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50화 (50/206)

50. 기다리다.

바로 통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나는 전투나 복수에 미친 놈도 아니고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줄 정도로 바보도 아니다. 굳이 지금 싸워줄 이유가 없다.

그리고 통로를 이용하면 어쩌면 굉장히 쉽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통로를 닫지 않고 자리에 앉아 녀석이 오기를 기다렸다.

단순한 떠돌이 변이체가 아니다. 마치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도 추적 계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일 것이다.

대체 어디서 십수 년을 헤매다 이제야 나를 찾아왔을까. 녀석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나를 추적해 왔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잠시 후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던 속도를 생각하면 녀석은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통로를 통해 보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다. 나는 그래도 녀석을 기다렸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내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사이코 메트리를 쓴 부작용만은 아닐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꽤 길었다. 그리고 마침내 통로가 열린 방으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3m 정도의 신장 덕분에 녀석은 구부정하게 숙여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두 발로 걷고 있지만 개구리를 닮은 몸과 팔다리 그러나 머리는 흡혈박쥐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를 가진 녀석이었다. 유난히 큰 동공은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져 번뜩이고 있었고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은 입안은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여러 겹으로 자라 있었다.

“어디서 뭐 하던 놈이냐 너는?”

들릴 리 없지만, 녀석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처음 보는 녀석이다. 내가 오랫동안 생존자로 떠돌면서 직접 본 변이체의 숫자는 적지 않다. 그런데 저렇게 생긴 녀석은 처음 본다.

변이체는 나를 찾는 것처럼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개구리의 손처럼 끝부분이 뭉툭한 손으로 방 안의 물건들을 이것저것 만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놈이 어떤 놈인지를 알았다.

녀석은 사이코 메트리를 가진 녀석이다. 백퍼센트 확신하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방의 물건들을 만지던 녀석이 통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꺼내 들었다. 설마 녀석이 통로 반대편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방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이쪽을 봤어야 했다.

아니면 사이코 메트리를 사용해서 볼 때는 통로의 존재가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벽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녀석이 내가 지구로 건너가는 지점을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통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여태까지 실험을 통해서 얻은 결과로는 녀석이 이쪽으로 건너올 수 없겠지만 변이체로 실험을 해본 적은 없다.

녀석이 만약 이쪽으로 건너온다면? 나도 죽을지 모르지만, 녀석도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내 손에 죽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집에는 스승님이 계신다. 7성 기사라면 힘이 빠진 변이체 정도는 썰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변이체가 악마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녀석이 이쪽으로 튀어나온다면 나는 아마도 악마 소환자로 몰려 왕도의 광장에서 여러 토막이 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누군가에게 목이 잘릴지도 모르겠다.

녀석의 손이 통로를 향해 다가오는 그 짧은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통로에 닿는 순간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녀석의 개구리 같은 손이 통로의 벽면을 따라 미끄러진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통로를 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쪽이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전히 뇌를 굽는듯한 두통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공간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오러를 잔뜩 불어넣어 통로를 향해 던졌다.

본격적으로 투척술 같은 것을 익힌 적은 없지만, 5성 기사가 온 힘을 다해 던진 물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살인 무기가 된다.

그러나 지난번 만났던 도플갱어의 방어력을 생각해볼 때 이것이 큰 효과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녀석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 녀석이 죽을 때까지 얼마든지 던져줄 자신이 있다.

파앙!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통로를 통과한 단검은 아무 방비도 없이 통로 쪽 벽을 어루만지고 있던 녀석의 복부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러나 칼끝이 살짝 박힌 것 같았던 단검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개구리처럼 매끈한 피부를 가진 녀석의 복부에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녀석은 곧바로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었다. 아마도 단검의 기억을 읽는 모양이었다. 순간 녀석의 입이 쭉 찢어지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듯한 표정이 되었다.

