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42화 (42/206)

42. 뜻밖의 손님

‘이게 왜?’

기사들의 연공이 끝난 후의 내 생각이었다. 지금 내 손은 방금 승급을 한 5성 기사의 손에 붙잡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4성에서 오래 정체되었다가 방금 5성으로 올라선 기사는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연신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렇다. 내가 만든 거의 아무 효과도 없었을 영약을 먹고 3명이 승급했다. 2성 기사 한 명과 4성 기사 둘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게 그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는 건가?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여기 모인 기사들은 모두 오래 정체되어 있던 사람들이었고 그냥 될 사람이 가짜 약을 먹고 효과를 본 것이다.

그 와중에 약을 먹은 15명 중에 지독한 맛을 이겨내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며 뛰쳐나온 두 기사는 일생의 기회를 잃은 것처럼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연단술사는 아까부터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었다. 평생 쌓아온 지식과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그나저나 일이 복잡하게 됐네’

생각지도 못한 플라시보 효과 때문에 내가 만든 약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아무도 승급하지 못했어야 했다.

감사를 표하는 기사들에게 벗어나자 갑자기 두통이 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 난관을 또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자네 모두 기록했지?”

“걱정 마십시오. 숨 쉬는 횟수까지 기록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마법사가 기록관에게 확인받고 있었고 기사들이 승급하자마자 몇 명은 누군가에게 보고하기 위함인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게 아닌데···.”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연단술사만이 현실을 부정하며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내 손을 떠났다. 만드는 방법과 재료를 모두 알려줬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할 것이다.

스승님의 방으로 돌아온 후 감찰국장의 방문을 한 번 더 받았고 확인 차원에서 맹약의 스크롤을 한 번 더 찢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어제 그 연단술사가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영약을 제조하는 것을 참관했다. 그리고 이어진 실험에서 15명 중 1명이 토했고 나머지 14명 중에서 1명이 승급했다.

“으아아아!”

또 한 번 상식이 파괴되는 현장에 연단술사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내가 제조한 영약으로만 승급이 되었다면 영원히 왕궁에서 빠져나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스승님은 나와 얘기했던 면제 기간을 3년으로 협상을 마치셨다. 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지만,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 3년 후라면 나는 성인이 되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며칠 후 스승님이 정식으로 국왕 폐하에게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고 나서야 우리는 왕궁을 나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깜짝 놀랄만한 일 여러 가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는 그 며칠 사이에 이미 공동묘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으리으리한 별궁이 지어져 있었다.

“저게 무슨 일이에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중을 나온 집사에게 별궁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법사들 수십명이 동원되어 건축을 하더군요. 그렇게 많은 마법사가 동시에 마법을 쓰는 것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돈과 권력이 합쳐지니 정말 못 하는 것이 없구나.

그리고 새로 생긴 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럼 저것도요?”

“네, 저것은 다른 마법사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노엘... 아니 이제 브라스 백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작위를 하사받으신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것 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산산조각났던 연무장과 기숙사가 있던 자리에는 전보다 훨씬 비싸 보이는 돌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연무장과 내 돈을 들여 지은 새 저택보다 훨씬 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기숙사가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보고드려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이번엔 또 뭔가요?”

“옛 저택의 잔해를 치우는 과정에서 지하실이 발견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도 여쭤봤는데 지하실이 있던 것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단단한 철문으로 잠겨있기 일단은 내버려 둔 상태입니다.”

원래 저택의 주인이 비밀금고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놨던 건가? 뭔가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저택을 팔고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크게 기대가 되진 않았다.

“그리고 며칠 전에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권력가의 후계자들이 온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벌써 왔나 보군요?”

“아닙니다.”

왜인지 집사가 빙긋 웃으며 옆으로 비켜서자 문이 열리며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저택 안에서 나타났다.

“빅터!”

“어머니?”

엄마가 거기서 왜 나와? 는 아니고 한참 전에 편지로 내가 자리를 잡았으니 한번 놀러 오라고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에 답장을 받지 못했는데 이런 깜짝 방문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달려가서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이것은 원래의 나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뭐랄까.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몸이 그렇게 자동으로 움직였다.

“잘 지냈지? 얼굴이 반쪽이구나.”

모든 어머니의 눈에는 자식이 조금만 떨어져도 다이어트를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이래 봬도 도축업체 사장이라서 매일 고기를 먹는데 반쪽일 리가 없다.

