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강해지는 맛
이번에는 지구의 토끼꼬리 풀 수확량이 조금 많았기에 진짜 약은 37개가 완성됐다. 저택의 화분에서 키운 토끼꼬리 풀로 만든 가짜 약도 혹시 몰라 비슷한 수량으로 만들어두었다.
이번에는 수량이 꽤 되다 보니 만드는데도 꽤 시간이 오래 걸려 다 만들고 나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평소에도 불면증 덕분에 보통 사람보다 잠을 적게 자는 편인데 가끔 이렇게 밤을 새우고도 몸이 멀쩡한 것을 보면 기사가 좋긴 좋다. 전생이었다면 이미 몇번은 지쳐서 쓰러졌을 것이다.
내 상태를 잘 알고 계신 스승님은 그래도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 좋다고 하시지만 오랜 습관이고 일종의 질병이라 오래 잠을 자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수면제 같은 것을 처방받으면 푹 잘 수도 있겠지만, 몸에 이상이 온다면 모를까 벌써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2차 영약 배포가 있다는 것은 이미 며칠 전에 알린 상태였고 스승님의 허락을 받아 오전 수련을 건너뛰고 영약을 나눠줬다.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스테이시는 영약 자체보다는 제조 과정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왕실에는 제조 방법을 공개한 상태지만 처음 몇 명을 이후로는 승급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 효과에 대해 의문을 남기고 있었다.
“못 알려줄 것도 없는데 대신 거래를 했으면 좋겠어.”
방법 자체는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의 마나니까.
[뭘 원하시나요?]
“악마용 혈액독을 만드는 방법과 교환하면 어떨까?”
변이체를 상대하며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혈액독이었다. 아직 2회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변이체를 만날지 모르는데 직접 제조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스승님께 말씀을 드려볼게요]
“그래 좋은 대답 기다리고 있을게.”
영약을 만드는 중에 고심 끝에 진짜 약을 먹을 사람을 골랐다. 일단 기존에 한 번씩 먹었던 사람들은 제외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는 세 명밖에 남지 않는다. 공주까지 더하면 네 명이겠지만 감히 공주에게 어떻게 이 끔찍한 것을 먹인단 말인가.
“공주님도 드셔보시겠습니까?”
“저도 먹어봐도 되나요?”
그래도 예의상 물어보긴 했는데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고 나서 결정하시죠.”
잘못하면 왕실의 품위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공주가 토하는 꼴을 십수 명이 보게 될 테니까.
먼저 철권단에게 영약을 나눠줬다. 미안하지만 전부 가짜 약이다.
“우욱!”
“궤에에엑!”
괴상한 소리와 함께 영약을 억지로 삼키는 철권단원들이었다. 약의 효과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뱉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나름 개량했는데도 맛은 크게 나아지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솔직히 아무도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플라시보 효과가 이번에도 적용이 된 모양이다.
두 명이 승급했다. 철권단원 중 가장 재능이 좋다고 하는 크리스 힝켈과 오스마르 바르트였다. 2성이었던 둘이 3성으로 승급했다. 둘 다 스승님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승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둘의 승급과정을 보호하시고 돌아온 스승님이 옆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말씀하셨다.
“이상하느냐?”
“알고 계셨습니까?”
“네가 얼굴로 말하고 있지 않으냐. 이게 왜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내 표정 관리가 그 정도로 형편없었나? 그보다는 스승님이 독심술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닐까?
“제가 만들었지만 저게 왜 효과가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영약이잖느냐”
“네?”
“효과가 미미하긴 해도 영약은 맞다. 이번 것은 전처럼 길을 열어주는 효과는 없는 것 같긴 해도 말이다.”
가까이에서 둘을 보호하면서 오러의 흐름까지 읽으신 모양이다.
확실히 내가 화분에서 키운 토끼꼬리 풀도 엄밀히 따지면 영초인 것은 맞다. 가장 최하급의 영초라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 정도이긴 하지만 연단까지 했으니 효과가 제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이게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라는 소린가?
“그렇군요. 저는 약효보다는 몸에 좋은 것을 먹었다는 생각이 발전을 돕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없잖아 있겠지. 중요한 것은 네가 저들에게 그만큼 믿음을 줬으니 약도 효과를 본다는 것 아니겠느냐?”
