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중대사안
"너 내 부하가 돼라."
"무슨 개소리야?"
"공작가 가주가 되긴 싫고 평민으로 살긴 싫다며?"
"그래. 그거하고 네 부하가 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지?"
이 녀석 아직 이해를 못 하고 있다.
"네가 생각할 때 나는 귀족이 될 수 있겠냐?"
슬라이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방법이 문제일 뿐 어떤 작위라도 받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왕도에서 유명한 천재였던 슬라이트에게 인정받았다. 뭐 나도 천재 소리를 좀 듣긴 했지만, 변경이었고 진짜 천재도 아니니까.
"그래 나는 준남작의 차남이라서 지금은 사실 평민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귀족이 될 거다. 나도 평민으로 살아갈 자신은 별로 없거든. 그것도 가능하면 영주가 될 생각이야."
"그래, 너라면 가능할 거다."
슬라이트도 순순히 인정했다. 15살에 4성 기사라는 것은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재능이다.
"내가 영주가 됐을 때 내 부하가 되라는 얘기다. 봉신 귀족이 되면 되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거잖아? 아니면 나 말고 다른 귀족의 봉신 귀족이 될래? 그런데 공작가 도련님을 봉신 귀족으로 받아주는 영주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뭔가 속셈이 가득하겠지."
슬라이트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그 혼란을 더욱 키워주기로 했다.
"아니면 네가 완전히 독립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새로운 성을 하사받고 작위를 받는 방법도 있지. 그런데 공작가에서 그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까? 네 아버지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건 좀 어려울 거다."
나는 쉬지 않고 슬라이트를 몰아쳤다.
"그리고 네 큰형님이 너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는 게 너를 아끼고 사랑해서라고 생각하는데 마냥 그렇지도 않을걸? 공작님이 앞으로 얼마나 사실까? 8성 기사이시니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별일이 없는 한 20년은 더 사시겠지? 그럼 그때, 네 큰형님의 나이는 얼마지?"
"70대 중반이시겠지."
"그래 그때 너는 30대 중반이겠지 최소 6성 기사일 거고 어쩌면 7성의 벽을 뚫었을 수도 있지. 그럼 나이 많은 네 조카들은 7성 기사가 된 너와 가주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되겠지. 누가 이길까? 그리고 진 쪽은 어떻게 되지?"
슬라이트는 반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물론 아직 20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천천히 생각해보라는 거야."
나는 혼이 나간 것 같은 슬라이트를 내버려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씨앗은 심어놓았으니 남은 것은 그것이 싹을 틔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이다.
페미컨은 우리 집에서 이틀을 더 머문 뒤 집으로 돌아갔다. 슬라이트는 그 후로 뭔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폴켄과 도련님 부대의 훈련이 중단됐다.
나는 그사이 폴켄을 가르쳤다. 원래 약속대로 심법을 전수해주기로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심법은 두 가지다. 하네스 가문의 심법과 제국 기사의 심법이다.
하네스 가문의 심법은 아무리 그 성능이 좋지 않다고 해도 가문의 심법이니 남에게 가르쳐줄 순 없었기에 제국 기사의 심법을 가르쳐 주었다. 뛰어난 재능은 맞는지 폴켄은 금세 심법을 외우고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작은 사건도 있었다.
"단장님! 단장님! 어서 와보세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폴켄이 난리를 치는 통에 가보니 아직 닭장이 완성되지 않은 관계로 꼬꼬들이 머무는 방이었다.
"저것 좀 보세요!"
뭔가하고 보니 꼬이와 꼬삼이 모두 건초 대신 버릴 헌옷들을 쌓아둔 곳에 얌전히 둥지를 틀고 앉아있었다. 폴켄이 꼬이의 옆으로 가서 엉덩이를 살짝 들추자 달걀이 보였다.
"알을 품는구나?"
지구에서 꼬이와 꼬삼이는 한 번도 알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럼 저 알에서 병아리가 깨어난다면 세상을 떠난 꼬일이의 자식이 되는 건가? 이것은 중대사안이다.
