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뜻밖의 수확
사장실로 돌아와 돈이 될만하거나 쓸만한 물건이 있는지를 둘러보았지만 돈 조금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은 없었다. 두목의 시체에 아공간 주머니가 있는 것을 확인했기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공간이 있으면 굳이 금고를 따로 둘 필요가 없다. 대신 스트라이더 997번 같은 특별한 물건이 아니라 보통 아공간 아이템이라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면 꺼낼 수가 없기 때문에 두목이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 모르는 나는 물건을 꺼내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아공간 아이템의 파괴다. 마석이나 혹은 핵이 될만한 물건을 파괴하면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마력의 파동과 함께 큰 소음과 흔적이 남기 때문에 이쪽 세계에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물론 나는 지구에서 하면 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 일단 그것은 남은 표적을 처리하고 확인해도 될 문제다.
서랍 안에 있던 단검 한 자루를 챙겨 허리띠에 끼워 넣고 사장실을 나와 위층으로 향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오던 건달 한 놈이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말했다.
"마침 오시는군요. 사장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니 이놈이 두목이 아니었어? 무슨 사채업자 주제에 사장하고 회장이 따로 있어? 어쩐지 너무 약하다 싶었다. 진짜 두목은 역시 꼭대기 층에 있는 놈이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고 위로 올라가 회장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짜 두목 놈이 문서를 확인하다 말고 나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아래 층의 사장보다는 이놈의 눈빛이 더 날카롭다.
"왔나? 금방 왔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음성을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어도 특유의 말투 같은 것은 내가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두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두목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이야기다. 귀 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듯 했으나 녀석은 크게 의심하지 않고 나에게 한쪽 귀를 내어주었다. 나는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말을 하는 척 몸을 숙이다가 허리띠에 꽂아두었던 단검으로 심장에 찔러넣었다.
"너, 무슨..."
놀란 눈으로 진짜 두목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기사고 뭐고 방심하고 있다가 심장을 찔리면 끝이다. 이래서 암살자가 무섭다는 것이다.
통로를 열고 단검을 빼지 않은 채 그대로 시체를 밀어 넣었다. 현장에는 피 한 방울 남지 않았다. 이런 걸 보고 완전범죄라고 하던가? 대격변 전의 세상에서 이런 능력을 얻었다면 참 죽일 놈이 많았을 텐데 아쉽다. 아니 그때는 나도 보통 사람이었으니 사람을 못 죽였을까?
진짜 두목이 보고 있던 문서를 보니 그것은 편지였다. 누가 보냈는지 쓰여있진 않지만 읽어보니 내무대신 쪽에서 보내온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었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사채업자들 일 처리가 느리고 마음에 안 든다는 타박으로 시작해서 슬라이트를 자극해 사고를 치게 만들라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증거 또는 협박용으로 써먹을 수 있으니 편지는 잘 챙겨 넣었다. 방안을 조사하니 이번에도 딱히 숨겨진 금고라던가 쓸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확인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아마 진짜 두목에게도 아공간 아이템이 있을 것이다.
진짜 두목의 방을 나와 다시 발길이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마구 돌아다녔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일부러 빈민가를 헤매고 다닌 것은 검은형제단의 눈을 교란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와 집에 돌아온 후 체력 회복을 하며 슬라이트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사채업자 부두목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너는 같은 4성 기사와 대련을 많이 해봤겠지?"
"그런 편이지."
"너는 4성 기사 중에서 어느 수준이냐?"
"나는 태어나서 같은 등급의 기사와 대련해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
"나한테는 졌잖아?"
슬라이트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너는 마검사이기도 하지만 오러가 뭔가 이상하다."
"그래?"
나야 비교 대상이 없었으니 알 수가 없던 일이다. 슬라이트가 갑자기 자신의 검을 꺼내더니 뽑았다. 언뜻 보기에도 예기가 흐르는 좋은 검이다. 공작가 막내 공자님의 검이니 당연히 좋은 검일 것이다.
