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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52화 (52/206)

52. 형 왔다.

내가 속으로 욕한 것을 느낀 것인지 마탑주가 허허 웃으면서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너무 놀라지 말게 애초에 팔 생각이 없어서 높게 잡은 가격이니까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네 내 말이 맞나?”

“그렇습니다. 마탑주님”

마탑주의 확인에 노인이 수긍했다. 그래도 그렇지 저건 무슨 정신 나간 가격이란 말인가. 사러 왔다가 그냥 갔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가격 보고 놀라서 도망간 것 아닌가?

“그럼 현실적인 가격은 얼마나 됩니까?”

“그래 얼마나 되지?”

내 물음에 마탑주는 다시 시선을 노인에게 돌렸고 노인은 목록을 보며 열심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느긋한데 노인이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죄책감 같은 것은 내게 사라진 감정인 줄 알았는데 전생의 유교 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영향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었나 보다.

“갑자기 가격 산정해서 애매하긴 합니다만 정가로 계산한다면 금화 4500개 정도가 되겠습니다.”

엄청나게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비싸다. 애초에 내가 아니면 살 사람도 없는 물건들이니 정가로 살 생각은 없다.

“그래도 너무 비싸군요.”

내 의견을 확실하게 제시했다. 마탑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에게 다시 물었다.

“원가로 계산한다면 어떤가?”

노인이 다시 땀을 줄줄 흘리며 이제는 목록이 아니라 웬 책 한권까지 꺼내 계산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마탑주가 그만큼 대하기가 그만큼 부담스럽거나 무섭다는 뜻이다. 지금 상대하기로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마탑 소속이라면 다를 수도 있긴 하겠다. 회사 사장님들도 직원들에게나 무섭지, 회사 밖으로 나오면 그냥 아저씨 아닌가?

“금화 1200개 정돕니다.”

다시 확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비싼 가격이다. 전생에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4달라 드립처럼 나도 무조건 금화 4개를 외치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 날강도고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많이 깎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르고 골라서 나온 물건들인데도 너무 효과가 애매한 것 같습니다.”

애초에 하자가 있는 물건들이다. 물건에 문제가 있으면 가격을 깎는 것이 당연하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네. 이것들은 완전히 대 악마용으로 한정된 물건들이거든.”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악마에게만 효과가 있도록 연구해서 만든 물건들이라는 거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물건들이라면 이렇게 개인에게 쉽게 판매가 가능하겠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시선을 아까 봤던 2m짜리 작살로 돌렸다. 저건 악마가 아니라도 아무나 찔리면 죽는 것 아닌가?

“그럼 저건 뭡니까?”

“저런 건 대장간에서도 팔지 않나?”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럼 그런 걸 왜 만들어서 100년씩 쌓아놓는 건데? 하지만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문제다.

“그래도 어차피 제가 아니면 살 사람도 없어서 폐기될 물건들 아닙니까? 좀 싸게 주십시오.”

나는 대놓고 뻔뻔하게 할인을 요구하기로 했다. 어차피 수 싸움을 하자고 하면 저 노회한 괴물을 이길 자신이 없다. 스테이시의 아까 행동을 봐선 이미 깎아줄 생각이 있으니 높으신 분이 여기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 어차피 버릴 물건이라면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래서 얼마면 살 텐가?”

뇌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탑에 오기 전부터 원래 내가 생각했던 금액의 상한선은 금화 600개 정도 딱 재료비의 반값이다. 그런데 조금 더 깎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 옆에서 아이브 공주가 끼어들었다.

“금액이 모자라시면 제가 좀 보태드릴까요?”

마음은 고맙지만, 돈이 모자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이 순진한 아가씨야. 공주가 끼어든 타이밍이 영 좋지 못하다.

“나도 도울 생각이 있네.”

“나, 나도”

마그나와 자칼까지 끼어들었다. 평소에 같이 뒹굴며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하고 있으니 체감이 잘 안되지만 얘들 왕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집안 자식들이다. 예전에 슬라이트가 망나니 시절에 펑펑 쓴 금액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슬라이트를 한 대 때리고 말았는데 아마 얘들도 금전 감각은 비슷할 것이다.

