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그라운드 제로
“들라 하십니다.”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고 공주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내가 잠깐 묵었던 방에 비하면 몇십배는 크고 화려했다.
내가 묵었던 방을 보고 품었던 왕궁이 생각보다 검소하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방 저편에 작은 탁자를 두고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한명은 스승님이었고 다른 한명은 굳이 누가 설명해줄 필요도 없었다. 라이브러쉬 왕국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었다.
국왕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했다. 그냥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전에 왕세자를 보고 생각했던 왕족은 모두 성형 포션을 사용한다고 했던 소문을 얼굴로 부정하고 있었다.
풍기는 기세도 전에 봤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왕세자는 나는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는데 국왕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나를 데리러 왔던 공주도 외모가 아름다운 편이었는데 이 정도면 친자확인 검사를 해봐야 하는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제자를 보니 참으로 헌앙하군.”
“저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제자입니다만 아직 부족합니다.”
국왕과 스승님의 대화가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다행히도 어려서 예법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크게 잘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바로는 국왕을 접견하기 전에 예법 교육을 따로 몇시간씩 받는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국왕이 예법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모양이다.
“일어나 가까이 오라.”
고개를 드니 어느새 공주는 국왕의 뒤에 가서 있었다. 일어나 국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국왕의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을 때 방 안에 있던 호위 기사들에게서 강한 기세가 느껴졌다.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말라는 신호다.
슬쩍 스승님과 눈을 마주치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스승님은 믿어도 나를 믿지는 못한다는 건가? 위험도로만 따지면 스승님이 몇백 배는 더 위험할텐데?
“노엘 경과 자네 때문에 벌어진 다툼에 대해선 알고 있는가?”
“제가 들은 이야기가 제대로 된 정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충 듣기는 했습니다.”
“잘 됐군. 소문과 크게 다른 이야기는 아닐 것이야.”
일부러 소문을 흘린 건가? 그런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왕실은 과연 어떤 큰 그림을 그린 것일까?
“노엘 경과 자네 때문에 내가 며칠 동안 고생이 많았다.”
“송구합니다.”
이럴 땐 그냥 죄송하다고 하면 된다. 옆에서 스승님이 웃고 계신 것을 보면 나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닌것 같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노엘 경에게 백작위를 내리려고 한다.”
결국 백작인가 아무래도 후작을 주기엔 반발이 거셌던 모양이다. 반대했던 귀족들은 괘씸하지만, 왕실의 결정은 이해한다.
“그리고 영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아.”
그것까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인가? 잘하면 내 계획대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후보가 된 곳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용기를 내서 말했다. 아무리 소탈해 보이는 국왕이라고 해도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귀족들은 아카서스 영지와 팔테라마 영지를 추천했네”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이놈의 땅덩어리가 얼마나 큰지 영지가 워낙 많아서 바로바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카서스 영지는 북서쪽 경계에 위치한 곳이고 팔테라마 영지는 동북쪽에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변경 중의 변경, 즉 변경백이 되라는 것이다.
“대신들은 아이멜슈라트 영지를 추천했고”
아이멜슈라트면 왕도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이다. 거긴 일반 영지도 아니고 왕실 직할령으로 알고 있다. 즉 왕실 사람으로 두지는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대우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나온 곳이 카라커스 영지와 암테일 영지다.”
나는 암테일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위치상으로는 두 곳 모두 참으로 애매한 위치다. 카라커스는 왕도에서 서쪽이었고 암테일은 동쪽이라는 것이 다를 뿐, 왕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것이 단순하게 왕도에서 거리만 가지고 절충안이 나왔다는 것이 좀 우습긴 하지만 원래 정치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두 영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아주 옛날에 작성된 죽은 정보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간략한 요약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정보에 의하면 두 영지는 꽤 큰 차이가 있다.
카라커스 영지는 꽤 부유한 곳으로 알고 있다. 생산 능력이 좋은 땅이 있으며 특산품도 여러 가지 존재한다. 반대로 암테일 영지는 그냥 평범한 영지다. 영지의 크기도 카라커스 영지가 더 큰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카라커스를 선택해야 하는데 왜 이런 선택지가 나왔을까?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려고 한다. 어차피 네가 물려받을 곳이 아니냐?”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이미 내가 물려받는 것으로 확정된 건가?
“두 영지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왕실의 대리인이 관리하고 있다.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다고 하더구나.”
“영지의 수입은 카라커스쪽이 훨씬 좋겠지요?”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냐?”
“노블레시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자가 없다면 더더욱 카라커스 영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저는 암테일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응? 카라커스가 더 좋은 영지라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그렇지요. 그렇기에 암테일을 선택했습니다.”
의외의 선택이었는지 스승님과 국왕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생겨난 느낌이었다. 덤으로 국왕의 뒤에 서 있는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그 절충안도 결국은 귀족들의 입김이 들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뻔한 답이 나왔다는 것은 그곳을 유도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휘둘리기 싫다고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두 영지의 차이가 크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암테일 영지를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암테일 영지가 그리 나쁜 땅은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냥 평범한 영지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구나.”
“평범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관리하기 쉽다는 뜻도 됩니다. 스승님은 돈이 필요하십니까?”