갑자기 훅 들어와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 스승님 때문에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하루빨리 졸업시켜 전부 집에서 쫓아낼 생각만 하고 있는데 말이다. 말을 돌리기 위해 아이브 공주에게 다시 물었다.
“아직 드시고 싶으십니까?”
철권단원들이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 삼키는 것을 보고도 아직 호기심이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조금만 먹어봐도 되나요?”
가짜 약이라면 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애초에 공주는 마음만 먹는다면 왕실 쪽에서 얻어도 되는 물건이다. 그래서 가짜 약을 하나 내줬다.
가짜 약에 살짝 혀끝을 대본 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하게 입을 막더니 굉장히 빠른 걸음으로 별궁으로 도망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철권단원과 슬라이트가 나를 천하에 죽일 놈처럼 몰아세웠다.
“악마”
“냉혈한”
“저 정도면 반역 아닙니까?”
“공주님의 암살 시도였나?”
아직 영약의 맛을 보지 못한 명문가 3종 세트만이 어리둥절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다음!”
나는 비난을 가뿐하게 무시하며 나머지 인원들을 불렀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슬라이트, 방금 나에게 반역죄를 씌우려고 했겠다? 넌 가짜 약이다. 뭐 애초에 처음부터 진짜 약을 줄 생각도 없었지만 가짜 약을 만들던 중에 소분의 실패로 가장 크게 만들어진 것을 주기로 했다.
“뭐야 왜 이렇게 커?”
철권단에게 나눠준 것보다 거의 1.5배는 되는 큼직한 영약을 손 위에 올린 슬라이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몸에 좋은 거니까 많이 먹어라.”
슬라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파리 쫓듯이 손바닥을 휘둘러 슬라이트를 쫓아냈다.
그리고 마그나와 자칼 그리고 스테이시의 차례, 마그나를 주는 것은 확정이었고 마지막까지 고민 끝에 모두에게 했다. 스테이시의 경우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내가 지구로 오가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나를 추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여러 가문에 은혜를 입혀놓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적어도 아직은 마탑과 북부 그리고 내무대신의 힘이 내 주변을 지켜주는 것이 더 이득이다.
세 사람은 앞에 복용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봤기에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다시는 먹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
[왜죠?]
떨던 몸을 멈추고 스테이시가 의문을 나타냈다. 마법사의 지적 호기심이란 두려움도 떨치는 효과가 있다.
“돈도 많이 들고 거기에 지금은 정원사도 없으니 나 혼자 기르기도 힘들어. 나중에 다시 토끼꼬리 풀을 기를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중단이야.”
실제로 마석을 태워 가며 토끼꼬리 풀을 기르는 것이 돈이 꽤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37개를 만들어 놔서 여분이 좀 생긴 것도 있지만 다시 지구 쪽에 다시 농사를 짓는 것이 망설여졌다.
기상연구소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우연인지도 모르겠지만 떠돌이가 벌써 두 번째 찾아왔고 앞으로 어떤 놈이 찾아올지 모른다. 내가 조금 더 힘이 있다면 오는 족족 잡으면서 힘을 키웠겠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아직은 피해 다니며 힘을 기를 때였다.
[원하신다면 마탑에서 영초를 지원해드릴 수도 있어요.]
“굳이 도움까지 받아 가면서 영약을 많이 만들 생각은 없어. 왜 인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스테이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사람이니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자칼에게 다가가 땀이 흥건한 손에 영약을 올려주었다.
“걱정하지 마, 아직 죽은 사람은 없어.”
괜히 장난을 쳤나? 자칼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옆의 마그나도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녀석은 자칼처럼 소심하지도 않은데 왜 이리 긴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맛없는 것 한번 먹는 게 그렇게 무서워?”
“맛없는 것을 먹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걸 먹고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내가 볼 때는 나보다 훨씬 성공한 녀석이다. 잘생긴 얼굴에 좋은 집안에 모자랄 것이 없는데, 왜 이리 성공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다. 몇 번 넌지시 물어봤는데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했다.
스테이시에게도 영약을 건네주자 넷은 거의 동시에 영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으읍!”
