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달라진 위상
“으아아아!”
“사람 살려!”
다리가 느린 몇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폭풍의 영향권을 피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막 1성에 오른 두 사람은 이번에 1성에 오르지 못했다면 정말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나 폭풍은 일정 크기가 되자 옆으로 계속 커지지 않고 거대한 회오리가 되어 위로 솟구쳤다. 100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마나의 회오리가 왕도의 하늘을 꿰뚫는 모습은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매끈하게 깔아놓았던 연무장의 돌바닥이 산산이 조각나서 하늘로 솟구치고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철권단의 기숙사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덤으로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옛날 저택도 워낙 낡았던 때문인지 견디지 못하고 구석부터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새로 지은 저택과 닭장이 폭풍의 영향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매일 스승님을 껌딱지처럼 붙어서 따라다니던 똘똘이도 오늘은 웬일인지 꼬꼬들에게 붙어있었다. 기가 막히게 감이 좋은 녀석이다.
하늘로 솟구치는 기숙사의 지붕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내 돈’
뭐 스승님이 7성에 오른 축하금이라고 생각하자. 그런 식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옆에서 이 엄청난 광경을 넋을 잃고 보고 있는 슬라이트를 보았다.
7성에 오르는 것이 이 정도면 저 녀석의 아버지인 공작이 8성에 오를 때는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거의 자연재해 수준 아니었을까? 궁금하니까 물어보자.
“공작님이 8성에 오를 때는 어느 정도였는지 알고 있냐?”
“글쎄, 내가 태어나기 전 일이라서 큰형에게 듣기만 했는데 다행히도 인적이 없는 야산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들었다. 산봉우리 하나가 사라졌다고 하더군.”
진짜 자연재해 수준이구나. 반동이 다른 사람보다 큰 것이 확실한 내가 7성이나 8성에 오를 땐 잽싸게 지구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마나의 파동이 전해져와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당연하게도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왕국에 셋밖에 없던 7성 이상의 기사가 넷이 되었다. 이것은 대형 사건이다.
저 엄청난 마나의 파동을 숨길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종을 울리며 치안대의 마동차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지난번 사건으로 싹 물갈이가 된 이후로 제대로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어서 경비대로 시작해 철권단의 부모님들을 비롯한 인근 귀족 가문들 그리고 마탑에서도 몇 명이 왔고 급기야는 왕실에서 근위 기사단이 출동했다.
순식간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집주변이 바글바글해졌고 그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특히 내 주위에는 수십명이 몰려들어서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슬라이트와 철권단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저기 다들 진정하시고 천천히 질문하시면 모두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달래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차라리 왕세자라도 다시 와서 교통정리를 해줬으면 하고 있을 때 우리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났다.
“애들을 몰아세워서 뭘 어쩌자는건가!”
귀가 먹먹하도록 쩌렁쩌렁한 호통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이 인파를 반으로 가르며 에인프라흐 공작이 나타났다. 이미 반지를 빼고 왔는지 8성 기사가 내뿜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주변의 공기를 내리눌렀다.
“거기! 뭘 하고 있는 건가? 현장 통제를 해야지 애들을 붙잡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이어지는 공작의 호통에 나와 철권단의 주변이 몰려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비대와 치안대는 군중 통제를 하고 근위 기사단은 안쪽의 경계를 부탁합니다.”
이어서 공작가의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슬라이트가 공작을 보고 반색하며 아이처럼 달려왔다. 사실 16살이면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나이다. 공작이 그런 슬라이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예, 잘 지냈습니다.”
에인프라흐 공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자네 소식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오랜만인 것 같지 않군.”
공작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형제단이 사방에 깔려있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내 사람을 데려다가 아주 재밌는 일을 벌였어.”
공작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뭔가 또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님은 이미 은퇴하셨으니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힘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그것은 확실하다. 왕국에 있는 7성 이상의 기사는 세 명이다. 왕실에 한 명, 북방에 한 명 그리고 에인프라흐 공작이었다.
여기에 스승님이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사람으로 들어가면 아무리 왕실에 우호적인 에인프라흐 공작가라고 할지라도 왕실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
지난번 왕세자를 만나며 확실히 느꼈다. 왕실에서도 공작가를 우호적인 존재로 인식하고는 있지만 완전한 자기 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지. 노엘은 확실히 이제 내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어.”
에인프라흐 공작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곧바로 말을 바로 잡았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 일부러 들으라고 나를 이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역시 늙은 너구리 같은 영감이다.
“언제까지 나를 밖에 세워둘 참인가? 손님 대접이 박하군.”
이것은 공작의 배려나 다름없었다. 나는 서둘러 철권단을 불러 모아 에인프라흐 공작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에는 다행스럽게도 집사가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잘 다스렸는지 고용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나 크게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대처를 잘하셨군요. 손님이 오셨으니 간단한 다과를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철권단은 편하게 쉴 수 있게 따로 방을 내주었고 집사에게 다과를 부탁한 후 공작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에인프라흐 공작은 자리에 앉자마자 설명을 요구했다. 이미 어느 정도 다 알고 왔을 텐데 참으로 뻔뻔한 행동이었지만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옆에 앉은 슬라이트가 조잘조잘 알아서 잘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들으신 대로 대충 그렇게 된 일입니다.”
