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45화 (45/206)

45. 백명의 사람, 백 가지 사연

큰 소동이 끝나고 자칼 에르하트가 5성 기사가 되었다.

“허허, 어떻게 네 주위에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구나.”

스승님의 말씀처럼 왜 이상하게 내 주위에 이런 인간들만 꼬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설에서나 나오던 환생자 특전 같은 건가?

자칼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많은 축하를 받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그 표정이 굉장히 기묘해서 진짜 기뻐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왕도를 떠나지 않고 있던 자칼의 누나인 비올라가 자칼의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왔다.

“자칼!!”

무작정 저택으로 진입하려다가 저택의 입구에서 왕실의 병사들에게 붙잡힌 비올라가 자칼을 불렀다. 이제 우리 집은 상대가 국왕이나 왕세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지른 소리임에도 주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소란이 있고 난 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은 비올라를 집주인인 내가 맞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자칼 공자의 누님이시죠? 안에서 자칼 공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큰 여자를 처음 보았다. 2미터가 넘는 키도 그렇지만 덩치가 엄청났다. 삼국지의 장비가 여자로 환생하면 이런 모습일까? 6성 기사라는 것을 떠나 덩치가 주는 위압감이 굉장했다.

“자네가 그 유명한 빅터 공자로군. 만나서 반갑다. 하지만 동생을 빨리 보고 싶군.”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빅터는 맞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성격과 목소리도 이게 여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이 여자를 감당할만한 남자가 왕국에 있기는 할까?

40대 중반의 비올라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오누이인지라 비올라가 자칼을 자식처럼 키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자칼!”

기숙사 안으로 들어온 비올라는 성큼성큼 달려가 자칼을 덥석 껴안았다. 가뜩이나 왜소한 자칼을 비올라가 껴안으니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누, 누나 숨 막혀.”

“앗! 어디 다치진 않았니?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괜찮아.”

아니 당신들 헤어진 지 이제 반나절도 안 됐거든요? 무슨 얼굴이 반쪽이 됐다는 말인가.

“정말로 5성이 되었구나. 역시 내 동생이야. 이 누나는 믿고 있었다.”

“으, 응”

“이제 집에 가자꾸나.”

“응?”

“성과를 이뤘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니?”

반나절 만에 돌아가자는 비올라도 황당했지만, 그런데 자칼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나는 조, 조금 더 이곳에 있고 싶어.”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비올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손을 입으로 막았다. 그게 그렇게 충격을 받을만한 일이었나?

“세상에 우리 자칼이 자기 의견을 말하다니 정말 다 컸구나. 누나는 정말 기쁘단다.”

그러면서 덩치만큼이나 큰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가 정신병이 걸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미 많이 걸려있지. 그래서 더 악화될까봐 둘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잠시 후 비올라는 스승님을 만나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스무번쯤하고 돌아갔다. 비올라가 돌아가자마자 잠시 후 에르하트 가문에서 보낸 것이라면서 북부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물건들이 화물용 마동차로 30대가 도착했다. 덩치만큼이나 통이 큰 여자였다.

덕분에 집사가 엄청나게 바빠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더 많이 뽑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공석인 정원사도 새로 뽑아야 하고 해서 이미 채용공고를 내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이래저래 폭풍과 같은 하루가 지나고 결국 저녁에 스승님의 지도도 하루를 건너뛰게 되었다.

대신 새로운 인원들이 온 기념과 자칼이 승급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저녁에는 치킨파티를 열었다.

왕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치킨을 처음 먹어본 자칼은 맛에 매우 놀라워했고 처음 왔을 때처럼 심하게 위축되지 않으면서 함께 파티를 즐겼다.

한쪽에선 치킨을 먹고 다른 한편에선 그동안 모두의 왕국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게임을 즐겼다. 특히 철권단들은 자칼이 승급하는 것을 직접 본 터라 죽어라 1등을 노렸다.

아이브 공주는 저녁에도 별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함께 작은 파티를 즐겼다. 왕궁에서 평소 워낙 좋은 것을 많이 먹던 사람이라 그런지 치킨을 즐기는 것 같진 않았지만, 사람이 모여있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나와 공주는 그 사이에 사업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스카엘을 공주에게 소개해줬다.

“모두의 왕국을 구상한 건 저이지만 만든 건 이 친구입니다. 손재주가 무척 뛰어나죠.”

“공주님을 뵙습니다. 미스카엘 하바라고 합니다.”

내 부름에 공주의 곁으로 온 미스카엘은 손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저렇게 긴장하는지 모르겠다.

“어머, 그럼 저 조각들도 모두 이분이 하신 건가요? 작은 건물들이 너무 정교해서 깜짝 놀랐어요.”

“네, 저쪽에 몇 개 투박한 건 제가 만든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미스카엘이 만든 것이죠.”

“대단하세요.”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미스카엘의 얼굴과 목덜미가 빨갛다 못해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러다 잘하면 사람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잠시 미스카엘을 멀리 보내놓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말인데 미스카엘을 제작과정에 참여시켰으면 합니다. 원제작자이니 판매에 따른 이익금도 주었으면 하고요.”

“보상이야 드리겠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어차피 생산은 따로 일을 맡긴 공방에서 할 텐데요.”

“아니지요. 공주님은 이것 하나만 팔고 끝내실 겁니까?”

내 말에 공주의 눈이 또 금빛으로 변했다. 실제로 색이 변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라는 거다.

“또 다른 것도 구상한 게 있으신가요?”