자칼은 앞으로 손을 뻗으며 뭔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이것은 누구도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읏! 읏!”
스테이시가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을 처음 들어봤다. 생각보다 귀여운 목소리였다.
“끄으윽!”
마그나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면서 영약을 꼭꼭 씹어먹고 있었다. 그냥 삼키나 씹으나 효과는 똑같다는 것을 알려주려다가 참았다.
“널 우욱! 반드시 우욱! 죽이겠다. 우욱!”
남들보다 훨씬 큰 영약을 받은 슬라이트는 요령이 좋게도 헛구역질하면서 나를 저주하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아 참아라 그것은 강해지는 맛이니라.
잠시 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슬라이트와 자칼, 스테이시는 승급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괴물같은 천재 놈들이 나를 앞서가는 것은 부담스럽다.
슬라이트야 가짜 약을 받았으니 당연하고 자칼은 승급한지 얼마 안 된 영향인 듯 싶었다.
“스테이시는 아쉽네 효과가 없어서.”
[아니에요. 충분히 효과가 있었어요.]
승급이 가능할것 같았던 스테이시는 마법사라서 그런 것인지 승급에 실패했다. 아쉬울텐데도 스테이시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기특해서 사탕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러자 슬라이트놈이 귀신같이 나타나서 손을 내밀었고 자칼도 그 뒤에 숨어서 손을 내밀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사탕을 내놔라.”
“주, 주세요.”
슬라이트 놈에게 간디가 빙의하셨나?
“이게 그렇게 맛이 없나?”
내가 사탕 대신 영약을 하나 더 꺼내자 슬라이트가 몸서리를 쳤다.
“지난번보다 더 지독한 맛이었다. 마치 걸레 빤 물을 먹었다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기분이다. 하나 더 먹으면 6성 기사가 된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어질 정도다.”
슬라이트의 적나라한 설명에 옆에서 자칼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개량했는데 왜 더 맛이 없어진 거지?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잘못 가르쳐준 왕실 연단술사를 탓해야 한다.
둘에게도 사탕을 하나씩 나눠주고 마그나를 지켜보았다. 넷 중에서 유일하게 마그나가 승급에 성공해 이번에도 스승님이 수고를 하고 계셨다.
“허어!”
마그나의 근처에 계시던 스승님이 갑자기 감탄사를 내뱉으셨다. 뭐가 잘못됐나 싶어서 살펴보니 마그나의 상태가 이상했다.
“뭐냐 저건? 말도 안 돼.”
나 다음으로 이상한 것을 눈치챈 슬라이트가 보기 드물게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나요?]
스테이시가 나에게 물어왔다.
“아마 맞는 것 같아. 두 번 연속 승급이야.”
2성 기사였던 마그나가 3성에 오른 데 이어 바로 4성 기사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사례가 과거에 있었나? 스승님이라면 알고 계실 텐데 지금은 질문하기가 어려웠다.
“와아!”
자칼조차도 입을 크게 벌리고 놀라워하고 있었다. 잠시 후 승급이 끝나고 마그나가 몸을 일으켰다. 마그나는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그동안 뭐가 맺힌 것이 많았는지 마그나가 길게 포효했다. 모두가 마그나를 축하해주었고 마그나는 평소의 바른생활 꼰대 모드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웃으며 모두에게 화답했다.
“고맙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다.”
내 손을 잡고 마그나는 몇번이나 약속했다.
“그래, 잊어버리지 마라.”
잊어버려도 찾아가서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나중에 스승님에게 여쭤보니 두 번 연속 승급하는 것이 아주 드물지만,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마그나는 그동안 명가의 자식으로 많은 지원을 받았고 그중에는 영약 같은 것도 많았는데 그것이 힘이 뭉쳐있다가 내가 준 영약의 힘으로 길이 열려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설명도 해주셨다.
늘 그렇듯이 이런 날에는 파티가 열렸다. 모두가 먹고 마시며 즐겼고 별궁으로 도망갔던 아이브 공주도 뒤늦게 돌아와 파티에 참석해 어울렸다.
마그나의 소식이 당연히 본가에도 전해졌고 며칠 후 나와도 관계가 조금 있는 내무대신이 직접 우리 집에 행차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