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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24화 (24/206)

24. 오랜만이야

"컥!"

오러만 쓰지 않았지, 진심으로 내지른 주먹이었기 때문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슬라이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단장님!"

도련님 부대의 일부가 쓰러진 슬라이트에게 다가가고 나머지는 나에게 와서 따졌다.

"단장님 어째서 부단장님을 공격하신 겁니까?"

단장?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왜 어째서 갑자기 단장이 돼버린 거지? 어쨌든 이 열혈만 가득한 놈들을 진정시킨 위해선 아무 말이라도 뱉어야 할 것 같았다.

"너희들도 무가의 자손이니 전쟁사 같은 것은 조금이라도 공부해봤겠지?"

도련님 부대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공부했을 것이다. 재능이 없는 대신 뭐라도 하려고 했을 테니까.

"적이 보인다고 생각 없이 돌격하는 부대들의 결과는 어땠지?"

"대부분은 큰 손해를 입었죠."

도련님 부대 중 가장 연장자인 자힘이 대답했다. 당연하겠지만 도련님 부대의 나이는 전부 나와 슬라이트보다 많다. 가장 연장자인 자힘의 나이가 26살이다. 나보다 11살이 많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나와 슬라이트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돌격도 엄연한 전술이다. 생각하고 움직여야 하는 법이란 말이지. 그렇지 않고 생각 없이 움직이는 부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도련님 부대에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발딱 일어난 슬라이트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통 오합지졸이라고 한다. 그래서 너희는 오합지졸인가?"

"아닙니다!"

"오합지졸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건데 생각 외로 반응이 좋았다. 일단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이 사건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여러분들도 일단은 돌아가 계시죠. 계획이 세워지면 옆집의 젠투씨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일단 도축업자들도 돌려보냈다. 돌아가는 페미컨의 눈빛이 영 거슬렸다. 내 오랜 경험상 저놈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

"꼼짝하지 말고 전부 집에 붙어있어! 집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전부 쫓아내 버릴 거야!"

그렇게 엄포를 놓고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움직였다. 지난번 검은형제단에 들렀을 때 두목인 브루노씨가 다음에는 본부로 쳐들어오지 말라면서 비밀지부 위치를 몰래 알려줬다. 이곳은 부두목인 에일로이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비밀지부의 위치는 번화가 한가운데 있었다. 그것도 귀족들을 대상으로 애완동물을 파는 가게로 위장하고 있었다. 뒷세계 조직의 비밀지부가 있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은 곳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습은 지구의 펫샵과 비슷했다. 밝은 조명에 주로 귀엽고 작은 동물들이 꼬물거리면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이런 것인지는 몰라도 다행스럽게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집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세련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노년의 신사가 나를 맞이했다.

"브루노씨가 여길 소개해주셨는데요."

"그러시군요. 빅터 하네스님"

"저를 아십니까?"

"지금 왕도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 중에 한 분 아닙니까?"

역시 정보단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 내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몰랐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도축업자들과 관련된 정보를 얻었으면 합니다."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테이블로 안내받아 조금 기다리자 굉장한 미인인 직원이 차를 내주고 다시 안쪽으로 사라졌다. 역시 검은형제단은 뒷골목의 이권보다는 정보 쪽이 본업인 것 같다.

차를 거의 다 마셔갈 때쯤 신사가 문서 한장을 들고 나타났다.

"문서를 가지고 나가시는 것은 안 됩니다. 이곳에서 보시기만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신사가 가져다준 문서를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뻔했다. 겨우 한장의 문서일 뿐이지만 지금 상황에 필요한 정보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다.

사채업자의 뒤에는 징세청장인 울리 자히르 백작이 있다. 징세청장은 생각보다 굉장한 권력을 가진 자리다. 평범한 범죄와 달리 세금에 관련된 일은 반역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울리 자히르 백작의 뒤에는 내무대신 나단 오페르 후작이 있다고 한다. 산 넘어 산이다.

