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가면 놀이
다음 날 페미컨은 아침부터 도축업자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제의를 했다.
"우리는 이대로라면 모두 눈 뜬 채로 사업체를 모두 강탈당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을 것이오. 그러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사실을 보여줍시다."ㅁ
"그게 뭡니까 조합장님?"
"모두 지금 이 시간부로 파업합시다."
도축업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비록 독립된 사업체라고는 하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왕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대 파업이라는 것은 일종의 반역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왕실에 납품하는 업체들은 더욱 그랬다.
"그랬다간 모두 죽습니다! 조합장님"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 있소? 반역도로 몰려 죽으나 빚더미에 앉아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부려 먹히나 뭐가 다르단 말이오? 모든 책임은 이 페미컨이 지겠소. 철권단의 공자님들도 도와주시겠다고 했으니 그러니 진행합시다. 철권단에 누가 있는지는 다들 알고 있지요?"
에인프라흐 공작가 망나니의 이름은 여기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반쯤 넘어온 도축업자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페미컨은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쾅!
"이 페미컨! 목숨을 걸겠소. 누가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겠소? 우리의 재산과 자유는 우리의 힘으로 지킵시다!"
그 엄청난 박력이 평소의 페미컨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도축업자들이 감화되어 같이 소리를 질렀다.
"지킵시다!"
"우아아아아!"
곧 군중심리에 휩쓸려 모든 도축업자들이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페미컨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사탕 한 주먹을 꺼내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도축업자들이 사업장을 모두 중지시키고 파업에 들어가자 당장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쪽 성문 근처의 도축업자들이 왕도의 모든 육류의 유통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당장 도축이 중지되고 육류의 유통이 멈추자 왕도에 큰 소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이틀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저장해두었던 물량이 모두 소비되자 육류의 유통이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고기를 사기 위해 왔던 유통업자들을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를 하고 있는 도축업자들을 보고 혹시라도 연관될까 두려워 재빨리 발길을 돌렸다.
처음에 영향을 받은 것은 평민들이었다. 그러나 육류의 가격이 순식간에 오르고 돈을 주고서도 쉽게 고기를 구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하자 귀족들에게도 영향이 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왕실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동문의 도축업자들은 왕실에도 납품을 하고 있었으니 진즉에 이야기가 전해졌어야 했는데 누군가가 중간에 힘을 써서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손을 썼기 때문에 그나마 늦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미리 준비해둔 작업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돌턴골드 상단이 비밀리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왕도 전체에 도축업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구체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무대신의 반대 파벌에 속한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고 귀족들의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하자 그것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왕족들의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
그사이 당연히 파업을 하고 있는 도축업자들에게도 압박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치안대였다. 치안대가 우르르 몰려오자 도축업자들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나타난 것이 도축업자들을 지켜보고 있던 슬라이트와 도련님 부대였다.
"나는 슬라이트 에인프라흐다. 당신들은 누구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는가!"
망나니로만 유명했던 공작가의 아들이 추상같이 호통을 치자 당장이라도 도축업자들을 연행할 것만 같았던 치안대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명령을 내린 사람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로본 자작가의 자힘이라고 하오!"
"나는 힝켈 남작가의 크리스요!"
도련님 부대들도 모두 한명씩 자기소개를 하며 도축업자들의 앞을 막아서자 치안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치안대가 이들을 압박하려는 일은 정당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귀족가의 도련님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이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듣자 하니 이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도 그대들은 사채업자의 편을 들었다고 하더군. 거기 책임자가 누구인지 나와서 이름을 대시오."
슬라이트의 말에 출동했던 치안대의 조장은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본인도 대장의 말에 따라 움직였을 뿐 책임자가 아닐뿐더러 떳떳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간다."
조장의 말에 치안대가 물러가자. 다음에는 경비대가 찾아왔다. 그러나 경비대도 비슷한 상황을 맞아 힘을 쓰지 못하고 대치만 하다가 돌아갔다.
치안대와 경비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갈 때마다 이를 선동하는 페미컨에 의해서 도축업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랐다.
격렬했던 하루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페미컨은 무거운 몸을 소파에 파묻고 사탕을 오독오독 씹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떠날 때가 되었군."
누군가 문을 노크하고 미리 불러두었던 성실해 보이는 직원이 들어왔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막스 잘 왔네."
페미컨의 몸으로 변해 며칠 휴가를 주었던 막스가 돌아왔다. 페미컨의 몸으로 며칠 살면서 이 업체가 그동안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네 막스"
"아닙니다. 사장님"
갑작스러운 페미컨의 치하에 막스는 어리둥절했다.
"이건 그동안 수고했다는 뜻으로 주는 것이니 받아두고"
약간의 금화를 건네주자 막스는 돈을 받으면서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가족들을 돌보고 지금 회사에 할 일이 없는 줄은 알지만,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날 찾아주게"
"알겠습니다. 사장님"
성실하고 좋은 중간 관리자라는 막스다. 페미컨의 업체가 잘 굴러가는 것은 막스의 공이 크다는 것이 다른 직원들의 평이었다. 막스가 퇴근하고 회사에 혼자 남게 된 페미컨은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 막스는 사장실에서 목을 메단 페미컨을 발견했다. 그리고 혈서로 쓰여진 유서를 발견해 도축업자들과 슬라이트에게 달려왔다.