녀석은 천천히 뒷걸음질로 세걸음 정도 물러서서 통로 쪽을 응시한 채 몸을 둥글게 말아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그곳으로 나올 테니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이미 십수 년을 먹이를 먹지 못하고 사람을 찾아 떠돌았을 것이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통로를 닫아버렸다. 녀석은 언제까지 저곳에서 기다릴 것이다. 그럼 나는 그보다 강해지거나 녀석을 죽일 방법을 찾아서 넘어가면 된다. 어차피 시간은 나의 편이다. 녀석들은 먹이를 먹지 못해 실시간으로 약해지고 있고 나는 매일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녀석을 죽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녀석을 죽일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역시 통로의 존재를 스승님에게 알리고 스승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스승님이라면 아마도 내 상황과 능력을 이해해 주실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뼛속 깊이 숨어있던 인간 불신이 오랜만에 고개를 들었다.

일단 스승님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뒤로 미루도록 한다. 생각하다 보면 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시간은 나의 편이니까. 몇 달 후에는 16살이 되긴 하지만 나는 아직 15살이고 평범하게 산다고 해도 50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 전혀 급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그렇게 최면을 걸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부작용 덕분에 스승님에게 말을 하고 다시 하루 훈련을 건너뛰었다. 지난번에 이어 또 내가 아프다고 하자 여러 명이 병문안을 왔다.

상식적으로 5성 기사가 몸이 아파서 쉬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스승님은 직접 진찰을 해보시기도 했는데 의사도 아닌 양반이 내 병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아이브 공주는 왕실 소속의 의사가 만들었다는 강한 진통제를 가져다줬다. 이미 지난번에 진통제와 해열제가 듣지 않았기 때문에 쓸모는 없었지만, 나중에 신체 변형을 사용할 일이 있을 땐 유용할 것 같아서 고맙게 챙겨두었다.

슬라이트 놈은 건방지게도 빈손으로 와서 괜찮냐는 말 한마디도 없이 내 방에 있던 과일만 주워 먹고 갔다. 공작가에서는 과일을 안 주는 것인가?

자칼과 마그나는 밖에서 사 온 것인지 과일을 잔뜩 사 와서 슬라이트가 먹은 과일을 채워놓았다.

철권단원들은 차례로 찾아와 별로 쓸모는 없어 보이지만 이것저것 놓고 갔다. 그래도 어떤 놈과는 다르게 성의는 참 고마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테이시가 왔다.

[사형에게 가보실래요?]

뒷집에 사는 미친 마법사, 병원을 하고 있다고 하긴 했다. 그런데 이 부작용을 마법사가 고칠 수 있을까? 괜히 희귀한 질병이라고 하면서 미친 마법사의 실험용 쥐가 되긴 싫었다.

“아니 괜찮아.”

[사형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알고 보면 착해요.]

어리고 귀엽고 천재인 사매에게는 그렇겠지. 미친 마법사지만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고쳐준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상한 실험을 한다는 소문도 있다. 나중에 슬라이트 놈이 다치면 한번 보내봐야겠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마탑에서는 악마에게 대적하는 방법을 계속 연구 중이라고 했지?”

[네, 맞아요.]

“그거 굉장히 오래전부터 연구했겠지?”

[제가 알고 있기로는 마왕의 1차 침공 때부터 연구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럼 벌써 400전부터 연구하고 있다는 소리다.

“효과가 있는 것도 있어?”

[2차 침공까지는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고 해요.]

100년을 연구하고도 성과가 없었다고?

[그런데 그 후로는 조금 성과가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2차 침공 때는 광검제가 혼자서 다 쓸어버렸잖아?”

[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전에 투입할 기회가 없었죠. 그리고 그 후로도 많은 걸 연구했어요.]

바로 이거다. 해결책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럼 300년 동안 연구한 악마용 뭔가가 쌓여있다는 거네?”

[아마 그럴걸요?]

“악성 재고겠구나?”

스테이시는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였다. 악성 재고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안 팔리고 쌓여있기만 하다는거잖아.”

[오래된 것은 폐기했을 거예요.]

그것은 나에게 안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가져간 변이체의 팔이 있으니 그걸로도 무언가를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조금은 남아있겠지?”

