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56화 (56/206)

56. 출근하지 않는 정원사

분명 나라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데 아니 아예 다른 차원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직접 본 내무대신은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대격변 이전의 대한민국에서 텔레비전에 매일 보이던 얼굴과 똑같았다. 자신이 부패한 정치가라는 것을 누가 알아주지 않을까 봐 온몸으로 나타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전에 봤던 정치인들과 한치의 다름도 없이 거짓 웃음을 지으며 우리 집에 사는 모두와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슬라이트나 자칼 등과 악수를 할 때는 유독 오래 손을 잡고 있기도 했다.

내무대신 나단 오페르는 의외로 나에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미약하긴 하지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전의 사건에 대해 나를 의심하고 있긴 한 것 같았다.

내무대신은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스승님과는 따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두 시간이 넘는 긴 대화였지만 요약해보면 조금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이것조차 지구의 정치인과 너무나 비슷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와 말을 섞는 것도 아니었지만 몇 번이나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격변 직후의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행동이란 정말 혐오스러운 수준의 것이었다.

그중에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인 시의원과 시장도 있었다. 그들은 무능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정치인이 변이체보다는 다른 생존자들의 손에 의해 죽었다고 알고 있다. 내가 알고지낸 오래 살아남은 생존자치고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한두명 죽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마 그것은 확실할 것이다.

마그나는 그런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우 곤두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그나의 눈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나 애정 같은 것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나와 같이 혐오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무대신은 혼자 온 것도 아니었다. 마그나의 동생인 차남을 같이 데려왔는데 내무대신의 복사판이라고 해야 할까? 내무대신과 생긴 것부터 하는 행동까지 똑 닮아있었다. 나와의 첫 대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빅터 하네스인가?”

나와 동갑이라서 반말을 해도 할 말이 없긴 한데 굉장히 고압적인 자세였다.

“그래”

고압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짧게 대답했더니 녀석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네가 재주가 좀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아까보다 눈썹의 움직임이 조금 더 커졌다. 아직 어려서 내무대신처럼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재주를 우리 오페르 가문에서 써볼 생각은 없는가?”

“없다.”

내가 왜 이제 와서 내무대신의 밑으로 들어가겠는가. 누구 밑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지만 만약 들어간다 해도 오페르 가문은 아닐 것이다. 단호한 거절에 녀석의 이번엔 눈썹의 위치가 원상복구가 되지 않았다.

“다시 물어보지. 나를 위해 그 재주를 쓸 기회를 주마.”

오페르 가문도 아니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 이건 미친놈인가? 내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마그나가 끼어들었다.

“미들턴 그게 무슨 실례냐! 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겐 예의를 다하라고 몇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바른생활 꼰대가 또 불이 붙어서 자기 동생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름이 미들턴이었군. 마그나의 동생은 그 잔소리가 아주 익숙한 것처럼 신경도 쓰지 않고 시선을 나에게서 돌리지 않고 있었다.

“마그나 하나 물어볼 게 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

예의 바른 꼰대 마그나는 동생에게 잔소리하던 와중에도 내 질문에 바르게 대답했다.

“네 동생하고 너하고 어머니가 다르냐?”

“아니다. 우리 어머니는 같다.”

워낙 외모 차이가 나서 혹시나 어머니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귀족이 첩을 여러 명 두는 것이 큰 흠이 아닌 세상이니까. 그리고 앞의 형제를 한번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이 자식이!”

미들턴이 발끈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지금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는데 아쉽게도 바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은 형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으니까. 그런데 지가 화를 내면 어쩔 텐가? 마그나가 이곳에 왔을 때 2성 기사였지만 미들턴은 그조차도 되지 않았다. 아직 오러홀도 각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녀석도 권력가의 자식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발끈한 미들턴이 덤벼들려고 했지만 나는 5성 기사다.

“으윽!

덤벼들려고 하는 미들턴에게 기세를 집중하자 미들턴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

“그만! 그만해라.”

마그나가 끼어들어서 말렸다. 마그나가 끼어들어서 말리지 않았어도 딱히 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고통은 조금 더 줬을 것이다. 여태까지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그렇게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날을 위해 영향력을 늘리고 공주를 비롯해 다른 명문가 자제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들턴 너는 아버지 곁으로 가서 자중하고 있어라.”

“시끄러워, 네 말 따윈 듣지 않아.”

미들턴은 마그나의 말을 무시하고 철권단이 모여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미안하다. 동생이 실례했다.”

“괜찮아. 이 정도야 뭘”

사실 조금은 내가 유도한 것도 있었다. 내무대신이 과연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었다. 내무대신은 분명 이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서지 않았다. 살짝 도발을 걸어 내무대신의 본심을 조금은 끄집어내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노련한 정치인인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마그나가 미들턴과 내무대신을 번갈아 보며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를 악물고 성공하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지. 몇 번 물어보기도 했고.”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왜 마그나 정도 되는 녀석이 굳이 그렇게 힘든 길을 걸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그리 바르지 못한 사람이다. 아니 상당히 썩어빠진 귀족이다.”

그것은 직접 경험한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보다시피 동생 녀석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비슷하다.”

그래 아주 판박이더라.

