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맛 좀 볼래?
나쁘지 않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어차피 어떤 방식으로든 왕실과 귀족 파벌의 감시는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오히려 후계자가 아니면 후계에 가까운 인물들을 모아서 한자리에 둔다면 서로 견제도 할 것이고 어떤 세력도 나를 쉽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내가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위기 감지로 변이체를 피하는 것만으로 내가 가장 오래 살아남았을까? 아니다. 나와 비슷하거나 훨씬 더 좋은 이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많았다.
내가 오래 살아남았던 이유는 운도 분명히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계획은 틀릴 수 있고 상황은 항상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거기에 대응하는 유연한 사고방식이 내가 오래 살아남았던 이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자네 그 영약 다시 한번 만들 수 있겠나?”
국왕의 눈에 기대가 가득했다. 역시 올 게 왔다. 이럴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했었다. 민간에 핵무기 제조법이 있는데 국가에서 간섭을 안 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제 기술이 부족하여 같은 효과를 낸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밑에서 워낙 말이 많아서 말이야. 자네가 검증을 좀 해주어야겠네.”
영약의 효과는 당연히 지구에서 기른 토끼꼬리 풀 때문이지만 제조 방법도 내가 작정하고 감춘다고 하면 알아낼 방법이 없지 않겠나? 싶었지만 여긴 지구가 아니다.
지구의 거짓말탐지기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마법 도구가 가득하고 맹약의 스크롤 같은 것을 사용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왕실에서 지구에 대해 알아낸 것이 아니라면 맹약의 스크롤도 두렵지는 않다.
“그럼 나는 일이 바빠서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국왕이 공주와 함께 자리를 뜨고 방에 스승님과 나만이 남게 되었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면 둘만의 시간을 줄 모양이다.
“고생했구나.”
“아닙니다. 스승님이 고생하셨지요.”
우리 사제지간은 잠시 해후를 가졌다. 그리고 국왕 앞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세 명을 뽑은 것은 스승님의 생각이셨습니까?”
“그래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문제가 있겠느냐?”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생각보다는 훨씬 잘된 일이다. 어중이떠중이 여러 명을 받느니 아예 호랑이굴을 만드는 것이 낫다.
“그런데 정말 암테일로 괜찮겠느냐?”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왕도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요. 다만 스승님이 조금 더 고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면제 기간을 최대한 길게 받아야겠습니다. 저희는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구나. 최대한 노력해 보마.”
영지를 새로 하사할 때는 보통 세금에 대한 면제 기간을 준다. 그리고 그 면제 기간에는 영지전이 불가하다. 기반이 없는 새로운 영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짧게는 1년 보통은 2~3년을 주는 것이 관례이나 후계자가 되지 못한 왕족이 영지를 받게 되면 10년 정도를 주기도 한다.
나는 최소한 3년 정도는 받기를 바랐다. 스승님이나 내가 가진 무력을 사용해 오히려 빨리 영지전을 벌여 영토를 늘리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싶기도 하겠지만 당장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다.
그렇지 않아도 경계하는 사람이 가득한데 섣불리 움직여 적을 늘리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나와 스승님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며 조금씩 아군을 늘려가는 방법이 최선이다.
잠시 후 찾아온 시종의 안내를 받아 오늘 하루 스승님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방을 안내받았다. 영약을 만드는 시범은 내일부터 보여주면 된다는 안내도 받았다.
둘이 쓰는 방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처음 배정받았던 방에 비하면 몇 배나 크고 화려한 방이었다. 스승님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너무 차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아직 아무 공적이 없고 작위도 받지 못한 준남작의 차남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안내받은 방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는데 스승님이 무언가를 했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러를 사용해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소리를 차단했다. 공작님이 하는 것을 몇 번 보고 따라 했는데 이제는 나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래 아무래도 왕궁 안에서는 한마디라도 조심해야겠지.”
우직한 기사인 것 같으면서도 스승님은 이런 면이 종종 보였다. 역시 공작가의 기사단장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 암테일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냐?”
“표가 났습니까?”
“네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하기야 정상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암테일 영지 근처에 제국의 유산이 잠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승님은 눈을 크게 뜨일 정도로 놀란 모습이었다. 나는 간략하게 사채업자에게 제국의 장부를 얻은 과정을 설명해드렸다. 다만 이미 얻은 스트라이더 997번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과연, 그런데 그 사채업자 녀석들을 처리한 것이 너였느냐?”
“네, 스승님”
“내무대신이 그 녀석들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절대 찾을 수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아노더스에서는 찾지 못한다. 스승님은 납득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끝내셨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것을 물으셨다.
“너는 폐하를 어떻게 보았느냐?”
“대단히 무서운 분인 것 같습니다.”
나는 솔직히 내 감상을 이야기했다. 아주 잠시 보였던 야수 같은 느낌. 그리고 쉽게 내보이지 않는 심계, 아무리 왕국에 썩은 부분이 많다고 한들 한 나라를 수십년째 통치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네 말이 맞다. 폐하는 그럼 어떤 왕인 것 같으냐?”
어려운 질문이다. 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지금 라이브러쉬 왕국의 운영을 보자면 국왕의 통치방식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것이다. 딱히 성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암군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 같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사실 이렇다 할 업적을 쌓기 어렵기 때문에 국왕에 따라 대규모 공사를 하거나 법을 크게 재정비해서 치적을 만들고는 한다. 그런데 지금 국왕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성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온화한 성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폐하는 패왕의 자질을 타고 나셨다.”
잠깐 야수 같은 기세가 보이긴 했지만, 그 동네 아저씨 같은 국왕이 패왕?
