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아까 그건 버립시다.
점심쯤이 되어 새로운 손님들이 약속이라도 해서 모였다가 온 것인지 함께 도착했다.
내무대신의 장남, 마그나 오페르
북부 사령관의 차남, 자칼 에르하트
라이브러쉬 왕국 마탑주의 후계자, 스테이시 플레이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국의 셋째 공주 아이브 라이브러쉬
이름값으로만 치면 왕국을 들었다 놨다 할만한 거물들이 모였다.
“어서 오시게 모두 환영하는 바이네, 내가 비록 정식 스승이 되어줄 수는 없겠지만 배움을 원한다면 편견 없이 공평하게 가르침을 내려주도록 하겠네.”
먼저 대표로 스승님이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들은 허리를 굽혀 스승님의 인사에 답을 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집안의 자식들이라고 해도 7성 기사의 앞에서는 공손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의 주인인 빅터 하네스입니다. 머무는 동안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고 원하신다면 따로 수행 인원과 생활하셔도 좋지만, 손님들 역시 이곳의 고용인이나 수련생들에게 예의를 갖춰주시길 바랍니다.”
일종의 경고였다. 내가 아직 전생에 지구에서 살던 물이 덜 빠졌는지 몰라도 고용인들에게 막 대하는 것은 두고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의외로 반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워낙 쟁쟁한 가문의 자식들이라서 조금 걱정했는데 그래도 명가의 자식은 다르다는 건가? 어쩌면 슬라이트가 말한 대로 그렇게 꼴통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공주만 해도 여자치고 야망이 좀 있어서 그렇지 멀쩡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나의 작은 소망은 곧바로 깨어졌다. 이번에는 손님들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내무대신의 아들은 겉으로 보기엔 손님 중에서 공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손을 대면 베일 것같이 깔끔하게 다려진 옷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페르 가문의 장남, 마그나 오페르라고 합니다. 한동안 같이 생활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 어이, 슬라이트 공자 지금 사람이 앞에서 말을 하고 있지 않나?”
마그나의 자기 소개 때 슬라이트가 잠시 딴청을 부리자 마그나는 그것을 참지 못했다. 슬라이트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겠으니까 저리 꺼져.”
“자네는 예전부터 그랬지. 자고로 귀족이란 언제나 반듯한 모습을 보여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네! 그리고 그 말투는 뭔가? 누가 들었을까 봐 두려운 말투로군. 하루빨리 고치도록 하게. 그리고 지금 복장이 귀족으로서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하나? 품위를 찾을 수 없군. 내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주면 입을 텐가?”
말이 많다. 그리고 선민의식도 좀 있는 것 같고 좋게 보면 대쪽 같은 진짜 귀족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그의 아버지가 내무대신이다. 사채업자 사건을 빼놓고 보더라도 그런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아, 그만하라고!”
“흠흠! 이만하면 자네도 알아들은 것 같으니 그만하도록 하지.”
마그나의 잔소리는 결국 참지 못한 슬라이트가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야 끝났다. 왜 꼴통이라고 하는 줄은 알겠는데 생각보다 좀 기가 약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나이도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스무살인데 2성 기사 수준이다. 엄청난 지원을 받았을 명가의 장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수준 이하다.
다음 순서로 시선이 넘어갔다. 이번엔 마탑의 후계자다. 내가 놀란 것이 마탑의 후계자가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기사와 달리 여자 마법사도 많고 과거 초월자였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도 여성 마법사였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다.
[잘 부탁합니다. 스테이시 플레이스라고 합니다. 나이는 16세, 4 서클 마법사입니다. 언령 마법 수행 중으로 말을 할 수 없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말을 하지 않았다. 마법으로 허공에 글을 쓰고 있었다. 16세의 나이에 4 서클이라는 것은 마탑의 후계자로서 부끄럽지 않을 실력이었다. 그리고 저거 단순하게 마법으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보이도록 쓰는 것이니 본인은 반대로 쓰고 있다는 말이 된다. 천재임에는 분명하다.
“쟤 저러고 말 안 한 지 몇 년 됐다.”
옆에서 슬라이트가 슬쩍 알려주었다. 언령 마법을 어떻게 수련하는지 몰라도 말을 안 한 지 몇 년이라는 것에 또 놀랐다. 그런데 말을 안 하는 것만 빼면 멀쩡하지 않나?
“숙소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기존의 기숙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성이라 불편하실지도 모릅니다.”
내 물음에 스테이시는 곧바로 다시 글을 썼다.
