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바사삭!
빌어먹을
역시 사람을 믿는 게 아니었다. 기초체력 훈련만 하는데 제자들이 도망갔다고 했을 때 수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상식적으로 뛰어난 검술을 배우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도 있는 기회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있겠는가?
사람을 쉽게 믿은 실수를 한 결과 나는 지금 철권단과 함께 연무장에 쓰러져 있었다.
스승님은 사제의 연을 맺은 후 지체하지 않고 간단한 짐을 꾸려 우리 집으로 바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고맙게도 나를 지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철권단과 폴켄까지 지도를 해주시기로 했다. 물론 슬라이트도 슬쩍 끼어들었다.
그런데 스승님 기준의 기초체력 훈련이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초다. 토대를 잘 쌓아야 집도 튼튼한 법이다. 너희들은 아직 기초가 부족하다.”
그 기초라는 것이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것부터 시작이었을 줄이야. 내가 평소에 육체단련을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해도 죽을 것 같은 난이도의 훈련이었다.
슬라이트와 철권단원들도 쫓아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쪽에는 나보다 조금 여유를 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스승님은 한가지 거짓말을 더 하셨다. 우리 집에 찾아와 자체적으로 훈련을 하고 있는 철권단과 폴켄을 본 스승님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폴켄을 확인하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
“슬라이트 도련님에 빅터에 이 아이까지 여기는 무슨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인재들의 집합소인가?”
폴켄의 재능이 뛰어나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리고 스승님은 폴켄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저기요. 스승님? 저에게 마지막 제자가 되어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역시 인간은 쉽게 믿어선 안 된다.
폴켄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기초 체력훈련에서 폴켄만 열외였다. 물론 나이가 어리니 그러는 것을 이해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어리지 않은가?
“스승님 저도 나이가 어립니다만.”
말은 꺼내 보았다.
“빅터 너도 성장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신체적으로는 완성돼있다. 그리고 회복력도 믿을 수 없이 뛰어나더구나. 이런 몸을 가지고 수련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손해다.”
이렇게 일축당했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내가 뛰어난 신체를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복력이야 재생력 덕분일 테고 그렇다면 역시 꼬꼬들의 몸이 변한 것처럼 나도 지구의 영향을 받아 신체의 기본 구성이 바뀌었다는 것인데 예전에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서 본 것처럼 환골탈태나 바디 체인지를 한 적도 없는데 어떤 원리로 신체가 건강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매일 지옥 훈련을 넘어서는 강도 높은 훈련이 계속되었다. 매일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가혹한 훈련을 하는데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재생력 덕분도 있지만 스스로 몸이 매일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의 훈련 방법은 언뜻 보기에는 무척 가혹하고 힘들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매일 훈련을 따라갔다.
“대단하다. 너는 매우 잘하고 있다. 육체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많다. 오러에 관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많지. 하지만 정신력을 타고난 사람은 많지 않다. 너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노력만 하면 된다.”
스승님은 훈련 중에는 무서울 정도로 빡빡하지만, 훈련이 끝난 후에는 이런 식으로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먕! 먕!
똘똘이 녀석은 언제부터인가 닭장을 뛰쳐나와 스승님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스승님도 똘똘이를 귀여워한다. 이 녀석 은근히 강자를 따르는 건가? 그럼 전에는 꼬꼬들이 강자였던 얘기잖아. 왠지 괘씸하지만 귀여우니까 봐주도록 하자.
훈련 외에도 제법 바빴다. 이제 지미 집사가 많은 일을 대신 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벌려놓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토끼꼬리 풀의 씨앗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영초의 씨앗인지 구하기도 어려웠고 가격도 생각보다 높았다.
일단 위장용으로 화분 열댓개에 심어서 마석과 마법진을 이용해 마나가 풍부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화분에는 지구의 흙을 사용했다. 기르는 것은 미리 고용해두었던 정원사의 일이었다.
정원사 벤프리는 묘목과 관목을 부지의 경계에 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여성 고용인들이 하기 어려운 힘쓰는 일도 도와주고 있었으니 만능 일꾼인 셈이다. 물론 보수는 섭섭지 않게 챙겨주고 있었다.
