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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9화 (19/206)

19. 꽃향기를 맡으면

그럼 이제 거래를 제안할 차례다. 병을 줬으면 약도 줘야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찰리씨 돌턴골드 상단에서 직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렇게 마구 깎아주셔도 되는 건가요?"

행동거지나 말투 등을 볼 때 찰리 데커의 출신은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아직 젊다. 20대 중반의 나이라면 보통은 말단 직원이다. 그런데 상관의 허락도 없이 200 금화를 깎아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전 아직 평사원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재량권은 있습니다."

"돌턴골드 상단은 직원들에게 재량권을 많이 주는가 보군요?"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어차피 공작가를 통해서라면 금방 아실 테니 말씀드리지만, 전 직급은 평사원이지만 보통 직원은 아닙니다. 상단주님이 제 아버지입니다."

돌턴골드 상단의 상단주의 이름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노먼 돌턴이다. 성이 다르잖아? 그렇다는 것은 서자라는 얘기다. 이 세계에선 제법 흔한 이야기다.

"그런 눈으로 보실 것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사랑받고 자랐거든요. 다만 형님들의 견제가 좀 심할 뿐이지요."

돌턴골드 상단주가 서자 아들에게 실적을 만들어주려고 하는데 본처 자식들이 훼방을 놓는다는 얘기구만? 그렇다면 더욱 좋다. 내가 그걸 해결해 줄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실적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네,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영 쉽지 않군요."

"그거 제가 해결해드리죠. 일단 집 거래부터 완료할까요?"

찰리 데커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보였다. 가까운 관청에 가서 두 건의 소유권 이전을 했다.

물물교환식이라고 해서 내가 새집을 금화 100개에 인수하는 것으로 계약이 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세금 걷는 공무원들도 바보가 아니다.

찰리 데커에게 들으니 거래 가격을 최소금액으로 설정하고 이면계약을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그래서 구입과 매각을 합쳐 또 세금을 금화 50개나 내게 되었다. 그래도 정상적인 거래에 비한다면 80개를 아낀 셈이니 다행이었다.

찰리 데커는 원래 집 앞까지 나를 태워주었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할 때 내가 억지로 붙잡아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나름 힘을 줘서 반항했지만, 일반인이 4성 기사인 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

"잠시만요.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실적 해결해 드린다고 했잖습니까? 잠시 보여드릴 것이 있어서요."

나는 아공간 팔찌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알루미늄 덩어리다. 원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느라고 고생 좀 했다.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찰리 데커는 쇳덩어리 두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은 운철 아닙니까? 나머지 하나는 잘 모르겠군요."

스테인리스 스틸 즉 운철은 이곳에서 귀한 금속이다. 아직 제련법이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크롬이나 니켈의 추출법이 개발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이쪽 세계에는 아예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금의 가치가 지구보다 월등히 높다. 벤 행정관에게 배우기로는 금광 자체가 적다고 했다.

아직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 흔한 자원이 지구에선 희귀한 자원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철입니다."

"이게 경철이란 말입니까?"

찰리 데커는 깜짝 놀라 다시 알루미늄 덩어리를 살펴보았다. 그만한 크기의 경철 덩어리는 여간해선 본 적 없을 것이다. 운철도 희귀하지만, 경철이라 불리는 알루미늄은 이곳에서 정말로 희귀한 금속이다. 물론 아직은 그 용도가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수요를 맞추지 못할 만큼 귀한 금속이다. 알루미늄 또한 추출이 어려워서 희귀한지 아니면 그 자원 자체가 적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자라면 추출법이 개발되기 전에 최대한 뽑아먹어야 한다.

내가 꺼낸 것은 각각 3kg 정도의 덩어리다. 이것들의 가치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몇 배는 높다. 다만 이것을 나 스스로 유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돌턴골드 상단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그런데 실적이 필요하고 상단주가 밀어주는 서자 아들이 있다. 적임자이지 않은가?

"실적이 필요하시다고 했죠. 정기적이지는 못하겠지만 운철과 경철을 공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금도 가능하겠지요."

"설마 이거?"

"아닙니다. 애초에 이 정도 경철을 가진 곳이 흔하겠습니까? 그런 곳이 도둑을 맞았다면 소문이 났겠지요. 절대로 장물은 아닙니다. 아직 출처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 확실하게 문제가 없는 물건입니다."