도축업자들이 두려워하는 사채업자라는 녀석들도 단순한 사채업자가 아니라 나단 오페르 후작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 페니실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일반 조직원 50명에 4성 기사 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페미컨은 징세청장 울리 자히르 백작과 요즘 자주 만난 흔적이 있다. 우리 집에 왔던 것처럼 살려달라고 찾아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닐 확률이 높다. 가장 큰 도축업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도축업자와 달리 페미컨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은 아주 소액이었다. 즉 이놈은 첩자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아니 꼭 내가 해결을 해야 할까?

작게 보면 도축업자들의 위기지만 크게 보면 결국 에인프라흐 공작가와 오페르 후작가의 정치싸움이 아닌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꼴은 되고 싶지 않다.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징세청장 울리 자히르 백작이 도축업체들을 집어삼키려는 방법이 너무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단 도축업자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과도한 세금을 물렸다. 근래 들어 상당한 부를 쌓고 있던 도축업자들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세금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사채업자들이 파고들었고 치안관과 경비대는 그것을 묵인했다. 언뜻 보면 완벽한 작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했다. 누구도 자기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었을까? 자기 권력에 취했을 것이다. 권력에 오래 잠겨있다 보면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판단력을 잃게 된다.

나는 그런 인간들을 많이 보았다. 대격변 후에 이미 기존의 권력이 모두 사라진 후인데도 불구하고 과거의 권력에 취해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변이체보다 같은 생존자들에게 죽는 경우가 많았다.

법과 권력이 사라진 세상에서 정치인이나 판검사 같은 권력층은 생존자들의 화풀이로 아주 좋은 상대였다.

어쨌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 일에서 빠질 것인가? 아니면 뛰어들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검은형제단의 신사가 건네준 이 정보는 믿을 수 있을까? 정보 자체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이 정보의 방향이 너무 일방적이다. 나에게 둘 중의 하나를 강요하고 있는 느낌이다. 검은형제단에서 이런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작가에서도 이번 사건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내가 공작가를 선택하도록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답안지와 달리 세상은 답이 하나가 아닐 때가 많다. 양자택일은 더더욱 아니다. 새로운 답을 만들어내면 된다.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가능성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나는 문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은 마치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금화 20개입니다."

"네?"

"정보 이용료입니다."

노신사가 아주 신사답지 않게 거금을 요구했다. 아니 이거 공짜가 아니었나?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금화 20개를 꺼내 노신사에게 건넸다. 그리고 펫샵을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노신사가 불렀다. 작고 하얀 털북숭이 하나가 노신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애완동물 가게에 오셔서 값을 치르셨으면 한 마리 받아 가셔야지요. 멜티라는 견종입니다. 작지만 아주 빠르고 영리하지요. 고양이보다 쥐도 잘 잡습니다."

작고 하얀 털북숭이를 넘겨받으며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됐든 개가 됐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거 아니겠나?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돌턴골드 상단에 가서 찰리 데커를 만났다.

"상단주님을 뵈었으면 합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아버지는 왜? 그런데 그건 뭡니까?"

"똘똘이입니다. 보다시피 작고 하얀 강아지죠."

"아니 그건 알겠는데 강아지는 왜 안고 다니십니까?"

"쥐를 잘 잡는다고 해서요."

나는 당당하게 쥐를 잘 잡는 똘똘이를 안고 돌턴골드 상단주인 노먼 돌턴을 만났다. 찰리 데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단주와 거래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슬라이트를 포함한 12명의 도련님이 나를 맞이했다. 도련님 부대에 대한 내 명령은 간단했다.

"페미컨을 잡아 와라"

"응?"

"모셔 오라는 것이 아니다. 잡아 와라. 반항하면 좀 패도 괜찮다."

"그 사람은 우리 편이잖아?"

"이젠 아닐걸?"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하지만 내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자 슬라이트와 도련님 부대가 우르르 집을 떠나갔다. 그 사이 집으로 들어가 폴켄과 제이시에게 똘똘이를 소개했다.

"똘똘이라고 한다. 쥐를 잘 잡는다더군."

