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30화 (30/206)

30. 거물

확실히 지난번 부두목과는 달랐다. 단순히 경지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의 차이였다. 지금 상대하는 신임 두목은 마법사와 전투 경험도 풍부한 것 같았다.

그런데 검술 자체는 명가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따져보면 나와 조금 더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더 날 것의 느낌이다. 아마도 용병 기사일 것이다. 아무리 기사들이 흔해서 택시 기사까지 하는 왕도라고 하지만 5성급의 기사는 그리 많지 않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도 아닌 용병 기사는 더더욱 적다. 내무대신이 제법 힘과 돈을 썼을 것이다. 그럼 내무대신은 무엇을 노렸을까?

단순히 도축업자들의 사업체?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도축업자들의 수입이 요즘 늘어났다고 해도 내무대신쯤 되는 대귀족에게 그리 큰돈이라 할 수 없다.

아니면 슬라이트의 실수를 유도해 그것을 빌미로 공작가의 힘을 줄이기? 그것도 아니다. 그것이라면 뭣도 모르고 가즈아!를 외치던 슬라이트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시점에서 거의 끝난 이야기다. 혹은 내가 사채업자들의 수뇌부를 암살한 시점에서 완전히 끝났다.

맹렬히 공격하는 두목의 공세를 막아내며 캐스팅을 마쳤을 때 신임 두목은 재빨리 다시 공세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어이, 도련님 우리 정도 되는 사람들이 여기 온 것이 이상하지 않아?"

이것은 완성된 캐스팅을 망치려는 노련한 기사의 꾀일까? 아니면 죽음이 확정된 상대를 향해 보이는 여유일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두목은 피식 웃더니 슬라이트를 상대하던 부두목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그만 놀고 빨리 끝내자고."

슬라이트를 여유있게 몰아붙이고 있던 부두목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씨익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이 자식들 다른 사람은 다 죽여도 슬라이트는 살려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애초에 슬라이트를 죽이려고 온 놈들이었나? 내 예상이 빗나갔다. 그럼 공작가와 전면전을 피할 수 없을 텐데. 뒷일은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어찌 됐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최대한 눈앞의 두목 놈을 빨리 해치우고 슬라이트를 구해야 한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두목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온 힘을 다해 공격에 들어갔다.

쾅! 쾅!

내가 할 수 있는 오러를 최대한 검에 밀어 넣고 있었지만 오러의 힘만으로 눈앞의 상대를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두목은 완성된 마법을 의식한 것인지 내 공세를 적절히 방어하며 간격을 주지 않고 방어하고 있었다.

슬라이트가 나와 대련할 때와 비슷한 대처다. 그렇다면 실제로 마법을 사용했을 때도 비슷할 것이다.

"플래시"

두목과 나 사이에 강한 섬광이 일어났다. 두목은 예상했다는 듯이 눈을 감고 거리를 벌렸다.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나 역시 내가 쏜 섬광에 시야를 잃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으나 앞으로 나서며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닿을 리 없는 거리였다. 기사들의 싸움에서 거리는 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두목은 내가 휘두른 검이 자기 몸에 닿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노렸다.

우두둑!

검을 휘두르는 팔에 신체 변형을 사용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팔이 30센티 정도 늘어났다. 당연히 엄청난 고통이 따랐지만, 이번 경우에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팔 부러지는 고통 한 번에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잡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가 아닌가?

샤악!

해적왕을 꿈꾸던 소년의 기술을 응용한 검격이 닿을 리 없는 거리에 있던 두목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순간 부릅뜬 두목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뜻이 가득 담겨있었으나 입 밖으로 무언가를 내뱉지는 못했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섬광 덕분에 베는 순간을 본 사람은 없겠지만 재빨리 팔을 복구시키고 벌어진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는 두목의 시체가 땅에 쓰러지기 전에 나는 이미 슬라이트를 돕기 위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슬라이트는 갑자기 기세가 바뀐 5성 기사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미 팔과 다리에 검을 허용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데 답이 없었다.