“나도 큰형에게 연락을 넣어보지”

결국 슬라이트까지 나섰다. 하지만 마탑주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 스테이시가 다시 손가락으로 마탑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까보다 강도가 좀 세진 듯 하다.

하지만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금화 1200개라고 해도 조금 무리를 한다면 지불하지 못할 것도 없다.

“금화 300개 정도라면 제가 사겠습니다.”

재료비의 4분의 1, 상당히 후려치는 가격이었지만 어차피 내가 아니면 살 사람이 없는 물건들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조금 더 높여서 흥정하면 되겠지.

“좋네. 그 가격에 주도록 하지.”

그런데 마탑주가 너무 쉽게 승낙했다. 이게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신 스테이시를 잘 부탁하네.”

할인의 대가로 제자를 잘 부탁한다는 건가? 그런데 기사라면 모를까 내가 스테이시를 도울 방법이 마땅치가 않다. 기껏해야 매일 대련을 해주는 정도?

“이야, 장로님 근 200년 만에 악마용 상품으로 매출을 올린 담당자가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마탑주는 곧바로 노인에게 축하를 건넸다. 조금 전까지 잔뜩 위축되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던 노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저 할아버지 마탑의 장로였어? 마법사가 아니라 배우를 했으면 대성했을만한 연기력이었다.

“아이고, 마탑주님 덕분입니다.”

이거 내가 당한 건가? 시선을 스테이시에게 돌리자 스테이시는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금화 300개에 사는 건 변함없지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원래 정가는 얼마입니까?”

“금화 33200개”

마탑주가 싱긋 웃으며 원래 가격을 그대로 읊었다.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면 진짜 저 가격을 받을 생각이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나는 금화 300개를 그 자리에서 지불하고 13종의 물건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스테이시에게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나왔다.

[사실 그냥 주시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원래 비싼 물건은 맞아요.]

내 금화 300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래도 금화 300개에 지구에 있는 내 집을 차지하고 있는 변이체 놈을 죽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다. 까짓것 금화 300개에 변이체 한 마리씩 죽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돈을 쓸 수 있다.

집으로 돌아와 지하 연무실에 사 온 13종의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1. 악마용 마비독 (5회분) : 이 독에 악마의 근육이 마비되는 것을 확인

2. 악마 추적 장치 : 악마 특유의 마나 파장을 추적할 수 있는 장치

3. 악마용 피부 독 (1회분): 악마의 피부에 심한 발진이 생기는 것을 확인

4. 악마용 향수 (3회분): 악마의 후각세포가 활동을 멈추는 것을 확인

5. 시각 상실용 섬광탄 (일회용) : 악마의 경우 기사보다 34배의 강한 섬광에 단시간 시각을 잃는 것으로 추정. (주의 : 인간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음)

6. 악마용 단검 : 발킬라이 광석을 제련하여 만든 단검, 악마의 피부를 쉽게 베어낼 수 있다. 단 내구성이 매우 약하다.

7. 악마용 혈액독 (3회분) : 악마의 혈액에 반응하여 혈액을 굳어지게 만든다.

8. 악마용 성적 흥분제 (1회분) : 악마의 성기가 반응하는 것을 확인

여기까지가 그나마 설명으로 확실히 효과가 있을 것 같은 물건 8종이었다. 과연 전투에 써먹을 수 있을지 미지수인 것도 몇 가지 있긴 했지만 고르고 골라서 나온 것이 겨우 이거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가져온 것 5종이 있다.

9. 악마를 가두는 상자 : 이곳에 갇힌 악마는 밖으로 나올 수 없음.

10. 투시 안경 : 악마의 신체 내부를 투시할 수 있다.

11. 악마용 공격 팔찌 : 이 팔찌를 장비한 기사는 악마에게 두배의 타격을 가할 수 있음.

