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35화 (35/206)

35. 광검제의 검술

정신을 차린 것은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녘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벽이 허물어져 있었고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오래됐다고 해도 철근 콘트리트로 지어진 건물의 벽이 무너지다니 슬라이트가 5성에 오를 때 바로 옆에 있었지만, 생각보다 금방 끝났고 마나 폭풍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확실히 내가 뭔가 다르긴 다른 것 같았다. 대체 이 지구의 마나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나와 다르게 진짜 천재인 슬라이트를 데려다 이곳에서 수련시키면 무시무시한 괴물이 탄생하는 것 아닐까? 아니면 스승님을 이곳에 데리고 온다면 평생 숙원이셨던 7성의 벽을 넘으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스승님과 슬라이트를 믿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단 달라진 점을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일단 초감각의 영역이 확실히 더 늘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감각만으로는 훨씬 더 발전한 것 같기는 하다.

5성의 벽을 깨며 오러홀도 커졌다. 기존의 거의 세배는 되는 것 같다. 이러니 4성 기사 둘이 덤벼도 5성 기사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거다.

검을 뽑아 오러를 넣어보니 이것도 훨씬 자연스럽다. 출력 자체가 더 쉽고 강해졌다. 밖으로 나가 잠시 이리저리 움직여 보니 운동 능력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런데 이것은 스승님의 기초 훈련 덕분인지 아니면 경지가 오르면서 증가한 것인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뭐 시너지 효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 예전의 올림픽에 나간다면 슬렁슬렁 움직여도 금메달 20개 정도는 딸 수 있을 텐데 환생도 한번 해줬으니 다음엔 회귀가 어떤지 누군가에게 제의하고 싶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그럼 대격변을 한 번 더 겪어야 하니 그것은 사절이다.

이런저런 점검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오니 확실히 감각이 늘어난 것이 느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제이시가 느껴진다. 폴켄은 쿨쿨 자고 있었고 꼬꼬들도 닭 주제에 새벽에 울 생각도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똘똘이는 스승님의 방에서 누워있다가 방금 일어났다. 스승님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스승님이 검을 챙기고 곧바로 나를 향해 오고 계셨다. 자던 중에도 갑자기 나타난 나를 느끼신 것이다. 검을 챙긴 것을 보니 내가 아니라 침입자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슬라이트 놈은 5성 기사라는 놈이 전혀 모른 채 꿀잠을 자고 있었다.

수련실의 3중 잠금장치를 열고 재빨리 지하 1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스승님과 마주쳤다. 나를 보자마자 스승님의 눈이 눈 건강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크게 떠졌다.

“너?”

“밤사이 성과가 있었습니다.”

꾸벅 인사를 올렸다. 깨달음이 있었던 것은 분명히 스승님의 도움이 컸으니까.

“믿을 수가 없구나.”

“스승님의 덕분입니다.”

“아니 이건 그런 수준을 넘어선 것이지. 네가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스승님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집에도 편지를 한 번 더 써야겠다. 새로운 집도 완공되었고 이제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도 될 것 같았다. 멍청한 형이 왕도를 처음 보고 바보처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덕분에 그날 하루는 또 작은 파티가 열렸다. 치킨을 잔뜩 튀겨놓고 즐기는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소소한 행복이었다.

왕도에 또 하나의 소문이 돌았다. 이제는 철권단의 아지트처럼 알려진 내 집에는 특별한 수련법이 있다고 말이다.

16살에 5성 기사에 오른 슬라이트에 이어 15살에 5성에 오른 또 한명의 천재에 대한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왕도에 퍼졌다. 그런 천재들을 키워낸 곳이니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식을 가진 많은 귀족의 문의가 들어왔지만 모두 정중하게 거절했다. 덕분에 한동안 집사가 답장을 쓰느라 매우 바빴다.

경지가 오른 후 드디어 슬라이트와 다시 대련을 시작했다. 여전히 기술에서는 밀리지만, 오히려 오러의 힘은 같은 4성일 때도 내가 우위에 있었는데 이제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졌다. 그리고 육체적인 힘도 마찬가지였다. 재생력 덕분인지 스승님의 훈련으로 육체가 단련되는 속도가 달랐다.