별거 아닌 영약 한 알씩 나누어 먹은 이야기를 대모험처럼 그린 슬라이트의 설명이 끝난 후 나는 한마디만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 맛없는 영약은 남은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여분이 있었다고 해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설마 스승님의 경지가 오를 줄은 몰랐다.
왕국에 정체되어버린 6성 기사가 몇 명이나 되던가? 아주 많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숫자도 아니다. 혹은 7성에 정체되어버린 왕의 검으로 불리는 지글러 아인워드 후작이라거나 북부의 호랑이라 불리는 올라프 에르하트 후작 같은 사람들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또 만들 방법은 있는가?”
“시도는 해보겠지만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영약에 관련된 질문을 하고 있지만 에인프라흐 공작은 의외로 영약에 큰 집착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확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자네는 이제 왕국의 주요 인사가 된 것일세”
“그렇겠지요?”
“자네가 그 영약을 계속 제조할 수 있다고 할 때 자네가 적국에 넘어간다고 생각해보게 그것은 재앙일세.”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나라의 국력을 쥐고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반대로 적국의 입장에서는 자네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대상이지.”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스승님이 승급하고 나면 이 저택에 7성 기사 하나와 5성 기사 둘이 있다. 근위 기사단이라도 몰려오지 않는다면 막아낼 수 있는 전력이다.
“쉽게 죽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여차하면 지구로 도망가면 된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내가 사채업자 두목들을 처리할 때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을 사용하는 암살자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자네가 그것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이제는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힘의 균형 때문입니까?”
“그렇지 역시 똑똑하구만, 우리 왕국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 것이지 하지만 그 힘이 지나치면 외부에서 적을 찾게 된다네”
나는 왕국 내부의 권력투쟁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지만 공작은 더 넓은 시야로 보고 있었다. 전쟁을 걱정하고 있던 것이다. 나도 전쟁은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떼로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당장 내가 영약을 계속 만들어서 6성 기사들에게 복용시켜 7성 기사가 잔뜩 생겨난다면 분명히 전쟁을 말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이해했습니다. 고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마음으로는 공작과 뜻이 같지만, 확답은 하지 않았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데 스승님은 언제쯤 깨어나실 것 같습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네. 내가 7성에 오를 때는 이틀 정도가 걸렸고 북쪽의 애송이는 일주일이 걸렸지, 왕실의 그 사람은 하루도 걸리지 않았네. 개인차가 너무 커”
“그렇군요.”
다행히도 밖에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내가 직접 나가 일을 해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았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같이 집에 있는 바람에 귀찮은 날파리들이 감히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지만 그래도 간혹 제법 큰 파리들이 문을 두드리는 것을 제외하면 빠르게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끝나가는군”
3일 동안 함께 집에서 머물며 후라이드 치킨과 아직 출시되지 않은 양념치킨을 마음껏 즐기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공작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마나의 파동이 서서히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슬슬 나가봐야 할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지.”
에인프라흐 공작을 앞세워서 우리는 3일 만에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지나며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떠나고 몰려들었던 인파는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한적해졌군.”
“어차피 스승님이 깨어나시면 다시 몰려올 테 지요.”
이미 왕실에서 사람이 나와 스승님이 깨어나자마자 왕실로 와야 한다고 호출을 예약한 상태였다. 그 외에 몇몇 대귀족의 연락이 있었고 심지어 내무대신에게서도 연락이 왔었다.
지금 내무대신에게 모자란 것이 무력이니 소속이 없는 스승님이 탐이 날 것이다. 물론 스승님이 내무대신 쪽으로 붙을 일은 없을 것이지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제안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서서히 폭풍이 걷히고 여전히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앉아있는 스승님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스승님께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이 나서긴 했으나 그것은 공작이 중간에서 막아주었다. 덕분에 오직 나만이 스승님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스승님의 모습이 점점 더 확실히 보인다. 일단 젊어지셨다. 흰 머리와 수염은 그대로지만 풍채도 조금 더 좋아지신 것 같고 얼굴에 남아있던 주름이 사라진 것이 보인다. 환골탈태? 반로환동? 무협지에서 봤던 단어들이 몇 개 떠올랐지만, 그것과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가장 달라진 점은 역시 풍기는 기세다. 6성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이 자연스럽게 뿜어지고 있었다. 공작이 차고 다니는 그 반지를 하나 구해드려야 할 것 같다.
마침내 마나의 파동이 완전히 잦아들고 나는 스승님의 곁에 섰다. 그리고 스승님이 눈을 뜨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제자를 잘 둔 덕분에 내가 평생의 숙원을 풀었구나.”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하는 스승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조금 젊어진 얼굴의 스승님이지만 변함없는 온화한 미소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와아아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철권단이 환호를 지르고 주위를 둘러싸고 호위하고 있던 근위 기사단과 치안대 그리고 경비대도 일제히 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우고 새로운 7성 기사의 탄생에 경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