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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47화 (47/206)

47. 악마의 팔

뇌에 짜릿짜릿하게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마치 데이터가 강제적으로 입력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각성인 것은 알겠는데 예전의 각성과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새로 얻은 능력은 사물을 만져서 사물에 깃든 가장 강한 기억을 읽는 능력이었다. 이걸 사이코 메트리라고 했던가?

대격변 이후 만났던 생존자 중에서도 이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대격변 이후의 세계에서 좋은 사람은 대부분 일찍 죽었고 그 사람도 크게 다른 운명을 걷지는 못했다.

전투와는 전혀 상관없는 능력이었지만, 그 효용성을 알기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이 능력을 잘 활용한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변이체 중에서도 사이코 메트리를 쓰는 것으로 추정되는 개체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철저하게 준비된 방공호나 쉘터들이 힘없이 무너진 이유였다. 사이코 메트리를 사용하는 변이체들은 인간이 과학 문명의 힘을 빌려 설정해놓은 비밀번호를 너무 쉽게 알아냈다.

“야, 너 괜찮아?”

보기에도 흉측한 괴물의 팔을 붙잡고 실실 쪼개고 있는 나를 보고 슬라이트가 께름칙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어, 괜찮아. 이 팔 생각보다 감촉이 괜찮은데?”

“미쳤냐?”

슬라이트의 질색하는 표정을 보자 왠지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만 있어 봐.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능력을 얻었으면 써먹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마침 딱 좋은 소재를 손에 쥐고 있다. 운이 좋다면 변이체로 추정되는 것의 팔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변이체의 팔을 잡은 손에 집중해 능력을 발동시켰다. 선택적으로 발동이 가능한 능력이기에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장갑을 끼고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능력이 발동되는 순간 시야가 바뀌었다.

눈앞에 잘생긴 얼굴의 검은색 청년이 보인다.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 검은색 가죽 갑옷에 검신까지 검은색인 특이한 검을 들었다. 아, 이것은 이 팔의 원래 주인이었던 괴물의 시야인 것 같다. 검은색 청년이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네가 우리 제자 팔 자른 놈이냐?”

건들거리는 태도에 나이를 많이 보더라도 2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제자가 있었나 보다. 입은 복장만 보더라도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은 알겠다. 얼핏 보기에도 입고 있는 가죽갑옷이나 들고 있는 검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크워어어어!

검은색 청년에게 뭔가 위협을 느낀 것인지 괴물이 포효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살기가 느껴지는 포효였다. 변이체의 특징과 같은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살의다.

괴물이 땅을 박차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정도의 속도다. 내 동체시력으로는 지금 괴물이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코 약한 변이체가 아니다. 이 정도면 변이체가 가장 강했던 시절에서도 강한 축에 드는 녀석일 것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괴물이 검은색 청년을 공격한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검조차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청년의 눈이 정확히 괴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것은 반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여유를 부리고 있던 것이다.

괴물의 팔이 검은색 청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이 괴물, 팔이 사람처럼 두 개가 달린 것이 아니다. 네 쌍인가? 기괴하게 생긴 여덟 개의 팔이 잔상을 남기며 기관포처럼 검은색 청년에게 쏘아졌다.

콰콰콰콰쾅!

나는 검은색 청년의 검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괴물의 공격은 하나도 통하지 못했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검격이 괴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전에 잠깐 한 수를 보았던 에인프라흐 공작 그 이상이다. 물론 그때 에인프라흐 공작이 모든 힘을 보여준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검은색 청년도 마찬가지다.

“쯧! 겨우 이 정도야? 알렉스 녀석 교육을 다시 받아야겠어.”

검은색 청년은 괴물의 힘에 실망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정도 괴물에게 팔이 잘린 제자에게도 실망한 모양이다.

“그만하자. 나 바쁘다.”

순간 번쩍하고 섬광이 일어난 것 같았다. 괴물의 팔 한 짝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연속으로 번쩍번쩍하고 섬광이 일어날 때마다 괴물의 팔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검은색 청년이 검을 움직이는 것을 보기는커녕 움직임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감히 내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8성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빛이 보였을 때 괴물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목이 잘린 모양이다.