슬라이트가 각종 기술을 사용해도 그것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양상의 대련이 되었다. 이제는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괴물 같은 놈”

대련에 패배한 슬라이트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남이 볼 땐 너도 괴물이야.”

내가 볼 때도 충분히 괴물이다. 우리의 대련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스승님이 나섰다.

“슬라이트 도련님의 기술이나 대처는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빅터의 강한 힘을 너무 의식하고 움츠리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십시오.”

“조언 감사합니다.”

슬라이트가 조언을 듣고 멀리 떨어져서 뭔가 고심하기 시작했다. 저 괴물 같은 천재 놈은 분명히 다음번에는 지적받은 단점을 고쳐서 올 것이다.

“빅터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너의 검술은 분명 좋은 검술이긴 하지만 깊이가 없다.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겠지?”

“네, 슬라이트가 여러 가지 검술의 초입부만 모아놓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다. 너 광검제를 알고 있느냐?”

모를 리가 있나. 그 광검제가 사용하던 신검 중 하나인 슈바르거트를 내가 가지고 있는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 너의 검술은 광검제의 검술과 매우 닮아있다.”

“광검제의 검술은 전승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광검제가 정확히 어떤 검술을 사용했는지도 내가 읽었던 책에는 나와있지 않을뿐더러 후손이나 제자도 없었기에 당연히 광검제의 검술은 남아있지 않은 줄 알고 있었다.

“광검제 본인이 쓰던 검술은 그렇지. 그런데 광검제는 의외로 검술을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던 분이다. 그분은 여러 가문에 직접 만든 검술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 검술을 가전 검술로 사용하는 가문이 아직도 남아있지. 그 가문들의 검술과 네가 쓰는 검술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것은 몰랐던 사실이다. 그럼 더욱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김경식은 분명히 지구의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너에게 그 검술을 가르친 사람은 별말이 없었느냐?”

“예,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라고?”

“김경식이라고 했었습니다.”

굳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스승님은 김경식이라는 이름을 듣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람들은 광검제에게 제자가 없다고 알고 있지만 광검제가 두 번째 마왕의 강림을 막아내기 직전에 가르치던 일곱 명이 있었다고 한다. 정식 제자로 인정하진 않았기에 제자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때 그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특이했다고 하는데 키무견시크라는 이름도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발음의 이름이니 그때 그 사람들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얘기가 복잡해지는데? 그럼 그 일곱명의 알려지지 않은 제자들이 지구로 넘어왔다는 얘기다. 나처럼 통로를 여는 기술이라도 가지고 있던 것일까?

“그런데 저는 책에서 그런 얘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숨겨진 비사인 건가요?”

“네가 어떤 책을 봤는지는 몰라도 나는 왕실에 소장되어 있던 역사서를 본 것이니 내가 더 정확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일곱 명의 사람들은 2차 마왕의 강림을 막아낸 후 어디에서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잊힌 것이지.”

확실히 내가 읽었던 책들이 좋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변경백의 서재에 있던 책들은 당시에는 나에게 유일한 지식의 창고였지만 양질의 도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광검제의 지도를 받았다면 그 사람들도 대단한 기사였을 텐데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건가요?”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진전이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너에게 이어진 모양이다.”

결국 풀 수 없는 수수께끼만이 남았다. 정말 김경식은 아노더스에서 광검제에게 검을 배운 사람들의 후손이었을까?

“검술의 맥으로만 보면 대단한 것을 배운 것이지만 깊이가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지금 그 검술을 네가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야.”

할 수 있을까? 나는 슬라이트처럼 천재가 아니다. 그런데 슬라이트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위인이었던 광검제가 만든 검술을 내가 이어서 발전시키라고? 지금으로선 대단히 회의적인 생각만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스승님이 읽었는지 호통을 쳤다.