[사형이 바로 옆에 살고 계셔서 신세를 질 생각입니다.]
“사형이 근처에 사십니까?”
사형이면 그 사람도 마탑주의 제자라는 거잖아? 스테이시는 손가락으로 저택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그 병원 운영하면서 인체실험 한다는 미친 마법사? 저 사람도 마탑주의 제자였어? 갑자기 스테이시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상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안 그래도 위축되어있던 사람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잔뜩 움츠린 인물은 북부의 호랑이라 불리는 올라프 에르하트의 아들이었다.
“자, 자칼 에르하트라고 합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모기가 날아가는 소리 정도로 자신을 소개한 자칼 에르하트는 정말 북부의 호랑이라 불리는 사람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18살로 알고 있는데 체격이 무척 왜소했다. 그리고 추남이었다. 외모는 나도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에게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데 정말 못생겼다. 성형 포션을 사용하기 전의 제이시 정도는 아니지만, 잔뜩 주름지고 균형이 맞지 않은 듯한 얼굴은 보기가 조금 불편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그렇다는 얘기다. 저렇게 소심하고 위축된 모습과 달리 4성 기사다. 아마 공작이 말했던 내 또래의 천재 중의 하나가 바로 저 사람일 것이다.
“아이브 라이브러쉬에요. 잘 부탁해요.”
공주의 소개는 간단히 끝났다. 아직 참모습을 보지 못한 관계로 슬라이트의 말대로 진짜 꼴통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뭔가 한가지씩 결점이 있는 천재들이란 건 알았다. 내무대신 아들의 재능은 아직 확인을 못 했지만 뭔가 잘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버지가 내무대신이라는 사실이 재능일 수도 있다.
나라고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오히려 전생의 여파로 여러 정신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천재도 아니다. 뭔가가 더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하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님, 첫날부터 훈련하기는 좀 그렇고 하니 서로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라. 다만 너와 슬라이트 공자는 저녁에 시간을 내서라도 따로 수련하거라.”
“예, 스승님”
나는 스승님의 허락을 받아 손님들을 기숙사로 안내해 방을 배정했다. 공주는 제외하고 일단 마법사인 스테이시에게도 방을 배정해주었다. 의외로 내무대신의 아들과 북부 사령관의 아들은 모두 개인 수행원을 데리고 오지 않아서 많은 방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오시기를 바랍니다.”
1층에는 이미 내가 새로 이름 붙인 ‘모두의 왕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공주에게 소개해주었다.
“이게 뭐로 보이십니까?”
“왕국의 여러 영지의 이름이 붙어있는 판이군요? 뭐에 쓰는 물건인가요?”
“공주님의 첫 번째 사업 아이템이 될지도 모르는 물건입니다.”
아이브 공주는 머리를 갸웃하며 모두의 왕국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이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잠시 후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각자 짐을 풀고 손님들이 1층으로 내려오자 간단하게 게임 방법을 설명해주고 본 게임에 들어갔다. 선수는 공주를 제외한 손님 세 명과 어제 연패의 기록을 세운 슬라이트였다.
슬라이트는 초보자 세 명을 상대로 첫 승리를 이미 따놓은 것마냥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각자의 말들이 주사위의 숫자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이브 공주는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왕국의 지리와 유명한 영지들을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고 금전 감각도 키울 수 있습니다. 잘 팔릴 것 같지 않으십니까?”
“교육적 기능이 있는 놀이라는 거군요?”
이미 아이브 공주는 반쯤 넘어와 있었다.
“아뇨 물건을 팔 때 그렇게 홍보하시라는 얘깁니다. 당장 공주님만 봐도 넘어가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이브 공주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공주와 나누는 동안에도 게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했다. 어제의 슬라이트와 똑같은 방식으로 게임을 하다가 마그나가 탈락했다.
“이럴 수가! 내가 파산이라니!”
어제의 누군가와 똑같은 대사를 내무대신의 아들 마그나가 외치고 있었다. 옆에는 마그나의 재산을 받아먹은 슬라이트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응, 거지는 꺼져.”
“아무리 내가 파산했어도 그렇지 어찌 나에게 거지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자랑스러운 라이브러쉬의 귀···.”
“아, 시끄러 파산한 사람은 조용히 해!”
슬라이트는 어제 내가 써먹은 도발을 마그나에게 똑같이 사용했고 마그나가 발작했으나 이내 슬라이트의 일갈에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며 기숙사 밖으로 사라졌다.