[아마도요?]

“그거 어떻게 내가 싸게 살 방법이 없을까?”

[왜요?]

악마가 없는 세상에서 악마 퇴치용 무기를 사려고 하는 것이 수상해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 집 지하에서 악마의 팔이 나왔는데 언제 뭐가 또 나올지도 모르잖아. 혹시나 해서 좀 가지고 있으려고”

[한번 말은 해볼게요. 그런데 싸게 살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꼭 부탁해”

싸게 살 수 있다면 좋지만 사실 효과만 있다면 가격은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내 주머니 사정이 버텨줘야겠지만 조만간 돈 들어올 곳은 많으니까. 할부로라도 살 수 있다면 산다.

하루 만에 병석을 털고 일어난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며칠 동안 나는 매일 통로를 열어서 확인했지만, 녀석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형이 좋은 것 가지고 온다.”

오늘 드디어 마탑에서 연락이 왔다. 내일 마탑에 직접 방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마법은 돈이 많이 드는 학문이다. 마법사를 고용하는데 비싼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버는 만큼 많이 쓴다는 이야기다. 스테이시는 처음에 조금 어렵다는 듯이 말했지만, 돈이 필요한 마법사가 악성 재고를 처리할 기회를 놓친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잘만하면 싸게 후려칠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다.

다음 날 나는 우리 집에서 기생하고 있는 명문가 3종 세트와 공주까지 대동하고 마탑을 향했다. 마탑을 멀리서 보기만 했지 직접 가보는 것은 처음이다.

일행에게 물어보니 모두 마찬가지인 듯 했다. 하기야 귀한 집 자식들이 뭔가를 사 올 일이 있어도 사람을 시키지 직접 움직일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스테이시의 안내를 받아 마탑 안에 들어가니 이게 왜 마탑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무척 거대한 건축물인 마탑이지만 안에서 들어와 보니 훨씬 넓었다.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있어요. 밖에서 보는 크기보다 3배 정도 넓답니다.]

내가 두리번거리자 스테이시가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줬다. 이런 거대한 크기에 공간 왜곡 마법을 걸고 유지하다니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인가? 하지만 그게 마법사라는 생물이다.

스테이시의 설명을 듣고 일행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것들은 공간 왜곡이 걸린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1층에서 스테이시가 마치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상자 안에 들어가 안에 설치된 마법구를 조작하여 내가 구입할 악마 퇴치 물품의 담당자를 호출했다.

잠시 기다리니, 마치 전생에 봤던 대학원생과 비슷한 몰골의 마법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것들을 사러 오신 분들이라고요?”

그것들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 담당자가 얼마나 그 물건들을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드러났다.

“네, 제가 그것들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것참 고마운 일이로군요. 그런데 일행이···?”

참고로 우리 일행은 3종 세트와 공주가 끝이 아니다. 공주의 호위와 수행 인원들까지 해서 꽤나 대인원이 되었다.

“이쪽은 아이브 라이브러쉬 공주님이십니다. 수행 인원들이 있어서 일행이 좀 많습니다.”

“흐엑!”

마법사는 소스라치게 놀라 공주라는 말을 듣고 바닥에 엎드리려다가 공주의 만류를 듣고 구부정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바로 이어서 나머지 일행도 소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여긴 오페르 가문의 장남이고 저기는 에인프라흐 가문의 막내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은 에르하트 가문의 외아들이지요.”

아무리 마탑에 박혀있는 마법사라고 할지라도 이 가문들의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마법사는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스테이시에게 곁눈질을 했다. 마치 뭐 이런 애들을 데리고 왔어? 하는 눈빛이었다.

마법사의 직책이 어떤지는 몰라도 분명 스테이시도 대하기 편한 상대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마탑의 후계자가 아닌가?

[괜찮아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스테이시는 악의 없는 순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글씨를 썼다.

스테이시는 그렇다고 해도 듣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들리지 않을까? 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충분히 나쁜 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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