“이놈! 누가 너더러 당장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평생 갈고 닦아도 할 수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일단은 내가 배우고 발전시킨 검을 배우도록 해라.”

“예!”

여전히 육체 강화에 힘을 쓰며 스승님의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배우는 스승님의 검술은 확실히 깊이가 있었다. 스승님이 직접 창안하신 검술로 아직 이름이랄 것도 없지만 익힐수록 확실히 상급의 검술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스승님의 검술은 보통의 다른 검술들처럼 확실한 상대를 두고 만든 것이 아니다. 일종의 임기응변을 극대화한 검술로 형식을 최소화하고 검 한번을 휘두를 때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덤으로 은근슬쩍 옆에서 슬라이트도 배우고 있었지만, 그 천재 슬라이트조차 쉽게 익히기 어려워할 정도로 어려운 검술이었지만 그것은 완성되었을 때 그만한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련님은 아직 이 검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언제 한번 다 같이 실전경험을 하러 가시죠.”

슬라이트가 스승님의 검술을 배우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실전이었다. 나는 오히려 반대였다.

“빅터 너는 검술에 살기가 너무 짙다. 네 나이에 왜 그런 성향이 나오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검술이란 것은 무조건 상대를 죽이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검술의 목적이 뭔가를 죽이기만 위해서라면 여러 가지 검식을 배울 필요가 없어, 그냥 단순하게 가장 빠르고 강력한 찌르기 하나만 배워도 된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가장 빠르고 강력한 찌르기를 익히고 싶다. 나는 보통의 상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변이체를 상대하려면 좀 더 강력하고 좀 더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그런 위력을 가진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내 마음을 스승님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스승님의 지도 방향과 조금 어긋난 것은 있지만 확실하게 나는 매일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철권단의 기숙사가 완공되었다. 기숙사가 완공되자 철권단은 전원이 기숙사에 들어오는 것을 택했다. 집도 그리 멀지 않으니 출퇴근을 해도 되겠지만 그들에게 집은 여전히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스승님은 첫날 철권단을 살펴본 뒤 나와 둘만 있을 때 조용히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저 아이들을 내가 모두 살펴보았는데 둘 정도는 가능성이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나머지는 나도 자신이 없구나, 특히 아직 오러홀을 깨우지 못한 두 명은 재능이 조금도 없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어려울 것이야.”

“왕도의 모두가 무능하다고 놀렸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포기했던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얻고 매일 피를 토하도록 훈련하면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불꽃을 태우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저도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써먹기 좋고 곁에 두면 여러 가문의 위세를 빌려 쓰기 좋은 도구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명 한명 사연을 알아가고 그들이 노력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부숴버리는 순간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도 신경을 써보마.”

내 이야기를 들은 스승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철권단에게 지옥 훈련 이상의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철권단도 발전했다. 일단 혹독한 육체적 훈련을 받은 탓에 모두 단단한 근육질의 사내들이 되었으며 잘못된 자세나 수련법을 스승님이 고쳐주면서 기본적인 실력도 모두 상승했다.

다만 오러의 경지는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는데 드디어 그것을 해결할 때가 왔다.

내가 아노더스에서 화분에 심어놓은 토끼꼬리 풀은 모두 싹을 틔우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다. 열매에 빼곡하게 달린 하얀 토끼털처럼 생긴 것들이 씨앗이므로 그것들은 따로 잘 모아두었다. 이것들을 기르는데 들어간 마석값을 생각하면 명백하게 손해이지만 한 그루도 죽지 않고 잘 자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했던 것은 지구에 뿌려둔 씨앗들이었는데 내가 지구에 뿌렸던 씨앗은 정확하게 53개였다. 그중 절반 정도인 24그루가 싹을 틔워서 죽지 않고 열매를 맺은 것은 15그루였다.

하지만 역시 지구에서 자라난 토끼꼬리 풀은 토끼털같은 씨앗이 전혀 달려있지 않았다. 대신 아노더스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열매의 크기가 두배가 넘었다.

드디어 오늘은 지구에서 수확한 토끼꼬리 풀의 열매를 먹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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