"넌 이 검이 어떻게 보이나?"
"좋아 보이지"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검이다. 왕국 최고의 명장이 1년간 공을 들여 만들었다고 한다. 신검까지는 아니어도 명검 수준에는 들어가는 검이지 그런데 네 검은 어떻지?"
평소 사용하는 내 검 역시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검이다. 저질의 검은 아니었지만, 그냥 보통 검이다.
"그냥 평범한 검이지."
"그런데 그 검으로 내 검과 30분을 넘게 부딪히고도 이빨 하나 나가지 않더군. 네 오러가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다."
검의 차이는 사채업자 부두목과 싸워보면서 여실히 느꼈다. 틈을 노려 찌르지 않고 몇 합 더 겨뤘다면 사채업자 부두목의 검이 부러졌을 것이다. 그런데 내 오러가 그 수준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물론 좋은 심법으로 지구에서 수련하기는 했지만 비교 대상이 없었기에 어떤 수준과 상태인지는 알지 못했다.
"너라면 당장 5성 기사와 싸워도 크게 밀리지 않을 거다."
내가 그 수준이라는 말이지? 그런데 다 죽어가던 방랑형 변이체 한 마리 잡지 못했다. 6성 기사 정도 되면 보통 변이체 정도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며칠 내가 안 보이더라도 나 찾지 마라. 그리고 철권단 데리고 도축업자들을 지켜줘. 사채업자들이 습격할지도 모르니까."
"알았다."
내 계획이야 이미 대략 알려준 적이 있으니 길게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두목들을 잃은 사채업자 조무래기들이 어떻게 튈지 모르고 혹시 내무대신 쪽에서 내가 제거한 놈들을 대신할 누군가를 보낼지도 모르기에 미리 대비해 두는 것이다.
나는 다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여러 곳을 떠돌다가 좋은 위치를 찾아 지구로 들어갔다. 사채업자 두목과 부두목이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 쓸만한 것을 빼놓고 시체를 처리했다.
땅을 파는 마법을 드디어 배웠기 때문에 시체처리는 어렵지 않았다. 아공간 아이템의 파괴를 할 때가 왔다.
사장이라 불리던 부두목은 주머니 형태의 것을 가지고 있었고 회장 놈은 나름 회장이라서 그런 것인지 반지 형태의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용사의 신검은 이런 것을 부술 때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먼저 바닥에 아공간 주머니를 놓고 버클 부분에 위치한 핵을 오러가 실린 검으로 내리쳤다.
펑!
내 예상보다 훨씬 큰 폭발음과 함께 주머니의 핵이 파괴됐다. 폭발력으로 두걸음 정도 뒤로 밀렸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줄은 알고 지구에서 작업한 것이지만 생각보다 큰 위력이었다. 피부가 노출된 곳에 파편이 조금 튀기며 생채기가 생겼다가 재생력에 의해 다시 아물기 시작했다.
용량이 크지 않은 주머니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위력이다. 과거 전쟁에서 마석으로 폭탄을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봤었는데 커다란 마석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기사도 상하게 할만한 위력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석 폭탄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들어가는 노력과 돈에 비해 위력이 별로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스트라이더 997번에는 아예 자폭 기능이 있었는데. 그건 대체 어느 정도 위력인 거지?
부두목의 아공간 주머니가 파괴되며 그 안에서 나온 물건들은 금화 120개 정도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물건이 없었다. 역시 부두목은 그냥 들러리 같은 놈이었나?
그래도 일단 돈은 챙겨놓고 나머지는 대충 치워둔 후 이번엔 두목의 반지를 검으로 조준했다. 이것은 주머니보다 용량이 더 큰 녀석이다. 폭발력이 그만큼 더 클 것이다.
한번 당해놓고 두 번째에도 대비를 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대비책을 몇 가지 세워둔 후 검을 내리쳤다.
퍼엉!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폭음과 함께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금화와 은화가 제법 많이 들어있어서 마치 돈의 비가 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애초에 내가 사채업자들의 두목급을 암살한 것은 상대의 전력을 깎고 움직임을 제한할 목적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역시 있군."