5성 기사와 처음 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련이었고 가문의 기사들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봐주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하고 있는 기사는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뭔가 번쩍하고 섬광이 일었다.. 그것이 빅터가 쓴 마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섬광이 사라지고 나타난 장면에는 시선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5성 기사의 목을 벤 빅터가 자신을 구하러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는 몰라도 대단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상식적이지 않은 녀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슬라이트는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기다렸지? 형 왔다!"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낭패한 기색이 되어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슬라이트를 구원하기 위해 난입했다.

"내가 한살 더 많다. 이 자식아!"

그렇지, 슬라이트는 나보다 한살 더 많은 16살이다. 그래도 아직 존댓말이나 형이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부를 생각은 없었다.

내가 싸움에 난입하면서 반대로 수세에 몰린 것은 부두목이었다. 순식간에 양쪽에서 협공당하며 몸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통 4성 기사 둘과 5성 기사 한명의 싸움이라면 5성 기사가 이긴다. 그런데 여기 있는 4성 기사 둘은 일반적인 4성 기사가 아니다.

내가 위력으로 부두목을 상대하고 그 틈을 슬라이트가 귀신같이 파고들어 상처를 입힌다. 큰 상처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조금씩 갉아 먹혀 들어가면 인간이란 것은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 자식들!"

수세에 몰려 당황한 부두목이 포효를 내지르며 슬라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 중의 하나라도 먼저 제거하면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조금이라도 약한 슬라이트였다.

"그리스"

아까부터 이미 캐스팅을 끝내놨던 마법을 슬라이트를 향해 달려드는 부두목의 발밑을 향해 깔았다. 역시 부두목도 노련한 기사였는지 순간 펄쩍 뛰어오르며 마법이 깔린 바닥을 피했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말려든 것이나 다름없다.

슬라이트가 상대할 생각 없다는 듯이 멀리 물러나고 다시 내가 등 뒤를 노린다. 부두목은 다시 나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시 슬라이트가 틈을 노리기 시작한다.

한 번도 합을 맞춰본 적이 없는데도 슬라이트와 나는 기가 막힌 연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슬라이트의 천재성과 나의 많은 실전 경험이 합쳐진 결과였다.

나는 대격변 초기 이후로 항상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했다. 진화한 변이체든 전투 능력을 각성한 생존자든 모두 나보다 강한 상대였다. 물론 도망친 적이 훨씬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싸웠을 때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작은 상처가 누적되고 출혈에 의해 부두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이렇게나 나약한 존재다. 변이체까지 갈 것도 없이 아노더스에 널리고 널린 마수들도 인간에 비해서는 월등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끄으윽!"

결국 커다란 틈을 보인 부두목의 가슴과 배를 슬라이트와 나의 검이 꿰뚫었다. 부두목이 쓰러지자 나와 슬라이트도 그대로 쓰러져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무난했던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전투였다. 몇 번이나 위험한 상황이 있었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재생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도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아무리 4성 기사 중에 특출나다 해도 장시간에 걸쳐 5성 기사의 오러를 받아내는 것은 몸에 엄청난 부하를 주는 일이었다.

드러누운 채로 사탕을 한 주먹 꺼내 씹어먹으며 포션을 하나 꺼내 슬라이트를 향해 던졌다. 상처가 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나는 처음에 당했던 귀를 만져보니 이미 모두 재생되어 있었다.

"받아라."

포션을 받은 슬라이트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포션을 벌컥벌컥 마셨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부대가 달려왔다. 부두목과 싸우는 중에 슬쩍슬쩍 확인했었는데 예상대로 그쪽의 싸움은 여유로운 낙승이었다.

"다친 사람은?"

"저희는 괜찮습니다. 조금 다친 사람이 있지만 내버려 둬도 나을 수준입니다. 두 분은 괜찮으십니까?"