12. 악마용 심장 말뚝 : 악마의 피를 먹을수록 강해지는 말뚝

13. 악마를 먹는 벌레 : 대륙 동쪽 신성 왕국이 있었던 곳 지하 깊은 곳에서 자생하는 벌레, 악마의 시체를 먹이로 삼는다. (현재 동면 중)

로또를 긁는 마음으로 가져온 5종의 물건이다. 설명이 명확하지 않고 과연 효과가 제대로 있는 것인지 의문인 물건들이다. 효과가 있는지 실험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은 것도 몇 개 있다.

그래도 실제 살아있는 악마가 아닌 시체만 가지고 연구해서 사람에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악마에게만 효과가 있는 물건들을 이만큼이나 만들어낸 마법사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어 나는 통로를 열었다.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마치 석상처럼 그대로 있었다.

“형 왔다.”

낮에 온종일 이 물건들로 어떤 조합을 짜면 효과적으로 저 변이체 놈을 죽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머릿속으로 수백번의 모의전을 치렀다.

다만 이 물건들은 변이체의 시체로만 실험했지 살아있는 변이체와 목숨을 걸고 싸워가며 실험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나도 목숨까지 걸어가며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다시는 지구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성장에는 분명 제동이 걸리겠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이미 이룬 것만으로도 나는 원래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작전을 세웠다.

일단 악마용 공격 팔찌를 팔에 찼다.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다. 뭔가 마법진 같은 것이 잔뜩 새겨져 있긴 한데 무슨 원리로 작동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그래도 뭔가 연구 결과가 있었으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비 독 한 병을 손에 쥐었다. 작은 병 안에는 뭐로 만들었는지 모를 푸른색의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피부위에 바르기만 해도 근육에 마비가 오는 것인지 아니면 몸 안에 주입해야 효과가 있는 것인지 얼마나 마비가 유지되는 것인지 그런 설명은 없었다.

일단 마비 독은 5회분이 있으니 여유가 있는 편이다. 슈바르거트도 미리 꺼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후우”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마비 독의 뚜껑을 열고 병을 든 손을 통로에 슬쩍 밀어 넣었다. 순간 마치 대포알처럼 멈춰있던 변이체 놈이 도약했다.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벌리고 단번에 내 팔을 잘라 먹겠다는 의지를 가득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했던 움직임이었다. 30년이 넘게 변이체들을 상대했던 것이 나다. 녀석들의 행동 패턴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변이체에 대한 학문이 있다면 박사는 따놓은 당상이다.

이미 예상하던 반응이라서 녀석의 한껏 벌린 녀석의 입속으로 마비 독을 집어던지며 팔을 뺐다.

텁!

간발의 차이로 손이 녀석의 입을 피해 돌아왔다. 통로 건너편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녀석이 입에 닫히며 그런 소리가 났을 것만 같았다.

달려들었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녀석이 통로가 열린 벽에 머리를 박고 다시 뒤로 물러섰다. 마비 독이 들은 병을 삼켰는데도 딱히 효과는 없어 보인다. 즉효성이 아닌 건가? 효과가 나타나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한 독일 수도 있으니 기다려본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녀석은 물러난 자세로 잠시 그대로 있다가 다시 원래의 웅크린 자세로 돌아갔다. 이러면 마비 독이 작용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다.

나는 빈손을 한 번 더 안으로 집어넣었다. 여지없이 녀석이 튀어 오르며 손을 노렸다. 그런데 아까와 다르게 반응이 조금 느렸다.

단순히 우연인지 아니면 독이 작용하는 것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면 한 번 더 하면 된다. 녀석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뒷걸음질하는 폼이 영 자연스럽지 않다. 한쪽 다리를 살짝 절었다.

‘됐구나.’

나는 확신했다. 변이체에게 독을 먹여본 적은 없지만, 녀석들은 팔이나 다리가 하나 날아가더라도 엄살을 피우는 경우가 없다. 절대로 조금 전처럼 다리를 저는 흉내는 내지 않는다.

약효가 조금만 더 돈다면 나가서 한번 붙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웅크리려다가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며 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하지만 성급하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한 번 더 확인한다. 손을 한 번 더 뻗었다. 녀석이 달려들기 위해 쓰러진 채로 버둥거렸지만 일어서지는 못했다.

나는 그제야 한손에 슈바르거트를 다른 한손에는 악마용 단검을 들고 통로를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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