생식능력이 중단되는 것은 지구에서만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럼 이제 나와 폴켄도 고자가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구에서 씨앗이나 아직 남아있는 나무 같은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다면 생식기능을 회복해서 번성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경 써서 잘 돌봐주도록 해."
"네! 단장님"
"그런데 왜 단장님이라고 부르는 거냐?"
"어, 철권단의 단장님이니까요?"
언제 그런 단체가 생긴 거지? 그리고 나는 단장이 된다고 허락한 적도 없는데? 어쨌든 도련님 부대도 이제 슬슬 정체성을 찾아줄 때가 된 모양이다. 지금은 그냥 갈 곳 없는 영혼들을 모아둔 동네 건달이 아닌가?
꼬꼬들의 방에서 나오자 발밑에서 꼬리를 맹렬히 흔들고 있는 하얀 털 뭉치가 보였다.
먕! 먕!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똘똘이다. 아직 어려서 잘 크는 것만이 본인의 임무이긴 하지만 특유의 귀여움을 무기로 제이시에게 먹이를 강탈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 녀석도 잠시 지구에 데려가 보는 것은 어떨까? 꼬꼬들처럼 급성장한다면 늑대만큼 커지지 않을까? 라고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그만두었다. 생존율이 너무 좋지 않고 급성장해서 너무 커진다면 쥐를 못잡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집에 쥐가 있던가? 아직 초감각으로도 느껴본 적이 없다. 쥐를 못잡을 지도 모르지만 귀여우니까 괜찮다.
그리고 이제 진짜로 쥐를 잡을 형님을 부를 시간이다. 그 전에 사전작업을 좀 해야겠지.
붕붕이를 타고 먼저 중심지에 가서 약국에 들러 강한 진통제를 구입했다. 그리고 페미컨에게 미리 들어둔 도축업자들을 털어먹고 있는 페니실버라는 사채업자들의 사무소의 앞에 차를 세워놓고 드나드는 인간들을 관찰했다. 검은형제단의 정보에서 봤던 것처럼 4성 기사 둘을 제외하고 특별한 전력은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슬라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더니 이제 회복이 조금 된 모양이었다.
"뭐 하고 오는 거냐?"
"쥐 잡을 준비를 좀 하고 왔지."
"너도 나와 비슷하군."
"뭐?"
"남을 믿지, 못하잖나? 그래서 뭐든지 혼자 처리하려고 하지."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 불신이야 내 불치병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왜?"
"네 부하가 되는 건 생각을 아주 오래 해봐야 하겠지만 이제 망나니 흉내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니 이제 내게 짐을 조금 넘겨도 된다. 나름 천재라고 불렸던 나다. 도움이 되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바라봤다. 과연 도움이 될까? 확실히 검술 쪽에서는 천재지만 다른 부분에선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물론 바보 수준은 아니겠지만 잔머리는 또 다른 영역 아닌가?
"뭐지 그 눈빛은? 굉장히 기분 나쁜데?"
너희 아버지와 너를 따라 한 건데 기분이 나쁘면 어쩌냐. 이게 동족 혐오인가 그건가?
"알았다. 조금 설명해주지."
나는 녀석을 끌고 다시 마당의 구석으로 끌고 가서 간략히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너 미쳤냐?"
"아니 아주 멀쩡한데"
내 계획을 들은 슬라이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안 될 것 같나?"
"아니 될 것 같아서 더 미친놈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조금만 삐끗하면 다 죽을 수도 있다."
"쥐를 잡아줄 큰 형님을 소환하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리고 아직 너에게 다 말해준 것이 아니야. 생각보다 위험하진 않을 거다."
"좋다. 도와주지 이제 망나니 흉내는 그만두기로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야겠군."
슬라이트의 동의를 얻어 계획을 실행하는데 아주 조금 더 편해졌다.
다음 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집 앞의 빈민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틈을 찾아 통로를 열고 들어가 어제 사둔 진통제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쓰읍, 빌어먹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참 세상 살기 힘들다. 슬슬 진통제의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변형을 시작했다. 목표는 어제 미리 봐두었던 페니실버의 4성 기사다.
우두두둑! 우둑!
"우욱! 씨발!"