사이코 메트리로 보는 기억은 거기에서 끝났다. 내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야, 괜찮아?”

슬라이트가 근처까지 다가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아무 때나 사용할 능력은 아닌 것 같았다. 능력을 사용할 때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리고 어김없이 부작용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허기가 아니다. 열과 두통이었다. 마치 뇌를 불로 달구는 것 같은 화끈한 두통이 찾아왔다. 차라리 허기가 찾아오는 것이 낫겠다. 이것은 사탕을 먹어서 해결하지도 못한다. 이번에는 해열진통제를 준비해야 하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혈이라도 생긴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냐?”

“뭐야? 진짜 정신이 나갔던 거야? 한 10초?”

생각보다 길지는 않다. 정확히 재어본 것은 아니지만 체감상으로 내가 기억 속에서 보낸 시간은 그것보다는 훨씬 길었다.

“이게 다인 것 같다. 이제 나가자.”

변이체의 팔은 그냥 두고 나가기가 좀 그래서 기왕 손을 댄 김에 그냥 들고 나가기로 했다. 변이체의 피부와 뼈가 워낙 튼튼한 덕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딱딱하게 굳어서 부서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먼저 슬라이트가 가볍게 뛰어서 밖으로 나가고 내가 뒤를 따랐다.

내가 시커먼 괴물의 팔을 들고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브 공주가 기겁했다.

“꺄악!”

“안심하십시오. 별거 아닌, 그냥 괴물의 팔입니다.”

변이체라고 말할 순 없으니 그냥 마수의 팔이라고 둘러대려고 했다. 일단 공주를 안심시키고 아공간에 저장해두려고 했다. 가지고 있다 보면 나중에 연구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법사의 탐구욕을 자극한 것일까? 눈을 빛내며 스테이시가 옆으로 다가왔다.

[잠시 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스테이시가 잘 관찰할 수 있도록 변이체의 팔을 들어주었다. 스테이시는 여기저기를 자세히 관찰하기도 하고 마법을 사용해 뭔가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분석 마법의 일종이라도 알고 있는 건가? 이게 마수와 다른 변이체라는 것이 밝혀지면 좀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한동안 관찰을 마친 스테이시가 허공에 글을 썼다.

[이건 악마의 팔 같아요. 아마 마왕교의 우상으로 사용했던 것 같네요.]

스테이시가 그런 글을 쓰자마자 주위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이 한밤에 거실에 불을 켰을 때 들킨 바퀴벌레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히익!”

“아, 악마!”

나도 솔직히 놀랐다. 변이체가 이미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악마가 변이체와 같은 존재였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악마라는 존재는 쉽게 말하면 마왕의 하수인 같은 것이었다. 1차 마왕의 강림 때 마왕과 함께 이 세계를 침공한 무수히 많은 악마가 마왕의 죽음과 함께 온 세상으로 세상에 흩어졌다.

그리고 마왕에게 힘을 받는다고 믿으며 그런 악마들을 도와주는 마왕교라는 사이비 광신도 집단 같은 것이 있었다.

마왕을 처치한 용사들은 전쟁 후에 대륙 전체를 샅샅이 뒤져 마지막 한 마리의 악마까지 남기지 않고 척살했다. 마왕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 내가 본 게 용사 중의 하나였다는 얘기인가? 광검제? 아니면 죽음의 그림자일 수도 있겠다. 보여준 무력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돼서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겠네요.]

스테이시가 안전을 확인해주고 나서야 멀리 떨어졌던 인간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그나마도 일정 거리를 두고선 멈추어 섰다. 그중에는 슬라이트 놈도 끼어있었다. 남자 놈이 겁이 많기도 하다.

“저 녀석 아까 악마의 팔을 만지더니 기분 나쁘게 웃었어.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오히려 손가락질하며 나를 매도했다. 안 그래도 뇌에서 열이 나고 있는데 더 열이 받아 변이체의 팔을 휘둘러 슬라이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 이거 은근히 타격감이 좋다. 튼튼하기도 하고.