찰리 데커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상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원한다면 독점 계약서를 써도 좋습니다. 돌턴골드 상단이 아닌 찰리 데커씨와 독점으로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실 이유가 있습니까?"

"장사는 신용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찰리 데커씨는 지금 실적이 필요하고 그동안은 저를 중요하게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전 앞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찰리 데커씨가 많은 도움을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 조건을 걸었음에도 찰리 데커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시면 새로운 거래처를 알아볼지도 모르지요."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지요."

찰리 데커가 떠나갔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이사를 시작했다. 내 짐이라고 할 것은 별것 없었고 백작이 놓고 간 옛날 집에 있는 가구만 챙기면 되는 일이다. 넓은 아공간 아이템이 몇 개나 있으니 휙휙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손쉬운 이사였다.

전생에 이런 아이템이 있었다면 이삿짐센터를 해서 떼돈을 벌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짐을 모두 챙긴 나는 바로 새집을 향했다. 제법 거리가 멀기에 이번에는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동쪽 성벽 쪽으로 가는 대형마차를 탔다. 견딜 만 하기는 했지만 마동차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마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직 불법이거나 공중 예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자들 몇 명이 담배를 피우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다. 이것은 당장 마동차를 사고 싶은 충동을 더욱 부채질했다.

새로운 집을 주소만 가지고 어렵사리 찾아 쓰러져가는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전에는 멀리서만 보고 갔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낡은 주택이었다. 그래도 구석구석 사람이 손을 본 흔적이 있었다.

아직 관리자가 남아있다고 했던가? 그나마 관리를 해서 이 정도지 아니면 진즉에 무너졌을 것 같았다.

"뉘십니까?"

한참을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서야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정갈하게 차려입었지만, 세월의 흐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노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 집과 땅을 인수하게 된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서류를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노인에게 건물과 대지의 소유권을 명시한 서류를 보여주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한참 살펴본 노인이 서류를 돌려주었다.

"확인했습니다. 젊은 새 주인이 오셨군요."

그런데 나는 이 노인을 계속 고용할 이유가 없다. 물론 있으면 있는 대로 도움이 되겠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럼 이 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무래도 제가 직접 쓸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새로 지을 예정이거든요. 허물거나 방치하게 되겠죠."

"그러십니까? 드디어 제가 그만둘 수 있겠군요. 흘흘."

얘기를 들어보니 노인은 원래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남작가의 집사였는데 남작이 병이 들어 죽으면서 노인에게 이 저택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남작의 죽음 이후에 남작가가 몰락하면서 소유권이 몇번이나 바뀌었지만, 저택의 관리인으로 노인은 계속 고용되었고 그것이 여태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이제 이 녀석도 저처럼 늙어서 더 버틸 힘이 없습니다. 오래된 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죠. 흘흘"

늙은 집사는 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나도 굳이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저택을 지으신다면 집사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추천하실만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나는 지구를 오가는 특성상 자리를 비우게 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때 전문적으로 집과 땅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폴은 아직 어리고 제시는 하녀 출신이라고 하지만 전체적인 관리를 맡기기엔 부족하다.

"제 손자입니다. 중퇴이긴 하지만 아카데미도 다녔고 공무원 생활도 좀 했습니다."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아직 서른이 안 됐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한 경력이다. 아직 젊기도 하고 그보다 그런 사람이 과연 작은 저택의 집사로 만족할지가 의문이다.

"그런 경력이 있는 분이 집사를 맡아준다면 좋지요. 거기에 할아버지의 도움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받아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새로운 저택이 지어졌을 때 방문해달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옛집을 지켜왔던 노 집사가 간단한 짐을 챙겨 떠나갔다. 노 집사는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아련하기도 하고 쓸쓸해 보여서 노 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새로운 집을 지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생활해야 한다. 어차피 진짜 생활은 지구에서 하겠지만 명목상으로는 그랬다.

그래도 저택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의 상태는 양호했다. 그래도 허물어진다는 운명은 바뀌지 않겠지만 몇 달 안에 무너질 것 같진 않았다.

지구로 돌아가 폴과 제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새로운 집을 구했고 둘이 나와서 생활하기에 충분한 집을 지을 거라는 얘기에 둘은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마동차의 면허를 따기 위해 관련 관청을 방문했다. 면허에 관련된 부분은 이동하면서 찰리 데커에게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생각보다 면허를 발급하는 과정은 간단했다. 이론 시험은 없었다. 아직 신호등도 없으니 관련 법규 같은 것도 제대로 없는 모양이었다. 시험은 간단한 실기가 전부인데 택시 기사의 말대로 오러를 쓰는 기사라면 기계치가 아닌 이상 떨어지기가 더 어려운 주행 시험이었다.