“잘 지냈어요. 다른 식구들은요?”

내가 말하자마자 안에서 아버지와 형도 걸어 나왔다. 이렇게 식구가 전부 와도 되는 건가? 물론 내가 남겨둔 금괴가 있으니 기찻값은 충분했지 싶은데 크리스타 백작이 잘도 허가를 내주었나 보다. 그런데 그 뒤에 의외의 인물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행정관님?”

나의 옛날 스승 중 한명이자 수도에서 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벤 아르파 행정관과 그 가족이 같이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벤 행정관의 가족도 어려서부터 왕래가 있었기에 모두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먼저 아버지와 형에게 안부를 건네고 벤 행정관에게 인사를 했다.

“행정관님은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아버지와 행정관이 동시에 휴가라니? 아버지는 몰라도 벤 행정관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꾸나. 그보다 저분의 소개를 해드려야겠는데.”

행정관의 말에 나는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노엘 스승님을 발견했다.

“아차! 이분은 제가 새로 모신 스승님인 노엘 브라스 백작님이세요.”

나는 식구들에게 스승님의 소개를 했다.

“못난 아들놈이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게릴 하네스라고 합니다. 백작님”

“당치도 않습니다. 훌륭한 자제를 두신 덕분에 제가 말년에 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노엘 브라스라고 합니다.”

강직한 기사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신분상으로나 실력으로나 큰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와 스승님은 의외로 처음부터 잘 어울렸다.

“이놈아 형님을 봤으면 공손하게 인사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어느새 바보 형 놈이 옆에 와서 옆구리를 찔렀다. 2성 따리 주제에 감히 5성 기사의 옆구리를 찌르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 분명하다.

“형, 왕도에서 기사는 검으로 인사를 하는 좋은 풍습이 있어. 오늘 한번 거하게 인사를 나눠볼까?”

물론 그런 풍습은 없지만 바보 형은 얼굴색이 변하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음, 왕도의 풍습은 존중하지만 나는 변경 사람이라 사양하겠다.”

이미 나와 자신의 차이가 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집에 슬라이트도 있었을 테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슬라이트놈은 나와보지 않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감각을 넓혀서 확인해보니 웬일로 평소에 근처에 가지도 않던 닭장 근처에 있었다. 폴켄도 그곳에 있는 것을 보니 둘이서 뭔가를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인사를 끝내고 집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에 다들 어떻게 단체로 오신 거에요? 아버지는 몰라도 행정관님은요?”

“음, 그게 우리 전부 잘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호계약해지라고 봐야겠구나.”

“네?”

크리스타 백작이 드디어 미친 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벤 행정관이 없으면 영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텐데?

“마리오와 너 사이에 있었던 일이 백작님 귀에 들어갔다. 이후로 백작님과 사이가 좀 소원해졌지, 네 잘못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에인프라흐 공작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계약을 해지하자고 하시더군. 송별금도 아주 두둑하게 챙겨주더구나.”

“아버지는 그렇다고 해도 행정관님은 왜요? 크리스타 백작도 행정관님이 없으면 안된다는 걸 알 텐데요?”

벤 행정관을 머리를 슬쩍 긁으며 대답했다.

“너에게 집을 싸게 판 것을 걸렸다. 뭐 그것은 사소한 문제지만 한번 무너진 신뢰는 언젠가는 크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네 아버지가 떠난다는데 나도 그곳에 남는 게 편치 않아서 내가 먼저 계약을 해지해달라고 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최적의 순간에 아버지와 벤 행정관이 나타났다. 지금 스승님의 영지에 가장 필요한 인재들이다. 경험 많고 강직한 기사와 유능한 행정관 이 둘만 있어도 영지는 어떻게든 굴러가게 되어있다.

나는 스승님이 새로 하사받은 영지에 관해서 설명했다. 스승님도 마침 잘 되었다고 하면서 두 사람에게 부임을 요청했다.

“허허, 한동안 쉬려나 했더니 이렇게 바로 일거리가 생기는군요.”

“좀 쉬다가 가셔도 됩니다. 그리 먼 곳도 아니고 어차피 지금은 왕실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을 테니까요.”

남자 어른들 셋이 금세 죽이 맞아서 시끌벅적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집을 빠져나와 닭장을 향했다. 대체 저기에 무슨 일이 있길래 아까부터 슬라이트와 폴켄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집주인이 왔으면 좀 나와봐야지 아까부터 거기서 뭐 하냐?”