"와! 강아지다!"

"어머 너무 예쁘네요."

예상대로 폴켄과 제이시는 똘똘이를 대환영했다. 귀여운 강아지를 싫어하는 아이와 여인은 거의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폴켄은 정이 들었던 꼬꼬들을 못 만나는 것에 굉장히 서운해하고 있었고 제이시는 폴켄이 수련에 집중하느라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쓸쓸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똘똘이는 그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꼬꼬들을 돌볼 시간이 됐던가? 슬라이트와 도련님 부대가 없는 틈을 타서 얼른 다녀오려고 방으로 들어가 통로를 열었다.

통로 너머로 들어서는 순간 심한 편두통처럼 한쪽 뇌가 띵하고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감각이다. 이번 생은 아니다. 전생에서 자주 느꼈던 감각이다.

초감각이 극도로 위험함을 경고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 뭐가 있을까? 변이체다.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

대부분의 변이체는 마치 지역의 영주처럼 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일정 범위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소수이긴 하지만 여행하듯이 방랑하는 개체들이 있다. 자리를 잡는 개체에 비해 약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같은 변이체끼리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보통의 인간 상대로는 강력한 포식자이며 학살자다.

나는 방랑 변이체들이 전멸한 줄 알았다. 급격히 줄어드는 인간만큼 변이체들도 줄어들었고 보통은 약한 순서대로 쓰러져갔다.

내가 죽기 전 6년 정도는 방랑 변이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오판이었던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초감각이 저 너머에 확실히 변이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돌아가자 굳이 싸워줄 이유가 없다. 방랑 개체이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떠날 것이다. 그동안 지구를 오가지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막 다시 아노더스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꽤애애액! 꼬꼬꼭!

꼬꼬들의 비명이 들렸다. 변이체가 꼬꼬들을 발견한 모양이다. 독수리만 한 덩치에 비해 너무 순해서 그렇지 싸우려고 한다면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 꼬꼬들이다. 그래봐야 변이체에겐 그냥 살아있는 먹이일 뿐이다.

나도 모르게 꼬꼬들이 있는 방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돌아가자 그냥 닭 세 마리일 뿐이다. 다시 키우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성은 수없이 나에게 돌아가라고 하고 있었지만, 몸이 이성의 지배를 벗어났다.

나는 변이체를 증오한다. 생존자에겐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내 눈앞에서 산채로 변이체에게 찢겨 죽은 사람만 해도 수천 아니 만 단위는 될 것이다. 그중에 대부분은 나와 말 한마디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나와 날을 세우던 사람도 있었고 친했던 사람도 있었고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으며 나의 우상도 있었다.

대격변 초기의 약한 변이체들은 제법 때려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변이체들이 진화하면 강해지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늘 도망쳐야만 했다. 왜? 힘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나는 그때와 비교하면 힘이 있다. 이제는 오러와 마법을 쓸 수 있다. 저 변이체가 아직 어떤 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만큼 제법 약해졌을 것이다. 잘하면 한번 해볼 만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어느새 문을 열고 있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오늘따라 유난히 소름이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느낄 수 있었다. 문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변이체의 움직임이 멈췄다. 저놈도 나를 감지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뒤돌아서 통로를 넘어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전생의 나는 반평생을 도망만 치며 살았다. 그런데 도망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육신은 살아남을지 몰라도 정신이 조금씩 죽어간다. 그렇게 도망만 치며 살아남았던 강한수는 마지막까지 괴로워하며 죽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빅터 하네스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

뚜벅 뚜벅

통로를 걷는 내 발소리가 내 심장 소리처럼 크게 울린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이 보였다.

"안녕?"

변이체 주제에 사람 말을 하지 마라.

꼬꼬의 피를 입 주변에 가득 묻힌 변이체 놈이 히죽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아는 녀석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몇 년 전이더라? 아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는 녀석이다. 반갑다. 입이 아닌 심장이 말하는 내 진심을 전해줬다.

"이 씨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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