"크윽! 조합장님!"
"어헝헝! 이 멍청한 놈이 조합장님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조합장이 혈서로 남긴 유서를 읽은 도축업자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페미컨이 남긴 유서는 징세청장과 페니실버의 악행과 경비대 그리고 치안대까지 얽힌 비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으며 목숨을 바쳐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신의 남은 모든 재산을 왕실에 바친다고 적혀있었다. 물론 내가 적은 내용이었다.
밤사이에 집에 복귀한 나는 슬라이트를 만났다.
"너는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집에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슬라이트는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탕을 열심히 퍼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소모되는 에너지가 더 컸는지 원래 몸으로 돌아온 나는 눈에 보일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연이어서 신체 변형을 하며 찾아왔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뚱뚱했던 페미컨으로 변신할 때는 반동이 더욱 커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죽도록 열심히 일하고 왔다."
"놀다가 온 건 아닌 모양이구나."
"내일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큰형님들이 오실 때가 되었거든."
"나 바보 아니다. 그 정도는 안다."
이 왕도에서 가장 힘이 센 파벌은 어디일까? 공작가? 내무대신? 아니다. 왕실이다.
처음부터 쥐를 잡을 고양이로 왕실을 생각하고 짠 계획이었다. 힘센 형님들 둘이 싸운다? 더 센 형님을 불러오면 된다.
물론 이쪽도 약간의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공작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무대신에게도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 나도 처음으로 도축업자들의 시위 현장에 참여했다. 아침부터 페미컨의 자결과 발견된 유서 덕분에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참여한 인원들의 의지는 최고조에 달했다.
내 계산과 찰리 데커가 은밀히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오늘쯤 왕실에서 개입이 있을 거다. 왕실 직할의 수사대 정도가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다. 페니실버가 전 병력을 이끌고 시위 현장을 찾아왔다.
사채업자들을 이끌던 기사 둘이 실종되었기에 꼬리를 자르고 숨지 않을까 했더니 답은 새로운 두목을 내려보낸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보다 강력한 두목이다. 왕실에서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죽여버리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증거인멸인지 아니면 단순한 보복인지 내무대신의 마음까지 알 방법은 없었다.
"느꼈나?"
내 물음에 슬라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겠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여도 너까지 죽이진 못할 거다. 그것은 공작가와 전면전을 뜻하는 것이니까. 한 놈만 붙잡고 시간을 끌어라."
새로 부임하신 사채업자 두목과 부두목의 인선에 내무대신이 힘을 좀 쓴 모양이다. 초감각으로 느끼기에 상대는 5성 기사 둘이다.
"너는?"
"네가 5성 기사와 붙어도 그리 밀리지 않을 거라며?"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다른 방법이 있나?"
"없지"
그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 어려운 상대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질 것 같은 느낌은 아니다. 위험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거든.
지난번 4성 기사와의 싸움이 너무 쉽게 끝나서 5성 기사는 어느 정도나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철권단은 업자들을 지켜라!"
"네!"
도련님 부대도 사기가 높다. 상대가 훨씬 많기는 해도 기사 둘을 제외하면 모두 뒷골목 건달들이다. 아직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는 해도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무가의 자식들이다.
도축업자들도 원래 하는 일이 칼 들고 가축들 멱 따는 것이 일상인 아저씨들이다. 보통 사람들보다야 훨씬 잘 싸울 거다. 그쪽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만 잘하면 된다.
신임 두목과 부두목이 앞으로 나왔다. 우리도 슬라이트와 내가 앞으로 나섰다. 둘 중에 조금 더 강해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놀랍군. 그 나이에 유명한 공작가 망나니와 비슷한 실력을 지닌 소년이 있을 줄이야."
"그쪽이 새로운 두목인가?"
"두목? 그래 뭐 그렇지."
"그럼 그쪽이 내 상대로군."
내가 되받아치자 신임 두목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아직 어려서 그런가? 혈기가 넘치는군. 아까워 그런 재능을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게 말이야."
두목은 마치 내 목숨이 이미 자기 손에 들어온 것처럼 거만한 말투로 지껄였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전생에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던 사람은 전부 나보다 먼저 죽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 않은 사람도 먼저 죽었지만.
"사채업자 두목 주제에 잘난 척 말이 많아."
가볍게 도발을 걸어주었는데 생각보다 정신 수양을 열심히 한 모양인지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나와 슬라이트도 검을 뽑아 들고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죽지 마라"
슬라이트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너야말로 내가 처리하고 도와줄 때까지 버티기나 해라."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몸을 날리고 싸움이 시작됐다.
쾅! 쾅!
확실히 5성 기사의 검은 무거웠다. 슬라이트처럼 대단한 기교를 쓰는 것은 아니었지만 검격 하나하나가 기존에 내가 상대했던 4성 기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도 생각보다 버틸 만 했다. 문제는 버틸 만 하다는 것이지 지금 상태로는 압도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슬쩍 시선을 돌려서 보니 슬라이트도 특유의 기교를 이용하여 상대하고 있으나 간신히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눈을 팔 여유가 있는가!"
두목의 호통과 함께 검 끝이 날카롭게 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끈한 고통과 함께 피가 튀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할 만하더라고."
도발을 한 번 더 날려주며 캐스팅을 시작하자 두목의 눈빛이 달라지며 캐스팅할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맹렬히 공격을 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