“그렇기에 더욱 무섭고 좋은 임금님이시다. 패왕을 자질을 타고 났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온화한 정치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설마 성격만 가지고 스승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진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다.
“국왕 폐하께선 힘을 숨기고 계신 겁니까?”
“맞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아까 품었던 한 가지 의문이 풀리려고 한다. 아무리 호위 기사가 있었다고 하나 국왕과 스승님이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 두고 그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었는지.
“설마, 스승님보다 높은 경지에 계신 겁니까?”
“그렇다. 많은 사람이 왕국 최고의 무인은 에인프라흐 공작님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가장 강한 분은 국왕 폐하시다.”
“설마 9성입니까?”
이제는 잊힌 지 오래된 초월의 경지. 그것은 모든 무인의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작님이 예전에 국왕 폐하가 더 강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아마도 8성의 끝자락인 모양이다. 아니면 스승님의 이론대로 선천적으로 모자란 무엇이 있거나 깨달음이 모자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냈던 영약에 큰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굳이 자리도 좋지 않은 공동묘지를 밀어버리고 별궁을 지어 공주를 상주하게 하는 강수를 쓴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힘을 가졌지만, 재임 기간 내내 전쟁을 일으키거나 귀족들과 크게 대립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국왕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왕이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중간에서 완충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공작가의 힘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공작가는 왕실을 제외하고 왕국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곳이다.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과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왕실과 귀족들 틈에서 시달리신 이야기와 어떤 생각으로 이번에 뽑힌 3명을 골랐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식사를 마치자 시종이 나를 영약을 만드는 곳으로 안내했다.
스승님과 함께 가는 것인 줄 알았으나 스승님은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 귀족들과 최종협상을 하러 가셔야 한다고 했다.
시종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독사가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의 감찰국장 구테 라이스였다. 예전에 왕세자와 함께 본 적이 있었다. 구테 라이스가 가장 먼저 나서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빅터 하네스 맞나?”
“네, 맞습니다.”
“맹약을 진행할 것이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감정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인간이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응대해주었다. 예상대로 구테 라이스는 맹약의 스크롤을 꺼냈다. 구테 라이스는 군더더기 없이 맹약의 스크롤 사용법과 내가 맹세할 내용을 말했고 나는 그대로 이행했다.
“나는 이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영약을 제조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물론 방법은 똑같을 것이다. 재료가 다를 뿐이지. 맹약을 받은 구테 라이스는 그 이상의 일은 자기와 상관없다는 듯이 바로 떠나갔다.
“그럼 바로 만들도록 하죠.”
굳이 시간을 끌 것도 없었다. 안내를 받은 곳에는 모든 재료와 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히려 내가 썼던 것보다 더욱 양질의 재료들이었고 정제시설도 훨씬 좋은 것이었다.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인 사람들이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왕실 소속 연단술사라네 실례지만 제조법을 지켜보겠네.”
“나는 궁정 마법사···.”
“나는 기록관에 소속된···.”
참 많기도 했다. 거의 20여명이 지켜보는 곳의 가운데에서 나는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간 끌 것 없이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주재료인 토끼꼬리 풀의 열매와 부재료를 다듬기 시작하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읍읍!”
왜 그러나 해서 둘러보니 몇몇 사람이 연단술사라고 소개했던 사람의 입을 막고 있었다. 뭔가 다른 말을 하려고 했나 본데 내가 집중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막은 모양이다.
그리고 정제과정에 들어가자 방해꾼들을 힘으로 이겨내고 연단술사가 마침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니 그걸 왜 거기에!”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는 건가? 나는 그저 책에서 봤던 대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만들었던 과정 그대로 진행할 뿐이었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겁니까?”
“이 사람은 내가 막을테니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게.”
궁정 마법사가 어느새 연단술사에게 마법을 걸어 말을 하지 못하게 해놓고 나에게 손짓했다.
“저는 어차피 맹약을 했기에 지난번과 똑같이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저분에게 배워보려고 합니다. 혹시 다음엔 더 좋은 품질의 약이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연단술사를 풀어주라고 하자 마법사가 한숨을 쉬며 마법을 해제해 주었고 연단술사는 쉬지 않고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연단술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왕실에 소속되어 있을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일 텐데 책만 보고 배운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얼마나 속이 터졌겠는가.
나 같아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를 참지 못했을 것이다.
“아까 재료 준비부터 잘못된 것이네! 왜 라비아타를 생으로 넣나? 그것은 살짝 물에 데쳐야 약성이 최고로 발휘되고···.”
뭐 이런 식이었다. 원래 성격이 좀 불같은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책으로 배울 수 없던 지식들을 실시간 강의처럼 들을 기회였다.
그리고 마침내 약이 완성되었다. 애초에 별다른 기술이 없는 내가 복잡한 과정의 약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약의 숫자도 전과 똑같이 15개를 만들었다.
연단술사는 마치 내가 만든 약의 결과를 알고 있다는 듯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 맛도 예상하는 건가?
“그럼 드셔보시죠. 미리 말씀드리지만 아주 맛이 없습니다. 토하지 않게 주의하세요.”
이곳에 모여있던 구경꾼 중에는 내가 만든 영약을 먹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오러 사용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경지도 아주 구간별로 골고루 모여있었다.
내가 완성된 영약을 건네자 기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치 보물을 하사받는 것처럼 두손으로 받아서 근처에 준비되어있던 각자의 연공실로 들어갔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기사들을 따라가 연공실 앞에서 기사들의 결과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아주 괴로워하는 소리가 연공실의 벽을 뚫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쯧쯧쯧!”
연단술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