“아버지는 부패했지만 유능하기에 왕실에서 봐주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동생의 기량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대로 가면 가문이 무너지는 것은 기정사실이지.”

“잠깐 장남은 너잖아? 네가 가문을 물려받는 것 아니었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많이 기운 상태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기와 쏙 빼닮은 아들과 자신과 완전히 반대 성향의 아들 중에 후계자를 고르라면 보통은 자신과 닮은 쪽을 고를 것이다.

“그래서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려고 한 거군?”

“그래, 그래야 가문이 살아남을 테니까. 아니 가문을 떠나서 떳떳한 귀족이 되고 싶다.”

어째서 저런 아버지 밑에서 이런 아들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마그나가 조금 선민의식이 있기는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니다. 나로서도 마그나가 오페르 가문의 뒤를 잇는 것이 더 이득이다. 그래야 뭐라도 나중에 받아낼 것이 아닌가.

“그래, 네 사정은 알았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마그나의 사정도 알았겠다. 기회가 된다면 마그나를 조금 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저 미들턴이라는 놈을 치워버리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지난번처럼 확 암살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시도 자체도 어렵겠지만 내무대신의 후계자로 유력한 녀석이 암살당한다면 지난번 사채업자들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내무대신과 미들턴이 돌아갔다. 내무대신은 돌아가면서 생색을 내기 위함인지 보답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한마디로 공수표다. 이것조차도 지구의 정치인을 닮았다. 개인적으로 정말 죽이고 싶은 인간이었다.

내무대신이 찾아왔던 날 오후에 마탑에서도 연락이 왔다. 내 영약을 만드는 방법과 악마용 혈액독의 교환에 관한 이야기였다.

[죄송해요.]

답은 거절.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스테이시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괜찮아. 딱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뭐”

혈액독의 제조 방법을 알았다면 조금 안심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다른 물건들도 꽤 남았고 혈액독도 두 개가 남아있다.

공벌레들은 이제 먹을 것도 없는데 동면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여러 가지 야채나 고기류 등 다른 먹이가 될만한 것들을 골고루 줘봤는데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손님이 오는 날이었는지 오후 늦게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도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어쩐 일이에요?”

우리 집에서 정원사로 일하다가 스카우트되어 나갔던 벤프리가 찾아왔다. 벤프리 이후로 새로운 정원사를 뽑으려고 했었으나 집사의 능력으로도 새로운 정원사를 뽑지 못하고 있었다.

토끼꼬리 풀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대 유행이 일어나면서 이것을 기르려고 귀족들이 고액으로 정원사들을 고용해 능력 있는 정원사들의 씨가 말라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토끼꼬리 풀은 정원사보다는 마법사가 기르는 것이 더 잘 기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귀족들과 상인들이 정원사들을 모조리 고용해버린 것이었다.

“하하, 예상하셨겠지만 잘렸습니다.”

벤프리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새로운 효과를 가진 토끼꼬리 풀을 기를 수 있을까 해서 벤프리를 데려갔지만 당연하게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건가요?”

“네, 다른 곳에서도 몇군데 오라는 곳이 있었지만 거기서도 어차피 오래 못 다닐 텐데요. 눈치도 많이 봐야 하구요. 여기가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요. 보수는 전과 같을 거예요.”

“그럼요. 그걸로 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벤프리가 작업하다가 말고 나간 정원의 작업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일부는 관리하긴 했으나 전문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확실히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였다.

벤프리가 돌아왔으니 토끼꼬리 풀을 다시 길러봐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영약의 여분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구에서 다시 농사를 짓는 것은 생각을 해봐야 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을 한 벤프리가 며칠이 지나도 출근하지 않았다.

“집사님 벤프리씨와 연락이 되나요?”

“네, 집을 알고 있습니다.”

“한 번 찾아가 봐야 될까요? 그사이에 더 좋은 조건이 있어서 거기로 간 것인데 찾아가면 부담스러워할 거 같기도 하고요.”

“그럼 지인을 통해서 한번 자연스럽게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사축으로 혹사당한 경험 때문인지 혹시 더 좋은 조건을 찾아서 간 것이라면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뭐라고요?”

“우리 저택을 찾아왔던 그날 밤에 벤프리가 죽었답니다.”

집사가 지인을 통해 알아낸 정보는 벤프리의 사망이었다.

“이유는요?”

“선술집에서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범인은 잡혔답니까?”

“아니요. 아직인 듯 합니다.”

이 세계 특히 왕도는 지방에 비해 범죄율이 낮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봤던 중세 판타지처럼 성질 좀 난다고 아무에게나 칼질해서 죽이거나 귀족이 마차로 평민을 아무렇게나 치고 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전생의 대한민국과 비교한다면 범죄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미국의 디트로이트 정도는 된다고 봐야 할까?

“그런데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요즘 꽤 유명합니다.”

“유명한 귀족이라서 못 잡고 있는 건가요?”

“아뇨. 연쇄살인범이라고 합니다. 아직 정체는 모르고요. 벌써 꽤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사관들이 추적에 실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벌써 왕도에 자리를 잡은 지도 1년 정도가 되었는데 그 사이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에는 흉악한 이야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왕도에서 연쇄살인이라니 이것은 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다시 출근했던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제 사람이니까요.”

집사가 보일 듯 말듯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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