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모두의 왕국
가족들과 며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아버지와 벤 행정관님은 스승님의 봉신 작위를 받기 위해 여러 가지 행정절차를 거쳐야 했다.
아직 크리스타 백작가에서 해임된 관련 서류가 왕실로 올라오지 않은 상태라서 그것부터 해결해야 했기에 꽤 많은 돈이 들어갔고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아버지와 벤 행정관 모두 봉신 귀족이기는 하지만 남작으로 승작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어머니와 형을 비롯해 행정관님의 가족들에게 왕도 관광을 시켜주었다. 비록 기대했던 만큼 형이 촌놈 티를 내지 않아서 조금 실망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새로 온다던 3인방은 북부 사령관의 아들이 거리상 오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함께 온다고 일정이 조금 늦춰졌다. 덕분에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늘어나서 좋았다.
이제 옆집 이웃이 된 아이브 공주는 이미 입주를 한 모양이지만 공주도 다른 사람과 시간을 맞출 생각인지 따로 인사를 오거나 하진 않았다.
왕실 소속의 병사들로 저택 주위의 경비가 대폭 강화되었고 이번 일이 있기 전부터 은밀히 저택 주위를 감시하고 있던 인원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철권단도 조금 긴 휴가를 줘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슬라이트와 나는 훈련을 쉴 수 없다는 스승님의 명에 따라 매일 열심히 지도받았다.
7성 기사의 지도를 받아보라는 착한 동생의 마음으로 거기에 바보 형을 슬쩍 끼워 넣었지만 스승님의 육체단련 코스를 며칠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에 아버지가 대단히 실망하여 형을 매우 꾸짖는 사건이 있었다.
딱히 형이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훈련을 버틴 철권단이 대단히 독한 사람들이 맞았다. 스승님의 옛 제자들도 그걸 버틴 사람은 결국 두 사람밖에 없지 않았나.
나중에 몰래 영약이라도 만들어줘야겠다. 왕실 연단술사에게 배운 것도 있었으니 다음에 만드는 것은 맛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과의 즐거운 시간이 끝나고 아버지와 벤 행정관님은 스승님이 써준 임명장을 가지고 암테일 영지로 떠났다. 나는 조금 더 머물라고 요청했지만 하루빨리 내려가 영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뜻이 워낙 확고해서 말릴 수는 없었다.
형은 그래도 남아서 스승님에게 지도받는 것이 어떨까 했지만 바보 형은 자신도 아버지를 돕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함께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아버지는 죽어도 받지 않을 것이 뻔해서 어머니와 형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재산 중 상당한 금액을 넘겨주었다. 연무장과 기숙사 건설에 들어갈 돈을 아낀 것도 있고 제법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그렇게 넘겨진 돈은 어차피 영지 운영에 쓰일 것이고 결국 내 영지가 될 것이니 일종의 투자라고 볼 수도 있었다.
가족들이 떠나고 바로 이제는 옆집 이웃이 된 아이브 공주가 찾아왔다.
“점점 약효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해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뭐 당연히 그렇겠지, 플라시보 효과가 언제까지 계속 통할 리가 없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당신도 해결책이 없다는 거죠?”
“네, 저로서도 아무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공주는 아직도 나에게 미약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이웃이 된 것이 그렇게나 불쾌한 일인가? 그래서 나도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하려고 했다. 감정적인 무언가가 섞이면 왠지 더 미움받을 것 같았다.
“왕실의 전령으로 오신 겁니까?”
“네, 일단은 그런 임무를 받았으니까요.”
“그러시군요.”
내 조금 딱딱한 태도에 공주는 뭔가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검술을 하지 못해요. 할 생각도 없고요.”
“그러십니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을 감시하는 것밖에 없어요.”
뻔한 사실이지만 직접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의외로 솔직하다. 아니 왕족이라서 가능한 행동인가?
“안타까운 일입니다. 뭔가 무료함을 달래드릴 것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당신 천재라면서요?”
“어렸을 때 그런 소리를 좀 듣긴 했지만, 변방에서였을 뿐입니다. 왕도에는 저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이 있겠지요.”
