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슈바르거트
그가 또 보였다.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청년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사람이 역시 광검제라 불렸던 지르크 폰 가이스트가 맞을 것이다.
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검제의 생전 모습을 본 사람이 되었다. 라고 생각할 뻔했으나 순간 아직 살아있는 용사가 있음을 깨달았다.
엘프 여왕 이시리엘, 마왕을 처치한 용사 중 아직 유일하게 살아있는 멤버이자 남아있는 유일한 초월자였다. 마왕의 2차 침공 이후로 엘프 왕국은 완전히 바깥과 교류를 완전히 중단하고 폐쇄적인 상태에 들어갔다.
엘프의 숲에 들어간 인간은 무조건 죽는다. 실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엘프와 이시리엘이 제국과 마찰이 있었을 당시에 엘프 숲 한가운데에서 이시리엘이 쏜 화살이 제국의 황궁에 있던 황제를 노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시리엘이 쏜 화살이 황궁의 벽 31개를 뚫고 황제를 노렸을 때 광검제가 막아냈다.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엘프 숲 중앙에서 과거 제국의 황궁이 있던 곳의 거리는 마도 기차로 달린다 해도 한 달이 훨씬 넘게 걸리는 거리다.
그런 장거리에서 어디에도 있을지 모를 황제를 저격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 거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엘프의 숲의 경계에 넘어서는 모든 인간의 이마에는 화살이 박힌다.
엘프 숲 중앙에서 생활하고 있는 엘프 여왕 이시리엘이 날리는 화살이다. 이것은 이미 수없이 증명된 사실이다. 언제 어느 때 몇명이 들이닥친다 해도 엘프 여왕의 화살을 피하지 못한다.
북부의 호랑이라 불리는 올라프 에르하트 후작이 북부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싸우는 것은 마수나 야만인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우매함과 싸우는 것이다. 엘프의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죽음을 피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엘프를 노리고 엘프의 숲에 발을 들이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나타난다.
에르하트 후작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인간들이다. 역으로 엘프 왕국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엘프 왕국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맺어진 맹약에 따르는 것도 있지만 엘프 여왕의 분노가 라이브러쉬 왕국에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슈바르거트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바뀐 시야에서 나는 광검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의 시야로 보고 있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광검제는 요리조리 돌려가면서 나를 아니 슈바르거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도 광검제가 처음 슈바르거트를 손에 넣었을 때의 기억인 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실망이었다. 얼마든지 다른 중요한 기억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시발 것, 마왕이 들고 있었을 때는 이거저거 신기한 짓 많이 하더니 내가 들고 있으니 아무것도 안 하네?”
슈바르거트의 원래 주인이 마왕이었었나?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보다 슈바르거트라고 하지 않고 슈발것이라고 했다. 익숙한 욕설이다. 광검제는 한국 사람이었던가?
“그 검의 이름이 슈바르거트인가요?”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란 귀에 보는 순간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광검제와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엘프 여왕 이시리엘이었다.
“슈바르거트? 뭐 그렇다고 치자, 내 말을 안 들어? 이 시발 놈, 네 이름은 지금부터 슈바르거트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신검 슈바르거트의 이름에 관한 참으로 하찮은 역사였다.
하지만 그것에서 내가 알아낸 사실은 절대 가볍지 않다. 광검제가 지구의 그것도 대한민국의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은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시간상 말이 안 된다. 광검제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왕의 1차 침공 직전이다. 그때만 해도 약 400년 전이다. 그럼 광검제는 조선시대 사람인가? 어쩌면 나처럼 이곳에서 환생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광검제는 출신이 분명하지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코 메트리를 쓴 부작용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현기증도 일어나서 자리에 그냥 벌렁 드러누워 머리가 식기까지 기다렸다. 이것은 단순히 해열제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사이코 메트리를 사용할만한 물건이 많이 있다. 스트라이더 997번부터 시작해서 그 안에 저장되어 있던 물건들과 사채업자들에게 빼앗았던 제국의 장부에서도 뭔가를 기대해볼 만 하다.
그런데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하루에 몇 개씩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고 이걸 계속 사용해도 되는지가 의문이다. 열 때문에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이기에 망정이지 일반인이었다면 버티지도 못했을 거다.
고심 끝에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아주 중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마탑에서는 변이체의 팔을 가져간 이후 조용했지만, 왕실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지하실을 조사했다. 원래 구 저택을 가장 오래 관리했던 지미 집사의 할아버지도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며칠 후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풀려났다.
“조사 결과, 그 악마의 팔은 아주 오래전 마왕교가 번성했을 때 마왕교에서 이곳 지하에 파묻어 놨던 걸로 판명됐어요. 그리고 그걸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남작이 찾아내어 혹시 마왕의 힘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것저것 해봤던 것 같아요. 그러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자 도로 지하실을 만들어 넣고 그 위에 집을 지은 거죠. 그 남작과 가족들은 저주받은 것인지 몰라도 이미 다 죽었어요. 그래도 관련된 사람이 누가 없는지 조사는 하고 있어요. 마왕교의 잔재일 수도 있으니까요.”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이브 공주가 수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마왕교가 아직 남아있습니까?”
당시에 용사들이 마지막 한명까지 다 죽여서 씨를 말린것 아니었나?
“물론 예전에 용사님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척살했지만 그 후에 몇세대가 지나면서 가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나타나고는 해요. 마왕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면서요.”
사이비 종교 같은 느낌인가? 대격변 이전의 지구에서도 독버섯처럼 사회의 이곳저곳에 기생해 세력을 키우던 사이비 종교가 많았다. 그리고 대격변 후에도 많은 패악질을 부렸고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이 그것들 때문에 죽었다.