지구에서는 기상연구소 바깥에 땅을 고르고 씨앗을 심었다. 과거의 다른 풀이나 병아리들의 생존율이 20 대 1 정도였으니 그것을 감안해서 최대한 많은 씨앗을 뿌렸다.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생각보다 많은 씨앗을 확보한 것이 다행이었다.
또 새로 고용한 가정부인 마사와 힐마는 40대 중반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제이시와는 첫날부터 마음이 통해 자매처럼 지내기 시작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마사는 요리 솜씨가 좋을 뿐더러 귀족가에서 오래 요리를 하면서 고급 요리 재료를 만진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향신료를 구입해 마사와 함께 수많은 배합을 연구한 결과 마침내 궁극의 음식이 탄생했다.
“치킨···.”
황금빛 튀김옷을 입고 있는 치킨이 완성되었다. 이게 뭐라고 죽기 직전에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세계에도 닭튀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닭튀김을 해달라고 졸라서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맛이 아니었다.
바사삭!
바삭하게 부서지는 튀김 옷 안에 숨겨진 촉촉하고 부드러운 닭의 살코기를 이빨이 뚫고 들어갔다. 입안 가득히 퍼지는 고소함과 향신료의 내음이 영혼을 적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이것은 확실히 전생에 먹던 치킨이다. 그런데 맥주는 어디 있지? 이런 실수가 있나 내 지금 나이를 생각하다 보니 맥주를 준비하지 못했다.
“어머, 단주님 뭘 울기까지 하세요. 이 닭튀김의 이름이 치킨이라는 건가요?”
“응, 어렸을 때 이방인이 하던 음식점에서 한번 먹어본 적이 있거든 그런데 어디에도 비슷한 음식을 하는 곳이 없더라고 다들 한번 먹어봐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들어서 한조각씩 치킨을 들고 뜯기 시작했다.
“어머!”
“우와!”
감탄사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심지어 스승님조차 이미 두 번째 조각에 손을 대고 있었다. 역시 치킨은 옳았다.
“이건 팔아도 되겠어요. 아니 팔아야 해요.”
“확실히 이 요리는 상품성이 있습니다.”
“나도 왕국 곳곳을 여행하며 여러 가지 음식을 먹어봤지만, 이것은 확실히 맛있구나.”
집사와 스승님에게도 인정받았다. 사실 처음부터 치킨은 판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 도축장의 주인이다. 거기에는 닭도 포함이 된다. 거기에 돌턴골드 상단이라는 판매처도 가지고 있다. 물론 직접 음식점을 운영할 생각은 아니었다.
“요리 비법을 돌턴골드 상단에 판매하려고요. 돌턴골드 상단이 가지고 있는 호텔과 고급 음식점에서만 팔게 할 거예요. 계획은 알려드릴 테니 그건 집사님이 협상을 맡아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치킨의 레시피에 대한 판매는 쉽게 이루어졌다. 찰리 데커와 상단주에게 시식을 시켜줬고 그 자리에서 구입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액수도 제법 큰 돈을 받았고 받은 돈 중에 일부는 함께 레시피를 완성한 마사에게도 나눠주었다.
돌턴골드 상단이 소유한 고급 음식점과 호텔에서 치킨의 판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엄청난 호평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입소문을 타고 번진 치킨의 맛이 왕도를 사로잡았고 치킨을 판매하는 고급 식당에 줄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장사가 잘됐는지 돌턴골드 상단주가 굉장한 고가의 감사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인가? 절대 아니다. 이제 겨우 오리지널 프라이드치킨을 완성했을 뿐이다. 나의 뇌에는 아직 수많은 치킨의 맛이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음식들도 남아있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바뀌고 드디어 새 저택이 완성되었다. 그날 하루는 스승님의 재량으로 훈련도 쉬고 모두 이사를 도운 후 작은 파티를 열었다.
모두가 즐겁게 웃고 떠드는 광경을 보며 이제 아주 조금은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터야 이 광경을 기억해라.”