“왕도에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아예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런가? 생각해보니 에인프라흐 공작이 말했던 내 또래의 천재들 몇 명 중에 나머지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설마 5성 기사가 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과분하신 칭찬입니다.”
“아뇨. 제가 당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검술 실력만이 아니에요. 단신으로 왕도에 올라와서 단기간에 이만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공주님께서는 돈을 버는 쪽으로 관심이 있으십니까?”
“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공주도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라이브러쉬 왕국은 역사적으로 딱히 정략으로 공주를 외국에 시집보내고 하지도 않는다. 그중에는 오히려 뛰어난 재능으로 왕국의 한 자리를 차지한 여성들도 있었다. 아이브 공주는 그런 쟁쟁한 여성들을 동경하는 모양이었다.
“미력하지만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요?”
“약속드리지요.”
공주에게 느껴지던 미약한 적개심이 사라졌다. 이미 나에게는 돌턴골드 상단이라는 좋은 거래처가 있지만 언제까지 그곳 하나에 의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공주가 스스로 상계에 뛰어들길 원한다면 지원해줄 용의가 충분히 있다. 왕실의 힘을 사용한다면 단기간에 큰 사업을 일으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좋을까? 보통은 화장품 사업 같은 것을 시키면 좋겠지만 내가 화장품에 대해서 무지하다. 만드는 법도 당연히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해도 현재 팔리고 있는 화장품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사업은 둘째치고라도 검술 훈련을 할 생각이 없는 공주의 무료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무언가가 필요했다.
공주가 돌아가고 나는 집에서 한 가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주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으면서 공주의 첫 번째 사업 아이템이 될만한 것이다. 사업적으로 너무 큰 아이템이 아니면서 처음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을 생각하느라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북부 사령관의 아들이 마침내 왕도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사흘 정도 따로 볼일이 있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흘 후부터 철권단에 합류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래서 꽤 오랜 휴가를 끝내고 철권단도 불러들였다.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그래 다들 잘 지냈나?”
“이곳에 오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역시 집보다 이곳이 더 편합니다.”
오랜만에 만나 모두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제 기숙사도 전보다 더 좋아졌으니 아예 이곳에 눌러살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두손 가득 뭔가를 들고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스스로 챙긴 것은 아닐 것이고 부모가 챙겨줬을 텐데 7성 기사인 스승님의 지도를 받는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터무니없이 싼 값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들이 새로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새로 합류할 인원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듣는 순간 철권단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서, 설마 공주님도 함께 훈련을 받으시는 겁니까?”
그게 걱정이었던 건가? 뭐 적어도 아이브 공주는 기숙사에서 함께 살지는 않을 테니 걱정이 되진 않는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다.
“아니다. 공주님은 훈련받지 않으실 거다.”
“그런데 마탑의 후계자라면 마법사인데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본인이 직접 와서 용건을 밝히겠지 뭔가 이유가 있으니 지원을 했을 것이다.
“공주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슬라이트 때문인지 의외로 북부 사령관의 아들이나 내무대신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은 없었다. 뭐 예전의 악명도 그렇고 집안의 권력이나 명성 같은걸 생각해도 슬라이트가 둘보다 위이긴 하다.
그렇게 스승님과 함께 즐거운 훈련이 시작되고 훈련을 마친 후 내가 연무장 한쪽에 앉아 며칠 전부터 만들고 있는 그것을 위해 나무를 깎고 있을 때 철권단의 한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뭘 만드시는 겁니까?”
“미스카엘인가? 음, 다음 사업 아이템이라고 할까? 그런데 내가 손재주가 별로 없어서인지 쉽지 않네.”
내가 기계치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 쪽으로는 별로라고 할까. 뭔가 예쁜 것을 만드는 것에는 예전부터 재주가 없었다.
“작은 집을 만드시는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손재주가 있는 건가?”
“예, 어려서부터 뭔가 만드는 걸 잘하고 좋아했지요. 어머니가 조각가 출신이시거든요.”