“네, 하지만 천천히 하나씩 풀어 놔야죠. 그리고 그 시제품을 만들어줄 사람으로 미스카엘을 계속 쓸 생각입니다. 그리고 공방에서 대량생산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우리가 만든 ‘모두의 왕국’을 사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상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아직 아이브 공주는 경험이 일천했다. 아이브 공주가 상업에 뜻이 있다면 분명 별궁에 따라온 수행원 중에서 이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걸까? 뭔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 놀이를 하다가 승급했다는 소문을 퍼뜨릴 테니 역시 기사일까요?”

“네, 기사들이 많겠죠. 기본적으로는 귀족들일 겁니다. 그리고 귀족들은 남들보다 더 좋은 물건과 특별한 것을 좋아하죠.”

“아, 따로 고급품을 만들자는 거군요?”

다행히 아이브 공주의 머리가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네, 그것도 대량생산이 아닌 수제품으로 한정판을 만들어 파는 거죠. 실력으로만 보면 다른 뛰어난 장인도 많겠지만 미스카엘은 자칼이 승급을 한 ‘모두의 왕국’을 직접 만든 사람이죠. 가치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빅터 공자는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아닙니다. 보통 상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빅터 공자는 상인이 아니라 기사잖아요.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죠. 거기에 마법도 사용하실 수 있다지요? 그 신비의 연단술은 어떻고요.”

생각해보니 그렇게 되나? 뭔가 되게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 같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판매 이익에서 저에게 1할, 미스카엘에게는 그가 만드는 수제작 한정판의 이익에서 5할을 주십시오. 그 정도 계약이면 서로가 만족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치킨의 제조법을 판매할 때는 레시피를 통째로 넘겼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감히 누가 공주가 직접 판매하는 제품의 유사품을 팔겠는가? 그럴 걱정이 전혀 없다.

“계약 내용은 좋아요. 그런데 미스카엘 공자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할까요? 그래도 기사 지망생이잖아요?”

“얘기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할 겁니다. 아니라면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아이브 공주와 이야기를 끝내고 미스카엘을 찾았다. 미스카엘은 저택 밖에서 눈까지 빨갛게 변한 채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왜 그렇게 긴장했던 거야?”

“후우, 긴장했던 것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요.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걸 참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제가 만든 작품을 공주님이 칭찬해주셨다고요.”

아, 나와서 울었던 건가? 사실 철권단의 모두가 그렇다. 집에서 무능아로 소외된 채 제대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진짜 재능을 찾아 왕족에게 칭찬받는다니. 나 같으면 너무 기뻐서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을 거다.

나는 미스카엘에게 안에서 공주와 나눴던 계약 내용을 알려주었다. 미스카엘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손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겠습니다. 하게 해주세요.”

“집에는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장남이라고 해도 어차피 저는 이제 후계자도 아닌데요. 단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계승권을 박탈당한 장남이 어떤 건지요. 뭣하면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대신 기숙사에서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렇게 미스카엘의 동의까지 얻어서 아이브 공주와 첫 계약이 다음 날 이루어졌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별궁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던 공주의 측근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계약서를 검토하고 계약이 끝나자마자 왕실과 연관이 있는 공방을 연결해 생산 스케쥴을 잡았다. 왕실 홍보부에 연락해 자칼이 승급한 사건을 소문내는 의뢰를 했으며 미스카엘이 사용할 작업실을 수배했다.

그 처리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왕실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리 왕족이라고 해도 비중이 떨어지는 공주의 수행 인원이 이 정도인데 국왕이나 왕세자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물이 많겠는가?

이튿날에는 손님들이 오고 첫 번째 전체 훈련이 시작되었다. 아이브 공주는 열외가 되어 공주가 미리 준비한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훈련을 참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왕족이 직접 참관하는 훈련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굉장한 영광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비록 감히 손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별과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어쨌든 공주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은가? 미인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힘을 낼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철권단의 사기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놀라운 것은 마법사인 스테이시도 훈련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철권단과 같은 수준인 것은 아니고 폴켄과 같이 하기로 했다.

처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강도가 낮아졌지만 철권단이 지금 하는 정도만 해도 보통 사람들 아니 기사라 하더라도 나가떨어지기 딱 좋은 수준이다. 당장 바보 형만 하더라도 며칠 버티지 못하지 않았나.

“모두 수고했다. 쉬어라.”

오전 훈련이 끝나고 다들 땀을 식히며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길 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딱 한명 있었다. 내무대신의 아들 마그나였다. 자칼은 에르하트 가문에서도 상당한 강도의 훈련을 했었는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체력 단련을 마쳤지만 마그나는 아니었다.

“괜찮습니까?”

걱정되어 다가가 물으니 거의 죽기 직전의 사람으로 보였다.

“괘, 괜찮소이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단정하게 빗어놓았던 머리는 땀과 먼지 범벅이 되어 제비집처럼 되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으며 두 다리가 바람 앞의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서 있는 게 용할 정도로 보이는데 버티고 있으니 정신력은 인정해줄 만 하다고 생각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나는 괜찮아야만 하오.”

그러면서 이를 악물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기숙사로 향하는 마그나였다. 백명의 사람이 모이면 백 가지 사연이 있다고 한다. 거대 파벌의 수장인 내무대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사연이 없겠는가?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다.

대귀족의 아들치고 별다른 재능이 없는듯한 마그나가 왜 이곳까지 와서 저렇게 이를 악물고 버티는지는 궁금하지만, 갑자기 다가가면 누구나 경계하기 마련이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천천히 다가가면 마그나가 가진 사연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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