손에 와인 한잔을 들고 옆으로 다가온 스승님이 말했다.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행복과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아니 평생 공작가 기사로서 강자로 살아오신 분이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더 잘 알 걸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새로 지은 저택에는 여러 가지 편의장치도 잔뜩 구입해서 넣었다. 슬라이트가 그렇게 원했던 냉장고도 있었고 가구도 제법 고급으로 채워 넣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지하 2층에 개인 연무장을 가장한 보안이 되는 장소가 생겼다는 것이다. 비싼 마법 잠금장치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3중으로 자물쇠를 채워서 내가 들어가서 잠그면 문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
전에도 지구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제법 눈치를 봐야만 했었다. 이제 저녁마다 마음 놓고 지구를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전에 지구로 넘어가 심법을 수련하고 심어둔 토끼꼬리 풀의 성장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하루 일과나 다름없었다.
심법을 수련을 마친 후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과연 이 밖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물론 인간은 멸망했으니 다른 사람을 만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번에 만난 곰처럼 어쩌면 다른 생물이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얼마나 많은 변이체가 남아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힘을 보존하고 있을지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도플갱어의 힘을 전승받으며 확신했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은 생물 혹은 변이체의 시체에서 능력을 흡수한다.
가장 쉽게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면 다른 생존자들의 시체다. 물론 내 시체처럼 미라처럼 보존되어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외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하 방공호라던가 그런 곳에는 충분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지하 방공호라는 것도 그렇게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서울 강남에 많은 방공호가 있었지만, 변이체들은 그것들을 우습게 파괴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존자라면 두 번째는 누구였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미국이나 그런 곳에 몇십년은 버틸 수 있는 깊은 방공호가 있었다고 하는데 거기일까? 아니면 나처럼 도망치는 것에 특화된 능력을 갖춘 생존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생각을 하던 중에 만약 이곳을 벗어나게 된다면 처음으로 가게 될 장소를 생각했다. 내가 이곳 기상연구소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소속되었던 쉘터가 있던 곳, 가장 가까운 도시인 태백시이다.
태백시에 자리 잡고 있었던 변이체를 우리는 미친개라고 불렀었다. 개와 비슷한 모습의 변이체다. 개와 비슷한 만큼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아서 한번 냄새 맡은 사냥감을 엄청난 속도로 집요하게 추적했었다.
진화를 거듭한 녀석은 인간으로서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다른 대도시의 변이체와 비교해보면 그렇게 강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일단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미 그때만 해도 변이체들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던 시점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미친개라···.”
녀석이 단단히 방비 되어 있던 태백시의 쉘터를 공격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나와 함께 모여있었던 생존자는 모두 7명이었다. 이미 대격변 후의 아수라장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노련한 생존자들이었다.
그중에는 나처럼 회피에 특화된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었고 전투계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런 노련한 생존자들이 철저히 준비한 시설을 녀석은 종잇장처럼 뜯고 들어와 구석에 생존자들을 몰아넣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이 한명 한명 꺼내 먹었다.
내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생존자의 희생도 있었지만, 천운에 가까웠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미친개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금 상태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한단계 경지를 올려 5성이 된다면 상대할 수 있을까?
미친개가 그때보다 얼마나 약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만났던 도플갱어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해볼 만할 것도 같았다. 머릿속에서 녀석과 싸우는 상상 속의 전투를 해본다.
5성 기사가 된 나와 약해진 미친개의 싸움의 시뮬레이션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나는 그 싸움에서 수없이 죽었고 몇번은 이기기도 했다. 그리고 점점 이기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설마 그게 온 건가?’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아 연공을 시작했다. 얼마 전 스승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넌 이미 오러의 양은 4성 기사의 끝에 다다랐다. 운용 방법은 조금 모자란 것 같지만, 그것은 내 기준에서 그런 것이겠지. 단지 깨달음의 문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는 네 힘을 전부 사용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게 네 성장을 막고 있다.”
그런가? 수십 년을 도망만 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도망칠 여지를 만들어 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변이체와 싸우게 된다면 내 모든 힘을 다 쓰지 않고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세워두고 있던 벽이 치킨의 튀김옷처럼 바사삭 부서지며 오러홀에 하나의 별이 더 탄생하였다. 주변에 강렬한 마나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