미스카엘 하바라고 했던가?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는데 기사 가문의 후예라고 검만 휘두르고 있었으니 발전이 없던 것이 당연하다.
“그럼 조금만 도와주겠어?”
“얼마든지요.”
미스카엘은 내가 준비한 나무토막을 잡고 거침없이 조각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숭숭 파내는 거 같은데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밀한 조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굉장한데?”
빈말이 아니라 진짜 재능이 있었다.
“하하, 기사가 될 남자가 이런 손장난이나 한다고 어려서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혼났지요.”
아니야. 네 재능은 그거다. 미스카엘도 이제 2성 기사이긴 하지만 3성 기사도 택시 운전이나 하는 세상이다. 굳이 기사가 되겠다고 검술만 붙잡고 있어 봐야 가진 재능을 죽이는 것밖에 안 된다. 애초에 처음 철권단이 모였을 때부터 내 목표는 재능이 없는 검술을 그만두게 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한명 찾은 것 같다.
“아니야. 어쩌면 넌 이것으로 부자가 될 수도 있겠다.”
“네?”
“그냥 그런 줄 알고만 있어. 여기 나머지도 좀 부탁해.”
그렇게 조각을 몽땅 떠넘겼다. 절대 내가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재능에 맞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좋은 인력이 마침 찾아와준 덕분에 손님들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 시제품이 완성될 수 있었다.
나는 첫 게임의 멤버를 소집했다. 슬라이트와 나 그리고 이것을 만든 미스카엘 그리고 폴켄까지 네명이 게임판을 가운데 두고 모여앉았다.
기숙사에 판을 깔았기 때문에 주위에는 철권단원들이 우릴 둘러싸고 또 무엇을 하나 구경하고 있었다.
“이건 뭐냐?”
“호오, 제가 만든 것이 이렇게 쓰이는 것이로군요?”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재밌는 거야. 일단 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내가 만든 것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재미가 보장된 게임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푸른 마블 아직 제대로 된 오락거리가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분명히 먹힌다고 확신하고 있다.
게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라이트가 가장 먼저 파산했다. 검의 천재지 게임의 천재는 아닌 모양이다. 평소 돈 걱정 없이 살아온 덕분에 돈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서인지 펑펑 돈을 쓰다가 잔고가 없을 때 내가 구입한 땅에 걸려버렸다.
“이럴 리가 없다. 내가 파산이라니! 내가 파산이라니!”
“응, 거지는 저리 꺼져.”
“하하하하!”
주위에서 구경하던 철권단원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슬라이트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나와 대련에서 졌을 때도 저렇게 억울해하지는 않았었는데 이상한 부분에서 승부욕이 발동한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더욱더 확신했다. 이건 분명히 먹힌다.
그리고 다음에는 미스카엘이 파산했다. 미스카엘은 처음부터 게임 자체보다는 게임 보드와 사용되는 조각을 어떻게 더 개량할지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아,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이판도 다시 만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드디어 나와 폴켄의 진검 승부, 물고 물리는 접전 끝에 결국 폴켄이 승리를 거두었다.
“와아! 저 이제 부자예요!”
자신의 앞에 가득 쌓인 가짜 돈을 만지며 폴켄이 환호했다. 아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즐거워한다.
“다시! 한 번 더 해!”
게임이 끝나자마자 슬라이트가 득달같이 다시 달려들었고 나는 슬쩍 빠졌다. 다른 철권단원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럼 재밌게들 즐겨봐.”
밤늦게까지 계속된 게임에서 슬라이트는 결국 1승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나와 함께 먼저 빠졌던 미스카엘은 밤새도록 작업을 했는지 아침이 되자마자 퀭한 눈으로 내가 만들었던 어설픈 게임 보드를 완전히 고급품으로 새로 만들어서 나타났다.
“어떻습니까?”
“역시 이쪽에 재능이 있어.”
내가 엄지손가락을 세워주자 미스카엘은 아이처럼 웃었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각 마침내 그들이 찾아왔다.
첫 대면에서 나는 왜 슬라이트가 꼴통들이라고 말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