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지하실 탐험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오후는 대련 시간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 만큼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비슷한 수준의 상대가 슬라이트 밖에 없다 보니 조금 정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대련 상대를 정할 때 가장 인기인이 된 것은 역시 새로운 인물이자 승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칼이었다.
“자칼 나랑 붙어보자.”
슬라이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첫 순서는 집주인인 나에게 양보를 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
“아니 이럴 때 집주인인 척 하는 거 너무 역한것 아니냐?”
“척이라니 나는 항상 집주인이었다.”
나와 슬라이트가 투닥거리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자칼 오빠, 나랑 대련해주세요.]
“어? 으, 응”
스테이시가 반칙을 썼다. 자칼은 얼굴을 붉히며 단번에 넘어갔다. 오빠라니 저건 진짜 반칙이지. 저걸 어떻게 이겨?
순식간에 흥이 떨어진 슬라이트와 나는 둘의 대련을 지켜보기로 했다.
자칼은 굉장히 방어적인 검술을 사용했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에르하트 가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검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익힌 것이라고 하는데 원래 본인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할까?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닌 방어를 하면서 상대방의 틈을 노리는 전형적인 반격형 검술이었다.
그러나 자칼보다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스테이시였다. 수준급 마법사의 대련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제 자칼이 승급할 때는 경황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스테이시는 그때 마법을 사용했다.
실드 계통의 마법으로 보였는데 분명히 마법을 사용했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한 게 무슨 큰일이냐고 하겠지만 스테이시는 지금도 그때도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캐스팅이 없이 마법을 사용한다. 그게 지금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콰앙!
아무런 캐스팅도 없이 발현된 불덩어리가 자칼에게 날아가 폭발을 일으켰다. 순간 화염에 휩싸인 자칼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5성 기사가 그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다.
화염을 뚫고 나온 자칼이 엄청난 속력으로 스테이시를 향해 쇄도했다. 마법사와 기사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이런 식이다. 거리를 줄이려는 기사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마법사.
간혹 근거리 마법을 선호하는 전투 마법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다. 그렇게 치면 드물지만, 활이나 투창을 사용하는 기사도 있다.
스테이시가 오늘 오전 훈련에서 폴켄과 훈련을 아무 문제 없이 끝낸 것을 보고 알았지만 스테이시의 운동능력이 결코 약한 편이 아니다. 스승님의 배려로 폴켄의 훈련량이 적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철권단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지구에서 그랬다면 아동학대로 잡혀갔을 수준이다.
거기에 마법을 사용한 것인지 무척이나 몸이 가볍고 빠르게 움직인다. 스테이시가 유령처럼 연무장을 휘휘 움직이며 견제용 마법을 사용하자 자칼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다 틈이 보이면 공격형 마법을 사용한다. 마법사 전투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는 스테이시였다.
그렇게 거의 일방적으로 스테이시가 공격하고 자칼이 방어하며 따라붙으려고 시도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10여분이 훌쩍 지나갔다.
[졌습니다. 역시 5성 기사를 상대로는 버겁네요.]
갑자기 스테이시가 멈춰 서며 패배 선언을 했다. 그런데 정작 승리한 자칼은 10분 내내 마법을 얻어맞아 몸의 이곳저곳이 그을리고 얼어붙어서 거지꼴이고 스테이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역시 마법사는 무서운 존재였다.
자칼은 그래도 이겼다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뭐 서로가 만족했으니 좋은 대련이었다고 해야 할까?
“와아아아!”
손에 땀을 쥐며 대련을 지켜보던 철권단이 환호성을 질렀다. 4 서클 마법사와 5성 기사의 대련은 확실히 아무리 왕도라고 해도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일단 마법사가 싸우면 마법으로 인해 시각적으로 화려하니까 볼 맛도 난다.
“훌륭한 대련이었다. 스테이시는 견제 마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좀 더 연습하면 좀 더 기사와의 싸움에서 유리하게 될 것이다. 마침 여기 좋은 대련 상대들이 많으니 마음껏 연습할 수 있겠지. 자칼은 몸을 너무 사렸다. 비슷하거나 낮은 경지의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피해를 전혀 보지 않겠다는 생각보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밀고 들어가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조언 감사합니다.]
“예, 교관님 명심하겠습니다.”