나 역시 대격변 이후 그런 단체들과 몇번이나 충돌한 적이 있다. 그래서 제대로 알려주었다. 지금까지 불법 단체인 그것들을 지켜준 것은 바로 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법이 사라지고 변이체가 날뛰는 세계에서 사이비 종교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가진 힘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과 변이체가 많았다. 썩어빠진 사이비 교주의 혀는 더 이상 그들을 지켜주고 단합시키지 못했었다.
“상단의 준비는 잘 되어가십니까?”
내 물음에 아이브 공주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상단의 설립은 아버지에게 허락받았고 ‘모두의 왕국’은 이미 왕실에서 선주문도 받았어요.”
전의 영약 때처럼 또 플라시보 효과가 나타나서 기사 몇 명만 승급해 준다면 이것은 진짜 대박이 될 거다.
“다행이군요. 그래서 상단 이름은 생각하셨습니까?”
“토끼 꼬리 상단이에요.”
“그렇군요. 귀여운 이름입니다.”
뭔가 익숙한 이름이지만 공주가 작명한 것이라고 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기에 의문을 가지진 않았다. 여자애들은 귀여운 것을 좋아하니까.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지만, 여기에선 궁금하다고 해줘야겠지?
“조금 궁금하긴 하군요.”
아이브 공주는 신이 나서 상단의 작명에 관한 비사를 털어놓았다. 내가 만든 영약과 관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귀여운 이름이라서 그렇게 지었다는 얘기였다.
여자아이를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으로 실감했다. 거기에 왕족이라서 더욱 힘들다.
미스카엘은 이미 며칠 전에 아이브 공주가 마련해준 작업실로 떠났다. 철권단의 첫 번째 졸업자였다. 스승님은 아무리 다른 일을 하더라도 수련을 멈추지 말라고 조언하셨지만 나는 스승님 몰래 검술은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 조각에 모든 힘을 다해보라고 조언해주었다.
영원히 미스카엘을 못 보는 것도 아니지만 철권단은 또 시끌벅적하게 송별 파티를 벌였다. 그리고 또 한명의 재능을 찾아냈다.
“자! 슈에르츠 한 곡 뽑아봐!”
“노래! 노래! 노래!”
약간의 술이 오가며 한참 파티에 흥이 올랐을 때 철권단 중의 한 명인 슈에르츠를 나머지 철권단들이 종용하고 있었다.
“슈에르츠가 노래를 잘하나?”
옆에 있던 슬라이트에게 슬쩍 물었으나 슬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검술 말고는 의외로 무능한 구석이 많은 녀석이다.
그러는 사이 수줍게 일어난 슈에르츠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가 막혔다. 생긴 것도 철권단 내에서는 제법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슈에르츠였지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 굉장한 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가 슈에르츠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단순하게 노래를 잘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귀족들이 즐기는 문화는 있지만, 아직 대중문화라는 부분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이곳과 다르게 전생의 나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살았다.
그런데 슈에르츠의 노래는 단순히 미성이고 노래를 부르는 기술이 좋은 것을 뛰어넘어 마치 뱃사람을 유혹해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이런 걸 타고난 연예인이라고 하던가?
노래가 끝나는 순간 모두가 손이 터지도록 박수를 쳤다. 그것은 파티에 참석했던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라면 왕국에서 그 누구보다 좋은 가수들을 많이 봤을 터인데 저 정도다. 나는 또 한명을 졸업시킬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나는 공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아주 훌륭한 노래였어요.”
“공주님이 보신 최고의 가수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공주는 턱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에 못지않아요. 저 공자는 왜 기사를 하고 있는 거죠?”
그야 집에서 기사만 하기를 원했고 아직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찾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왜 다른 철권단들은 슈에르츠가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나와 슬라이트만 몰랐던 거지? 이것들이 훈련 끝나고 자기들끼리만 놀러 다니는 것이 틀림없다. 뭐 어쨌든, 그것은 상관없고. 나는 공주에게 집중했다.
“어떻습니까? 두 번째 상품이 될 것 같지 않으십니까?”
순간 공주의 눈빛이 또 금색으로 바뀌었다. 이 여자도 가만 보면 뭔가 금전에 관계된 뭔가를 타고난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지구에서 내가 좋아했던 중 슈에르츠의 목소리와 잘 어울릴만한 노래를 기억의 늪을 뒤적여 떠올려야 했고 그중 지금 왕국에서도 들을만한 노래를 또 걸러냈다. 그러다 보니 몇 곡 남지 않게 되었지만,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를 악보로 옮겨적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어려서 그나마 음악에 대한 교육도 아주 조금 받은 적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렸을 때 내 스승은 벤 행정관 같은 사람을 포함해 꽤 여러 명이 있었고 그중의 한명이 오렌 나바로라고 하는 크리스타 백작가의 집사였다.
그런데 이 오렌 나바로라는 사람이 음악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조예도 조금 있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에게 알려줬었다.
악보는 오선지가 아니고 사용하는 악기도 지구의 것과는 달랐다. 여기서는 다시 공주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어설프게 배운 지식으로는 슈에르츠의 재능을 완전히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전문가를 초빙해 도움을 받아 제대로 된 악보를 완성했다.
“오, 이것은 너무 아름다운 곡입니다. 빅터 공자는 음악적 재능도 상당하군요?”
나를 도와준 왕실 소속의 최고 연주자가 한 말이었다. 왕국에서 최고 중 한명이 한 말이니 이 노래는 분명히 먹힐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재능 따위 없다. 그냥 전생의 경험을 뽑아먹을 뿐이다.
완성된 악보를 가지고 반주를 해줄 연주자를 불러 연습하고 슈에르츠를 반강제로 끌고 와 합류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모두가 만족할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