지금 보니 내무대신의 아들은 이런 쪽에도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대체 무슨 숨은 재주가 있는 걸까? 내 의문을 뒤로 하고 게임은 계속되었다.
[슬라이트님 3500 금화를 주세요.]
“으윽!”
자신만만했던 슬라이트는 신음을 흘리며 자기 말을 게임판 위에서 내렸다.
스테이시가 건물을 잔뜩 세워놓은 땅에 슬라이트가 걸리며 슬라이트가 두 번째로 탈락했다. 남은 사람은 스테이시와 자칼이었다.
둘의 대결은 제법 볼만했다. 때로는 필요 없는 땅과 건물을 팔고 다시 구입하는 등 두뇌 싸움이 치열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런 전략보다는 사실 운이 많이 작용하는 게임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명승부가 이어지고 모두가 넋을 잃고 주사위가 떨어지는 순간마다 탄식과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볼 때는 참으로 순박한 사람들이다. 고작 보드게임에 이렇게 흥분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숨 막힌 대결이 끝나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순간 나는 급박하게 외쳐야만 했다.
“아니 갑자기 왜? 슬라이트 공주님을 지켜라! 빨리 아무나 스승님 좀 불러와!”
북부군의 총사령관이자 북부의 호랑이라 불리는 강한 기사인 올라프 에르하트 후작은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격과 그에 어울리는 엄청난 크기의 대검을 사용하는 호탕한 무인이었다.
그리고 장녀인 비올라 에르하트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버지를 외모와 성격까지 쏙 빼닮은 여장부였다.
그런데 늦둥이인 차남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기는 했으나 타고나기를 추남에 왜소한 체격을 가진 자칼은 남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물론 아는 사람들은 검술에 대단한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체격이 왜소한 그는 아버지와 누나처럼 대검술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재능을 타고난 검술에도 차츰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왕국을 뒤흔드는 이야기가 돌았다. 경지를 올릴 수 있는 영약이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 영약을 만든 것은 15세의 천재 소년이라고 했다.
소년의 스승인 노엘 브라스라는 노 기사가 영약의 힘으로 7성 기사가 되었다는 소문은 왕도뿐만이 아니라 왕국 전체를 강타했기에 변방에 위치한 에르하트 가문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단숨에 장녀인 비올라가 왕도에 급파되었고 노엘이라는 기사의 작위와 영지를 정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천재 소년의 주위에 가문의 인재를 배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과 미리 친분을 나눌 수도 있고 잘하면 영약의 제조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거기에 7성 기사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는 일거양득을 넘어 일거다득의 기회를 잡기 위해 수많은 귀족 가문이 달려들었다. 결국 마지막에 뽑힌 것은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들이었고 물론 거기에 에르하트 가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칼은 정말 그곳에 가기 싫었지만, 아버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결국 고향을 떠나 왕도로 향했다. 왕도에는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누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진 자칼을 며칠 동안 잔뜩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그곳을 찾아갔다.
자칼의 눈에는 전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소문의 천재 소년부터 해서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소문이 좋지 않은 천재, 마법의 천재라는 마탑주의 후계자, 그리고 자칼에게는 앞선 누구보다 부러운 사람인 내무대신의 아들, 그는 정말 잘생기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리고 천재 소년이 만들었다는 놀이를 하게 되었다. 생소했지만 별로 어려운 게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심오한 부분도 존재했다. 그렇게 잘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칼은 모두를 이겨내고 승리했다. 비록 놀이에 불과했지만 승리하는 순간, 주위에서 사람들이 환호했고 자칼은 짜릿함과 동시에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슬라이트가 재빨리 공주를 대피시키고 나와 스테이시가 오러와 마법으로 터져나오는 마나의 폭풍을 막아내고 있을 때 이상을 감지한 스승님이 뛰어들어와 오러의 막을 펼쳐 그것을 막아주셨다.
“아니 왜 갑자기 승급하고 난리야?”
거기에 18살에 5성 기사라니 미친 천재가 여기 또 하나가 있었다. 뭐 15살에 5성 기사인 내가 밖으로 꺼내면 욕을 먹을 말이긴 하다.
일단 스승님이 자칼을 맡아주시니 안심이다. 이번에는 비록 내 돈으로 지은 기숙사는 아니었지만, 기숙사를 또 새로 지을 뻔했다.
나는 밖으로 대피해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공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주님 아까 얘기했던 홍보 방법은 모두 버립시다.”
“네?”
“5성 기사가 될 수 있는 놀이, 이것 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까?”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공주의 눈이 금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