장부다. 어디서 얼마나 들어와서 내무대신 쪽으로 얼마가 흘러 들어갔는지에 대한 장부가 있었다. 보통 이런 일에는 장부를 절대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하수인 놈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무조건 만드는 것이 장부다. 인간 불신에 대한 증거가 하나 더 늘었다.
그런데 장부가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분명히 사채업자 두목 놈이 작성한 페니실버에 대한 장부지만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다른 장부가 하나 더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확실히 오래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물건이 분명했다. 워낙 골동품 급으로 보이는 물건이라 조심스럽게 표기된 연도와 날짜를 보니 제국 시대의 말기의 물건이다.
제국 군대의 물품이 어디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적혀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왜 사채업자가 가지고 있지? 어딘가에 빚을 받으러 가서 고서로 보이는 물건이니 빼앗아 온 것인가?
그런데 살펴보는 와중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 검과 창, 도끼, 스태프 및 완드가 각각 500개씩 제국의 특정 지역으로 수송됐다는 기록이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지 않은가?
스트라이더 997번에 들어있던 물품의 양과 같다. 우연일 수도 있으나 장부의 기록에는 그와 비슷한 군수물자가 여러 군데에 나눠서 이동됐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물건이다. 이것만 있으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다른 제국 던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던전의 위치를 안다고 내가 그것을 발굴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던전이란 사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침입자를 막게 설계되어 있다. 멤파이 자작령에서 발견된 던전만 해도 수백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공략된 것이 아닌가.
일단 던전이 속한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두 번째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힘을 빌려 던전 공략해야 하는데 에인프라흐 공작가? 어림도 없다.
일단 이것은 묻어두기로 했다. 나중에 내가 스스로 힘을 가지게 된다면 그때나 손을 대볼 만한 문제이고 그 전에 던전이 다른 이에 의해 발굴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처음부터 원했던 사채업자의 장부도 얻었고 폭발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줍기 귀찮아서 회수하진 않았지만, 꽤 많은 돈도 얻었다.
그럼 이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짓을 또 하러 가야 한다.
페미컨은 열심히 짐을 싸고 있었다. 며칠 전 빅터 하네스라는 갑자기 왕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소년을 만난 후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무려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천재 망나니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는 알 수 없는 소년이었지만, 공작가에서 망나니에게 붙여준 모사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해 쉽게 대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죽는 것이 확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년이 시키는 대로 가족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고 먼 지방으로 나눠서 피신시켰다. 소년은 적당히 적은 돈만 줘서 보내라고 했지만, 그 말은 듣지 않았다. 처와 자식들에게 움직일 수 있는 돈의 반을 넘게 나눠주었다. 그 정도는 있어야 남은 삶을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에게 아주 잔인한 말을 했다. 도축업자들을 모아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자살하라고 했다. 그래야 가족들이라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은 시킨 대로 할 수 없었다. 소년의 명령대로 도축업자들에게 그걸 시킨다면 정말 다 죽을 수도 있다. 도망친 가족들도 결국에는 잡혀 죽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 팔 수 있는 재산을 처분해 페미컨 본인도 도망치려고 했다. 아직은 시간이 있을 것이다. 지방 어딘가에 꼭꼭 숨어 죽은 듯이 살아간다면 공작가나 징세청장이라도 자신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팔아치우지 못한 재산이 아깝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막스! 막스 어디 있나!"
막스를 불렀다. 사업체에서 그나마 믿을 수 있고 순종적이며 똑똑한 직원이다. 남은 사업체는 일단 그에게 맡겨 운영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사업체를 다시 회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이 열리고 막스가 들어왔다. 그런데 막스의 눈빛이 조금 이상하다. 평소의 소처럼 순한 눈빛이 아니다. 설마 눈치를 채고 돈이라도 요구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처음부터 조합장님이 제 말대로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인간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막스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것이 페미컨이 이 세상에서 들은 마지막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