진통제를 잔뜩 먹었음에도 고통에 욕이 절로 나왔다. 변형을 마치고 나니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원래 사람이 아닌 것이 쓰던 기술이라 그런지 전신 변형은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미리 준비해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체형만 바꾸는 것도 큰일인데 도플갱어처럼 옷까지 실체화시키면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사탕을 한 주먹 꺼내 우둑우둑 씹어먹으며 밖으로 나가서 페니실버의 본거지를 찾아갔다.
"사장님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문 앞에서 인사를 하는 졸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서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두 명의 4성 기사 둘 중의 어떤 놈이 내가 변신한 놈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는 찍어야 한다. 둘 중의 하나이니 50퍼센트의 확률이다. 그런데 문 앞에서 만난 졸개가 나에게 사장이라고 했으니 사장이 있을 만한 곳에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 있겠지.
2층에 한 명, 3층에 한 명이 있다. 보통은 최상층에 사장이 있는 법이다. 나는 먼저 2층을 향했다. 당연하게도 나를 막아서는 녀석들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내 선택이 틀렸음을 알았다. 아니 이 미친놈들은 왜 사장이 2층에 있는 거야?
자신과 똑같이 생긴 녀석이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본 페니실버의 사장은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녀석의 뒤편에 통로를 열고 테이블 위를 날아 녀석이 앉아있는 의자와 통째로 지구로 넘어갔다.
우당탕하며 지구로 넘어가 굴렀지만, 녀석도 엄연히 4성 기사다. 순식간에 일어나 자세를 잡고 검을 뽑으며 싸울 준비를 했다.
상대는 나와 같은 4성 기사다. 4성 기사와 싸우는 것은 슬라이트에 이어 두 번째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처음이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상대의 나이는 대략 40대 정도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경험은 무시하지 못한다.
"여긴 어디고 넌 누구냐!"
주위를 둘러보고 순식간에 바뀐 환경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
"알려줄 거 같아?"
살짝 조롱하자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의외로 도발에 약한 타입이었군? 그러니 사채업자 두목이나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죽어!"
녀석이 먼저 검을 휘둘러 온다. 나도 미리 뽑아놓은 신검 슈바르거트를 들어서 막았다. 지구에서는 이 검을 마음껏 쓸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도 약점이 있다. 바뀐 몸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변신 후에 본거지까지 걸어가면서 최대한 감각을 일치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등한 무인들의 싸움에서 이것은 상당히 치명적인 일이다.
쾅! 쾅!
서로의 오러가 격돌하며 작은 방안에서 충격파가 울린다. 자질구레한 물품들이 사방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진다. 그나마 이럴 줄 알고 방을 정리해둬서 다행이지 난리가 날 뻔했다.
몇 번 검을 부딪치며 맞섰다. 역시 몸에 완전히 적응되지 않아서 이질감이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할 만 하다?
슬라이트가 강했던 것일까? 아니면 눈앞의 상대가 약한 것일까? 거기에다 역시 신검이라고 해야 하나. 도플갱어와 싸울 땐 그 위력을 체감하지 못했지만 몇 번 검을 부딪힐 때마다 상대 기사의 검이 눈에 띌 정도로 박살이 나고 있었다.
몇 번 더 검을 부딪쳐 봤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쉽다. 그렇게 위협적인 상대가 아닌 것을 확인한 이상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마검사였던거냐!"
사채업자 두목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난감함을 표시했다. 그리고 검이 공격적으로 변했다. 갑자기 공격적으로 전환했다는 것은 상대방이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뜻이고 다급해진다는 것은 허점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샤악!
캐스팅이 끝나기도 전에 허점을 파고든 내 검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사채업자 두목의 목을 찔렀다. 목뼈까지 완전히 관통한 검을 나는 옆으로 베어냈다. 목이 반쯤 베어진 사채업자 두목의 시체가 힘없이 쓰러졌다.
같은 4성 기사지만 생각보다 상대가 너무 약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한 것인가? 적응하지 못한 육체로 이 정도니, 원래의 몸이었다면 더 쉬울 뻔했다. 가능하다면 다른 4성 기사와도 대련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사탕을 한 주먹 꺼내 오독오독 씹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