대련을 보고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스승님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 차례가 왔다. 그런데 슬라이트와는 너무 자주 대련해서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관중들도 갑자기 흥이 식어버렸다. 철권단은 이미 많이 보아온 광경이기 때문이다.
“후딱 끝내자.”
“알았다. 순식간에 끝내주지.”
“얼씨구?”
같은 5성의 경지에 들어온 이후 내가 이기는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미친 천재답게 슬라이트도 매번 붙을 때마다 뭔가 새로운 수를 만들어서 가져오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 성장 속도가 더 빨랐다.
스승님에게 따로 배우고 있는 검술은 그만큼 좋은 검술이었다. 기존의 마구잡이 검법과 연결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배우는 것도 빨랐다.
쾅! 쾅!
오러와 오러가 부딪히고 견제용 마법이 난무하는 대련은 약속대로 금방 끝났다. 서로 꼼수 없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승리였다.
“빅터는 아직 검의 반응이 늦다. 너의 경지와 육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반응할 수 있다. 슬라이트 도련님은 지나치게 빅터의 힘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흘려내고 피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만 때로 몇번은 몸으로 버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 스승님”
“조언 감사합니다. 노엘 백작님”
스승님은 여전히 슬라이트에게만은 경어를 쓰고 있었다. 평생 공작가의 기사로 살아오셔서 고치기가 쉽지 않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음 차례는 철권단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마그나가 끼어있었다. 마그나는 얼핏 보기에도 아직 몸의 회복이 덜 되어 보였다.
자기 수준에 맞는 상대를 고른 철권단의 대련이 끝나고 마지막에 마그나가 철권단 중에 가장 실력자인 크리스 힝켈을 상대하게 되었다. 경지는 같은 2성이니 원래라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련은 일방적이었다. 아니 일방적인 흐름으로 가기도 전에 마그나가 패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데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패배한 후 마그나는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스승님의 조언이 있고 난 뒤 나는 마그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내일은 다를 것이오.”
마그나는 이를 갈더니 몸을 휙 돌려 숙소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나에게 슬라이트가 다가왔다.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라.”
“왜 저러는 건지 혹시 알아?”
“음, 뭐랄까. 저놈은 완벽주의자에 원칙주의자지. 그런데 그게 좀 과해 본인에게도 가혹하지만, 종종 남에게도 그것을 강요하거든.”
완벽해지길 원하지만 그럴 재능은 없다. 자신에게 날을 세우고 남에게도 날을 세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대격변 이전의 삶에서도 그렇고 대격변 이후에도 보았다. 대격변 이전의 삶에서는 사실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살면서 많은 역경에 부딪히다 보면 조금씩 모서리진 마음이 깎여나가고 언젠가는 둥그렇게 변해가게 된다. 대신 그동안 너무 아프다는 것이 흠이지만 어쨌든 죽진 않는다.
그런데 대격변 이후의 삶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죽었다. 마음이 둥그렇게 변하기 전에 죽어버렸다. 지금 왕국은 평화롭다. 대격변 전의 지구와 같다. 그러니 마그나도 조금씩 깎여나가다 보면 언젠간 둥그렇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루의 정해진 훈련이 끝난 뒤 나는 며칠 미뤄왔던 일을 해치우려고 했다.
“어디 가냐?”
그런 나를 슬라이트가 불러세웠다.
“옛날 집 있던 자리에 지하실이 나왔다며? 거기 안에 뭐가 들었나 한번 보려고.”
“나도 같이 가자.”
남자라면 이런 비밀기지 탐험 같은 거 못 참는다. 슬라이트가 먼저 따라온다고 하자 나머지가 엄마 오리를 따라오는 새끼오리처럼 우르르 나를 따라왔다.
“이게 뭐라도 그렇게 다들 따라오는 거야?”
“재밌어 보이잖습니까?”
철권단의 최고 연장자이자 리더 역할을 하는 자힘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뒤쪽에는 아직 별궁으로 돌아가지 않은 아이브 공주와 스테이시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거참”
연무장에서 별로 멀지도 않기에 조금 걷자 잔해가 치워진 자리에 정사각형의 뻘겋게 녹이 슨 철문이 땅에 박혀있었다.
