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마법사와 금화
마법사의 안내를 받아 넓지만 복잡한 마탑의 내부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승강기를 탔다. 마법으로 작동되는 승강기였는데 커다란 접시 형태의 발판 위에 올라서면 움직이는 것이었다.
혹시 저택을 높게 증축이라도 하게 되면 설치할 수 있을까 하고 슬쩍 가격을 물어보니 내 소망과 의지를 단번에 꺾을만한 액수였다.
어쨌든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창고 그 자체인 곳이었다. 정말 커다란 방 하나에 선반들이 끝없이 들어서 있고 선반 위에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이것들이 전부 악마 퇴치에 관련된 물건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건 내 생각보다 훨씬 많다. 스테이시가 오래된 것은 폐기한다고 그러지 않았었나?
“대체 몇 년 동안 만든 건가요?”
“100년입니다.”
400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효과가 있는 것을 만든 건 300년 전이라고 했으니 오래된 것을 폐기한 것은 맞는 것 같다.
“100년 전에 만든 것이 성능을 잃진 않았나요?”
“그건 모릅니다. 아시겠지만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살아있는 악마에게 직접 사용해본 적이 없는 것들이거든요.”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대충 보기만 해도 물량과 종류가 내 생각보다 훨씬 많아서 당황스러웠다.
“물품 목록 같은 것은 없나요?”
“따로 정리한 것은 없습니다. 대신 물건마다 꼬리표가 붙어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가까이 있는 것부터 몇 개를 확인해봤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은 둥그스름한 항아리였다.
피부 연화제 : 악마의 피부에 잘 펴서 바르고 1시간쯤 지나면 악마의 피부가 부드러워진다.
악마용 화장품이야? 피부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부드러워진다니 효과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저걸 몸에 바르라고 변이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 옆에 있는 것은 마치 고래잡이용 작살처럼 생긴 2미터는 넘을 것 같은 커다란 작살이었다.
악마용 작살 : 심장에 강하게 찌르면 죽는다.
2미터짜리 작살을 심장에 찔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생물이 있긴 하던가? 그리고 저걸 어떻게 찌를 건데? 나는 시선을 안내 마법사에게 돌렸다.
“너무 무책임한 설명 아닙니까? 효과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고요.”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은 모르겠다는 표현을 했다.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요. 아마 대부분은 연구비를 타기 위해서나 마탑에 남을 자격을 얻기 위해서 연구과제로 만든 것들일 겁니다. 세상에 남아있지도 않는 악마를 잡겠다고 누가 진지하게 뭘 만들겠습니까?”
안내 마법사는 여기 있는 것들을 팔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행색도 딱 대학원생이었지. 어디 높은 마법사의 노예로 굴려지다가 마지못해 끌려 나온 모양이다. 시선을 다시 스테이시에게 돌리니 스테이시도 옆에 있던 물건들의 꼬리표를 보고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도 분명 쓸모있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그래 어차피 시간은 많다. 나는 조금 조급해졌던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런 수준이라면 진짜 쓸모있는 것을 찾아도 헐값에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스테이시 잘못은 없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 그리고 나머지는 좀 도와줘. 나 혼자 이 중에서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을 찾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나는 그때부터 선반들을 배회하며 쓸모 있어 보이는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행들도 마치 보물찾기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사방으로 흩어져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시간 정도 창고를 샅샅이 뒤진 끝에 고르고 골라 내 앞에 놓여있는 것들이 13종의 물품이었다. 그나마도 꼬리표에 붙어있는 설명만으로 그 효과를 제대로 알 수가 없기에 상당히 후하게 평가해서 13종인 것이고 진짜 효과가 있을 것 같은 것은 8종에 불과했다. 수천개의 물건 중에서 고른 것 치고는 너무 초라한 결과였다.
“그럼 이제 계산을 해보죠.”
앞에 고른 물건들을 늘어놓고 말을 하자 안내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정말 사실 겁니까?”
“사지도 않을 거면서 왔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짜 삽니다. 물론 합리적인 가격이라면요.”