다만 이곳에서도 상당한 수수료를 받을 뿐이었다. 애초에 마동차에도 아직 번호판이 없는 산업 초기다. 면허라는 개념을 잡은 것도 세금을 받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아침에 집을 나가 점심이 조금 지났을 때 내 손에는 면허가 들려있었다. 면허를 발급하는 관청에는 각종 마동차를 제작하는 공방들의 홍보물이 잔뜩 있었다. 홍보물을 살펴보다가 적당한 가격과 성능을 갖춘 마동차를 발견했다.

내가 선택한 차량은 전생의 소형차와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차량이었다. 물론 디자인은 아직 촌스러웠다. 전생의 기억을 살려 자동차 디자인을 팔아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면허를 가지고 해당 공방을 찾아가 바로 계약하고 이미 생산되어있는 차를 받았다. 비록 미리 만들어둔 마동차의 색상이 노란색밖에 없어서 마치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날 것만 같지만, 전생과 현생을 합쳐 75년 만에 드디어 마이카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새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집에 편지를 썼다. 이제 주소가 생겼으니 집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편지에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근황을 적고 멤파이 자작가에 대한 진행 사항을 알려달라고 적었다.

그리고 폴과 제시를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나갈 때가 되기도 했고 내가 지구에서 편안히 수련하려면 바깥을 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저택 안에서만 생활한다면 안전할 것이다.

맹약의 스크롤을 꺼내 그에 대한 것을 알려줬는데도 폴과 제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느낌이랄까. 나와 지구에 대한 비밀을 누군가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조건을 걸고 폴과 제시는 스크롤을 찢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아무래도 제시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띈다. 아무리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오가는 사람이 있으면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다행스럽게도 스트라이더 997번에 저장된 포션류에는 신체 변형 포션이 몇 개 있었다.

이것은 처음에 미용 목적으로 개발됐지만, 첩자나 사기꾼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지금은 만들고 유통하는 것이 불법인데 당시에는 불법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첩자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인지 물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노더스로 나가기 전에 제시에게 신체 변형 포션을 복용시켰다.

이 포션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신체가 변형되는 동안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한동안 제시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기상연구소를 울렸다.

포션의 효과가 끝나고 제시가 방 밖으로 나왔을 때 밖에서 울던 폴이 제시에게 달려들었다.

"엄마!"

"이제 엄마 괜찮아."

변형된 제시의 얼굴은 꽤 미인이었다. 신체 변형 포션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상상하면 그대로 변형시켜주는 기능이 있다. 다만 그것이 상당히 구체적인 상상이 필요해서 얼굴을 다치기 전의 얼굴을 상상하라고 일러줬었다.

자기 엄마가 엄청나게 미인이라는 폴의 말은 얼굴의 다치기 전의 제시를 기억했기 때문이었을까? 엄청난 미인까지는 아니지만 제시는 제법 미인이 되었다. 거짓말쟁이 폴은 과거에 했던 거짓말을 반쯤 지우게 되었다.

폴과 제시는 지구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으나 속으로는 그게 아니었는지 아노더스로 돌아오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왕도의 풍경은 비록 이곳이 왕도에서도 가장 외곽의 발전이 덜 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멤파이 자작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봐줄 사람도 생겼고 나는 여유롭게 지구에서 그동안 못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찰리 데커가 찾아왔다.

폴과 제시에게 찰리 데커가 찾아올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줬었고 손님이 찾아온다면 통로를 여는 곳의 바로 앞에 있는 장식품을 뒤집어놓으라고 했다.

나는 수련을 하는 중간마다 통로 밖을 확인했고 장식품이 뒤집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찰리 데커는 나를 보자마자 답을 말했다.

"제안하신 것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찰리 데커씨의 결정입니까? 아니면 상단주님의 결정입니까?"

"물론 제 결정입니다. 사실 결정은 그날 바로 했습니다. 며칠 늦게 찾아온 것은 사업계획서를 제대로 작성해서 보여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며칠 전과 다르게 찰리 데커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약간의 야망, 희망 그리고 자신감이 보였다.

"우린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내민 손을 찰리 데커가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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