손잡이는 이미 삭아서 당길 수도 없을 것 같고 밖으로 자물쇠가 있는 형식도 아니었다.
녹이 슨 문을 당겨서 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검을 꺼내 오러를 가득 주입해서 문을 내리치기 시작하자 녹슨 쇠가 뭉텅이로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왜 이렇게 두꺼워?”
철문의 두께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게 두꺼운 철문을 달아놓은 것을 보면 확실히 중요한 것을 저장했을지도 모르는 시설이긴 하다. 그런데 초감각으로 감지하건대 이 지하실에는 거의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나와봐라. 그런 것도 못 부수나?”
슬라이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경지가 비슷한데 크게 다를 리가 없었다.
“저, 저도 좀 해봐도 될까요?”
슬라이트 다음 차례로는 소심하게 자칼도 나섰고 스테이시까지 나섰지만, 도대체 지하에 무슨 대형 마수라도 가뒀던 용도인지 두께가 50cm는 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 차례가 왔고 있는 힘을 다해 깨부순 결과 마침내 문이 반으로 쪼개지며 육중한 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후욱! 후욱! 이런 빌어먹을 문짝 드디어 깨부쉈다.”
그렇게 드러난 지하실은 꽤 깊었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광원 하나가 나타나 스르륵 움직이며 안을 비춰주었다.
“고마워요. 스테이시”
마법사가 옆에 있으니 이렇게 편하다. 물론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긴 한데 발상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보통 사람은 어두우면 불을 피워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마법으로 빛을 만든다. 방금 나도 마법 등불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지 직접 광원 마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제법 깊이가 있지만 사다리를 가져오기도 귀찮고 내려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가볍게 지하실 안으로 뛰어내렸다.
“발 조심해”
슬라이트 답지 않게 내 걱정을 해주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정도로 다칠 거라면 5성 기사의 경지가 아깝다.
이미 안의 내부 구조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사각형의 지하실이다. 가로세로 5미터 정도 될까? 문짝을 새로 달고나면 뭔가를 저장하는 곳으로 써먹어도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구석에 뭔가 있긴 있었다. 감각으로 느껴지기엔 그냥 지하실 모양을 그렇게 만든 줄 알았더니 어스름한 빛으로 보니 철로 만든 기다란 상자였다.
“라이트”
이번엔 내가 직접 광원을 만들었다. 역시 다시 봐도 철로 만든 상자가 확실했다.
“아, 이 짓을 또 해야 하나?”
상자 역시 워낙 오래된 탓에 시뻘겋게 녹이 슬어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겉에 자물쇠가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자물쇠만 부수면 상자는 열릴 것 같기도 했다.
“안에 뭐 있냐?”
슬라이트가 얼굴이 거꾸로 불쑥 내려왔다.
“어, 상자 하나가 있네.”
“오!”
감탄사를 터트린 슬라이트가 폴짝 뛰어서 내려왔다. 이 녀석 은근히 이런거 좋아하는구나?
딱히 마나 같은 것이 없으니 대단한 것이 들어있진 않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금화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빨리! 빨리 열어보자.”
슬라이트가 기대에 찬 눈으로 상자를 열어보라고 재촉했다.
깡!
검을 꺼내 자물쇠를 내리치니 다행스럽게도 녹이 슨 자물쇠가 단번에 부서졌다. 녹이 슨 상자를 손으로 만지고 싶지 않아 조금 힘을 줘서 발로 밀어 치듯이 걷어찼다. 파상풍을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기껏 이만큼 성장했는데 파상풍으로 죽으면 그것만큼 우습고 억울한 일도 없을 거다.
제법 긴 상자였지만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반바퀴쯤 구르면서 열렸다. 안에서 누렇게 변색된 천 안에 감싸여 있던 길고 시커먼 것이 툭 튀어나왔다.
“으헉!”
슬라이트가 깜짝 놀라며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그놈 겁이 많기도 하다.
그것은 미라처럼 바짝 마른 팔이었다. 길고 위협적인 손톱이 아직 그대로 붙어있고 그 길이가 1.5 미터쯤 되는 것이 사람의 팔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이것 익숙한 느낌이 난다. 물론 마수의 팔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왠지 변이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바짝 마른 기괴한 팔에 손을 댔다.
각성, 그것이 또 한 번 나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