비교적 청렴한 기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거의 아버지의 봉급만으로 생활하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알아들었는지 찰리 데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듯했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받아둔 것이 에인프라흐 공작의 명함이다.
"이것 알아보시겠습니까? 가문의 명예를 걸고 가짜는 아닙니다."
"에인프라흐... 공작님의 황금 명함이군요."
공작에게서 받았던 금으로 된 명함을 보여주자 찰리 데커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명실상부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과의 인연을 보여준 것이다.
"시골 준남작의 차남인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300 금화나 하는 집을 샀겠습니까? 공작님이 지원해주신 덕분입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요?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나는 일부러 놀리듯이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실례했습니다. 에인프라흐 공작님의 후원을 받으시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찰리 데커는 그래도 상황판단이 빨랐다. 바로 머리가 탁자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였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모르고 하신 일이니까요. 저도 이 집에 계속 살고 싶다는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가격이면 비워드리죠. 그래서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찰리데커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권한으로는 원하시는 금액을 맞춰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본사와 상의 후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본인 권한으로 제시할 수 있는 금액이 500 금화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정도로는 나를, 아니 정확히는 에인프라흐 공작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도에서 제법 잘 나가는 돌턴골드 상단이라고 해봐야 에인프라흐 공작의 입김 한 번이면 날아갈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시죠. 그리고 가능하시면 제가 다음에 이사 갈 집도 같이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중심가가 아니어도 되니 가능하면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동산 중심의 상단이니 분명 좋은 집을 알아봐 줄 것이다. 나는 아쉬운 것이 없다.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찰리 데커는 바로 다음 날 다시 찾아와 제시했다.
"900 금화를 드리겠습니다."
사자마자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집값이 3배로 올랐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제법 놀랐다. 전생에 이래서 다들 부동산투기를 하느라 난리였나 보다.
"그게 본사에서 생각하신 최선입니까?"
"네, 본사와 상의해 계산하기로 이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사 가실 집들도 몇 군데 알아봤습니다. 모두 저희 돌턴골드 상단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으로 바로 이사가 가능하십니다."
한 번 더 튕기면 금액이 조금 더 올라갈 것도 같은데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돌턴골드 상단과 함께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 가격에 집을 넘겨드리기로 하지요. 그리고 이사 갈 집을 미리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참고로 이사 가실 집을 현물 형태로 받으시고 이 집의 거래가격을 낮추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세금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900 금화의 거래라면 세금만 90 금화다. 납세는 국민의 의무이지만 줄일 수 있다면 줄이는 게 좋다.
"그럼 집은 언제 보러 가시겠습니까?"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보러 가시죠."
찰리 데커를 따라 집을 나와 조금 걷자 빈터에 세워둔 찰리의 마동차가 있었다. 찰리가 모는 마동차를 타고 몇 군데 집을 돌아봤으나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셋이 살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좁았다.
"일단은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빈터도 좀 있으면 좋겠고요. 아무래도 왕도에 그런 집을 사려면 너무 비싸겠죠?"
내 말을 들은 찰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조건의 집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시면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넓을 것을 제외하면 조건이 너무 좋지 않거든요."
"얼마나 좋지 않길래 그런가요?"
"집이 아주 낡았습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아직 남아있긴 한데 관리로 어떻게 될 수준이 아닙니다. 저희도 그 집을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허물고 다른 것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거든요.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고 적당한 가격에 인수하겠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아서 지금은 그냥 방치하는 중입니다."
"일단은 한번 보고 싶은데요."
"네, 부지는 굉장히 넓습니다. 아마 이 가격에 왕도에서 이보다 넓은 부지의 집을 찾을 순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마동차로 1시간이 훌쩍 넘게 달려서 찾아간 곳은 성벽이 보일 정도로 왕도의 완전히 동쪽 끝이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크기는 대략 기사 연무장 3개 크기 정도 되려나? 그리고 그 벌판의 가운데에 아주 낡은 저택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여기가 그곳입니다."
소개하는 찰리 데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이곳을 고를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여긴 가격이 얼마나 합니까?"
"저희가 구매한 가격이 금화 천 갭니다."
"하지만 몇 년째 그냥 두시는 것을 보면 아주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이겠죠? 가격은 오르지 않았는 데 유지비는 계속 들 테고요."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무언가 시설을 짓기에는 주변 여건이 너무 좋지 않거든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래 보였다. 당장 다 쓰러져가는 울타리 왼쪽으로는 공동묘지가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뭔가 커다란 건물이 있긴 한데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정상적인 시설이 아니었다.
"저기 저 시설은 뭡니까?"
"도축장입니다."
공동묘지와 도축장 사이에 있는 집이라니 완벽하다. 중세 판타지 3대 혐오시설 중에 두 개가 바로 옆에 있다. 그러니 이렇게 넓어도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부지의 저 너머에는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은 뭔가요?"
"일단은 병원입니다만..."
찰리 데커가 말끝을 흐렸다.
"정상적인 병원이 아닌 모양이죠?"
"네, 일단 오는 사람을 고쳐주긴 하는 모양이지만 의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운영하는 병원입니다. 사람을 가지고 실험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나. 마지막 한 가지 퍼즐이 완성됐다. 공동묘지, 도축장, 거기에 미친 마법사의 인체 연구실이다.
"3대 혐오시설의 가운데 있는 곳이군요. 금화 천개 다 받으실 생각은 아니지요?"
"설마 이걸 사실 생각이십니까?"
"가격을 좀 빼주신다면요."
찰리 데커가 미친놈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왕도에서 이만한 크기의 부지를 가진 저택이다. 사실 저택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니 새로 짓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가 직접 설계한 집을 지을 찬스다. 이것은 남자의 로망 아니겠나? 전생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곳에서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휴, 금화 백 개는 빼 드리지요."
그럼 5평짜리 집과 저 다 쓰러져가는 집을 교환하는 셈이 되는 건가? 헌 집을 줬더니 더 헌 집을 줬어. 두꺼비도 그렇게는 안 한다.
"적당한 크기의 저택을 지으려면 얼마나 듭니까?"
"들어가는 자재와 크기를 생각하면 다릅니다만, 고급형으로 생각하면 보통은 200... 그렇군요. 금화 200개 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두꺼비도 새집을 주는데 사람이라면 그보단 나아야지. 5평짜리 집을 내주고 기사 연무장 3개 크기이니 대충 6000평 크기의 땅을 받았다. 그리고 100골드를 거슬러 받는다.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다음 거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