스승님은 필요한 것이 사실 분이다. 재물에는 원래 초탈한 분이었고 명예는 7성에 올라선 순간 충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삶의 목표도 벽을 넘어 7성에 도달하는 것이었으니 이미 모든 것을 이룬 분이다.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자주 영지에 내려가서 관리하실 건가요?”
“너와 함께 이사를 한다면 모를까. 나도 다른 귀족들처럼 대리인을 파견하겠지.”
“그렇기에 암테일 영지가 더 낫습니다. 크게 신경 쓰기 싫거든요. 저 역시 큰돈이 필요하지 않고 원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벌 자신이 있습니다.”
스승님과 나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국왕이 끼어들었다.
“정말로 단지 그 이유뿐인가?”
“폐하,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영지 관리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동네 아저씨 같던 국왕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흉포하고 거칠다. 마치 늙은 야수를 앞에 둔 느낌이었다. 역시 이 사람도 뭔가 알고 있던 건가?
내가 암테일 영지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제국의 유산인 던전이다. 내가 사채업자들을 처리하며 입수했던 제국 말기의 장부를 살펴본 결과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지만 대략 어느 지역 부근인지는 유추할 수 있는 정도였다.
총 7개의 던전은 라이브러쉬 왕국에 4개 그리고 국경 지대에 1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왕국인 제멜아크 왕국에 2개가 있었다.
라이브러쉬 왕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4개의 던전 중 하나는 멤파이 자작가에서 찾은 그것이다. 그곳에서 나온 스트라이더 997번은 내 수중에 있다.
남은 3개의 던전 위치를 대략 추정해보면 하나는 왕실의 직할령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에인프라흐 공작령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왕실이나 공작가에서 제국의 유산을 찾아냈다는 소문이나 기록은 없지만 나는 이 두 개의 던전이 이미 발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암테일 영지 부근에 있다. 정확히 암테일 영지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근의 다른 영지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 근처인 것은 확실하다.
암테일 영지 내에 던전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할까? 영지의 주인이 다름 아닌 스승님이다. 근처의 영주들이 누군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왕도 부근이 아닌 이상 지방 영주의 전력이야 뻔하다. 비난을 조금 감수하더라도 7성 기사가 마음먹고 영지전을 건다면 영토 조금 빼앗는 것이야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래서 귀족들이 죽어라 변방으로 내몰려 했던 것이기도 하다.
에인프라흐 공작가도 그런 식으로 영토를 늘렸으니까.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다. 물론 당장 던전을 찾아낸다고 공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단 확보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내 것이 될 확률이 높다.
“흠, 그렇단 말이지?”
국왕의 분위기가 다시 변했다. 아마 왕실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암테일 영지를 후보로 내놓은 것을 보면 확신은 없는 듯 하다.
“좋다. 짐도 그대들이 왕도에 계속 머물기를 원했노라.”
그거야 그렇겠지. 왕실 직속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왕실에 우호적인 7성 기사가 왕도에 머문다는 것은 그만큼 왕실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다만 지금 그대들이 살고 있는 곳은 방비가 너무 허술하다.”
7성 기사가 살고 있는 곳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말은 좀 그렇지만 특작대를 직접 본 이상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타국의 특수부대가 나를 노리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래서 짐이 대신들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을 나누어 답을 내었다.”
부디 이상한 짓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승님을 슬쩍 보니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다. 그런데 국왕의 뒤에 있는 공주의 눈빛이 수상하다.
순간 국왕이 무슨 말을 꺼낼지 알 것 같았다. 왜 공주가 나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을까?
‘설마 부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도 내 짝을 스스로 정할 권리가 있는데.
“지금 그대들이 살고 있는 곳 옆에 공동묘지가 있더군? 그곳에 별궁을 짓기로 했네.”
어? 내 생각이 틀렸나 보다. 그런데 우리 집 옆에 별궁이? 그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수다. 자연스럽게 우리 집까지 왕실의 인력으로 경비가 될 것이고 땅값도 많이 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단 혐오시설이 하나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 별궁에 여기 내 딸인 아이브가 한동안 거주할걸세.”
아, 그래서였군. 그럼 자연스럽게 공주가 우리 집을 오가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뭘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귀찮은 일거리를 맡은 공주가 그래서 적의를 가지게 된 건가?
“그리고 이것은 노엘 경과도 상의가 된 것인데, 자네가 만들었다는 그 철권단이라는 단체 말이네.”
“송구합니다. 폐하”
일단 사죄하고 본다. 비록 힘은 미약하지만 철권단은 일종의 사조직이다. 왕실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아니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 몇 명 더 넣어야겠네. 여기 아이브도 포함이네.”
“귀족 측 자제들입니까?”
공주만 받아준다고 하면 당연히 귀족 측에서 반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표로 몇 명 받아준다면 어느 정도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
“소문대로 자네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군? 나중에 정치를 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행이군. 왕세자가 속을 썩일 일은 없겠어.”
국왕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승님이 입을 여셨다.
“최대한 숫자를 줄이고 괜찮은 녀석들로만 내가 추려봤다. 그 결과 공주님을 제외하고 세 명만 받기로 했다.”
“그 세 명이 누구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내무대신의 아들, 마탑주의 후계자, 북부 사령관의 아들이다.”
거기에 슬라이트와 공주까지 포함하면···. 오, 세상에 맙소사 우리 집이 왕국의 차기 권력자들 집합소가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