안내 마법사는 미친놈을 본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하기야 저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 쓸모없는 물건들을 산다는 놈이 나타났으니 미친놈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말 목숨이 걸린 문제다.
“제가 이걸 구입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안내 마법사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사실 정말 구입하실 줄은 몰랐기에 전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내 마법사는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가격을 알아본다며 위로 사라졌다.
“그런데 너 정말 이것들 사려는 거냐?”
슬라이트가 옆으로 와서 물었다.
“산다니까?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나?”
“아무리 봐도 쓰레기 같은데···.”
슬라이트가 중얼거렸다. 변이체가 없는 세상이라면 쓰레기가 맞다. 철저하게 변이체를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들이니까.
[저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스테이시도 자리를 비웠다.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성은 중요한 볼일을 볼 때도 저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어디를 가냐고 묻진 않았다.
“사실 왕실에도 이와 비슷한 물건들을 비축해 놓은 것이 꽤 있어요. 그런데 외부로 반출이 금지된 품목이라서 미안해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장 쓸 물건도 아니고 그냥 제 노파심과 수집벽 때문에 사려는 것이죠.”
아이브 공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실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들이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쓸모는 없을 것이다.
사실 당장 이 세상에 변이체가 풀려난다고 해도 지구처럼 치명적인 결과가 나오진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거래가 되지 않기는 해도 왕실이나 마탑 혹은 대귀족 가문에는 7 서클 이상의 마법 스크롤이 대량으로 있을 것이고 변경의 성벽이나 마도 기차에 장착된 천골포 같은 것도 있다.
그리고 7성 이상의 기사나 고위 마법사들이 모여서 대항한다면 수십마리쯤 풀려서 난동을 부린다고 해도 초기에 진압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과거 마왕의 침공 때는 수십 마리가 아니라 마왕을 포함해 수만마리가 풀려나왔으니 대륙의 모든 인류가 합심해서 싸웠던 것이다. 그리고 마왕에 대항하는 용사들이 있었다.
초월급 기사 셋과 초월급 마법사 한명, 그리고 초월급 궁수 겸 정령사 한명이 힘을 모아서도 간신히 이겼다는 마왕은 대체 얼마나 강한 녀석이었을까.
악마가 변이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마왕은 변이체가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용사들이나 광검제의 기록을 보면 마왕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확히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확실히 마왕과 대화를 나누었다면 마왕은 변이체가 아니거나 아니면 단순한 변이체가 아닌 한단계 더 위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변이체를 본 적도 없고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한국에서만 도피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해외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해외 어딘가에는 마왕이 강림했을 수도 있다. 미국의 핵 공격에서도 멀쩡했다는 변이체가 아마도 마왕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 아노더스를 침공했던 마왕과 지구의 마왕이 별개라고 한다면 아직 지구 어딘가에는 마왕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젠가 만날 확률이 제로는 아닐 것이다. 그럼 광검제가 마왕의 2차 침공 때 혼자서 다 쓸어버렸던 것처럼 초월급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내 마법사와 스테이시가 각각 사람을 한명씩 데리고 돌아왔다. 한눈에 봐도 스테이시가 데려온 사람을 보고 나머지가 쩔쩔매는 모습이다.
합리적인 추론을 거쳐 생각해보면 스테이시가 데려온 저 사람은 아마도 스테이시의 스승일 것이다. 바로 이 거대한 탑의 주인 마탑주다.
겉으로 보기에 노인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것은 경지가 높아서 그런 것일 것이다. 기사처럼 갑자기 젊어지는 수준은 아니지만, 마법사도 경지가 높아지면 노화가 느려지는 경향이 있다.
알려지기로는 마탑주는 현재 7 서클의 마법사다. 스승님과 동격 혹은 그 이상의 존재다. 순간적인 화력이나 광역 공격에 있어서는 기사가 절대 마법사를 이길 수가 없다.
“아이브 공주님을 뵙습니다. 스테이시의 스승인 마션스 켄드릭입니다.”