“앗! 오셨어요. 단장님”

“왔냐?”

폴켄은 벌떡 일어나 나에게 인사했으나 슬라이트는 뚱한 얼굴로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닭장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옆으로 다가가서 닭장 안을 보니 별로 다를 것도 없는 평소의 닭장 안의 풍경이었다. 꼬이와 꼬삼이는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똘똘이는 양치기 개도 아닌 닭치기 개가 되려고 하는 것인지 민첩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제는 꽤 커버린 병아리들을 몰고 있었다. 저러다가 한번 콱 쪼여야 쓴맛을 보고 그만둘 것 같은데 여태까지 용케도 쪼이지 않고 병아리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대체 뭘 구경하고 있는 거야?”

“잘 보세요. 단장님”

나는 둘의 옆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서 똘똘이의 닭치기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똘똘이가 요리조리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다가 병아리들이 구석에 몰렸을 때였다.

번쩍!

병아리 한마리에게서 빛이 났다. 똘똘이가 갑자기 터져 나온 빛에 시야를 잃은 순간 병아리들은 틈을 노려 다시 멀리 달아났다.

“끝이야?”

“네, 저게 다예요.”

확실히 신기하긴 하다. 마수도 아니고 빛을 뿜어내는 닭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계속 보고 있는 거야?”

“빛을 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빛을 내는 건 한 마리 뿐이거든요. 다른 아이는 또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확실히 이걸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기는 하다. 특히 마법사 같은 인간들에게 보이기라도 한다면 당장에 해부라도 하려고 하겠지.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원리로 이런 돌연변이가 태어났냐는 것이다. 지구의 마나를 이어받은 2세대에 모두 나타나는 증상일까?

어쩌면 지구의 생존자 중 일부가 이능을 각성했던 것처럼 병아리에게서도 그런 특징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

지구의 마나에 영향을 받은 2세대에게 모두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면 토끼꼬리풀로 만든 영약을 먹은 모두의 2세에게 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영향이 받을 확률이 높은 것은 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고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걸 봤나?”

“아뇨 제가 발견하자마자 부단장님에게 알려드렸어요.”

그나마 본 사람이 적은 것이 다행이다. 슬라이트를 믿을 수는 없지만 말해봐야 에인프라흐 공작이겠지 마구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병아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 어디로 옮기지?”

“그냥 똘똘이만 꺼내면 되는 거 아니냐?”

가만히 있던 슬라이트가 한마디를 뱉었다. 똘똘이만 없으면 병아리들이 궁지에 몰릴 일이 없으니 빛을 뿜어내지 않을 것이고 그럼 해결되는 셈인가?

“똘똘이 너 나와.”

먕!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이 녀석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닭치기 놀이를 하고 있던 똘똘이가 내 명령에 바로 그만두고 닭장의 울타리 밑으로 기어서 빠져나왔다. 아직 작으니까 가능한 방법이긴 한데 다시는 못 들어가게 막아놔야 할 것 같았다.

“너 닭장 출입 금지.”

내 말에 똘똘이의 쫑긋 서 있던 귀가 아래로 쳐졌다. 뭐지 이 녀석 진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건가? 이 녀석은 지구의 마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 혹시 슬라이트처럼 이 녀석도 개 중에서는 천재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슬라이트와 똘똘이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자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슬라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길래 황급히 시선을 돌렸는데 똘똘이도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거봐 똑같네.

개를 기르면 전부 자기 개는 천재로 보인다더니 내가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야 똘똘이는 진짜로 똑똑하잖아?

눈빛이 괘씸한 똘똘이를 들어 올려 폴켄에게 안겨주고 집안으로 보낸 뒤 슬라이트와 둘만 남았다.

“별일 없었냐?”

“없었다.”

“철권단은?”

“며칠 휴가를 줬지.”

어쩐지 철권단이 안 보인다 했다. 나는 곧 이곳에 합류할 새로운 인원에 대해 알려주었다.

명단 한명을 알려줄 때마다 슬라이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왜 그래?”

“꼴통이야.”

“누가?”

“전부 다”

전직 왕도 제일의 꼴통 입에서 나온 말이니 정확할 것이다. 차기 권력자들이 아니라 왕도의 꼴통을 다 모은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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