"죽지 않았으면 괜찮은 거야."

"대단하십니다! 5성 기사 둘을 어떻게..."

경지가 낮으니 감으로 경지를 알지는 못하지만, 무가의 자식들이다 보니 검에 서리는 오러의 농도를 눈으로 보고 경지를 대충 유추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4성 기사 둘이 5성 기사 둘을 상대로 이기다니 상식을 파괴하는 일이다.

"운이 좋았지. 그보다 저 건달들 모두 잡아서 묶어놔"

쓰러져 있는 페니실버의 건달들은 잡아 놓으라고 했다. 이미 죽어버린 두목들과 다르게 이것들은 나름의 쓸모가 있을 것이다.

장내가 정리되고 슬라이트와 내가 체력을 조금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위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처음에는 자신들도 연관되어 처벌받을까 두려워 가까이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왕도에 퍼진 소문을 따라 응원하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그리고 구경꾼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순수한 구경꾼이 아닌 것들도 많이 보였지만 내버려 두었다. 막는다고 안 올 것들도 아니다.

그런 많은 군중 앞에서 공작가 망나니와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천재 소년이 사채업자가 불러온 5성 기사 둘을 잡아냈다. 왕도가 또 한 번 뒤집힐 것이다.

슬라이트가 상기된 얼굴로 군중들의 환호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 묘하게 기분이 나빠서 가까이 다가갔다.

"좋냐?"

"좋다. 이런 기분이군."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슬라이트가 다시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도련님 부대가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오려는 것을 내가 막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가까이 다가오지 마. 그리고 가능하면 조용히 해"

대체 뭘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슬라이트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번 깨달음으로 인해 경지가 오르게 된다면 16살에 5성 기사가 된다. 나처럼 기연을 얻은 것도 아니다. 물론 공작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니 그것도 기연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16살에 5성 기사라니 정말 미친 재능이었다. 이러면 공작이 죽기도 전에 7성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

슬라이트를 중심으로 마나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도련님 부대가 재빨리 주변 사람들을 먼 곳으로 물리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나는 바로 옆에서 슬라이트를 호위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마나가 점점 격렬하게 요동을 치고 그 중심에 앉아있는 슬라이트의 몸이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가라앉고 마침내 슬라이트가 눈을 떴다.

"축하한다."

"고맙다."

내 인사에 녀석이 처음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녀석이 눈을 뜨기도 전에 슬라이트가 5성의 경지에 올랐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시커먼 색상의 마동차 수십 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동차에는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왕실의 문장이 찍혀있었다.

"드디어 올 게 왔군."

"자신 있는 거냐?"

"글쎄 나라고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인간 사이에 작용하는 욕망에는 익숙하지."

온갖 종류의 욕망이 뒤틀리고 섞인 곳에서 살았었으니까. 그곳은 어떤 의미로는 가장 격렬한 정치판이었다.

검은색 마동차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수십명의 사람들이 먼저 내렸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치 독사를 연상케 하는 중년인이 있었다. 생긴 것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풍기는 기운이 그렇다는 것이다.

"감찰국장이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

슬라이트가 넌지시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었다. 수사대 정도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 왔다. 내 계산이 또 조금 어긋난 모양이다.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먼저 감찰국장이 우리 앞에 섰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감찰국장의 눈빛에 수십번은 죽었을 것이다.

"감찰국장 구테 라이스 백작이다. 준비하도록"

무엇을 준비하라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검은색 마동차 수십 대가 들어올 때 그 중심에 하얀색 마동차가 한 대 있었다. 그리고 아직 그곳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하얀색 마동차의 문이 열리며 호위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먼저 내렸고 이내 꼿꼿이 서서 오러를 실어 외쳤다.

"왕세자 전하 행차시다!"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아니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물론 우리 형은 아니고 슬라이트의 매형이다. 감찰국장이 온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거물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거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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