굳이 자신을 마탑주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공주에게도 간단히 묵례만을 취한다. 단순히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왕실과 마탑은 원래 그런 관계다.
다들 편하게 라이브러쉬 왕국 마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마탑은 라이브러쉬 왕국 소속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국가의 마탑도 마찬가지다. 물론 서로 최대한 편의를 봐주기는 하지만 종속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마탑주를 비롯한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작위를 받지도 않는다. 그래서 서류상으로는 분명 평민이지만 아무도 그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만나서 반가워요. 마탑주님 아이브 라이브러쉬입니다.”
아이브 공주도 간단히 예를 갖춰서 인사를 했다.
“막내 제자가 드물게 저를 찾아와 부탁하길래 흥미가 생겨 직접 내려와 봤습니다.”
마탑주는 즐겁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 일행을 둘러보았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오자 확실히 그가 마탑주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고위 기사가 뿜어내는 위협적이고 강렬한 기세와는 다르지만, 마치 주위의 마나가 모두 마탑주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싸우면 무조건 진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똑같았다.
“빅터 하네스군.”
일행을 둘러보던 마탑주의 시선이 나에게 멈췄다. 일행 중에서 나를 찾긴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이 중에서 마검사는 나 혼자뿐이니까.
“예, 마탑주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단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스테이시의 스승이거나 연장자라거나 그런 걸 떠나서 그는 강자다. 그렇다고 모든 강자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눈앞의 강자는 그럴 자격을 갖추고 있는 강자였다.
“자네 상당히 특이하군?”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 했지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남들보다 특이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특이한 것은 아마도 지구의 마나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스승님이나 에인프라흐 공작은 기사라서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눈앞의 마탑주는 누구보다 마나에 민감한 고위 마법사다.
“아주 구식의 연공법을 사용하고 있어. 그거 제국 시대의 것인가?”
다행히도 지구에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결코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내가 쓰는 마나 연공법은 스트라이더 997번에서 나온 제국의 것이 맞다. 이것의 출처를 자세히 파고든다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어보인다.
“예, 우연히 얻게 되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지. 그런데 새로 개발된 연공법이 훨씬 좋은 것이니 기회가 된다면 바꾸도록 하게나. 마탑에서 아주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들이 있다네”
그것을 내가 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저렴하다고 했지만 절대 저렴하지 않다. 내가 여태까지 번 돈을 안 쓰고 모두 모은 뒤 그것을 두배로 곱해도 구입하지 못할 가격이다. 그것조차 외부에 판매하는 연공법 중에서 하급의 것이다.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행이었다. 알고도 넘어가 준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런 사람들이 꽤 있어서 쉽게 넘어간 것인지는 모른다. 일단 적의가 없는 것을 봐서는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그런데 여기 있는 것들을 구입하고 싶다고?”
“예, 마탑주님”
“특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군. 그래 얼마에 살 텐가?”
돈 얘기로 넘어가면 아무리 상대가 마탑주라고 해도 쉽게 당해줄 수는 없다. 애초에 가진 돈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지만, 마법에 관련된 물품의 가격을 생각하면 절대 방심할 수는 없다.
“영원히 팔리지 않을 물건들을 처분해드리는 것이니 최대한 싸게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들어간 재료비만 해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네.”
옆에서 스테이시가 마탑주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싸게 팔아 달라고 미리 이야기했겠지.
“일단 얼마인지는 알아야 흥정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거기 자네 여기 담당자겠지?”
“예, 마탑주님”
“여기 골라놓은 이것들 가격이 얼마로 책정되어 있는가?”
“계산해보겠습니다.”
안내 마법사와 함께 나타난 노인이 마탑주의 부름에 머리를 조아렸다. 마탑주가 훨씬 젊어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저 노인보다 많을 것이다. 괜히 머리를 쓰는 마법사가 아닌지 노인은 목록을 꺼내 확인하더니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33200 금화입니다.”
이런 미친 마법사 새끼들, 하마터면 이 말을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