“으악! 악마에 닿았다!”

슬라이트가 발작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옆에 있던 자칼은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래도 5성 기사들인데 너무한 것 아니냐?

사람들이 악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부감이나 선입견은 이 정도이다. 나름 배울 만큼 배우고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슬라이트가 이렇게 경기를 일으킬 정도이니 보통 사람들이 악마에 대해 가지는 공포심은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악마 그 자체에 대한 공포보다는 용사들이 당시에 워낙 자비 없이 악마와 마왕교의 모든 인간을 처단했고 그것을 모든 국가가 도왔기 때문에 악마와 연관되면 무조건 죽는다는 인식이 시간이 지나며 이렇게 됐다는 연구 결과가 쓰인 책을 본 적이 있다.

“그것 왕실이 처리하도록 하지요.”

용감하게도 아이브 공주가 앞으로 나섰다. 물론 악마의 팔을 바라보는 아이브 공주의 표정은 무척이나 볼만할 정도로 여러 가지 감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혹시 마탑에 넘겨주실 수는 없나요?]

이번에는 스테이시가 끼어들었다. 모두가 혐오하는 것과 달리 이게 생각보다 수요가 있는 모양인데?

“무슨 용도가 있는 건가요?”

“왕실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런 것들을 발견하면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 봉인하고 있어요.”

[마탑에서는 여전히 악마에 관해 연구를 해요. 그들의 약점을 찾기 위해서죠.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을 찾기도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희귀한 연구 재료 지요.]

누구에게 넘길지는 내가 정하는 건가?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내가 장난으로 던진 말에 아이브 공주와 스테이시의 얼굴이 동시에 심각하게 굳었다.

“그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한 발언이군요.”

[악마의 신체로 거래를 하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어요.]

아주 오래 전 용사들과 모든 국가가 손을 잡고 악마를 척살하던 시대의 법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내려온 탓이다.

“농담이었습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사과드리지요.”

반역이라는데 어쩔 수 있나. 아쉽지만 공짜로 넘겨야겠다. 아무래도 봉인보다는 변이체의 약점을 찾는다는 연구에 더 관심이 갔다.

“마탑에 넘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공주님 그래도 되겠지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이 지하실에 대한 조사는 왕실에서 하게 될 거예요.”

변이체의 팔이 언제부터 왜 그곳에 있었는지는 나도 궁금하다.

“알겠습니다. 그건 공주님에게 맡기겠습니다.”

[고마워요.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인데요. 뭘”

이렇게 가식도 좀 떨어주고 이제는 내 것이 아니게 된 변이체의 팔은 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아이브 공주와 스테이시가 긴급연락망이라도 가동했는지 엄청난 속도로 마탑과 왕실에서 사람이 나와 변이체의 팔을 수거해갔고 지하실을 정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마탑에서 변이체의 팔을 수거해갈 때는 아이브 공주가 직접 공증을 서주기도 했다. 그렇게 또 엄청난 하루가 지나고 모두가 잠에 빠져든 시간 나는 조용히 지하의 연무장을 통해 지구로 넘어왔다.

확인해볼 것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치가 높은 물건에 새로 얻은 능력을 사용해보기 위해서다.

광검제가 사용했던 신검 슈바르거트, 이것을 통해서는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광검제가 사용했던 검술의 편린이라도 얻게 된다면 엄청난 이득이지 않을까?

사실 아까 전 변이체의 팔에서 보았던 검은색 청년의 검술은 감히 내가 따라 할 수도 없는 수준의 것이지만 공부가 되지 않았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보는 것을 넘어서 직접 그런 경지의 검을 맞아보는 체험을 할 기회는 없다.

아니 체험한다면 평생 단 한 번은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혀에 대기만 해도 죽는 독의 맛을 느낄 기회는 한 번인 것과 같은 이치다.

엄청난 기대를 품고 슈바르거트를 든 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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